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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론性論
자사자(子思子)1)가 말하기를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이른다.” 하였으니, 무엇을 하늘이라 하는가. 주재(主宰)하는 것을 이름한다. 무엇을 명(命)이라 하는가. 부여(賦與)한 것을 이름한다. 무엇을 성이라 하는가. 품수(稟受)한 것을 이름한다. 성이 명에 근원한 것을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 하니 맹자(孟子)가 논한 것이 이것이고, 성이 기질에 구애받아 선악이 생기는 것을 기질지성(氣質之性)2)이라 하니 정자(程子)와 장자(張子)가 논한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근본을 미루어 보면 하나의 성이니, 어째서인가? 하늘의 법칙에 순일(純一)한 것이 성이긴 하지만, 텅 빈 곳에서 홀로 운행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형질에 들어간 뒤에 성이 이루어지고 정(情)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른바 기질지성이라는 것은 기질이 성을 담고 있는 것을 설명한 것이니, 두 가지 물건이 아니다.
순자(荀子)는 “사람의 성은 악하다.” 하였고, 양자(揚子)는 “사람의 성은 선악이 섞여 있다.” 하였고, 고자(告子)는 “성은 여울물과 같다.” 하고 또 “성은 고리버들과 같다.” 하였고3), 한자(韓子)4)는 “성은 상중하(上中下) 세 가지가 있다.” 하였으니, 네 분이 성을 말한 것은 성이 발현한 곳에서 터득한 점이 있다. 대개 초목은 뿌리는 하나이나 가지는 만 개이고, 사람의 성은 근본이 하나이나 작용은 만 개이니, 이른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無聲無臭〕’는 것이 근본이고, 이른바 달도(達道)ㆍ달덕(達德)ㆍ경례(經禮)ㆍ곡례(曲禮)라는 것이 작용이다.
악(惡) 또한 성(性) 안에 포함됨은 어째서인가? 성은 기로써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質)이 순수한 사람은 담연히 사욕에 막힘이 없어 하늘이 명한 성에 순전(純全)하므로 나쁜 곳으로 옮겨 갈 수 없으니, 한자(韓子)가 말한 상품(上品)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질이 중간인 사람은 힘쓰면 성을 회복하고 게으르면 성을 잃으니, 한자가 말한 중품(中品)이라는 것과 고자가 말한 여울물이라는 것과 양자가 말한 선악이 섞여 있다는 것이 이것이다. 질이 낮은 사람은 배워도 알지 못하고 힘써도 이루지 못하니, 한자가 말한 하품(下品)이라는 것과 고자가 말한 고리버들이라는 것과 순자가 말한 성이 악하다는 것이 이것이다.
대개 기질지성을 논한 것이 점점 구비되고 분명해지다가 한자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다. 그러나 미루어 끝까지 나간다면 어찌 다만 세 가지뿐이겠는가. 비록 그 성을 천백 가지로 나누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어떻게 그러함을 밝히겠는가? 인심(人心)의 발현이 같지 않음은 그 얼굴이 각기 다름과 같고 금수와 초목이 같지 않음은 기록으로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사람과 물건이 같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그 같은 점으로 돌아가는 데에 방법이 있는가?”
“입이 맛에 대한 것과 귀가 소리에 대한 것과 눈이 빛에 대한 것과 코가 냄새에 대한 것과 사지(四支)가 안일함에 대한 것은 기질이니, 자신의 사욕을 이겨 예(禮)로 돌아가면 그 다른 점을 변화시켜 같은 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만물로 말하자면 사람과 다르니, 선유(先儒)가 비록 함정이 범을 다스리고 재갈이 말을 다스리는 것으로써 성(性)을 다하는 한 가지 방법을 밝혔지만, 사단(四端)의 순수한 성은 물(物)에게 가르쳐도 능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만물은 따로 만물이라서 사람이 모두 요순(堯舜)이 될 수 있는 것과 다른 점이다. 그러나 나는 새는 나는 데에 그치고, 달리는 짐승은 달리는 데에 그치고, 동물은 움직이는 데에 그치고, 식물은 심겨진 데에 그쳐서 그 성의 본체를 잃지 않고 모두 순조로운 데에 이르게 하는 것이 성인(聖人)이 물(物)의 성을 다 하게 하는 것이다.”5)
“사람과 물(物)이 같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기(氣)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기가 같지 않은 까닭을 들을 수 있겠는가?”
“양(陽)은 빠르고 음(陰)은 더디며, 해는 서쪽으로 가고 달은 동쪽으로 가며, 금(金)은 단단하여 부러지고 목(木)은 부드러워 휘며, 화(火)는 올라가고 수(水)는 내려간다. 사람과 물(物)이 이를 품수(稟受)하여 태어나기 때문에 다름이 있는 것이다.”
“사람과 물(物)이 같은 점이 있음은 어째서인가?”
“성(性)이 같기 때문이다.”
“성이 같은 까닭을 상세히 들을 수 있겠는가?”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6)이니, 한 번 음(陰)이 되게 하고 한 번 양(陽)이 되게 하는 것이 도(道)이다. 도는 사람과 물(物)의 구분이 없으니, 이것이 곧 같은 점이다.”
“그렇다면 물(物) 또한 오성(五性)7)이 온전한 것인가?”
“성이란 하나의 형체 없는 물건이니, 나뉘어 다섯이 될 수 있겠는가. 사람은 성에 밝으니 저절로 오덕(五德)이 온전해지고, 물(物)은 성에 어두우니 자연히 오덕이 어그러지는 것이다. 그 근본을 따져보면 물(物) 또한 이 성을 갖추고 있을 따름이다.”
“물(物) 또한 이 성을 갖추고 있건만 기질을 변화시키지 못함은 어째서인가?”
“그릇에 물을 담았을 때에 진흙을 탄 것은 맑기를 기다리기 쉽고 먹을 탄 것은 맑기가 어려운 것이다. 사람에 있어서도 하우(下愚)로서 변화시킬 수 없는 성이 있거늘8)하물며 물(物)에 있어서이겠는가.”
“물(物)이 성을 타고난 것은 어디서 볼 수 있는가?”
“물(物)이 성을 얻은 것이 비록 순수하지는 못하지만, 성이 없으면 물(物)이 없기 때문에 까마귀가 어미를 먹이는 것은 인(仁)이고, 벌이 군신(君臣)의 도를 다하는 것은 의(義)이고, 수달이 제사 지내는 것은 예(禮)이고, 개가 주인을 아는 것은 지(智)이고, 닭이 새벽을 알리는 것은 신信이다. 초목이 봄에 피어나는 것은 인이고, 여름에 자라는 것은 예이고, 가을에 이루는 것은 의이고, 겨울에 갈무리하는 것은 지이고, 뿌리와 꼭지가 떨어졌다가 다시 돋아나는 것은 신이다.
상마(桑麻)가 사람을 입히고 오곡(五穀)이 사람을 먹이는 것은 은혜이니 인에 속하고, 소가 물건을 싣고 말이 사람을 싣는 것은 건장함이니 의에 속하고, 양(羊)이 꿇어앉아 젖을 먹어 그 어미를 공경하는 듯함과 까치가 나뭇가지를 달리해 앉아 그 어버이를 높이는 듯함은 밝음이니 예에 속하고, 무릇 혈기를 가진 것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할 줄 알며 모두 생명을 사랑할 줄 알며 모두 입에 맞는 음식을 먹을 줄 알며 모두 교미하여 새끼를 낳을 줄 아는 것은 신령스러움이니 지에 속한다.
물(物)이 성을 받은 것은 마치 불의 밝음이 방 안에 있으면 그 빛과 밝음이 틈을 따라 드러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하나의 징험이다. 여기에서 유를 미루어 보면 물(物)마다 모두 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주무숙(周茂叔)이 뜰의 풀을 제거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 또한 성(性)이다.’ 하였고9), 백정자(伯程子)10)가 토끼를 파는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여기에서도 팔괘(八卦)를 그을 수 있다.’ 하였으니, 성이 있지 않은 물(物)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만 이(理)가 기질에서 분리되지 않은 것일 뿐이고, 저 성의 본체로 말하자면 또한 순연히 기질과 섞이지 않는 것이다. 순자ㆍ양자ㆍ고자ㆍ한자는 눈앞의 선악이 성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안 것이 있지만, 상제(上帝)가 내려 준 충(衷)을 따라 떳떳한 성을 소유하였음11)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고자가 성을 논한 것을 맹자가 그르게 여겼고, 한자가 성을 논한 것을 주자(朱子)가 취하지 않았으니, 기질지성은 군자가 성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분분하게 성을 논한 것을 한마디 말로 포괄하자면 합당한 말이 있겠는가?”
“반드시 ‘지극한 이를 묘합하여 마음속에 성실한 것이 성이다. 형체에 담겨 있기 때문에 기질지성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이에 순전하기 때문에 본연지성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라고 한다면 성론(性論)이 끝날 것이다.”
우러러 보건대 선유(先賢)들이 성을 논한 것이 많으니 내가 굳이 군더더기 말을 보탤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마침 성균관成均館 사유師儒의 의논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나누어 둘로 여기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부득이 〈성론〉을 짓는다. 성화(成化)12) 을사년(1485, 성종16)에 추강(秋江)이 경지재(敬止齋)에서 쓰다.
性論
子思子曰。天命之謂性。何謂天。主宰之名。何謂命。賦與之名。何謂性。稟受之名。由性之原於命者曰本然之性。孟子所論是也。由性之拘氣質而善惡者曰氣質之性。程張所論是也。推其本則一性也。何者。純於天則者性也。而不得獨行於虛中。故必入於形質。而後性成而情見。所謂氣質之性者。釋氣質盛性也。非二物也。荀子曰。人之性惡。楊子曰。人之性善惡混。告子曰。性猶湍水也。又曰。性杞柳也。韓子曰。性有上中下三品。四子言性。有得乎性之發用處。蓋艸木。一本
而萬枝。人性。一本而萬用。所謂無聲無臭者本也。所謂達道達德經禮曲禮者用也。而惡亦不遺於性內。何者。性以氣發也。然則質之粹者。淡然無私之蔽。純乎天命之性。而不可下移。韓子所謂上品是也。質之中者。勉而復性。懈而失性。韓子所謂中品。告子所謂湍水。楊子所謂善惡混是也。質之下者。學亦不知。勉亦不成。韓子所謂下品。告子所謂杞柳。荀子所謂性惡是也。蓋論氣質之性者漸備漸明。至韓子極矣。然推而極之。則何但三品而已。雖千百其性。亦可也。何以明其然也。人心發用之不同如其面。禽獸艸木之
不同無紀極。或曰。人物之不同如此。可以返其同。有其術歟。曰。口之於味也。耳之於聲也。目之於色也。鼻之於臭也。四支之於安佚也。氣質也。克己復禮。則可以變其異而返其同也。若夫萬物則與人異。先儒雖以陷穽之治虎。銜勒之治馬。明其爲盡性之一端。然四端粹然之性。物不可敎而能也。此萬物之自爲萬物。而非如人皆可以爲堯舜也。然飛止於飛。走止於走。動止於動。植止於植。而不失性體。使至於咸若者。聖人盡物之性也。曰。人物之不同。何也。曰。氣不同也。曰。氣之不同也。可得而聞歟。曰。陽速而陰遲。日西而
月東。金斷而木柔。火上而水下。人物稟此而生。故有異也。曰。人物之有同。何也。曰。性同也。曰。性之有同。可得詳歟。曰。無極而太極。所以爲一陰一陽者道也。道無人物之分。此則同也。曰。然則物亦五性全歟。曰。性者。一箇無形底物。判而爲五可乎。人明其性。則自然五德全。物昧其性。則自然五德虧耳。原其本則物亦具此性耳。曰。物亦具此性。而不能變化氣質者。何耶。曰。盛水於器。而和於泥也待澄易。和於墨也其澄難。在人亦有下愚不能移之性。況在物乎。曰。物之稟性。何處見之。曰。物之得性。雖不能純粹。而無性無物。故
烏能反哺。仁也。蜂能君臣。義也。獺能祭祀。禮也。犬能識主。智也。鷄能司晨。信也。艸木春榮。仁也。夏長。禮也。秋成。義也。冬藏。智也。根蔕脫落而復生。信也。桑麻衣人。五穀食人。惠而屬乎仁。牛能載物。馬能載人。健而屬乎義。羊之跪乳。似敬其母。鵲之異枝。似尊其親。明而屬乎禮。凡有血氣者皆知死之可畏。皆知生之可愛。皆知食之可口。皆知交之可乳。神而屬乎智。物之受性。如火明在房中。光明隨隙隨見。此其驗也。於此推類。則物物皆有性。周茂叔庭艸不除曰。也是性。伯程子見賣兔者曰。此可作八卦。言性之無物不在也。
然此特理之不離乎氣質者耳。若夫性之本體。則亦粹然不雜乎氣質。荀,楊,告,韓。有見乎目前之善惡是性。而不知上帝之降衷若有恒性。故告子之論性。孟子非之。韓子之論性。朱子不取。而氣質之性。君子有不性焉。然則紛紛論性。一言蔽之。有其言乎。其必曰。妙至理而誠於中者性也。而盛於形。故得氣質之名。純於理。故得本然之名。則性論畢矣。仰觀先賢論性多矣。余不必贅。然適丁成均師論分本然氣質之性而二之。故不獲已而作性論。成化乙巳之歲。秋江書于敬止齋。
[주1] 자사자(子思子) : 자사(子思)에 대한 존칭이다. 자사는 공자의 손자 공급(孔伋)의 자(字)이다. 《중용(中庸)》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중용》 첫머리에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아놓은 것을 교(敎)라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하였다.
[주2] 기질지성(氣質之性) : 성이원론(性二元論)에서 기질 속의 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북송(北宋)의 횡거(橫渠) 장재(張載)가 창시하고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발전시킨 학설이다. 인간의 본성을 순선무악(純善無惡)의 본연지성(本然之性)과 유선유악(有善有惡)의 기질지성으로 나누어 고찰한 것이다. 장횡거가 말하기를 “형체가 생긴 뒤에 기질지성이 있으니, 이를 잘 회복하면 천지지성이 보존된다.〔形而後有氣質之性 善反之 則天地之性存焉〕” 하였다. 《性理大全 卷5 正蒙 誠明》
[주3] 고자(告子)는……하였고 : 고자가 말하기를 “성(性)은 고리버들과 같고 의(義)는 나무로 만든 그릇과 같으니, 사람의 본성으로써 인의를 행함은 고리버들로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性猶杞柳也 義猶桮棬也 以人性爲仁義 猶以杞柳爲桮棬〕” 하고, 또 말하기를 “성은 여울물과 같다. 동쪽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르니, 인성이 선과 불선에 구분이 없음은 마치 물이 동과 서에 구분이 없는 것과 같다.〔性猶湍水也 決諸東方則東流 決諸西方則西流 人性之無分於善不善也 猶水之無分於東西也〕” 하였다. 《孟子 告子上》
[주4] 한자(韓子) : 당나라 한유(韓愈)이다. 한유는 〈원성(原性)〉에서 다음과 같이 성삼품설(性三品說)을 제기하였다. “성의 품등에는 상중하 세 가지가 있다. 상품은 선할 뿐이고, 중품은 인도하여 위나 아래로 가게 할 수도 있으며, 하품은 악할 뿐이다.〔性之品有上中下三 上焉者善焉而已矣 中焉者可導而上下也 下焉者惡焉而已矣〕” 《昌黎文集 卷11》
[주5] 성인(聖人)이……것이다 : 《중용장구》 제22장에 “오직 천하의 지극히 성실한 사람이라야 그 성(性)을 다할 수 있으니, 자신의 성을 다하면 사람의 성을 다할 수 있고, 사람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물(物)의 성을 다할 수 있다.〔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하였다.
[주6]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가 지은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태극권(太極圈)을 설명한 말로, 무극이면서 태극이라는 뜻이다.
[주7] 오성(五性) :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의 다섯 가지 성(性)을 말한다. 오덕(五德)이라고도 한다.
[주8] 하우(下愚)로서……있거늘 : 공자가 말하기를 “매우 지혜로운 사람과 매우 어리석은 사람은 변화시킬 수 없다.〔唯上知與下愚 不移〕” 하였다. 《論語 陽貨》
[주9] 주무숙(周茂叔)이……하였고 : 무숙은 주돈이(周敦頤)의 자이다. 주무숙이 창 앞의 풀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거늘 정명도(程明道)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나의 뜻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與自家意思一般〕”라고 답하였다. 《宋元學案 卷12 濂溪學案下》
[주10] 백정자(伯程子) : 명도(明道) 정호(程顥)를 가리킨다.
[주11] 상제(上帝)가……소유하였음 : 《서경》〈탕고(湯誥)〉에 “훌륭하신 상제가 하민(下民)에게 충(衷)을 내려 주어 그 자연스러운 이치를 따라 떳떳한 성을 소유하였다.〔惟皇上帝 降衷于下民 若有恒性〕” 하였다. 《서경집전(書經集傳)》에 “충(衷)은 중(中)이고, 약(若)은 순(順)이다. 하늘이 명을 내릴 적에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이치를 갖추어 편벽되거나 치우친 바가 없으니, 이른바 충(衷)이라는 것이다.” 하였다.
[주12] 성화(成化) :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이다.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