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아들의 과거 급제
중종(中宗) 11년(1516)에, 다섯 아들이 과거에 급제한 사례로 인하여 관원을 보내 이의무(李宜茂)의 묘소에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이의무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권(李菤)과 이영(李苓)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기(李芑)와 이행(李荇)과 이미(李薇)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五子登科
中宗十一年。命以五子登科例。遣官致祭于李宜茂墓。宜茂有五子。菤苓登武科。芑荇芃登文科。
1) 이의무(李宜茂. 1449~150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형지(馨之), 호는 연헌(蓮軒). 공조참의 이양(李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 이명신(李明晨)이다. 아버지는 지온양군사 이추(李抽)이며,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윤회(尹淮)의 딸이다. 1467년(세조 13) 사마시를 거쳐, 1477년(성종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박사·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을 역임하였다. 1487년 성균관전적으로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해 사슴가죽이 하사되었다.
이 해 홍문관교리로 밀양에 파견되어 흥학(興學)에 관한 일을 조사, 보고하고, 이듬 해 사헌부지평, 1492년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1493년 홍문관응교로서 특명을 받고 형벌을 남용해 사람을 죽인 임실현감 노처원(盧處元)을 엄히 국문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노처원의 동생 노처리(盧處利)가 음모를 꾸며 해하려 하자, 이 사실을 알고 노처리를 잡아 장형(杖刑)을 가하다가 치사(致死)하게 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495년(연산군 1) 사간원사간이 되고, 승정원교감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사헌부집의·상의원정을 역임하고, 1498년 무오사화로 평안도 어천역(魚川驛)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502년 성균관사성·군기시정에 보직되었으나, 정치가 문란해지자 외직을 청해 홍주목사로 나갔다가 기한 내에 조세를 수납(輸納)하지 않아 한 때 투옥되기도 하였다. 1507년(중종 2) 선정으로 표리(表裏: 왕이 내린 안팎의 옷감)가 하사되었다. 1510년 예조참판에 추증되고, 1516년 예조판서에 가증되었다. 기품과 도량이 활달하고 시문에 능했으며, 조정에 들어간 지 30여 년 동안 저축이 조금도 없어 가세가 늘 청빈했다 한다. 문집으로 『연헌잡고(蓮軒雜稿)』가 전한다.
2) 이기(李芑, 1476년 ~ 1552년)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자는 문중(文仲), 호는 경재(敬齋). 이명신(李明晨)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知溫陽郡事) 이추(李抽)이다. 아버지는 사간 이의무(李宜茂)이며, 어머니는 성희(成熺)의 딸이다. 좌의정 이행(李荇)의 형이다.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삼등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장인인 군수 김진(金震)이 장리(贓吏: 부정하게 뇌물을 받거나 직권으로 재물을 탐한 죄를 저지른 관리)였기 때문에 좋은 벼슬을 얻지 못하고, 종사관·종성부사·경원부사·의주목사로 전전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승진했지만, 삼사를 비롯한 철요의 직책이나 6경 등 서경(署經)을 필요로 하는 지위에는 나가지 못했다. 1522년(중종 17) 공조참의를 지내고, 이어서 함경도병마절도사·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527년 한성부우윤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치면서 민정과 국방에 이바지했다. 1533년 공조참판에 오르고, 이어서 예조참판·한성부판윤을 역임했다. 1539년 진하사(進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동안 지은 공로로 국왕이 병조판서에 임명하려 했으나, 이조판서 유관(柳灌)이 장리의 사위로서 서경을 받을 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유관은 나중에 보복을 당했다. 국왕의 신임과 이언적(李彦迪)의 주장으로 형조판서가 되고, 이어 병조판서로 발탁되었다.1543년 의정부우찬성에 이어 좌찬성·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 일파가 득세하자, 윤임(尹任) 등이 부적합하다고 탄핵하여 판중추부사·병조판서로 강등했다.
이에 원한을 품고 있던 중 명종이 즉위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첨정을 하자, 윤원형(尹元衡)과 손잡고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 때 윤임·유관 등을 제거하고, 추성위사협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協贊弘濟保翼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547년(명종 2) 윤원형·윤인경(尹仁鏡) 등과 더불어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일명 정미사화(丁未士禍)]를 일으켜 지난날 윤원형을 탄핵한 바 있는 송인수(宋麟壽),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李若水)를 사사(賜死)하고, 이언적(李彦迪)·정자(鄭磁)·노수신(盧守愼)·정황(鄭熿)·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仁傑)·김만상(金彎祥)·권응정(權應挺)·권응창(權應昌)·이천계(李天啓) 등 사림파 20여 명을 유배하였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면서 병조판서를 겸하여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였다. 풍성부원군(豊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좌의정이 되고, 1549년(명종 4) 영의정에 올랐다. 이기를 반대한 사림은 거의 모두 숙청되었다. 죽은 뒤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이기가 받은 훈록은 선조 초년에 모두 삭탈되었다.
3) 이행(李荇 1478~1534년)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水)·청학도인(靑鶴道人). 지돈녕부사 이명신(李明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 이추(李抽)이고, 아버지는 홍주목사 이의무(李宜茂)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교리(敎理) 성희(成熺)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증광 문과에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예문관 검열·봉교, 성균관전적을 역임하고,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0년 하성절질정관(賀聖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홍문관수찬를 거쳐 홍문관교리까지 올랐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사간원헌납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고, 이어 함안으로 옮겨졌다가 1506년 초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이 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다시 홍문관교리로 등용되고, 이어 부응교로 승진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재능있는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하였다.1513년(중종 8) 다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가 이듬해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사섬시정(司贍寺正)을 거쳐 1515년 사간원사간이 되고, 이어 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신진 사류인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 등이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어 첨지중추부사·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51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왕의 신임을 얻고 있는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로부터 배척을 받아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충청도 면천에 내려갔다. 이듬해 병조참의·호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홍문관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공조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과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그리고 동지의금부사와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도 겸임하였다. 1521년 공조판서가 된 이후 우참찬·좌참찬·우찬성으로 승진하고, 152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좌찬성을 거쳐 1527년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대제학 등을 겸임하였다. 1530년 『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을 책임맡아 끝내고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오히려 그 일파의 반격으로 판중추부사로 좌천되고, 이어 1532년 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1537년 김안로 일파가 축출되면서 복관되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었으나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4) 이미(李薇, 1484 ∼? )
본관은 덕수(德水). 초명은 이환(李芄). 자는 자패(子佩), 호는 산북(山北).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知溫陽郡事) 이추(李抽)이고, 아버지는 사간 이의무(李宜茂)이며, 어머니는 증대제학 성석용(成石瑢)의 딸이다. 좌의정 이행(李荇)의 동생이다.
1515년(중종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정언·감찰·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1) 대사헌에 이어 한성부우윤을 지냈고, 그 뒤 동지의금부사·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548년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우찬성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형조판서·한성부판윤을 거치는 동안 병이 많아 송사를 늦게 처리한다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지만 계속해서 지중추부사·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