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문예바다 신인상 수상 작가들 |
골담초 이름을 가르쳐 주던 당신의 밝기
정재원
굴포천을 걷다 삼각뿔처럼 계단에 앉았다
여기는 가을이지만
거기 당신은 봄 끝이어서
꽃잎 꽃잎들, 그 맑음의 세계
까마귀를 길조라 했다
나뭇가지엔 남은 가을 몇 장
기둥 타고 기는 노란 이끼
그곳 내부 걷어 내는 몸에서 타는 연기도 없었는데
가랑잎 수북한 곳을 밟는 부스럭 소리
빛 말갛고 뼈 깊은 안개 이랑 난데없이 열리고
당신 누운 산골 어깻죽지 거기까지 신발 뒷굽이 푹푹 빠진다
껍질 같은 살림 꾸리던
주름진 손에 꼈던 깍지 풀고
이전 그 이전으로
새소리 자욱하게 스미는
창호지 문 닫고
부르튼 발로
대지도 아니면서 흙 만지는 아이를 만났지
손톱 잘라 보내 드린 이야기는 날씨의 과거에서 여태 이리로 오고
아무것도 없이 감은 눈을 찔렀다
가시와 잘 자야 좋은 태몽 꾼단다
배꼽을 연 노란 날개야
골담초 먼빛, 그물망 치는 한낮
늑골엔 젖은 바람 한 모금
물방울 속에서 달리
정재원
그렇지만
밤 시간을 돌리는 어머니와
낮 시간을 돌리는 아버지는
각각이면서 한 몸
오염되어 쓸 수 없는
빨간 자궁을 꺼내 놓고 늘어진 그녀
그는 토닥토닥 잠재우는 습성을 익혀요
시간이 되려다 만 물결은
구름 아가미를 달고 있어요
초침이 구겨진다는 말은 생략하기로 할게요
뛰지 않는 맥박
세기말 문장이라고 읽어 두어요
유리조각과 뒤엉킨 철사
플라스틱이 가득 찬 물고기 뱃속
혈에서 진동이 흘렀겠죠
어둠이 번지는 지느러미를 보세요
머지않아 드러낼 한계,
인간 중심적인 욕망, 그 눈, 다툼, 상처, 타락, 전쟁
통 속의 뇌와 어마어마하게 돌아다니는 관념
함께라는 부사를
따로따로 방식으로 뒤집어 물고요
핵폐기물을 누군가 한 모금 삼키고 뻐끔거려요
시점이 늘어나고 바다가 괴괴해요
빛이 사라진 윤슬 아래에서 건져 올린 시계,
동전 앞면은 밥그릇이고
뒷면은 무덤이라고
물방울로 돌아가기 위해 휴식을 취하는 중인데요
에덴동산, 거기에 우리는 없죠
― Note
뒤로 걷다가 낮달을 만났습니다.
나팔꽃은 여전히 아슬한 곳을 붙잡고 오르는 습성이 있어요. 나는 너울거리는 칡넝쿨 순 건드리는 바람입니다. 들판으로 향하는 한 그루 두 그루 무궁화 스치는 팔월의 느린 바람 거스르다 보면 뽕나무가 서 있고 완두콩 터지는 마을. 누군가 흘린 발소리 줍느라 쪼그리고 앉아 있었으나 손에는 쥔 것이 없습니다.
나이 세어 가며 아이들이 이리로 걸어옵니다. 흙탕물을 뛰어 건너 앞질러 간 청년이 아치형 다리에서 내려섭니다. 노인이 지팡이 짚으며 앞에서 걷고 또 다른 노인이 한 걸음 뒤에서 붉은 길목으로 들고
아무것도 가두지 않은 생각 세계, 불이 꺼지고 나머지는 영원 그다음 너머라고 8시 58분 43초를 가리키는 시계탑. 반짝이는 십자가 불빛, 헤아릴 수 없고
윗길은 나무숲이 우거져 있습니다. 솔기 뜯어진 굽은 길허리쯤에 매미가 웁니다. 안 되는 일을 더 안 되는 일이 가로막아 주어서 오히려 다행입니다. 달은 면면이 닳아진 모서리마다 한 발 더 내어 디디며 자리를 바꿉니다.
보여 주고 싶은 것은 가 버린 것들뿐. 이마에서 어깨로 발밑으로 어두워지던 노을 아래 훅 끼쳐 오는 흙냄새. 그리움이라는 여기를 데리고 달에서 그는 몇 번이나 나온 걸까요. 날아간 새에 대해 침묵합니다. 애기똥풀 헤치며 빛나는 늪에 빈 페이지를 가져다 댑니다.
저쪽에서 이리로 오는 낡은 자전거며, 강아지 앞세우고 늙어 가는 사람을 부축하는 바람 사이 휘적휘적 망태기 들고 오는 젊은 남자며, 벌레들을 덮어 키우는 묵은 낙엽, 덜커덩 녹슨 마음 지나는 손수레, 아득히 길 찾아오는 꽃의 뿌리, 이슬 가득한 풀잎, 이 모든 것은 낮달에 있습니다.
명아주를 만납니다. 까마중을 만납니다. 강아지풀을 만납니다. 달을 건너는 어떤 몸은 작고 그림자는 키가 아주 크고, 저기 나뭇잎 사이로 빛이 밝히는 계단 앞으로 한 발을 옮기면 희미해지고, 뒤로 한 걸음 옮기면 선명해지고,
아린, 더 어린, 수만 번 잃어버리는 나를 만날 것 같습니다.
보이는 것들을 사람 너머 눈으로 다독거립니다. 수많은 그림자가 던지는 질문을 메모합니다. 시간은 도착이 아니라 선택의 출구. 어떤 관계에 몰입하여 쏠리기보다는 다 놓아주고 어떤 시를 안아 줄까 고민하면서 혼자였다는 생각 속으로 들어가 소통하고 싶어지는 문제. 저기 희미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빛을 만드는 폐역이 있을까?
정재원 | 2019년 『문예바다』 신인상 시 당선. 시집 『저녁의 책과 집을 잃은 노래』. 남촌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