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학교에서 네잎클로버 찾기가 유행했었다. 어떻게 유행이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업 시간 외에 시간이 남을 때면 모두가 밖에 나가 네잎클로버를 찾았었다. 나도 다를 바 없이 네잎클로버를 찾기에 참여했다. 내게도 행운이 찾아왔으면, 찾기 어려운 네잎클로버를 다른 친구들 보다 내가 먼저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네잎클로버는 보이지도 않고 세잎 클로버만이 나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하던 일에 싫증이 금방 오는 나는 네잎클로버 찾기를 포기하고 친구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네잎클로버를 찾는 수연이, 네잎클로버를 찾는 지은이, 네잎클로버를 찾는 하연이, 네잎클로버를 찾는 모든 사람들. 여기서 갑자기 드는 생각은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왜 행운만을 찾으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고 부단히도 애쓰는가?’이다. 그 이유가 네잎클로버가 세잎 클로버 보다 희귀해서? 아니면 모두가 바라는 걸 내가 가질 수 있으니까?, 모두가 찾아서? 나는 그런 이유에서 네잎클로버를 찾는 것이라면, 그래서 시간을 클로버 찾기에 탕진하고 있는 것이라면 안 찾아도 될 것 같다고 말할 것이다. (절대 내가 못 찾아서 그러는 건 아니고)
행운은 희귀해야 행운인 것이고 행복은 모두의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네잎클로버 찾기는 모순적이다. 이는 행복이 널린 곳에 행운이 있을 지도 없을 지도 모르는 확률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행복을 짓밟아 버리게 만드는 행위일 뿐이다.
나는 네잎클로버를 찾는 지은이를 보면서 “지은아, 넌 지금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행운 찾기 때문에 네 밑에 널려있는 행복을 밟고 있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지은이는 “그래, 네 말이 맞아.”라고 말하며 클로버 찾기를 그만했다. 지은이가 이 말을 듣고 클로버 찾기를 그만둔 이유를 행운 찾기에 눈이 멀어 행복을 까먹고 있었다는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사람들도 행복을 까먹어서 행운만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나는 나에게 “네잎클로버 같이 찾자!”라고 말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행운보다 행복이 좋아.”라고 말한다. 행운은 언젠가 누구에게나 찾아올 거라 확신하고 지금의 나는 내가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뿐이다. 미래의 나도, 지금의 나도, 게다가 과거의 나까지도 ‘어떻게 하면 내가 더 행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행복을 바라고 바랬으며 바랄 것임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네잎클로버가 아닌 세잎 클로버 찾기를 한다.
세잎 클로버 찾기는 네잎클로버 찾기에 비해 매우 쉽다. 세잎 클로버 찾기 방법은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마주할 수 있는 것에는 행복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꼭 찾고 싶다는 강박 관념도 생겨나지 않고 내게 주어진 과업을 잘 수행하게 된다면 행복 또한 따라오는 법이기에 세잎 클로버 찾기는 네잎클로버 찾기에 비해 나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며 내게도 효율적이다.
근데 그거 아는가? 네잎클로버는 상처가 난 곳에 잎이 생겨 네잎클로버가 됐다는 사실을. 나는 네잎클로버 찾기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풀도 어떻게든 살아보려 악을 쓰는데 왜 나는 그리고 사람들은, 주어진 삶에 열정을 다하지 않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삶의 고단함이 다를 수 있을지언정 풀은 풀로써, 사람은 사람으로서 구분되고 생명은 존엄하며 우리는 열심히 삶을 살 의무를 가자지기에 식물과 다른 수준의 역경과 고난이 내게 찾아와도 ‘끈질기게 살아보자’라고 다짐했다. 햇빛만 바라보며 사는 식물의 인생이 재미없다고 생각이 들면, 사람의 인생은 참으로 할 것이 많으니깐, 살기 싫어도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어도 날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행복이 널렸다는 이유만으로도 삶을 열심히 살아보려 부단히 애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