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洞부락의 제삿날 / 이성부(1942-2012)
이 울음 소리
마을을 덮고 세상을 흔드는
이 울음 소리,
九泉에 닿았다가 돌아와서
死者들을 일깨우고,
단단히 굳어지면
이 나라의 아픈 돌부리가 된다.
엄지로 코풀며
내뱉는 한숨도
겨레의 작은 가슴들에
깊은 悔恨으로 박히고,
으드득 갈아붙이는 새벽 이빨도
잠자는 사람들의
헛된 꿈을 깨문다.
억울한 者,
억울하지 않는 者
모두 한꺼번에 껴안았던 죽음인 것을.
아아 우리들의 이 커다란 슬픔이
슬픔으로 짓이겨져서
더운 사랑을 만들 날은 언제인가.
더운 사랑들이
빛나는 狂喜의 춤을 출 날은 언제인가.
1970년대 한국 문학가 중에 기억해야 할 시인이 있다면 이성부 시인을 빼놓을 수 없다. ‘고통스런 삶과 역사의 어둠을 이겨내고 일어서고자 하는 극복과 인고의 정신’을 담아 시를 썼기 때문이다. 1980년 광주의 처참한 현실에서 받은 아픔과 훗날 미안한 마음에 못 이겨한 시인은 『빈 산 뒤에 두고』부터 다소 누그러진 면이 없지 않으나 광주라는 장소애(topophilia)에 스며든 이야기를 통해 거대 담론을 이끌어 낸 민중 시인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민중을 말하지 못할 때 시인은 당당하게 민중을 말하였다(『전야』). 줄곧 현실과 사물에 대한 사실주의적 관찰을 통해 민중의 아픔에 함몰되지 않고 희망을 길어 올린 시인이 품은 슬픔과 한의 정조는 비관과 낙망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왜냐면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백제, 전라도, 광주, 무등산은 고향이며 시적 상상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후기 시인에게 미지의 세계인 ‘삶의 적들을 향해 끝끝내 나가고자 했던’ 시적 출구는 ‘산’이었다. 실제로 자주 산에 오르며 우리에게 보여준 시인의 아픔을 1970년에 발표한 「上洞부락의 제삿날」을 통해 공동체의 믿음이 무엇인지 읽고자 한다.
공동체나 공동체의식이 무너지기 시작한 심각한 문제는 이제 현실화되고 말았다. 서슬 퍼런 독재 권력에 우리는 죽었다. “상동부락” 누군가의 제삿날일 것이지만 시인은 개별적으로 조사弔詞를 달지 않는다. 지금도 상동, 하동이 흔한 지역의 이름들로 쓰이고 있는 그저 윗동네 모두의 애도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단단히 굳어지면/이 나라의 아픈 돌부리가 되”는 땅속 깊은 밑바닥(“구천”)까지 가서 돌아와 “마을을 덮고 세상을 흔드는” 응어리, “死者들을 일깨”는 울음소리다. 죽은 자는 결코 부락에서 사라진 자가 아니다. 모두의 “가슴들에/깊은 회한으로 박”혀 “으드득 갈아붙이는 새벽 이빨”이 되어 “잠자는 사람들의/헛된 꿈을” 깨무는 눈물, 콧물이 있다.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한꺼번에 껴안았던 죽음”은 애도하는 사람들로 “돌부리”가 되고, “새벽 이빨”이 되어 수틀린 시대가 걸려 넘어지거나 “헛된 꿈을” 깨울 수 있는 우리의 죽음이다.
그 죽음 앞에서 시인은 슬픔을 짓이기고자 한다. “슬픔이/슬픔으로 짓이”기는 것만이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할 수 있는 의식(“제삿날”)으로 진도의 <다시래기>와 같이 재생의 축제를 고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죽은 자는 신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산 자들로 “더운 사랑을 만들 날”을 희구하던 시인, 미친 듯이 기뻐하며(“광희”) “춤 출 날”을 끝끝내 함께 하지 못하고 떠났다. 이 땅에는 “억울한” 일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눈물의 누적을 허물고 함께 기뻐할 날이 좀처럼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그들은 쌓고, 우리는 울기만 한다. 세월호가 그러했고, 이태원 참사와 채상병 순직 사건 등 부조리한 시대에 앞산 바라보며 머리 풀고 함께 우는 자들도 적다. 눈물의 공동체도 소멸하고 있기에 시인의 시가 더 절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