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돌려 바로본 금북정맥
▲대현갈림길(대현리1구마을회관, 기러기재) 이정표 뒤쪽 우직진방향
▲잡목을 헤치며 오른다.
▲벌목지 능선 끝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261,1m 삼각점봉에서 북동으로 오던 마루금은 좌측 북서방향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261.1m봉 삼각점(보령304)
▲이후 마루금은 청양권역을 벗어나 온전한 홍성 땅으로 접어든다.
▲내포문화숲길 팻말이 가끔 걸려있는 북서방향의 능선따라 얼마쯤 걸어가다 임도로
내려선다.
▲임도길이정표(주류성2.3km, 기러기재2.1km, 대현1구마을회관3.0km) 상송리와 옥계리를 연결하는 임도길
▲주류성 ; [周留城 ] 삼국시대 백제의 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한 뒤 부흥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서기 660년 7월 18일에 백제의 의자왕이 신라(新羅)·당(唐)의 연합군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백제사람들의 부흥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는데, 점차 흑치상지(黑齒常之)와 복신(福信)이 웅거한 임존성(任存城)과 도침(道琛)이 이끄는 주류성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세력이 통합되었다. 그리하여 주류성을 공격하는 나당연합군을 크게 이겼으며, 이러한 기세로 부흥군은 200여성을 회복하였다. 웅진성 공격 실패와 옹산성(甕山城)에서의 패배로 그 기세가 크게 위축되었으나, 나당연합군이 고구려 공격에 전념하고 일본에 있던 왕자 풍(豊)이 돌아와(662년 5월) 부흥운동을 이끌면서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부흥운동세력의 지휘부 내에 분란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다시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데에 이른다. 더욱이 부흥군을 돕기 위해 왜(倭)가 보낸 병사 2만 7천명이 백강(白江)에서 궤멸되고 부여풍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백제의 부흥운동은 이내 막을 내리고 말았다. 주류성(周留城)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에 기재된 이름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주유성(州柔城)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두량윤성(豆良尹城)을 주류성의 다른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책의 문무왕 3년(663) 5월조에 "왕이 김유신(金庾信) 등 28장군에게 함께 두릉윤성(豆陵尹城)[두량윤성(豆良尹城)이라고도 한다]과 주류성 등 여러 성을 공격하라 명령하여 모두 빼앗았다"고 적힌 기사를 감안하면 두량윤성과 주류성이 같은 성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충남 연기군 전의면의 당산성(唐山城), 전북 정읍시의 두승산성(豆升山城), 전북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암산성(位金巖山城) 등에 비정하는 학설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주류성이 백강(白江)에서 가깝고 "농사짓는 땅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돌 많고 척박한 땅이어서 농사지을 수도 없는 땅이다. 지금은 지켜내는 곳이지만, 싸움이 길어지면 백성들이 굶주리기 쉽다"고 적혀 있어 위치 추정의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걷기 좋은 산책로의 숲길이 열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