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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과 기원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3, 5~6).”
왜 긍휼히 여겨야 하는가?
마태 5장 7절
오래전에
신문에 보도된 기사 한 토막을
기억을 살려서
먼저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선천성 판막증이라고 하는
일종의 심장병을 앓고 있는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장모 군이 있었습니다.
심장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애가 좀 신통치를 않고,
아무래도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것을 악용하여
그 반에 있는 다섯 명 가량의
질이 안 좋은 학생들이
그 장 군을
심심하면 외딴 데로 끌고 가서
두들겨 패고,
라이타 불로 손을 지지고,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워서 비틀고,
군대에서나 볼 수 있는
원산폭격을 시키면서
무척 심하게 학대를 했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
경찰에 고발을 했고,
이 다섯 명의 학생들이 연행이 되어
경찰의 신문을 받았습니다.
경찰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너희들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니?'
그랬더니
그 가운데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을 한 것이 신문에 나왔습니다.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를 때
쾌감을 느꼈습니다.'
그 한 마디가
저를 섬뜩하게 했습니다.
흔히 이런 현상을 놓고
'인간성이 파괴 되었다.',
'인간성이 상실되었다.'는
고상한 말을 많이 씁니다.
어쨌든 이 사건은
오늘 세상이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점점 비정하고
잔인해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숨기지 못하는
한 단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고 계셨던
그 당시도
오늘과 비슷하게
잔인한 세상이었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교만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율법을 지킨다는 구실을 내걸고는
남을 불쌍히 여길 줄 몰랐습니다.
심지어
안식일 날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안식일에 일하면 안 된다는 이유를 들어
그들을 도와주지 아니했다는
기록들을 자주 봅니다.
얼마나 매정한 세상입니까?
늙은 부모를 마음대로 학대해도
성전에 가서 헌금만 두둑하게 내면
사람으로 대우를 받는 세상이었으니
얼마나 비정한 세상입니까?
예수님이 살고 있던 당시 로마사회가
얼마나 잔인하고 비정했나 하는 것은
여기서 일일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문학 작품들을 통해서,
역사의 기록을 통해서
그 당시 사람들이
짐승보다 더 포악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를 낳았다가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내다 버리는 것은
예사로 생각하는 사회였으니
얼마나 비정하고
매정하고 차갑고
잔인한 세상이었나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배경속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산 위에서
많은 무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치십니다.
'너희들은 긍휼히 여겨라. 서로 불쌍히 여겨라.
그리하면 행복한 자가 되리니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불쌍히 여겨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돌아가는 세상 하고는
정반대의 교훈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매정하고 차갑고 냉정한 세상에서는
이를 악물고 정을 억제해야 하고,
표독스럽게 살아야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고
살아 남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님은 거꾸로 '긍휼히 여겨라.
그래야만이 행복한 자가 될 수 있다.
긍휼히 여겨라. 그래야만이
너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가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요즘 잘 안 쓰는 용어입니다.
사전을 찾아 보면 그 의미가
남을 불쌍히 여겨서 돕는 것이라고 나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하는
긍휼이라는 말은
흘러 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한없이 약하고 악한 사람들을 대할 때
보여 주시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성경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번역이 됩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로도 번역이 되고,
민망히 여긴다는 말로도 번역이 됩니다.
그만큼 폭이 넓고
차원이 심오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태도가 긍휼인가?'
어려움에 처한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처지에 나를 갖다 놓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같이 느끼고, 같이 보고,
같이 말하고, 같이 행동하고,
그를 도와주려고 하는,
이런 태도와 행위를 일컬어서
긍휼입니다.
나를 어떤 사람의 입장에 두고
그와 함께 생각하려고 하는
마음 자세를 동일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어떤 마음을 가지실까요?
'내가 할 수 있으면
네 처지에서 생각해 보고 싶다.
네가 느끼는 것, 네가 당하는 것,
네가 행동하는 모든 것을
내가 같이 해 보면서 너를 이해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이런 마음이
바로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만큼 우리를 완벽하게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신학적으로는
성육신이라고 말하는데
이 성육신을 보면
하나님의 긍휼이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7절,8절 이하에는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처지가 되시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비어'라는 말씀은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영광과 특권을
다 포기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는 말씀은
우리의 모습을 입고
우리 처지로 내려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내려 오셔서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당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시험만 당하고 아무 것도 안 하셨어요?
아닙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을 보면
시험을 당하면서 우리를 도와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네 가지를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자기의 영광을 다 포기해 버리고
자기를 비웠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똑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과 시험을
몸소 체험 하셨습니다.
그것을 체험하시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필요할 때마다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말은
이처럼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기 위해서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를 보고 명령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듯이
우리가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말은 쉽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막상 실천하려면
이것은 요원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형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한두 번 도와주기는 쉽습니다.
형제 사이에도 어려움을 당할 때
몇 번 울어주고 같이 잠을 자지 않고
고민해 주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형제를 위해
그의 처지가 되어 나를 비우면서
나의 것을 나누어 주고,
함께 고통을 감수하고,
필요하면 그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가 물을 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이기주의가 극성을 떨고, 매정하고,
형제고 부모고 자기에게 손해를 줄 것 같으면
얼굴을 싹 돌리는 세상에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긍휼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슨 명령이든지 우리에게 하실 때는
반드시 그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신 후에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되지도 않는 것을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도록 해 주셨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자기가 받고 경험한 것은
행동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도
내가 실제로 경험을 했고,
내가 실제로 그것 때문에
엄청난 축복을 누렸다고 한다면
그것을 비슷하게 합니다.
정 안되면 흉내라도 냅니다.
그러나 내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을 하라고 하면
그거 곤란하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을 했습니까?
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엄청나게 경험하도록
지금까지 은혜를 주셨습니다.
언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실 때
나 같은 죄인을 불러서
무조건 값없이 죄 용서하시고,
십자가의 피로 씻어 주시고, 성령으로 인을 쳐서
'너는 이제부터 내 아들이다.
날 보고 아버지라고 불러라.
그러면 내가 언제든지 대답해 주마.
도와주마.'라고 약속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긍휼을 쏟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긍휼이 흘러 넘칠 만큼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긍휼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엡2:5)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불러서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무너무 불쌍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우리를 불러서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 가슴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막 쏟아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긍휼을 체험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체험은 하지 못하지만
그런대로 공감을 하는 수준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맛 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긍휼을 기를 수 있는 큰 샘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았다면
나 같은 것이 하나님의 눈에 들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로
삼아 주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나를 이렇게
불쌍히 여기셨는지 모릅니다.
무엇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는지
성경을 아무리 뒤져 봐도 대답이 안 나옵니다.
대답 비슷한 것이
하나 있기는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5절,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긴다.
내가 긍휼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긍휼히 여긴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시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순전히 하나님께서 좋다고 여기셔서 부른 것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게 된 동기라고 말합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1학년 짜리 아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인지 아세요?
하도 어릴 때 일이라
별로 기억이 없지만 뻔하지 않습니까?
처음에 학교에 가서
예쁜 여 선생님을 담임으로 만나면
애들이 막 흥분합니다.
그 다음에 무엇을 원합니까?
선생님이 한 번이라도 자기를
더 봐 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선생님 앞에서 별의별 짓을 다 하지요.
'예, 예' 하기도 하고
'선생님, 선생님'하기도 하고 야단입니다.
선생님이 가만히 보면
어쩌다가 자기 눈에 드는 애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애를 다른 애보다
약간 다르게 대우를 합니다.
심부름도 하나 더 시키고
한 번이라도 눈길을 더 주고
한 번이라도 더 웃어 줍니다.
그러면 순진한 아이들은
그저 부럽다는 생각에
입을 딱 벌리고 쳐다 보는 겁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선생님에게 이유를 물으면
'저 애가 참 귀여워서
내가 조금 마음을 더 준 것 뿐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불쌍히 여기고 싶어서 불쌍히 여겼다.
내가 긍휼히 여기고 싶어서 긍휼히 여겼다.'
이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을 입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뿐입니까?
구원 받고 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아니하면
숨도 쉴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은
날마다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이 뻔합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목사지만
나 같은 놈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나 같은 놈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그러므로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것이 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불쌍히 봐 주시지 않으면
국물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악합니까?
무슨 일을 당할지 누가 알아요?
그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어머니가 자녀를 치마폭에 싸고 도는 것처럼
보호하시지 아니하면
오늘도 나는 안심하고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쏟아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노라.
내가 오늘도 너를
한눈도 팔지 않고 쳐다 보고 있으마.'
하시면서 감싸주시기에
오늘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렇게 긍휼을 엄청나게 받고 살고 있습니다.
이 긍휼의 샘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시편 저자가 103편에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성'하십니다.
항상 노를 품지도 아니하시고,
우리가 무슨 악을 범한다고 해서
당장 치고 들어오지도 아니하시고,
그저 참아 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덮어 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며,
우리의 모든 병을 고치시며,
독수리가 올라가듯이
우리의 모든 소원을 만족시켜 주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에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큰 긍휼을 입고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하기 때문에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도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맛을 봤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처럼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될까요?
예수님한테서 배워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실제로 몇 가지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아주 긍휼히 여겼습니다. 불쌍히 여겼습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을 보십시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보실 때
그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그가 귀족이든지 천민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이 없는 세상을 살면
그들을 심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까?
목자가 없어져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뿔뿔이 흩어져
헤매이며 고생하는
양처럼 보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들도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불쌍히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출세하면 무엇합니까?
남보다 조금 앞서면 무엇합니까?
남보다 건강해서 몇 년 더 살면 무엇합니까?
결국은 구원받느냐
구원받지 못하느냐가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텐데,
만약에 영원한 운명이
잘못된 길로 가야 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불쌍하냐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내 마음에 가지고
주님을 모르는 사람을 볼 때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자가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기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또 배울 것이 있는데
예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특별히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병든 자, 장애인,
세상에서 버림 받고 천대 받는 죄인들,
귀신 들린 자,
이런 사람들을
주님이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는지 모릅니다.
마가복음 1장 41절 이하에 보면
참 가슴 뿌듯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병환자가 죽을 고생을 해서
예수님 앞에까지 왔습니다.
아마 생명을 걸고
찾아온 것일 겁니다.
돌멩이를 맞으면 죽는데
어떻게 어떻게 예수님 앞에까지 왔습니다.
그리고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선생님, 선생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눈물 겨운 하소연입니까?
예수님이 그의 모습을 보시고
성경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그이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 말씀을 하시자마자
그 환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고통 당하는 자,
불행한 자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는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7장에도
가슴 뜨거워지는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
나인성이라는 작은 동네를 지나가시는데
상여가 지나갑니다.
장례식 행렬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결혼해서 아들 하나 낳고는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 아들 하나가
자기 생명과 같은 존재입니다.
훅 불면 날아갈까 할 정도로
정말 날마다 두근거리면서
키운 아들인데,
20대 초반이 된 그 아들이
갑자기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 그 과부가 세상 살 맛이 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장례행렬 뒤를 따라가면서
흐느끼고 우는
과부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 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주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신 뒤
관에 손을 얹으시고
'청년아, 내가 명하노니 일어나라.'하고
명령하셨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인지 모릅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에서
고통 당하고 괴로움 당하는
많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눈높이를 조금만 낮추고
주변을 살펴보면
긍휼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대합시다.
쌀쌀한 눈을 가지고 사람을 보지 맙시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용서를 통해서
긍휼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던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누가복음 23장에
특별히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운명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어떻게 정신이 있었는지,
어떻게 예수님이 그렇게 6시간 동안이나
제 정신을 가지고 버틸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운명하시기 전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저 쉽게 말하면
'하나님, 몰라서 저러는 것입니다.
나를 못 박는 저 짐승 같은 로마 군인들,
나를 팔아 먹은 저 무지 막지한 유대인들,
다 몰라서 이러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용서해 주옵소서.'
'몰라서 저런다.'는 말 그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 아이들이
잘 못한 일이 있어서
'저 놈 오늘 저녁에 가만히 안 둔다.' 하고
속으로 단단히 벼르고 있는데,
옆에 있는 아내가 자꾸 말합니다.
'그 애가 뭘 알겠어요. 몰라서 그러는걸'
옆에서
몰라서 그러는 걸
왜 그러느냐고 합니다.
가만히 듣고 보면
사실 그런 것 같습니다.
열 몇 살짜리가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러면 마음에 무슨 감정이 있습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 몰라서 그래. 그만두자.' 그러고 끝납니다.
아마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몰라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거야. 불쌍하다.'
우리가 불쌍히 여기면 용서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용서하면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긍휼을 베푸는 자,
긍휼히 여기기를 원하는 자에게
행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이 행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왜 행복할까요?
긍휼히 여기는 자가 행복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고 누구 마음입니까?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자기 안에
누구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평안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기심과 갈등으로 풍랑이 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하면
내 안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행복합니다.
여러분 긍휼히 여기면
왜 행복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계속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값없이 긍휼을 받았습니다.
조건 없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으려면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긍휼히 여기면 내가 긍휼히 여긴다.
너희가 용서하면 내가 용서한다.'
제 말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조건적입니다.
누가복음 6장3 8절을 보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네가 먼저 주어. 네가 먼저 불쌍히 여겨.
네가 먼저 구제해. 네가 먼저 도와줘.
그러면 내가 너를 도와준다.' 하는 말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쏟아 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긍휼을 받고도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도 얼굴을 돌리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15절에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구원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서는
내가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조건이 충족될 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긍휼을 실천합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면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날마다 하나님이 잘 봐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는데
세상에 겁날 것이 뭐가 있습니까?
형통할 때나 힘든일을 당할 때나
하나님이 날 불쌍히 여겨 주시고 내 옆에 계시는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겠습니까?
이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행복하기를 원합니까?
여러분, 긍휼히 여기십시오.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기를 원합니까?
먼저 긍휼히 여기십시오.
그래서 이 매정하고 더러운 세상,
악한 세상, 잔인한 세상,
우리가 들어가서 긍휼을 베풀므로
이 사회를 치유하고
절망에 빠진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고,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치유하고,
이 세상을 살맛 나는 사회로 바꾸어 놓아야 합니다.
누가 하겠습니까? 우리가 해야죠.
누가 하겠어요?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한
우리 모두가 해야지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도록
해 주시기를 바라고,
또 긍휼히 여김으로
복 받는 자 되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긍휼히 여김으로
이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놀라운 주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말씀 주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받을 것임이요,
아버지!
이 말씀 마음에 꼭 담고, 묵상하면서
말씀대로 순종하는 우리 모두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먼저 행복한 자가 되고,
이 하나님의 긍휼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긍휼을 전함으로 인해서,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영광스러운 날이
하루빨리 임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봉헌기도
복되신 주님,
주님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우리 인생을
강한 손으로 붙잡으셔서,
의와 진리의 길에 다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때로는 가난했고, 때로는 주렸고,
때로 눈물 흘리며 낙담할 때도 있었지만,
생명 되신 주께서 친히 우리를 위로하시어
“복되다” 선포해 주셨습니다.
주의 사랑에 감사하여 작은 예물을 드리오니,
드려진 예물과
드리는 주의 백성을 복되게 하시어
더욱 주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축도
이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믿는 자를 생명의 강가로 이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자신의 백성을 성실하게 가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물과 바람으로
끝없이 공급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저주의 길을 떠나
복의 길로 다니기를 소망하는
주의 백성들 머리 위에
영원히 함께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