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패를 딛고 일어서자
김 인 현
실패와 성공,
인생은 실패와 성공의 연속이다.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기회에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한다. 어떤 사람은 한번의 실패로서 좌절하여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고 패인이 되기도 한다. 어떤 자는 한번의 실패를 딛고 더 나은 미래를 살아간다. 실패는 자신에게 원인이 있기도 하고 주위환경에서 기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전혀 원인이 없이 타인에 의하여 자신이 실패하게 되었다는 것은 없다.
40대 후반에 들어선 나에게도 큰 좌절과 시련이 있었고 이제 제대로 순항하고 있는 길이지만 언제 다시 실패라는 좌절이 찾아올지 알 수 없다.
나에게 있어서 첫 실패는 시골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진학에서 이다. 시골 고등학교에서 1등을 하였지만 모자라는 점수에 나는 좌절하였다. 다행히 서울에 있는 작은 집에서 나를 받아주셔서 재수생활을 하게 되었다. 몇 달을 동대문에서 지내다가 정일학원이라는 종합반에 시험을 보았다. 떨어졌는지 합격하였는지 걱정이 되어 얼마나 망설이면서 창구에서 넘기는 서류를 보니 나의 이름이 있었다. 참 기뻤다. 덕분에 재수를 하여 한국해대에 합격하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두 번째의 실패는 한국해대 4학년 시절 부연대장 선거에서의 패배이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내가 별다른 사전준비를 저학년에서 하지 않다가 4학년 2학기를 위하여 출마한 것이 잘못이었다. 마산고-진주고 연합세력에 깨끗하게 패배하였다. 6명인가가 출마한 선거에서 4등을 한 것이 더욱 충격이었다. 선거를 마치면서 바로 방학이 되어 고향의 집으로 돌아와서 빈방에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표가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 한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서 그랬다. “인현아 선거결과는 너의 인격과 성실함과 다른 것이다” 라고. 학생시절의 선거의 결과는 실패를 만회할 기회를 다시 주지 못하였다. 우리는 곧 졸업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간부가 되었다면 4학년 2학기의 귀중한 시간을 많이 허비하였을 것이고, 부연대장이라는 타이틀에 건방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성인이 된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좌절은 대형 상선의 선장으로서 책임을 맡아 항해 중 선박이 좌초하여 침몰하게 된 사건이다. 말하자면 세 번째 실패인 것이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여 당시 우리 나라 해기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세계최대의 선사인 일본 산코 기센에 입사하였다. 그 후 선박생활을 열심히 한 덕분으로 당시 일본인, 유럽인, 대만인으로 구성된 산코 선단의 최고의 1등 항해사라는 평가를 받은 나는 31세에 드디어 최연소 선장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선장으로 출국하였다. 그런데, 담당 2등 항해사의 항로선정과 해도개정이 잘못되었고 이를 내가 확인하지 못한 통에 선박이 암초에 좌초하고 만다. 선박으로부터 유류오염사고가 발생하고 선박이 침몰하였지만, 천만다행인 것은 호주 당국으로부터 어떠한 형사상, 행정상의 처벌도 받지 않았고, 선원들도 어떠한 사상없이 모두 무사히 생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둘 중 하나만 나에게 떨어졌어도 나는 영원히 큰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했는지 모른다. 현지에서 우리 측 변호사와 회사의 지나친 정보통제와 나의 위축된 마음으로 나는 잠을 10일 정도 자지 못하였고 귀국 후에도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는 사고의 충격으로 6개월 정도를 무기력하게 멍하게 지내고 보냈다.
화주가 선주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호주 시드니 지방법원에 제기하였고, 이를 방어하기 위하여 회사에서 선장인 내가 필요하였다. 외부로부터의 접촉을 피하고 있던 나에게 회사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김선장의 소극적인 태도로 회사 후배들의 선장진급은 물론이고 한국해기사의 자질에 대한 문제가 법정에서 다루어져 한국 해대출신들의 실력이 의심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배들보다 2년이나 빨리 진급을 한 사람.... 후배들의 진급 길을 막다니.... 나는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사고소식을 몇 개월이나 뒤에 접한 고향의 아버님이 대전으로 오셨다. 그리고는 폐인처럼 된 나에게 눈물을 보이셨다. “나는 네가 성공하여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워 조부님의 대를 이어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너같이 착한 애한테 어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이냐. 애기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을 남기고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처음으로 보는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위대한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내가 태어날 무렵, 해방을 맞아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사온 어선 3척으로 동해안에서 수산업을 크게 하고 있던 우리 집은 영덕 지방의 명문이었다. 일본에서 학교를 졸업하신 아버지는 조부님이 정치를 하신다면서 까먹은 재산에 도산된 사업을 꾸려가기 위하여 뼈를 깎는 노력과 근검절약으로 우리들 형제들을 키우셨다. 우리는 항상 아버지를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였다. 아버지는 어떻게 한 집안이 실패로부터 일어설 수 있는 지를 몸소 보여주셨다. 내가 여기서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로 부터의 진정한 탈출은 사고가 나의 잘못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였다, 나는 책심(責心)이라는 단어를 수 백번을 쓰면서 나 자신이 선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반성을 하였다. 그러면서 이제 내가 별을 달았노라고 남에게 말 할 수있게 되었다. 호주에서 떠나올 때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가” 하고 담당 변호사와 검사원들에게 물으니, 많은 사람들은 큰 사고를 당하면 해운계를 떠나 산다고 하였다. 나도 부끄러운 마음에 해운계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주에서 소송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나는 해운계에 기여할 수있는 길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해상법이었다. 사고를 당하여 누구에게 법률적인 자문을 구하려고 하였지만 선후배 누구도 나의 법률적인 고민을 풀어주지 못하였다. 선장으로서 해상법을 하면 여러 가지 많은 소용이 될 것 같았다. 그렇다. 다른 분야에 가는 것보다는 지금까지 배운 분야에서 한번 더 기회를 갖자. 어려운 때 일수록 정면 돌파를 하자. 1992년 9월 어느날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항공기가 전진 타력을 죽이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는 모습에서 나는 영감을 얻었다. 일상 처럼보이지만 착륙순간 기장은 길지 않은 활주로내에서 정하여진 자리에 비행기를 멈추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하지 않을 수없다. 자칫하면 활주로를 벗어나 대형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제부터는 착륙하는 비행기의 전진타력 죽이기와 같은 최선을 다하여 실패없는 삶을 살자. 이렇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다행히 회사에서 대명비 형식으로 선장 기본급인 120만원씩을 보내주었다. 나는 배없는 선박의 선장으로서 집에서 근무를 하면서 회사에서 필요로 할 때까지 봉급을 받게 되었다. 집 근처에 있는 대전의 한남대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민법총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조금 공부를 하다보니 아무래도 정식 과정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이 들어 대학원 진학준비를 하게 되었다.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정말 열심히하였다. 사고의 악몽을 잊어버리려고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졸고 있으면 사고의 현장이 나타나 나의 잠을 깨워주었다.
서울대와 고려대를 목표로 하게 되었는데, 당시 어떻게 최고의 대학을 목표로 하게 되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무모해 보이지만, 내가 비록 실패는 하였지만 그래도 선장이었으므로 이 정도의 학교에서 공부할 실력과 지위에 있다는 자부심의 발로였으리라.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시험에 합격하였다. ‘축하합니다, 합격입니다’”하고 안내하는 아가씨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1991년 2월의 실패에서 1993년 12월의 1차적인 성공에 이르기까지 나는 2년 10개월이 필요하였다. 큰 환희가 찾아왔다. 이제 밑바닥으로부터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나의 제2의 모교가 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과의 인연, 은사님이 되신 채이식 교수(현 법대학장)와의 만남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연구실의 조교를 자청하여 8시에 연구실에 나가 청소를 하고 공부를 시작하였다. 기라성 같은 교수님들은 상법에 나오는 선장이 공부하러 왔다고 좋아하시면서 이끌어주셨다. 다행히 법학이 적성에 맞아 물을 만난 고기처럼 집중하며 열심히 하였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할 무렵 우리 나라 최대 법률회사(로펌)인 김&장의 해상팀에서 제의가 와서 들어가게 되었다. 호칭을 무엇이라고 하면 좋겠는가 하고 물었다. “당신들도 변호사 자격을 가지고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나도 선장면허를 가지고있는 전문가이다. 그러므로 선장으로 불러주고 선장대우를 하여달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 나라의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있다는 김&장의 120여명의 프로페셔널(변호사, 변리사, 회계사, 선장등으로 구성된 전문가)로서 비서가 딸리고 개인 사무실이 있으며 시간당 비용을 고객에게 청구하는 그런 전문인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팀장 변호사님이 김&장의 김영무 대표 변호사에게 “5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사람입니다. 해난사고를 당하여 해상법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호랑이를 잡으려고 호랑이 굴에 들어왔다고 합니다”고 나를 소개하여주었다. 나는 열심히 하였다. 그리고 한국해대 본과를 졸업한 선장이 서울법대를 나온 변호사와 겨룰 수 있는 정도의 전문성과 열정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3년이 지나자 드디어 영국의 법률전문 잡지는 한국 서울의 해상법 실무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서 시장을 지배하는 자는 김&장의 팀장 변호사와 Captain I.H. Kim이라는 평가를 내려주었다. 작은 성공이었다. 해운계에서도 나의 이름이 많이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성공 가운데에서 나는 나의 초심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선장으로서의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법적인 문제점을 선장을 비롯한 업계와 학계에 많이 알리려고 시도하였다. 이런 나의 인생관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김&장 사무실과 조화되기가 어려워졌다.
이런 차에 마침 목포해양대학교에서 동기로부터 법학교수로 오지 않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학교에는 다른 분들이 갈수 있고, 김&장에는 내가 아니고는 해운계와 법조계를 연결시켜주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는 많이도 망설였다. 고려대학교의 은사들이 학교를 많이 추천하여주었다. 대학의 교수라는 자리는 교수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조언이었다. 1999년 2월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학위논문 심사를 마친 다음 한국해양대학교의 선배 교수 두분은, 혜성처럼 나타난 후배를 잘 키워준 고려대학교 법대 교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내자, 법대의 교수님들은 훌륭한 학생을 보내주어서 고맙다는 덕담이 이어졌다. 항상 겸손하게 실무와 법을 잘 조화하면서 한국의 해상법을 잘 이끌어 갈 것을 부탁하셨다.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는 그 엄숙한 순간에 나는 처참한 사고현장이 떠 올랐다. 이제 다시 새로운 시작이다.
목포해대에 와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마침, 선배 선장출신 법학교수들이 정년을 하실 즈음이었다. 그래서 학교에 온지 2-3년 안에 큰 공백이 생겨 자연스레 내가 돋보이게 되었다. 김&장에 있으면서 평소에 궁금하였던 잇슈를 논문으로 1년에 7편 정도씩 담아내었다. 업계의 법률적 잇슈에 마다않고 뛰어 다녔다. 한국 정부의 대표로서 런던으로 뉴욕으로 다녔다. 몇권의 교과서도 성공적이었다. 이중의 한권은 대한민국 학술원의 우수도서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저술활동이 해운계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근정포장이라는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지난 미국 텍사스 오스틴법대의 석사과정에 들어간 나는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다시 맛보게 되었다. 절반의 성공은 석사학위를 우수한 성적으로 받은 것이고 공부를 많이하여 미국의 SSCI저널에 두편의 논문이 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 법대교수들도 SSCI 논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만나기 어렵다는 점을 볼 때 이는 상당한 학문적인 업적이라고 자평할 수있다. 절반의 실패란 뉴욕주 변호사 시험의 불합격이다. 애초부터 법학사가 없는 석사들에게 응시자격을 주지 않는 것인데 무리하게 법원에 청원을 하면서 시간을 많이 소비하고 늦게 자격을 받아 충분한 준비시간을 갖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나의 네 번째 실패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는 살아가는 긴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반복되는 삶에서 나타나는 한가지 현상일 뿐이다. 꼭 필요하다면, 다시 준비하여 시험에 합격하면 그 뿐인 것이다.
나는 세 번째의 실패를 딛고 일어섰다고 감히 말할 수있다. 나를 일어서게 한 것은 두가지 나의 가슴에 자리하고 있는 자부심이었다. 하나는 내가 한국해양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이고 그것도 본과 출신이라는 점이다. 나는 해운을 위한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자랐다. 엘리트가 한번의 실패로 무너질 수는 없는 것이다. 한번의 실패로 엘리트가 무너진다면 그것은 그를 교육시킨 학교의 교육 잘못이다. 회사에서 한국해대생의 신뢰성이 의심을 받고 있다는 말은 나에게 한국해대 본과출신으로서의 자부심을 자극하여 주었다. 다른 하나는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다. 비록 시골이지만, 전통있는 집안에 태어난 나는 누구네 손자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라났고, 집안의 이름에 누가 되는 행동을 하지 말고 사회의 리더가 되라는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는 가운데 집안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실패의 나락에 떨어져 영영 헤메고 있으면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다. 대전에 찾아오신 아버님의 눈물은 나를 구렁텅이에서 일어나게 하여주었다.
나를 일어서게 한 또 하나는 선장이라는 타이틀이었다. 선장은 비록 작은 조직이지만 조직의 리더이다. 선장은 해기사의 최고봉으로서 다른 직업군에서 이사에 해당하는 직위이다. 내가 30대 중반과 후반을 거치면서, 선후배 하나없는 고려대학교 법대 및 김&장 법률사무소라는 생소한 남의 영역에 들어가 견디어내며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해운계를 대표하는 선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과 해운에 대한 충성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양대학을 나온 선장이 무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 선장이라는 타이틀을 사회에서는 너무나 높게 인정하여 주어 큰 프리미엄을 가진 상태로서 자리를 잡아갈 수 있었다.
나를 일어서게 한 것은 명심보감(明心寶鑑)과 대학(大學)의 공부였다. 명심보감은 내가 사고 직후 1년 정도 혼미하여 무력한 상태를 견디어내며 살아갈 수 있도록 올바른 마음을 굳건하게 심어주었다. 그리고 대학은 나의 장래 입신(立身)에 대한 정신적인 기초를 제공하여주었다. 이를 통하여 나의 박학(博學)에서 독행(篤行)에 이어지는 인생철학은 더욱 굳어졌다.
선배님들, 동료들이 쉬어가라고 하면서 건강에 대한 걱정을 많이하여 준다. 이럴 때마다 나는 사고 후, 선박 등록말소를 위하여 선박침몰사실에 대한 사실증명을 공증받아 보내라고 서신이 회사로부터 왔을 때, 꼼짝을 못하고 10여일을 보내고, 겨우 집사람의 손을 잡고 공증사무실에 가서 서류를 하여 나오다가 지나가는 경찰차를 보고 무서워하였던 그 부끄럽고 무기력했던 날들을 떠올린다. 일을 할 수 있는 정신과 마음이 있고 몸이 그 정신과 마음을 따라 움직여준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온전히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이는 축복이다. 다시는 죽어있는 상태가 되지 말자.
어떠한 실패가 나를 다시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네 번째의 실패가 나의 인생에 없었으면 한다. 그러나, 인생이란 앞날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선배 선장님이 그랬다. 선장이 되기 위하여는 항상 세가지 해결책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첫 번째 방법이 안되면 두 번째 방법으로, 두 번째 방법이 안되면 세 번째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것이다. 이는 비단 현장의 선장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세 번째 실패는 나의 인생에서 정말 커다란 위기였고 그 위기는 전화위복의 큰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사고로부터 만 15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돌이켜 보건대, 그 후 나에겐 많은 행운이 찾아와 최고의 학교인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인 김&장 법률사무소와 인연을 맺어 각각 훌륭한 은사님과 선배들로부터 공부와 지도를 받고, 목포해양대라는 넉넉한 안식처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분에 넘치는 교수직을 즐기고 있다.
이상은 김 교수의 실패로부터 일어서기 체험담이었다. 읽은 분들로 하여금 실패로부터 일어서기라는 글을 쓰도록 권유하기 위하여 실패담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실패는 없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큰 실패를 하게 되는 분이 있다면, 김교수의 15년 걸치는 긴 체험담이 일어서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06.11.8.)(목포해대 문학동인지. 2007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