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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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에 의한 섯알오름 양민 학살터)
이곳은 왜정 때 일본군이 제주도민을 '강제 동원’하여 구축한 도내 최대의 탄약고였으며, 해방 직후 미군에 의해서 폭파된 곳이다. 1948~1949년 1만 5천 명~3만 명 (미군 정보자료 추정지, 제주도 의회 접수 2000년 1월 현재 약 1만 5천 명)의 양민이 군경 토벌대에 의해서 학살된 '제주 사건' (통칭 '4·3사건' : 'Red Hunt')이 진정국면에 접어들 무렵,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치안국의 불법적 '예비검속 (Preventive Detention: 혐의자를 미리 잡아 가두어 놓는 일)' 광풍(狂風)이 몰아쳐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경찰에 의하여 '강제 검속'을 당하였다. 예비 검속자들 중 약 1천 명(추정-모슬포경찰서 관내 252명, 서귀포경찰서 관내 240~250명, 성산포경찰서 관내 6명, 제주경찰서 관내 500~600명)이 넘는 제주인들은 당시 계엄군 (육군본부 정보국 CIC (방첩대)와 해병대 사령부 정보과)에 의해서 아무런 법적 절차없이 한 밤중에 무참히 총살, 이름모를 산야에 암매장 되거나 깊은 바다에 수장되었다. 현재까지 이곳만이 당시의 비참했던 상황을 보여줄 수 있는 제주도내의 유일한 학살터이다.
1950년 8월 20일 (음 7월 7일) 모슬포 경찰서에 예비검속된 357명 중 252명(숫자는 경찰극(極) 문서에 의함)을 새벽 2시경과 5시경 2차에 걸쳐 밤중에 총살(해병대 모슬포 주둔군 3대대) 돌무더기와 함께 암매장하였다. 그러나 만행은 당일 새벽 유족들에 의해서 발각되고, 그 시신 인도를 시도하였으나 당시 계엄군경이 무력으로 저지하고 이곳을 7년 동안 '출입 금지' 구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1956년 3월 29일 새벽 한림 지역 유족들이 61위를 수습하여 한림읍 명월리 개꼬리 오름(狗尾岳)에 안장하였다. (현재 45위만 남았음) 1956년 5월 18일 백조일손 유가족의 끈질긴 탄원으로 당국의 허가를 받아 149위를 수습하여 그중 132위를 상모리 지경 '백조일손 지지(百祖一孫之址)' (조상이 각기 다른 백서른 두 자손이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죽어 뼈가 엉퀴었으니 한 자손이다)”에 안장하였다. 1961년 이곳에서 철근을 채취하던 인부들이 유해 2구를 발견하여 섯알오름 북동편에 정중히 예를 갖추어 매장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고증자: 전도의회 부의장 姜豪男)
약 40위가 이곳에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여 국방부의 허가를 얻고 제주도의 예산지원으로 2000년 9월 21일부터 2001년 2월 20일까지 증언자의 의견을 토대로 주변 여러 곳을 수색하며 유해 발굴을 시도하였으나 많은 세월이 경과하고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여 추가 유해 발굴은 실패하였다. 유족들의 가슴에 '50년의 한(恨)'으로 응어리진 이곳을 탈바꿈하여 천부적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깨우치는 '역사박물관 (Historical Museum)' 으로의 전환을 기대해 본다.
(백조일손 유족회, 만벵디 유족회)
증거인멸의 장소
여기는 대학살을 감행(敢行)한 후 증거인멸을 위해 유품(遺品)들을 불태웠던 장소이다.
예비검속 구금(拘禁) 장소는 협소(狹小)했다. "넓은 장소로 간다" 고 유인(誘引)하여 희생자들은 생활 소지품(所持品)들을 모두 트럭에 실었다. 1950년 8월 20일 (음력 7월 7석) 새벽 트럭에 실려 가며 고향마을을 벗어나 이곳 길을 향했을 때, 그제야 자신들의 죽음을 예측했었는지 신었던 검은 고무신들을 벗어 던지며 가는 길을 가족에게 알리려 했었다. 길 위(路上)에 검은 고무신들을 따라 유족(遺族) 들이 달려왔을 때는 이곳에서 담요, 베개, 옷가지, 허리띠, 쌀, 부식 등 희생자들의 소지품이 모두 불에 타고 있었다. 그날의 역사적 사실을 자각(自覺)함은 희생자의 원혼(寃魂)을 추모하는 일로서, 당시에 남편 찾아 달려와 현장을 목격(目擊)했던 이상숙(李相淑: 1925년생) 여사가 일금 4,500만 원을 지원하여 재현(再現)된 시설물이다.
The place of the destruction of evidence
This is the place where relics were burned to destroy evidence of the massacre.
The place of preventive custody was confined. The victims loaded all of their belongings onto trucks, because they had probably been lured to a larger place.
After the trucks were loaded, at dawn on August 20th, 1950 (the seventh day of the seventh month of the lunar calendar), the trucks brought them down this road. They perhaps predicted their deaths and they tried to leave traces along the way by throwing off their black rubber shoes.
When the bereaved families came running by, following the black rubber shoes on the road, the belongings of the victims like blankets, pillows, clothes, belts, rice and side dishes, were all burning.
To realize the historical fact of that day is a way of honoring the vengeful spirits of the victims. This reenactment is supported by a 45 million won donation from Lee Sangsuk, born in 1925, who came to this place and witnessed these events.
일본군동굴진지(자료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