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며느리 유인 완산 이씨 묘지명〔亡子婦孺人完山李氏墓誌銘〕
아! 슬프다. 유인(孺人)은 안동(安東) 김원근(金元根)의 처이니, 보계(譜系)는 세종의 아들 밀성군(密城君)에서 나왔다. 영의정을 지낸 문정공(文貞公) 경여(敬輿), 이조 판서와 전문형(典文衡)을 지낸 문간공(文簡公) 민서(敏叙), 좌의정을 지낸 충민공(忠愍公) 건명(健命)이 유인의 7대조, 6대조 및 5대조이다.
부친은 헌성(憲成)이니 지금 의성 현령(義城縣令)이다. 모친은 숙인(淑人) 경주 김씨(慶州金氏)이니, 송애공(松崖公 김경여(金慶餘))의 후손이다.
유인은 정종(正宗 정조) 11년인 정미년(1787) 2월 24일에 태어났다. 원근에게 시집온 지 9년이 되었고 금상(순조) 7년인 정묘년(1807) 6월 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는 겨우 스물하나이다. 슬프다.
유인은 어려서부터 자주 병을 앓았고 장성해서도 여전히 여리고 약해 시부모가 항상 걱정하였다. 유인은 시부모를 상심케 할까 걱정하여, 심한 경우가 아니면 반드시 힘을 내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서 평소처럼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올려 자신의 병세를 시부모가 알지 못하게 하였다. 지난해 겨울부터 병이 더욱 고질이 되어 거의 다시 일어나지 못할 듯했다. 병세가 심해진 뒤에도 시아버지가 보러 가면 반드시 사람을 시켜 자신을 일으키게 하고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으며,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그렇게 하였다. 하지만 정신은 또렷하여 묻는 것이 있으면 또박또박 분명하게 대답했고 또 죽음을 애달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바로 그 평소의 수양을 알 수가 있다. 슬프다.
유인은 교하(交河)의 고향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열두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처음 서울로 와서 종부조(從父祖)의 집에 머물렀다. 그 집이 내 누님의 집과 담장을 맞대고 있었기에 시어머니 쪽 친속을 통해 내 누님에게 인사하였다. 누님의 아들은 유인의 종조숙(從祖叔)이었는데, 장난삼아 유인을 밀어 앞에 세워 두었지만 유인은 얼굴빛을 단정히 하고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서 마치 아무것도 듣고 본 것이 없는 듯 편안하였다. 시어머니가 어여삐 여겨 쓰다듬어 주고 돌아와 나에게 말하기를 “며느릿감으로 얌전하고 아름다우니 염두에 둘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벌써 혼사가 논의되었다.
그 이듬해에 우리 집으로 시집오니 용모는 단정하고 깨끗했고 품성은 정숙하고 부드러워 보는 사람마다 매우 칭찬하였다. 몇 년이 지나는 동안 밤낮으로 자식이 생기기를 바랐지만 까닭 없이 두 번이나 유산하였고, 끝내 다시 임신하지 못한 채 어느 날 아침 세상을 떠나 형적이 마침내 사라지고 마니, 앞으로 우리 집안을 보는 자들은 유인처럼 현명한 부인이 있었는지를 모를 것이다. 슬프다.
유인은 정숙하여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적었다. 귀고리며 비녀와 노리개 등 여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패물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좋아하고 부러워했지만, 유인은 그렇지 않아서 남들이 바라는 것이 있으면 상자를 털어 주고 마음 쓰지 않았다.
임술년(1802, 순조2) 이후로 성상의 수레가 대궐 밖으로 나올 때마다 집안사람들이 너도나도 집을 세내어 그 행차를 구경했는데, 유인은 시어머니가 함께 가자고 강권하는 경우가 아니면 늘 집을 지키며 앉아 있기만 하였다. 시어머니가 일찍이 말하기를 “이 며느리는 너무 욕심이 적으니, 오래 사는 데 이롭지 못할까 걱정입니다.”라고 하였다. 아! 욕심이 적은 것은 장수를 누릴 상(相)이 아니었던가. 욕심을 많이 부리며 장수하기보다는 차라리 단명하더라도 담백하게 살려고 했던 것인가? 슬프다.
유인은 이씨(李氏)의 딸이다. 옛날 백강공(白江公)은 인조 때 척화를 주장하다가 청나라 사람의 미움을 받아 용만(龍灣 의주(義州))에 구금되었으니, 우리 선조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대의가 천하에 알려졌다. 서하공(西河公)은 문장과 명망과 덕행이 일찍 세상에 알려졌고 우리 선조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과 함께 효종ㆍ현종ㆍ숙종의 세 조정을 섬겨 명신이 되었다. 한포공(寒圃公 이건명(李健命))은 경묘(景廟 경종) 원년(1721)에 우리 선조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과 세자를 세우는 문제를 결단했다가 함께 신임사화(辛壬士禍)를 당했다.
세상에 인친(姻親)과 선대의 우호로 일컬어지는 집안은 진실로 많지만 골육이나 마찬가지였던 우리 두 집안과 같은 경우는 아직까지 없었다. 만약 유인이 원근의 처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진실로 딸과 같이 여겼을 것이니, 그런 유인이 원근의 처가 되었음에랴. 살아 있을 때 어찌 사랑을 쏟지 않을 수 있었겠으며, 죽었으니 어찌 지극히 애통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슬프다.
세상을 떠난 다음 달 모일(某日)에 모지(某地) 모향(某向)의 언덕에 묘소를 잡아 장사를 지냈다.
그의 시아버지 풍고 거사(楓臯居士)가 오랜 사랑을 영원히 베풀 길이 없음을 슬퍼하고 지금의 애통함을 풀 길이 없음을 생각하여 이 글을 돌에 써서 광중(壙中)에 넣으니, 또한 유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슬프다.
처음 유인이 태어나던 날 저녁에 현령공(縣令公 이헌성)이 충민공(忠愍公 이건명)의 묘도에서 커다란 죽순이 자라 갑자기 하늘까지 닿는 꿈을 꾸고 드디어 유인의 소자(小字)를 짓고, 또 “이 아이는 반드시 성취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제 다 끝나 버렸으니, 그 꿈은 과연 거짓이고 진실이 아니었던가. 아! 슬프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부인의 삶은 婦人之生
자식 통해 귀하게 되고 남편 통해 영광 누리는데 以子而貴以夫而榮
구 년 동안 포의의 처로 살다가 九年爲布衣妻
혈육 한 점 남기지 못했구나 而無血肉遺嬰
또 싹만 틔우고 꽃 피우지 못했으니 而又苗而不秀
슬프다 현부여, 그 심정 어떠할까 哀乎賢婦若爲情
여기에 의지해 위로받기를 是依是慰
시아버지가 무덤에 명을 새기노라 其舅銘其塋
亡子婦孺人完山李氏墓誌銘
嗚呼。孺人安東金元根妻也。系出世宗諸子密城君。曰領議政文貞公敬輿。曰吏曹判書典文衡文簡公敏叙。曰左議政忠愍公健命。於孺人爲七世六世若五世祖也。父曰憲成。今令義城縣。母曰淑人慶州金氏。松崖公後也。孺人以正宗十一年丁未二月二十四日生。歸元根九年而歿。於今上七年丁卯六月五日。春秋纔二十有一。悲夫。孺人自幼善病。長猶淸脃。舅姑常以爲憂。孺人恐傷其心。非甚焉。必強盥櫛。定省如常。不使舅姑知之。自上年冬。病益痼。殆不能復強。旣㞃。舅視之則必倩人扶起。怵惕見於色。 臨歿猶然。精神不爽。有所問。能歷歷辨答。且無怛化意。卽其平日可知。悲夫。孺人生長交河之墓里。十二隨母夫人始至京師。舘於其從父祖家。其家與姊氏居。接垣而通。其姑屬拜姊氏。姊氏子。孺人之從祖叔也。戲推孺人置於前。則斂容齊手而立。湛若無聞覩狀。其姑憐而撫之。歸語余曰。婦材幼眇佳可念。時已議聘也。明年入門。貌端而潔。稟靜而柔。見者亟稱之。旣數年。日夜望其有子女。嘗無故墮胎者再。竟不復孕。一朝而逝。迹遂泯。人之觀吾家者。將不知嘗有賢婦人如孺人者。悲夫。孺人靚然寡嗜好。環珥簪珮之 可悅女心者。他人皆愛翫艶慕。而孺人不然。人之有所求。傾篋而不爲意。自壬戌以後。每車駕出。家人競貰屋觀光。孺人非其姑強與俱。未嘗不看屋而坐也。其姑嘗曰。是婦太寡欲。吾恐其不利於壽。噫。寡欲者非壽相歟。與其多欲而久視。寧短世而澹泊歟。悲夫。孺人李氏子也。昔白江公當仁祖世。斥和忤淸人。被拘龍灣。與先文正大義。聞天下。西河公文章名德。早顯於世。與先文忠。事孝,顯,肅三朝。爲名臣。寒圃公在景廟初元。與先忠獻决策建儲。同被辛壬之禍。世之稱姻親先好者。固多矣。未有若吾兩家之骨肉然也。使孺人。不爲元根妻也者。余固將視猶女也。孺人而爲元根妻也者耶。生乎安得不愛之鍾也。歿乎安得不慟之至也。悲夫。翌月某日。卜兆于某地某向之原。葬焉。其舅楓皋居士。悼舊愛之永墜。念新慟之莫抒。書銘于石。納諸其壙。其亦少慰孺人之心也歟。悲夫。始孺人之生之夕。縣令夢鉅筍生忠愍墓除。俄然凌霄。遂命其小字。且云是必有成立。今焉已矣。夢果妄而非眞者歟。悲夫嗚呼。銘曰。婦人之生。以子而貴。以夫而榮。九年爲布衣妻。而無血肉遺嬰。而又苗而不秀。哀乎賢婦。若爲情是依是慰。其舅銘其塋。
[주1] 죽은 …… 묘지명 : 아들 김원근(金元根)에게 시집와서 21세 때인 1807년(순조7)에 세상을 떠난 며느리 완산 이씨(完山李氏)에 대한 묘지명이다. 완산 이씨는 노론사대신의 한 사람인 이건명(李健命)의 현손녀(玄孫女)이다. 풍고는 이 며느리를 얻었을 때 〈원근의 아내를 보고서 기쁨을 기록하다[元根婦見志喜]〉라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한편, 아래 번역문에서 시부모 또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로 번역한 것은 풍고와 아내 청송 심씨(靑松沈氏)를 지칭한다. 《楓皐集 卷1》
[주2] 밀성군(密城君) : 세종의 다섯째 서자인 이침(李琛)으로, 신빈(愼嬪) 김씨(金氏) 소생이다.
[주3] 누님의 아들 : 이헌기(李憲琦, 1774~1824)를 말한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규(穉圭)이다. 1807년(순조7)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조 판서와 공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주4] 욕심이 …… 아니었던가 : 《논어》 〈옹야(雍也)〉의 “인자는 장수한다.[仁者壽.]”라는 구절에 대해 《논어주소(論語注疏)》에 “인자는 생각과 탐욕이 적어 성정이 항상 편안하고 고요하기 때문에 대체로 장수한다는 말이다.[仁者壽者, 言仁者少思寡欲, 性常安靜, 故多壽考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주5] 백강공(白江公)은 …… 알려졌다 : 백강공은 이경여(李敬輿, 1585~1657)로,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이다. 1642년(인조20) 12월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신익성(申翊聖)ㆍ이명한(李明漢)과 잡혀가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 1644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시 억류되었고 이듬해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귀국하였다. 문정공(文正公)은 김상헌(金尙憲)을 말한다. 김상헌은 1640년에 심양으로 압송되었다가 병이 심해져 1642년 1월에 의주(義州)로 보내져 구류된 적이 있었다. 이경여가 용만에 구금되었다는 기록은 찾지 못했다.
[주6] 서하공(西河公) : 이경여의 아들인 이민서(李敏叙)로, 자는 이중(彛仲), 호는 서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