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시는 서정시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또는 모든 특징을 다 가지고 있으나 산문의 형태로 쓰여진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산문 중에도 시적인 특징을 가진 산문이 있지만 산문시는 하나나 두 문단, 또는 한 두 페이지 의 짧은 길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시적인 산문이라 할지라도 산문시처럼 심상, 상징 등의 긴밀한 연결과 소리의 효과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산문시는 시행을 나누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유시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산문시가 리듬을 행에다 두지 않고 한 문장, 나아가서는 한 문단에다 두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산문시가 일종의 장르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들의 산문시 작품이 생긴 때부터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요한의 [불노리](1919)는 한국 현대시 최초 자유시의 작품으로 평가되어 왔으나 요즘은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미 1918년 <태서문예신보>에 김억의 시 '봄은 간다' 등의 자유시가 수록되었기 때문에 "현대시 최초"라고는 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주요한의 작품인 '시내'등 여덟 편의 자유시는 1919년1월에 간행된 <학우> 창간호에 "에튜우드(etude ; 습작)"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고, 그래서 '최초의 자유시'라는 명칭보다는 우리 근대시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당시 자유시의 전형으로서 소개된 주요한의 "불노리"는 현대시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산문시의 최초로 볼 수 있는 작품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 최초의 산문시에 대한 김윤식 교수의 의견을 인용해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시는5연으로 이루어진 산문시입니다. 특히 주관적 정서를 시의 대상으로 삼아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태도는, 독백적인 서정시의 특성을 잘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이 시에는 자유로운 사유의 흐름이 잘 나타나며, 그것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분열적인 심리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1연에서3연까지는 현실의 세계를, 4, 5연은 환상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시적 화자는 죽은 임으로 인한 상실감과 비통함에 젖어, 물과 불의 대립적 이미지로 형상화되는 삶과 죽음의 욕망 속에서 갈등합니다. 그러나 죽은 임을 따라 죽음의 물길을 가던 화자는 죽음의 끝에서 오히려 삶의 용기를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이 시는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과 같이, 생경한 한문투의 시어를 사용하지 않고 우리말을 발굴하여 구사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됩니다. 또한 재래의 정형성에서 과감히 벗어나 완전히 자유로운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계몽성·교훈성이 배제된 주관적 정서와 미의식을 갖춘 근대 자유시의 본격적인 출발이란 점에서 문학사적인 의의가 인정됩니다." <김윤식교수의 시특강 인용> 그러면 주요한 시인의 “불노리”를 한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4월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 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해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城門 위에서 내려다 보니, 물 냄새, 모래 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의 퍼런 꿈을 찬 강물 위에 내어 던지나, 무정한 물결이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아아, 꺽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임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기로 이 가슴 태워버릴까, 이 설움 살라 버릴까? 차라리 속 시원히 오늘밤 이 물 속에……. 그러면 행여나 불쌍히 여겨줄 이나 있을까……. 할 적에 ‘퉁, 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나는 매화포, 벌떡 정신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더 강렬한 정열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 숨막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겁게 삶을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4월달 따스한 바람이 江을 넘으면, 淸流碧, 牡丹峰 높은 언덕 위에 허옇게 흐늑이는 사람, 바람이 와서 불 적마다 불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 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들어박히고, 물결치는 뱃슭에는 졸음 오는 "이즘"의 형상이 오락가락—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소리. 달아 논 등불 밑에서 목청껏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뜻밖에 情慾을 이끄는 불 구경도 인제는 겹고, 한 잔 한 잔 끝없는 술도 인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 밑창에 맥없이 누우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間斷없는 장고 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불 이는 욕심에 못 견디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쳐 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위에 조을 때, 뜻있는 듯이 찌적거리는 배젓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적거리는 배가 오른다…….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綾羅島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추운 바람도 무엇하리요. 怪異한 웃음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의 어두운 가슴 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요.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시 "불노리" 전문(주요한))
이 시의 표현상 특징을 살펴 보면 구태의연한 정형성을 탈피하고 자유로운 시형을 선택하고 있으며, 내부에 응축되어 있는 감정을 절제없이 격렬하게 토로하여 산문적인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당시의 주된 경향이었던 한문투를 쓰지 않고 순수한 우리말을 쓰려고 노력한 점이 눈에 띄며, 순수한 예술성을 추구하고 영탄법과 반복법, 상징법을 사용하여 시를 썼다는 점이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월 초파일날 밤, 대동강에 불놀이하러 나온 사람들의 흥청거림과 시인의 고독한 마음을 대비시키고,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과 '불'이라는 두 개의 원형적 상징은 밝음과 어둠, 기쁨과 슬픔, 삶의 고뇌와 탈출 등으로 표상되는 대립적 개념이며, 이 대립개념은 결국 삶과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으로, 시적 자아는 이 둘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욕구가 많아질 수록 삶의 욕구 또한 더 많아진다는 역설적 극복에 의해서 마침내 시적 자아는 갈등을 극복하고 아울러 강렬한 삶의 의욕을 되살려 내게 됩니다. 물과 어둠, 슬픔과 고뇌는 '죽음'을, 불과 밝음, 기쁨과 비상은 '삶'을 상징하며, 시적 자아는 떠나 버린 임으로 인해 죽고 싶은 마음과 불놀이를 하는 주위 사람들의 흥겨움으로 표현되고 있는 삶 사이에서 방황, 번민하고 있는 것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서정주 시인의 "신부"라는 산문시를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를 못 참아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당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시 “신부” 전문(서정주))
이 시는 서정주(1915-2000)시집 [질마재 신화]의 첫 번 째 작품으로 낭만적이고 토속적인 분위기 속에서 여인의 정절을 짧은 이야기체로 노래한 산문적 내재율을 가진 산문시 작품입니다. 첫날밤 신랑의 오해로 신부가 소박을 맞았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뒤(늙었을 때) 변함없이 신부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 오해를 가슴에 품고 기다리던 신부는 신랑의 손길이 닿은 후 재가 되어버린다는 기다림과 한恨으로 얼룩진 여인의 삶을 그려내고 있으며, 기다림 끝에 초록재와 다홍재로 변한 것은 유교적인 열녀의 삶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용서와 화해라는 시공을 초월한 신화의 세계로 확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소재를 다룬 조지훈 시인(1920-1968)의 산문시 “석문(石門)”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 중천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시 “석문”전문 (조지훈))
이 시는 조지훈 시인(1920-1968)의 고향, 경상북도 영양군의 일월산에 있는 황씨 부인의 사당에 전하고 있는 설화를 소재로 지은 시로서 그 설화의 내용은 우연한 오해가 빚어져 첫날밤을 치르지도 못하고 버림받은 여인이 평생 동안 정절을 지키며 살다가 죽었다는 신부의 원한을 쓴 이야기인데 서정주 시인의 [신부]라는 시와 그 소재가 매우 닮아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조지훈 시집<풀잎단장>(1952))
이 외에도 많은 시인들이 이러한 형식의 산문시를 썼으며, 그것이 현대시의 시 형식을 발전시켜 왔음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지용 시인도 [슬픈 우상]이라든가, [삽사리][온정][장수산]등과 같은 여러편의 산문시를 남겼습니다.
가까이는 개인적인 호好불호不好를 떠나 정진규 시인의 산문시를 말하지 않고 산문시를 이야기 하였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뼈 나무의 뼈 흙의 뼈 이별의 뼈 슬픔의 뼈 사람의 뼈 컴퓨터의 뼈 뼈에 당도하기 뼈에 이르기 그걸 하고 있다 내 가장 사랑하는 여자도 뼈일 뿐이다 뼈로만 남아 있다 내가 여자의 살을 다 발라먹은 탓이다 사랑은 살일까 아니다 아니다 살의 숲을 헤치고 뼈를 찾아내기 살을 버리고 마침내 뼈로만 남아 있기다 빛의 뼈, 서로가 하얗게 하얗게 별들로만 빛나기다 어젯밤 나의 꿈 나의 물푸기 내 유년이 고기를 잡고 있었다 마지막 바닥엔 뼈들만 소복하게 남아 있었다 빛의 뼈, 별들만 소복하게 남아 있었다 아프게 살을 버린 사람들 그들의 것이라 하였다 어젯밤 나의 꿈 나의 물푸기 아, 그것은 물푸기가 아니라 살푸기 누가 살버리기라 하였다 어머니 당신도 지금 그렇게 계시지요 확실히 보였다 (시 "뼈에 대하여" 전문 (정진규))
뼈를 죽음 이후에도 남는 하얗게 빛나는 "정신적 결정체"로 보고 있는 산문시입니다. 이 속에는 매우 호흡이 빠른 반복이 계속 중첩되면서 그 실체적인 모습으로 끌고 가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정진규 시인은 1973년 시<들판의 비인 집이로다>이후 계속하여 산문시의 형태를 고집스럽게 지켜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어떤 분은 이제 그 형식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쉽게 말해서 이젠 지루한 느낌을 준다는 뜻도 되며 그 형식에 갇혀 제 시가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가장 근원적인 지적이 될 수도 있겠으나 저로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 형편에 있습니다. 이 같은 형식의 선택에는 저로서의 내면적이며 외면적인 필연성이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지녔던 처절한 싸움의 결과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체험과 상상력의 싸움이었으며 그 만남을 위한 또는 총체성의 획득을 위한 동일화에의 의지였습니다." "……산문시라는 형태를 개척한 바 있는 보들레르는 '산문시란 율동과 압운이 없지만 음악적이며, 영혼의 서정적 억양과 환상의 파도와 같은 의식의 도약에 적합한 유연성과 융통성을 겸비한 하나의 기적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정진규의 따뜻한 상징 중에서 인용)
필자의 졸저 "맑은 날의 우산 하나"라는 산문시집에 대한 해설에서 강남주 시인(현 부경대학교 총장)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 시집에서 필자가 최초로 목도하게 된 것은 산문시라는 시형에 대하여 유창섭시인이 다시 한번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기성의 이론을 거부하며, 자신의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성의 이론에 대한 거부는 늘 위험성이 따른다. 자신이 채택한 방법론의 실천은 평가에서 네가티브 반응이 나타나기 쉽다. 용기없는 사람은 그래서 자신의 기호를 개발하려 들지 않는다. 항상 하드웨어에 만족하고 그것만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개미는 가장 작은 나무 잎파리 하나의 그늘이면 족하다. 그 잎파리 하나로 나는 한 쪽 눈을 겨우 가릴 수 있지만 그리하여 보는 것의 절반을 잘라낼 수 있지만 가져도 가져도 끝이 없는 가슴 가득 욕심과 버려도 버려도 돋아나는 미움을 버릴 수 없다. 그 가득한 무게로 개미는 밟혀서 죽는다. 존재의 세계에서는 욕심의 무게가 작은 개미는 추락해도 죽지 않는다.
작은 것들의 세계는 언제나 아름답다.
(시『개미는 추락해도 죽지 않는다)전문 (유창섭))
지금 유창섭 시인이 채택한 산문시도 그런 점에서 보면 도전적이고, 모험적이다. 현대 시론의 석학 『S. 엘리어트』도 이미 산문시를 배척적으로 사용한 바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는 짐작가는 일이다. "시의 내용이란 일반적으로 운문으로 표현하는 종류이거나, 당연히 운문으로 표현해야할 종류의 것이거나, 그 어느 편에 속할 것이다. 후자라면 산문시는 배척된다. 전자라면 어느 것은 산문이나 운문 어느 것으로도 표현할 수 있거나 또는 무엇이든지 산문으로도 운문으로도 표현 할 수 있다는 말에 불과하다." (Essays, Prose and Verse. p.84) 그는 산문시를 산문의 형식으로 표현된 시적 내용을 말한다면서 이 같이 피력하고 있다. 시는 운문 쪽이 좋고, 시적 내용의 표현은 운문이 제격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장르 경계나 형식 경계가 중요시되지 않는 시대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시의 형식에 있어서 절대적 기준은 없다. 이는 다른 모든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더욱 더 분명한 것은 자유시는 산문시에 끌리고 있으며, 산문시 역시 자유시의 자장(磁場)에 의해 끌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직 필요한 것은 시적 정신이며, 그 정신을 펴나가는 데에 적당한 방법의 확보인 것이다."
이상에서 필자는 우선 산문시의 시대적 흐름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 보았습니다. 초기에는 자유시의 형태로 인식되었던 산문시가 자유시의 전형에서 떨어져 나와 자유시의 흐름과 병행하면서, 부분적으로는 자유시의 형식을 수용하면서(역으로는 자유시가 산문시의 형식을 수용하면서) 산문시가 그 경계를 무너뜨리고 시적 정서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며 발전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무엇이 먼저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시인이 자신의 언어를 어떠한 그릇에 담아낼 것이냐를 선택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시의 형식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의 형식 여하에 불문하고 존재 양식으로서의 산문시에 대한 실체적 흐름을 직시하여야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재되어 있는 운율(리듬)이 다르기 때문에 자유시에서의 시적 호흡에 비하여 산문시는 호흡이 빠르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역시 긴장감도 자유시에 비하여 느리게 구성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일반적 어법으로 시에 존재하는 호흡이나 긴장감이 빠르다든가 강하다든가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좋다는 기준은 없습니다. 다만 그러한 것을 어떻게 장치하여 읽게 할 것인가에 따라 시가 주는 정서적 흐름이 상당히 달라진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산문시는--모든 산문시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일반적으로 자유시에 많이 나타나는 압축이나 팽팽한 긴장감이 크게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문시에서는 그 압축이 행간에 위치하여 그 호흡을 길게 잡아주는 형식으로 비쳐지고 있으며, 시적 정서가 매우 속도감 있게 읽혀지는 속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시에서 드러낼 수 있는 효과와 산문시에서 드러낼 수 있는 효과를 적절하게 혼합하여 정서적 깊이나 울림을 전체에 고루 가져가기 위하여, 최근에는 순수한 산문 구조에 자유시의 형식을 접목시킨 형태로 글을 쓰는 예가 많이 발견됩니다. 바로 구조적인 경계(각각의 형식적 영역)가 무너지고 새로운 혼합적 형태의 시 형식으로 발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옳다 그르다 판정하려 들지 말고 자신의 시를 씀에 있어 시인이 스스로 자신의 글에 맞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우리 시의 발전을 위하여 올바른 자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산문시에 들어있는 내재율이란 대체로 하나의 문장에 걸쳐 존재하는 흐름을 가지는데 비하여 자유시의 경우에는 각 단어 또는 각 소절마다 리듬이 존재하게 되는 차이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산문시에 흐르는 시의 내재율은 시인 자신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커다란 흐름의 파장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산문시는 이렇게 쓰는 것이다" 라는 모범답안은 없습니다. 그것은 몸으로 느껴지고 체험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꼬집어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산문시에는 그 만의 내재율이 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보들레르의 말에 나타난 의미처럼 "산문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떤 정서적 양식"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산문시를 압축하여 행가름만 하면 자유시가 되는 것이 아닌 특별한 것이 산문시에는 있는 것입니다. 그 형식에 담아야만 하는 자유로움이 있는가 하면, 그 형식에 담으면 자유롭지 않은 속박이 느껴지는 시—자유시가 양쪽이 모두 열려 있는 형태라면 산문시는 어느 한쪽은 닫혀 있는 시 형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운위되는 자유시에서의 압축도 산문시에서는 행간에 위치한다기 보다는 행간에 은유적으로 존재하는 형식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미묘한 차이에 대해서는 직접 시를 쓰는 시인 자신이 스스로 어떤 형식이 좋을 것인가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 좋을 것인지 숙고하여 시의 그릇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입니다. (*) |
첫댓글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