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 화성(水原 華城)의 역사
* 수원 화성에 담겨있는 역사를 4편의 시로써 압축하여 표현하였다.
-수원화성 1_팔달산에 오르며 ; 수원화성 시설의 대강을 언급하고, 수원화성을 돌아 보는 역사적 감회를 표현한다.
-수원화성 2_ 임오화변, 정조의 효성 ;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간의 임오화변 비극의 그림자를 보고, 아버지 능을 화성 인근에 천장하고 능행하는 정조의 효성을 본다.
-수원화성 3_ 정조와 홍국영 ; 정조 세손시에 보호했던 홍국영 개인의 현우흥망을 본다.
-수원화성 4_정조와 정약용 ; 실학자 정약용의 화성축조 기여와 고난을 본다.
이재익 ; 시인, 전부산남일고 역사교사
[역사시]
수원화성 1 -팔달산에 오르며 이 재 익
팔달산에 오르면 효원(孝原)의 종(鐘) 하나에 효도, 둘에 화목, 셋에 소망을 비네.
팔달문은 장중하고, 서장대는 일망무제라 방화수류정은 아름답고 경쾌하구나.
가교일주에 완연한 그 자취 노여움, 원망, 지성(至誠)도 서렸어라 옹성의 실사구시는 세월에 바래지 않으리.
성문은 천년회포를 품었건만, 무심한 돌에는 이끼만 끼네 회억의 발길 멈춘 이 그 몇몇이었던가 원로의 지학인(志學人)도 옷깃을 여미네.
[도움글] ; 수원화성 시설의 대강과 역사유적 둘러보는 감회
•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 1997년 한국 5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 서쪽 팔달산 공원은 화성의 서장대가 있는 곳이다. 두 곳 큰 지휘소가 서장대와 동장대이다. 오늘날 팔달산 공원에는 수원시에서 정조가 부 사도세자에게 효심을 보였던 것을 기념하여 효원의 종을 만들어 달았다. 누구나 세 번 칠 수 있다. 효도, 화목, 소망을 빌면서....
• 수원화성은 채제공, 조심태 등이 1794~1796년에 약 3년간 축성하였다. 4대문과 수많은 유적이 잘 남아 있다.
• 정약용도 수원성 축조에 적극 기여하였다. 성설이라는 설계지침을 만들고 활차와 거중기를 만들어서 공사에 사용하였다. 화포 공용화기 방어구조 등 동서양의 과학을 통합한 건축물이다.
• 전통적인 우리 성 + 중국의 성 + 일본의 성 + 서양의 성곽까지 참고하여 새로운 개념의 성을 설계하였다.
• 여기에는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간의 깊은 불신으로 영조의 노여움과 사도세자의 한(恨), 정조의 부(父) 사도세장에 대한 지극한 효성(至誠)이 서렸다.
수원화성 2 -임오화변, 정조의 효성 이 재 익
붉게 타는 철쭉은 천년 한을 태우듯 자효의 상실, 그 부자의 심연을 의절(義絶)한 후 사도(思悼) 라니 허망도 하구나 .
임오 삼복에 탔던 목, 물 듬뿍 차려 제사지내 위로하네.
배봉도 명당이어널 화산으로 옮겼던 님 주교(舟橋)를 건너며 마음 먼저 달려가고 능역의 송충이도 꾸짖고 씹었네.
뒤돌아보고 또 본 지지대 어디런가 중흥의 큰 뜻 두고 몸이 먼저 갔구나.
[도움글] ; 비극의 임오화변 (1762) , 정조의 효심과 능행
• 사도세자는 영조의 제2자로 이복형 효장세자가 요절하자 세자에 책봉되었고, 15세에 대리기무를 보았다.
• 김한구, 홍계희, 윤급 등이 윤급의 종 나경언을 시켜 세자의 비행 10여 가지를 들추어 상변하였다.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사도세자와도 의절한 후 뒤주 속에 넣어 죽였다.
• 영조는 곧 뉘우쳐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뒤에 장헌(莊獻)(정조)→ 장조(莊祖) (고종)로 추존 되었다.
• 오늘날 그 문제의 뒤주가 외가쪽으로 전해내려 오고 삼복더위에 목이타서 죽었음을 감안하여 큰 그릇에 물은 덤북 담아서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한다.
• 사도세자 능은 원래 양주 배봉산에 있었다. 정조가 사도세자 능을 수원화성으로 천장한 것은 부의 한을 위로하려는 효심에서였다.
• 정조의 화성 축조 의도는 정치적 군사적 기능도 부여하고, 상공인을 유치하여 경제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천도도 고려했다.
• 정조의 화성 행차시 한강에 주교(배를 연결한 다리)를 놓아 건넜고, 일반 백성과 접촉, 정치에 반영하기도 했다.
• 정조의 효심은 부왕의 능역에 송충이도 잡아 씹었고, 돌아갈 때 뒤돌아보며 행차가 늦어진 고개에 지지대비(遲遲臺碑)가 있다.
수원화성 3 -정조와 홍국영 이 재 익
시강원 홍설서는 순간적 재치로 세손을 곤경에서 구하고 세손 보호하기를 불씨 보존하듯 하였다.
영명한 군주의 탄생이 한 신하의 재치와 헌신에 있었고, 거병범궐 아니거든 용서하마 언약하니 군신간에 이보다 아름다운 사연 또 있었을까?
군주가 고갱지신을 잊은 개자추 고사도 있고, 신하가 군주 은덕을 망각한 예도 있나니, 홍도승지 사적은 후자로다 도승지, 숙위소 대장을 한 몸으로 겸직하고 고상에 앉아 턱으로 세도하다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갔으니.....
현명하였거든 어리석지나 말든지 현우미추(賢愚美醜)를 분출함이 바람의 전설 같았다.
[도움글] ; 홍국영의 공헌, 세도와 몰락
• 사도세자는 영조의 제2자로 이복형 효장세자가 요절하자 세자에 책봉되었고, 15세에 대리기무를 보았다.
• 김한구, 홍계희, 윤급 등이 윤급의 종 나경언을 시켜 세자의 비행 10여 가지를 들추어 상변하였다.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사도세자와도 의절한 후 뒤주 속에 넣어 죽였다.
• 영조는 곧 뉘우쳐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뒤에 장헌(莊獻)(정조)→ 장조(莊祖) (고종)로 추존 되었다.
• 고갱지신 ; 춘추시대 진문공이 곤궁할 때 자기 허벅지살을 베어 먹인 충신 개자추 고사.
• 설서 ; 도서관리원, 홍설서는 세손을 보호한 홍국영.
• 정조가 세손 시에 조부 영조에게 문안 인사를 갔다. 읽고 있는 책에 관을 하문을 받았다. 영조는 어머니의 천한 신분 출신에 대하여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에 관한 것이었다. 세손은 얼떨결에 ‘그 대목을 가려두고 보지 않습니다’. 라고 거짓말을 했다.
• 영조는 사람을 시켜 책을 가져오게 하여 확인하려 하였고, 도서 관리 직책을 맡은 홍국영이 그 책의 해당 부분을 가려서 보낸 기지로 세손(뒤의 정조)은 위기를 모면했다.
• 세손은 홍국영을 신임하였고, 홍국영은 전심전력으로 정조의 신변을 보호했다.
• 정조 즉위 후 홍국영은 도승지와 숙위소 대장을 겸하며 큰 세도를 부렸다. 총명이 차츰 흐려져서 마침내 씻을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화병에 결려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는 현우미추(賢愚美醜)를 모두 분출시킨 혜성같이 나타나서 바람같이 사라진 인물이었다.
수원화성 4 -정조와 정약용 이 재 익
정조와 다산은 이이 학설을 매개로 사상과 배포가 서로 맞았으니, 위대한 군주와 학자의 만남이로다.
다산은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새로운 개념의 성을 설계하였고. 거중기 신기구를 만들어서 직접 사용한 위대한 실학의 구현자.
임이 알아줄 땐 돌덩이에 혼을 심던 이 임 가시고 초색도 병들자 다산 초당 영어 18년 그 오롯한 그리움을 치마폭에 매조화(梅鳥畵)로 달랬다.
-내 저술 알아주거든 부모처럼 대하라! 하였으니, 역사 속에 한 선각자의 고난은 민족에는 축복이 된 전화위복, 화성과 여유당전서 문화유산이 이렇게 탄생하였다.
[도움글] ; 정약용의 영광과 고난
• 정조와 다산의 만남 ; 정조가 성균관 학생들에게 중용에 관한 문제를 냈는데, 다른 유생들은 이황적 학설 경향인데, 다산 정약용만이 율곡 이이의 이론적 경향으로 답을 해서 정조와 학문적으로 상통했다.
• 수원화성 축조에 공학 기술적으로 기여한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의 최고봉이었다. 정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정조 사후에는 바람막이가 없어지자 천주교 신앙문제로 18년간 강진 등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적 ; 다산초당)
• 부인이 비단치마를 보내서 위로했다. 정약용은 그 치마폭에 그림을 그려서 집으로 보내어 가족을 위로했다. 그때의 매조도(梅鳥圖)에는 유배지의 곤궁함, 자식 사랑과 그리움이 절절하다.
• 유배지에서 학문에 전념하여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 등을 포함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니, 그의 저술 일체를 여유당전서라고 한다. 저술에 대한 자부심으로 아들에게 일렀다. “내 저술을 알아주면 부모로 섬기고, 원수라도 형제와 같이 정의를 나누라”고. 이런 정약용의 영광과 고난이 수원화성에 다 어려있다.
수원 화성 역사탐방
수원 화성 일주도
수원 화성 4대문
팔달산 ; 서장대와 효원의 종, 화양루 기타
화성의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
화성의 동장대, 성문 통로
화성의 포루, 공심돈 등 각종 방어시설
화성의 각종 암문(작은 통행문)들
화성의 치성, 적대, 봉화를 올리는 봉돈
화성 행궁 ; 정조 능행 후 임시 숙소, 보존된 거중기 모형도
사도세자능인 융릉과 정조릉인 건릉 일원, 용주사, 지지대비
◈ 탕평책 (蕩平策) , 탕평비 :
영조가 성균관 입구에 세움
정약용 유배시 가족에게 보낸 작품
수원 화성에서 이 재 익 (시인, 전부산남일고 역사교사)
<제목 차례> ▣ 수원화성 역사시를 짓다 / ▣ 팔달산 효원의 종 / ▣ 41개소 시설로 복원 정비 / ▣ 수원화성 주요 시설들 / ▣ 임오화변 (壬午禍變) / ▣ 정조와 홍국영 / ▣ 정조와 정약용 /
▣ 수원화성 역사시를 짓다
수원화성은 경기 수원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성곽(사적 제3호)으로 1997년 우리나라에서 5번째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로부터 지정된 역사유적이다. 나는 여기를 두 번 답사하였다. 그것은 1998년 K상고 2학년부장으로 애기봉(愛妓峰), 강화도 일원→ 도라 전망대, 제3땅굴→ 수원성, 에버랜드, 영릉→ 충주댐, 탄금대, 문경새재 등의 코스로 3박4일의 수학여행을 추진하면서 1998년 5월 23일에 수원성의 전 코스를 사전 답사하였고, 6월 10일에는 실제로 학생들을 인솔하여 수원성의 팔달산공원에 올랐다. 지금까지 수학여행 코스에 수원성을 넣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수원성을 한 바퀴 다 돌아보았지만 수학여행단의 차량을 주차할 공간이 없어서 같이 간 행정실 신주임을 다방에 기다리게 하고는 팔달산공원으로 다시 올라가서 산복도로 강감찬 동상 앞에 주차하면 되겠다고 보아두었다. 나중에 학생들을 인솔해 왔을 때는 관광버스 기사도 진입로를 몰라서 내가 택시를 타고 선도하여 인도하였다.
성곽은 도로로 인하여 군데군데 끊어져 있어 종전에는 답사하기 여간 번거롭지 않았으나 유네스코에 지정된 이후로는 도로 위에 모두 가교(架橋)를 놓아 연결되도록 하였고 수문장 겸 안내원도 몇몇 배치해 두고 홍보도 하고 있었다.
사전 답사 시에 나는 틈을 내어 인근의 K대 수원 캠퍼스에 가서 아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마침 축제 중이라 동아리 활동으로 음료수 장사를 하고 있어 찾느라고 애를 먹었다 이것을 계기로 나는 '수원 화성Ⅰ,Ⅱ,Ⅲ,Ⅳ' 라는 네 편의 연작 詩를 지었다. 이 시는 Ⅰ-수원성을 돌아보며 역사적 사념에 젖고, Ⅱ-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임오화변과 정조의 능행, Ⅲ-세손을 보호한 홍국영과 정조의 연연, Ⅳ-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를 만들어 축성에 기여한 정약용의 인간적 고뇌 등을 회상하며 쓴 시이다.
▣ 팔달산 효원의 종
수원화성의 서쪽 부분인 팔달산(팔달공원) 정상에는 효원의 종이 매달려 있다.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부(父)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을 생각하며 효도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최근에 만들어진 종이다. 이 종은 누구나 3번씩 칠 수 있다. 제1타종은 부모님의 은혜에 효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치고, 제2타종은 가족의 건강과 화목을 소원하고, 제3타종은 자신의 발전과 소원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종이다.
수원성의 축조는 정조대왕이 생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비롯되었다. 정조 13년 1789년에 원래 양주 배봉산 기슭에 있던 사도세자의 능을 구 수원읍인 화산(花山) 기슭으로 옮기고(현륭원, 顯隆園, 또는 융릉) 구 수원읍 주민을 모두 팔달산 아래로 고을 전체를 옮기면서 여기에 성곽 계획도시를 장엄하게 건설하였다. 이때 나라에서는 금 10만 냥의 재정을 썼고 새 수원의 주민들에게는 10년간 면세하였다. 성역의 노동력은 강제로 동원되는 부역이 아니라 임금을 지불하였고 돌이나 재료도 그 값을 지불하였다.
새 수원을 건설한 목적 중에는 전국 거상을 수원에 거주케 하고 육의전의 특권을 부여, 신흥 상인을 보호 육성하여 상권과 경제적 확보에도 그 목적이 있었다. 수원 화성은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정조18년) 1월부터 1796(정조 20년) 9월 까지 약 3년 동안에 축성을 하였다.
수원 화성 축조시 건축일지라고 할 수 있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는 완벽한 보고서가 남아있다. 성곽의 여러 부대시설의 형태와 사용한 기구들을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렸고, 목적, 기간, 공사과정, 들어간 물자와 비용, 감독관과 말단 장인에 이르기까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요사이 부실공사를 막기 위해 건축실명제가 논의되고 있는데 그 당시에 어떤 부분은 누가 쌓았다는 건축 실명제가 도입되었으니 그 기록정신은 가히 놀라우며, 현장의 생생한 숨결을 그대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화기에 대한 공격과 방어에 대처할 수 있는 과학적인 설계로 성곽의 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가장 근대적인 규모와 기능을 갖춘 성곽이었다.
우리나라 성곽은 기원전 1세기 왕검성이 기록상 가장 오래다. 행주성에서 보는 목책성, 풍납토성, 북한산의 산성, 서울의 도성, 서산의 해미읍성 등 지형을 잘 이용하여 서로 혼재 보완적 기능을 하여왔다. 이러한 성들은 호국의 의지나, 통치의 원활을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 졌다. 고려 말 왜구가 창궐하자 읍성이 만들어졌고, 실학자 반계 유형원이 읍성의 강화를 주장하였는데 그것이 18세기에 적극 반영되었다. 수원화성은 산성과 읍성의 혼합인데 가히 성곽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서양 과학의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만들었다. 거중기는 높이 4.4m 길이 7.2m 폭 1.7 m 정도이고 1개 가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양쪽 15명씩 붙어서 7.2톤의 돌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1인이 240kg을 든 셈이다. (40근의 힘으로 2만 5천근의 무게를 움직일 수 있다) 활차는 조그만 돌을 운반하는 것으로 소 한마리가 끄는 것이고 도르래를 이용한 녹로는 크레인역할을 하였다. 수원화성은 정조가 꿈꿔온 이상적인 신도시를 세우고자했던 계획도시였다.
▣ 41개소 시설로 복원 정비
일제와 6.25로 많이 훼손된 것을 1971-1978 사이에 복원하였다. 당초 성곽의 시설은 4대문을 비롯한 장대 2, 공심돈 2, 포루 8, 각루 4, 수문 2, 암문 5, 치성 10, 봉돈1 등 총 48개 시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41개소가 보수 복원되었다.
성(城)의 둘레는 5,4m, 타원형으로 한 쪽은 산성 한 쪽은 평지성, 읍성의 형태를 지형에 따라 잘 이용하였으며 과학적이고 완벽하다. 성의 평균 높이는 5m정도이다. 통치자의 실험적이고 개혁적인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고고하고 아름다운 자태는 도시속의 공간에서 현대와 함께 호흡하는 슬기를 보여 주고 있다.
도보로 3시간 내외가 걸린다. 일주 코스는 시계 방향으로 다음과 같다. (1)팔 달문(八達門)→(2)남포루(南砲樓)→→(3)화양루(서남각루)→(4)서남암문→ (5)서포루→ (6)서암문→(7)효원의 종, 서장대(西將臺), 서노대→ (8)서포루(西砲樓)→ (9)서북각루→(10)화서문(華西門)→(11)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12)북포루→(13)북서포루(北西砲樓)→(14)북서적대-(15)장안문(長安門)→(16)북동포루→(17)화홍문(華虹門)→(18)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동북각루)→(19)북암문(北暗門)→(20)동암문→(21)동장대(연무장)→(22)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23)동북노대→(24)창룡문(蒼龍門)→(25)동포루→(26)봉돈→(27)동남각루→수원천, 지동시장
▣ 수원화성 주요 시설들
□ 수원화성의 4대문은 팔달문(八達門 남문), 창룡문(蒼龍門 동문), 장안문(長安門, 북문), 화서문(華西門 서문)이고 모두 옹성(甕城)이 있다. 옹성이란 성문에 접근한 적군을 옆이나 뒤쪽에서 공격하기 위해 성문앞쪽으로 길게 반원형으로 성벽을 빼낸 것이다. 남대문인 팔달문과 북대문인 장안문은 서울 4대문을 본 따서 우진각 지붕에 장중한 모습이다. 그러나 다른 점은 그 규모가 서울의 것 보다 크고, 서울에는 없는 옹성이 있다. 옹성에는 오성지라 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에게 끊는 물을 흘려보낼 수 있는 5개의 작은 구멍도 있다. 남북의 대문과는 달리 동서의 대문은 격을 낮춰 규모가 작다.
□ 장대(將臺)는 2곳이 있다. 팔달산 정상의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 서장대는 수원화성 총지휘본부이다. 서장대는 수원시내 어디서나 보이는 곳에 위치하여 있어서 화성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평지의 동장대에는 연무장으로 군사훈련 지휘소였다.
□ 노대(弩臺)는 2곳인데 누각이 없이 적의 동향을 살피고 쇠뇌를 쓸 수 있는 단(壇)이다. 서장대와 동장대에 있다. 서노대는 8각으로 서장대 뒤에 있고 동북노대는 전돌로 쌓은 모서리를 죽인 네모꼴이다.
□ 적대(敵臺)는 성문에서 좌우로 80 여 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높은 대를 마련하여 창이나 활 화살들을 비치해 두고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다. 북동적대 북서 적대 2곳이 있다.
□ 각루(角樓)는 4개소가 있는데 각루는 정찰 군량운반 통로등의 용도이고 원거리 전망이 좋은 성곽의 모퉁이 요소에 자리하고 있다. 팔달산의 서남각루(화양루)는 이 성을 찾는 이로 하여금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 긴 회랑으로 들어가면 아늑한 잔디밭 공간이 있다.
동북각루는 그 명칭을 송나라 정명도의 시에서 따와서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으로도 불리는 정자이다. 성의 북벽에 있고 뾰족한 언덕의 최상부에 높은 축대와 긴 기둥으로 올려지어 마치 공중을 날아가는 듯이 경괘하고 아름답다. 지붕이 여러 겹으로 처리되어 건축미가 화려하면서 우아하고 그 아래에 용연이라는 연못이 있어서 화성의 아름다움의 절정에 이르는 곳이다. 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보는 용연의 달빛과 어우러진 버들가지를 '용지 대월'이라 하여 수원팔경의 하나이다.
□ 수원화성에는 수원천이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고 있어서 남북으로 수문이 두 곳 있었다. 방화수류정 부근에 있는 북쪽 水門인 화홍문(華虹門)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수문이 7개 있다. 남수문은 없어졌다. 수문아래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는 '화홍관창' 이라 불리는 또 하나의 수원팔경이다.
□ 공심돈(空心墩)은 원통형 망루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로 2곳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동북공심돈인데 벽돌을 이용하였으므로 둥근 곡선 건축이 가능하였고 보기에도 아름답다. 내부의 계단은 나사처럼 돌아올라 소라각 이라고도 한다. 최상부엔 바짝 엎드린 듯 한 누각이 있다. 서북공심돈은 하반부는 큰돌로 쌓았고 상반부는 전돌로 쌓았다.
□ 암문(暗門)이란 적의 몰래 드나드는 비밀 통로 격으로 5곳이 있다.
□ 봉돈(烽墩)은 5개의 화두를 가진 전돌로 아름답게 축조된 봉수대로 정찰과 정보전달의 군사적 상황을 알리는 시설이었다. 육지로는 용인의 석성산 육봉과 연락하고 바다로는 흥천대의 해봉과 연락하였다. 해봉은 너무 멀어 화성 서쪽 서봉산에 간봉을 두고 연락을 중계하였다.
□ 치성(雉城, 성가퀴)은 8개소가 있는데 성벽 앞으로 凸모양으로 튀어나와 전방과 좌우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사용되며 성벽을 견고하게 보호하는 기능도 하였다.
□ 포루(砲樓)는 5개소가 있는데 치성과 같이 돌출시켜 중화기를 배치하는 요새이다. 바닥부터 벽돌로 쌓았으며 최상층에는 지붕만 보이게 덮었다. 같은 발음의 포루(鋪樓)는 군사들을 엄폐하기위하여 성 밖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위에 설치한 2층 누각 건물이며, 건물에도 총안(銃眼, 총구)이 있다. 성위에서 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낮은 담장을 여장이라고 한다.
▣ 임오화변 (壬午禍變 )
영조는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세우고 탕평책 (蕩平策) 을 썼으나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당쟁에 말려든 것 같다. 사도세자(1735~1762)는 조선 제 21대 영조의 제2자로 이복형 효령세자(孝寧世子)가 요절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1749년(영조 25) 영조의 명을 받고 15세에 대리기무(代理機務)를 보았다.
호기심이 많아 지난날의 정쟁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기존 질서에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영조의 후궁 문숙의와 노론 강경파들은 질투심과 두려움으로 견제하던 중 그의 비행을 내세워 모함하였다. 마침내 1761년 임금도 모르게 관서지방을 순행하고 돌아오자 반대파들은 왕세자의 체통을 잃게 했다고 하여 논박하였다.
김한구(金漢耈)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洪啓禧)․윤급(尹汲) 등은 세자의 장인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크게 세력을 떨치자 홍봉한 일파를 몰아내고 세자를 폐위시키고자 윤급의 종 나경언(羅景彦)을 시켜 세자의 비행 10여 가지를 들어 상변(上變)하게 하였다. 이에 영조는 대로하여 나경언을 참형하고,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한 후 처음엔 칼로 자결을 명하였다. 1762 영조 38년 윤 5월 13~21일 복중에 8일간 뒤주 속에 가두어 죽였다 이것을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 한다. 이때가 영조 69세, 손자인 정조 11세 때이다. 영조는 곧 뉘우쳐 사도(思悼)의 시호를 내렸다. (정조가 장헌(莊獻), 1899년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追尊)되었다.)
영조는 임오화변의 내막에 대한 일체의 기록을 삭제하였고 30 여 년 동안 구구한 억측만이 떠돌았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는 자살을 기도했으나 어린 정조를 위해 목숨을 부지하였고, 뒷날 한중록(閑中錄)을 집필하여 시아버지와 남편사이에서 중립적이며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이 부자의 비극을 기록하였다. 궁중의 법도와 예의를 몸에 익힌 혜경궁은 자기감정을 최대한으로 억제하여 우아하고 세련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어린 사도는 옷을 잘못 입었다고 꾸중을 듣고 옷을 잘 입지 못하였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퇴행적 행위였다. 부모 없이 텅 빈 궁에서 외로운 아이가 병기놀이를 하다가 부왕으로부터 꾸중들은 적도 있었다. 홍릉에 갈 때 큰 비를 만났는데 영조는 세자 탓으로 돌리고 도중에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부왕으로부터의 애정결핍은 세자가 부왕을 두려워하고 정신신경증에 걸렸으며, 학문을 게을리 하고, 여러 가지 파행적 행동이 나타냈다. 왕 몰래 관서지방을 유람하고 오자 문숙의 일파의 모략과 나경언의 고변 등으로 부자는 더욱 멀어졌다.
종래 사도세자의 죽음을 악질과 광행으로 인해 비롯되었고 보았으나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 붕당사이의 정치적 갈등에 희생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정조와 홍국영
영조는 세손(정조)을 어려서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에게 입적시켜 사도세자와 왕세손(정조) 사이의 부자의 인연을 인위적으로 단절시켰다. 어느 때 세손이 조부 영조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뜻밖에도 어려운 국면에 부딪혔다. 여기에서 세손과 홍국영의 인연에 관한 얘기가 전한다.
영조는 요즘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었다. 세손은 『자치통감강목』을 읽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강목라고? 그럼 넷째 권에 내가 달가와 하지 않는 구절이 있는데 너는 어찌 생각하는고?"
그 구절은 한나라 제5대 문제는 자기는 고조의 소실 소생이라고 실토한 대목이다. 영조는 숙원 최씨(최무수리)소생이었으므로 어머니 신분이 천한 것에 콤플렉스(열등의식)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대목은 가려버리고 보지 않습니다." 얼떨결에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영조는 사람을 시켜 그 책을 가져오게 하였다. 세손은 안절부절 하였으나, 세자시강원 도서관리 관원 홍국영이 기지를 발휘하여 그 대목을 종이를 발라 보냈다. "너야말로 진정한 내 손자다."
뜻밖에 칭찬을 듣고 물러 나와서 세손은 홍국영에게 거병범궐(擧兵犯闕)하지 않는 한 어떤 일이고 용서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홍국영은 전심전력을 다하여 정조의 목숨을 노리는 자(노론)로부터 정조를 보호하였다. 정조도 언행의 일거일동을 조심하였다. 몇 달이고 옷을 벗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거나, 외롭고 불안했던 일이 많았다.
영조는 아들 죽인 일을 후회했다. 노론들이 하는 이야기만 듣고 터놓고 이야기 할 시간도 주지 않고 욱박질러 죽였던 것이다. 영조는 세손에게 "김상로 홍계희는 너의 원수다."라고 하였으나 세손은 일체 내색하지 않았다. 또 어떤 영조의 변덕이 나올 찌 몰랐기 때문이었다.
영조는 82세 때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고 83세에 죽으니, 25세의 정조가 즉위하였다. 홍국영은 이때 28세였다. 도승지와 숙위소 대장 등 여러 요직을 겸하였다. 정조는 홍국영에게경의 말이 곧 내말이라 하며 홍국영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총명하고 겸손하던 홍국영은 차츰 사람이 달라져갔다. 숙위소 높은 평상에 앉아 턱으로 대감들을 이래라 저래라 하며 거드름을 피웠고, 영화를 무궁토록 보전할 궁리도 해보았다. 누이동생을 후궁 '원빈' 으로 들였으나, 불행히 1년도 못되어 죽었다. 아직 정조에게는 소생이 없었다. 홍국영은 누이 원빈의 양자 들이는 문제를 정조에게 진언하였다. 홍국영의 의도는 그 양자를 세자로 삼아 지금 누리는 권세를 영영 보장받아 보려는 속셈이었다. 정조가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1780년 왕비 김씨가 앞서 원빈을 살해한 것으로 믿고 왕비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가 발각되었다. 정조는 조용히 그를 불렀고 홍도승지의 속셈을 다 알고 있었다. 홍도승지는 사태를 직감하고 사죄하였고, 지난날 정의를 생각하여 홍국영이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홍국영은 물러나 근신하였으나, 권세가 다하자 중구난방으로 탄핵을 받아 재산은 몰수되고 전리방귀(田里放歸 ; 시골추방)되었다. 강릉의 신세 진 사람이 그를 잘 모셨으나 물러 난지 8개월 만에 마음의 병을 얻어 나이 33세의 아까운 나이에 죽었다. 인간의 마음 내면의 현우미추(賢愚美醜)를 단기간에 그렇게 잘 보여주고 바람처럼 사라진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능행(陵幸)을 자주 하였으며 부친 능의 소나무에 송충이를 잡아 씹어 먹는 효성도 보였다. 그도 유언에 따라 부친의 릉 옆에 묻혔다.(건릉 健陵)
▣ 정조와 정약용
정약용(1762~1836)의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호는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 등....., 조선 후기 실학 최고봉의 학자다. 그의 아버지 정재원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는데 정조가 새 임금으로 등극한 후에야 정조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다시 올라가서 복직이 되어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었다.
다산은 영조 38년(1762) 사도세자가 참변을 당한 그해에 광주(廣州)에서 태어났다. 어쩌면 그의 환생이었을까? 정조는 이 다산을 특별히 총애하였다. 다산은 23세에 회시에 합격하고, 다음 해에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정조에게 중용을 강의하였다. 회시 합격자는 생원 진사인데 큰 벼슬에 나아가려면 대과를 보아야만 하였으므로 이것은 특별한 은전이었다. 정조가 율곡의 <사단기발설 ; .四端氣發說>을 지지하여 <四七續編>이란 논문을 집필한 후에 성균관 학도들의 견해를 알고 싶어 성균관에 시험문제를 보냈는데 학생들이 모두 시류에 따라 퇴계의 학설을 따랐는데, 오직 정약용만이 율곡의 학설을 지지하여 답안을 작성했으니, 의기투합하고 상통하였던 것이다. * 이 부분은 신용하,「다산 정약용의 사회사상」,『조선후기 실학파의 사회사상연구』,지식산업사,1997. 참고.
다산은 뒤에 대과인 식년문과 갑과에 합격하였다.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 보고 그의 학문에 감동되었고 이벽(李蘗)으로부터는 서학(西學, 천주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산의 생애는 초기의 사환기(仕宦期, 벼슬기)와 후기의 유배기(流配期)로 나눌 수 있다. 정조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으며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천주교인이라 하여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당시 30세였던 정약용은 왕실서고 규장각에 비치된 첨단서적을 섭렵, 전혀 새로운 개념의 성을 설계했다. 정약용이 활차와 거중기를 설계해 공사에 직접 사용하였고, 평지성과 산성을 합친 전통적인 우리 성, 중국성과 서양성까지 참고했다. 수원성은 근대 초기의 동서양의 과학을 통합 발전시킨 건축물이다.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 등에 연루되어 좌천, 외직, 복직, 사임 등을 거듭했다. 그를 아끼던 정조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다산은 정치적 역경 속으로 내몰렸다. 천주교 신봉으로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로 유배되고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어 18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정약용과 천주교에 관해서는 이벽 이승훈 등 98인 시복문제로 교계 학계 논쟁이 있었다.(1984.9.6 동아일보 참고) 謚福이란 카톨릭에서 성인 다음 중요한 반열에 올리는 것을 말한다. 영남대 정석종 교수 ; 신유박해 당시 다산을 심문한 기록에 '정약용을 계속 추궁하니 그의 실토하는 바가 문서에 나타난 것과 꼭 들어맞았고 천주교 신자들의 체포방략도 그가 밀고 하였아온 바...' '친형 정약종(사형)에게 보낸 편지에 ‘나에게 천주교를 믿으라고 하면 칼로 형을 찌르겠다.' 라는 사료를 통해 정약용의 시복문제를 반대하였다.
신용하 교수도 그의 『조선후기 실학파의 사회사상연구』에서 정약용이 1822년 회갑을 맞이하여 <자찬 묘비명>을 짓고 <遺令>이라는 제목의 아들에게 남긴 정약용의 유언장을 보면 종교적 의식이 특징적으로 부각되는 장례절차에서 정약용은 완전히 기본적으로 가장 고전적인 간소화된 유교 절차에 의거하도록 유교식 장례를 명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한 지 몇 해 후 부인 홍씨가 외로운 남편을 위로하고자 해진 치마 6폭을 보내왔는데, 그대로 본관 너무 오래 되어 붉은 색이 다 바랜 것이었다. 그것을 오래 간직해 두었다가 유배생활 13년째 되던 해 여름에 그것을 꺼내어 그림을 그렸다. 위쪽에 매화꽃 핀 나뭇가지에 참새 두 마리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시 한 편과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이 적혀 있다. 이것이 고려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매조도(梅鳥圖)(또는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1813) 이다.
부인의 치마를 오려서 족자 4폭을 만들어 두 자식에게 주고 또 그 나머지로 이 매조도를 그려 딸아이에게 전한다는 사연이다. 유배지 삶의 곤궁함과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있다. 그가 지적한데로 당시 사회는나뭇가지 하나 풀 한포기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는 난세를 맞아 비록 학문적 근거는 유교적인데 두었으나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개혁사상을 가지고 많은 저술을 하였다. 그는 두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내 저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이가 많으면 부모로 섬기고 혹시 원수사이라도 형제와 같이 정의를 나누라"
끝 여기까지 오셔서 감사합니다. (이재익)
수원화성 시설물에 대한 설명, 정보가 더 필요하신 분은 사진은 동일합니다. 둘러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http://skji.hihome.com/t_kiho/suwon/sw_s.htm |
첫댓글 虐政(?)의 글재주는 참 대단한것같다 . 나같은 막 노동꾼에겐 참 아득함 마저든다 .그래도 어쩌나 무지함을 깨우게 계속 많이 올려 주게나 .
너무 과찬입니다. 읽어 주어서 감사합니다. 참, 학정은 배울학, 정자 정(學亭)이지요. 전에 우리 동료가 내게 지어주었어요.
ㅎㅎㅎㅎㅎ 아이다 내만 그렇게 부를란다 .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