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까지 삼귀의 가운데 불보와 법보에 대한 귀의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승보에 대한 귀의의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승보라고 하면 우리는 스님을 생각합니다. “스님이 곧 승보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스님이 승보입니다. 그러나 스님 개개인이 승보는 아닙니다. 불보가 부처님을 의미하지만 부처님 개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참 모습을 의미하듯이 승보는 스님을 의미하지만 스님 개개인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선 귀의승(歸依僧)이라고 할 때의 승이 어떤 말인지 알아봅시다. 승이라는 말은 범어 sangha를 음사한 것입니다. ‘상가’를 소리나는 대로 ‘승가 (僧家)’라고 한자 표기했고, 여기에서 ‘가’가 탈락하여 간단히 ‘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상가의 뜻은 원래 모임이나 집합을 의미하는 것인데, 인도에서 출가수행자들이 나타나 집단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들의 집단, 즉 교단을 상가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또 같은 목적이나 이념으로 살아가는 사회공동체를 상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절을 ‘가람’ 이라고 부릅니다. 이말도 상가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인도에서 출가수행자가 교단을 이루어 살아가기 시작한 초기에는 지금의 사찰과 같이 크고 많은 건물이 없어서 공원이나 큰 정원과 같은 곳에 수행자들이 모여서 살았습니다. 인도는 날씨가 덥기 때문에 집이 없어도 나무 밑이나 동굴 같은데서 수행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출가 수행자들이 집단을 이루어 머물고 있는 곳을 sangha- arama, 즉 ‘상가의 공원’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라마’는 정원이나 공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상가 아마라’ 라는 말을 중국에서 ‘승가람’이라고 음사했고 여기에서 ‘승’이 탈락하여 ‘가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귀의승이라고 할 때의 승은 ‘상가’, 즉 불교 교단을 의미합니다. 스님들을 ‘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가’에 속한 사람, 즉 승려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릅니다. 스님을 의미하는 ‘승’은 승려에서 ‘려’가 탈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함경>에 보면 처음 불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부처님 앞에서 귀의의 서약으로 삼귀의를 할 때 “비구승에게 귀의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승보는 비구스님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요즈음은 스님 가운데 비구스님도 있고, 대처스님도 있기 때문에 <아함경>의 ‘비구승’을 대처가 아닌 비구스님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모두가 비구스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함경>에서는 스님을 그냥 ‘비구’라고 부르지 ‘비구승’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비구승에게 귀의한다’고 하지 ‘비구에게 귀의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아함경>에서 말하는 비구승은 bhiksu-sangha, 즉 비구들의 교단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승보’의 의미는 불교의 긴 역사를 통해 그 의미가 확대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비구의 교단’을 의미했던 것이 여인의 출가로 인해 비구니도 승단의 일원이 되었고, 대승불교의 발흥과 더불어 재가신도도 ‘승보’에 포함되게 됩니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사부대중이라고 하는데, 사부대중이 곧 ‘승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집단이 계율을 지킬 때 ‘승보’가 된다는 점입니다. 승보가 불교교단, 즉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면서 살아가는 공동체를 의미한다면, 승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공동체에는 규율이 있습니다. 우리가 조그마한 친목계나 어떤 모임을 만들어도 거기에는 회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회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그 모임의 구성원이 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교단을 이끄시면서 교단의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계율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은 단지 불교교단을 유지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음에 근거를 두고 만드신 것입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신 목적은 모든 중생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복은 우리의 참모습과 이 세상의 존재원리를 알아서 이에 따라 살아갈 때 실현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정하신 계율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참모습과 세상의 존재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제 계율을 살펴봅시다. 불교의 계율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근본은 오계(五戒)와 십선계(十善戒)입니다.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망어(妄語), 음주(飮酒) 이 다섯 가지를 금하는 것이 오계(五戒)이고,
이 오계를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으로 나누어
몸으로 짓게 되는 신업(身業) :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세 가지를 금하고,
입으로 짓게 되는 구업(口業) : 거짓말(妄語), 꾸며대는 말(綺語), 이간질하는 말(兩舌), 욕설과 같은 사나운 말(惡口), 네 가지를 금하고
마음으로 짓는 의업(意業) : 탐욕스러운 생각(貪愛), 성내는 생각(瞋恚), 어리석은 생각(癡暗)의 세 가지를 금하는 것이 십선계(十善戒)입니다.
이들 계율을 살펴보면 우리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은 우리가 모두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함께 연기(緣起)하고 있는 한 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같은 연기법(緣起法)의 진리에서 본다면, 살생은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 되고, 거짓말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그러합니다.
신구의 세 가지 업(身口意 三業)이 축적되어 에너지를 가진 업력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업(業)의 훈습(薰習)은 거듭되어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로 만들고 심지어는 사람의 얼굴, 생각마저도 그 업의 훈습에 따라 변하게 된다. 《초발심자경문》에 “선남자, 선여인들에게 세 가지 법이 있다면 진리의 도량에 이르게 되나니 그 세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신체의 청정(身淨)이요, 둘째는 입의 청정(口淨)이요, 셋째는 생각의 청정(意淨)이다. 이 세 가지 법을 갖추면 부처님의 도량에 이르게 된다. 몸을 가벼이 움직이지 않으면 산란한 마음을 다스려 선정(禪定)을 이루고 말이 적으면 미혹을 돌이켜보아 지혜를 이룬다.
실상(實相)은 언어를 떠난 것이며 진리는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입은 모든 화근의 문이니 반드시 엄하게 지키고 몸은 모든 재앙의 근본이니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 자주 나는 새는 그물에 걸리기 쉽고 가벼이 날뛰는 짐승은 화살을 맞을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설산에서 6년 동안 앉아 움직이지 않으셨고 달마는 소림굴에서 9년 동안을 묵언으로 침묵하셨다. 후세에 참선하는 사람들은 어찌 이 일을 본받지 않는가”라고 하여 업을 잘 다스리라고 했다. 신구의 삼업의 구체적인 열 가지 행위를 십악이라 한다. 자기가 짓는 악행의 업을 매일 참회하며 자신이 업의 고통에 스스로 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
살생을 예로 들어봅시다. 살생은 사람을 죽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생명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것이 불살생의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다른 종교에서도 살인을 해서는 안된다는 계율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은 사람을 위해서라면 죽여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다른 동물을 죽여서 제물로 바차기도 합니다. 우리도 대부분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태학자들은 모든 생명체는 먹이 사슬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사슬을 구성하고 있는 한 종류의 생명체가 사라지면 다른 생명체도 모두 죽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라는 연기법이 진리임을 증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살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거짓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남을 속이면 남도 나를 속이게 됩니다. 내가 속이면 결국은 나도 속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과 극락을 가서 보니 지옥이나 극락이나 다를 바가 없더랍니다. 환경도 같고 먹고 입는 것도 같았는데, 지옥의 사람들은 몸이 마르고 눈에는 사나운 독기가 서려있으며 서로 미워하고 경쟁하고 다투며 살고 있고 극락의 사람들은 몸이 윤택하고 눈빛은 자애로우며, 서로 존경하고 도우며 살더랍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을 보고서 그 이유를 알았답니다. 지옥이나 극락이나 모두 모여 식탁 양쪽에 서로 마주보며 식사를 하게 되어 있더랍니다. 그리고 수저와 젓가락이 매우 길더랍니다.
그런데 지옥의 사람들은 긴 젓가락으로 자신의 음식에는 손을 대시 않고 남의 음식을 집어다 먹더랍니다. 앞 사람이 자신의 음식에 손을 대는데 그 사람이 가만있겠습니까? 그 사람은 앞 사람에게 욕설을 하면서 상대의 음식을 집어가고, 이렇게 서로 남의 음식을 탐하다 보니 밥을 먹다가 싸움이 벌어져, 음식은 먹어보지도 못하고 엎질러져 먹을 수 없게 되고, 요행히 젓가락으로 집은 음식도 자신의 입으로 넣으려고 하니 젓가락이 길어서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지를 않더랍니다. 그래서 식사시간이 끝나도록 음식은 먹어보지를 못한 채 서로 싸움만 하다가 나와서는 서로를 원망하면서 반목하더랍니다.
그런데 극락의 사람들을 보니 긴 젓가락으로 자신의 음식을 집어다가 앞 사람 옆 사람의 입에 넣어주면서 좋은 음식을 서로서로 권하더랍니다. 아무도 자신의 음식을 자기가 먹는 법이 없지만 흘리는 음식도 없고 먹지 못한 음식도 없이 배불리 먹고서는 “오늘은 아무개 덕에 식사를 잘했노라”고 하면서 서로 존경하고 친목하더랍니다. 이렇게 되니 지옥에는 원망이 가득하고, 극락에는 존경과 사랑이 넘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 혼자 살려고 하면 나도 살 수 없게 되고, 나 혼자 속지 않으려고 하면 나도 속게 됩니다. 이런 사회에는 원망과 미움과 투쟁이 가득합니다. 반면 남을 살리면 나도 살게 되고, 남을 속이지 않으면 나도 속지 않게 됩니다. 이런 사회는 존경과 사랑과 평화가 충만합니다. 이것이 연기법의 진리에 의해 존재하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부처님의 계율은 이렇게 우리가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삶의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율은 평화와 화합의 길입니다. 승가는 부처님의 계율 아래서 존경과 사랑으로 화합된 평화로운 공동체입니다. 승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이같은 화합된 평화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부처님의 계율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처님은 불교교단이 분열하는 것을 매우 우려하셨습니다. <아함경>에 보면, 그 당시 자이나교의 교주가 죽자 교단이 반목하고 분열하는 것을 보고,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구들이여, 너희는 우유와 물처럼 화합하라.” 우리는 과연 우유와 물처럼 화합하고 있습니까? 우리 사회는 남달리 화합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사상적으로 대립하고 있고, 동과 서가 지역적으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대립은 자신은 옳고 남은 그르다고 하는 편견 때문입니다. 나를 버리면 화합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치게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옛날 어느 큰 절에서 스님들이 공부를 하다가 야외에 소풍을 나갔습니다.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 엄한 절 생활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꼈습니다. 길을 가다 보니 주막이 있었습니다. 일행 중의 한 스님이 주막을 보고 “우리 오랫만에 나왔으니 곡차나 마련해서 먹고 놉시다” 라고 제안을 하니 모두들 그렇게 하자고 동의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스님은 다른 스님들이 모두 동의하니까 반대는 못했지만 속으로는 “술을 마시는 것은 파계인데 이거 큰일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스님들은 주막에서 마련한 술통을 짊어지고 길을 가는데 들에 소가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한 스님이 “안주도 없이 어떻게 술을 먹겠소. 저 소를 잡아 안주로 씁시다” 라고 하니 또 모두 찬성했습니다. 이 스님은 “이제는 도둑질에 살생까지 하는구나. 이것은 절대로 묵과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남들은 모두 먹고 마시며 즐겁게 노는데 자신은 아무 재미도 느끼지 못하고 야유회를 마치고 절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언제 술 먹고 소 잡아먹었냐는 듯이 태연하게 절로 돌아왔는데, 이 스님은 그날 밤 몰래 큰 스님에게 찾아가 그날 있었던 일을 고해 바치고, 스님들에게 엄한 벌을 내릴 것을 요구했습니다. 큰 스님은 이 이야기를 듣고 “알았다, 것 참 큰일이로구나” 라고 대답하고서 다음날 소풍갔던 스님들을 모두 모이게 했습니다. 일러바친 스님은 “이제 대중들이 큰 벌을 받겠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큰 스님께서 이 스님을 불러 대중 앞에 세우더니 “이놈이 대중의 화합을 깨뜨렸다. 당장 이 놈을 절에서 내쫓아라” 이렇게 호령을 하더랍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실화는 아닙니다. 단지 공동생활에 화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주고 아무리 옳은 것도 대중의 의사에 반한다면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대중이 원하면 소도 잡아먹는다”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는 계율은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화합하여 평화롭게 사는데 그 의의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계율은 우리가 화합하여 평화롭게 사는데 가장 옳고 바른 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화합된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계율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우리는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승보에 대한 귀의를 맹세하는 ‘歸依僧 衆中尊’ 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닙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 대중 속에서 부처님의 계율을 지켜 그들과 화합할 것을 맹세합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말고, 대중의 뜻에 따르면서, 부처님의 계율 속에서 화합하여 평화로운 사회를 만듭시다.
지금까지 삼귀의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삼귀의는 불교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으므로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앞으로 할 강의의 개요인 셈입니다. 앞으로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야기를 다양한 교리 중심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