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포로의 석방
1953년 3월 이래 휴전회담이 급속히 진전되는 과정 속에서 한국정부의 저항이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겪은 북한의
침략전쟁을 분단상태의 종식으로 마감하려는 데서 한국의 통일정책이 좌절을
겪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공산군의 점령치하에서 강제적으로 의용군으로
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되거나 또 국군포로로 공산군에 강제편입되었다가
다시 포로가 된 반공포로를 공산측에 양도한다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이승만은 휴전은 일종의 자살행위이며
필요하다면 한국군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겠다고 공언하였습니다.
한국민들도 통일정책을 지지하여 휴전을 반대하는 시위를 계속하였고
이승만의 태도는 완강하여 한국대표로 하여금 휴전협상을 거부할 것을 지시하기에
이르렀고 6월 18일 새벽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사전예고도 없이
한국포로감시원으로 하여금 2만7000명에 달하는 반공포로를 석방시켜
버렸습니다. 이승만은 이것이 자기의 명령임을 명백히 하고 군경에 대하여
석방된 반공포로를 보호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러한 돌발사태 속에서 공산측은 미국을 이승만의 공범자라 맹렬히
비난하였습니다. 이사건은 세계가 놀라는 커다란 민족의 쾌거였습니다.
평화선선언.
1952년에 접어들면서 일본 어민들은 4월 28일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이 연합국 측과 제2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해
1951년 9월 8일 체결한 강화조약이 그날 발효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일본 어민들이 ‘본토’ 주변의
정해진 선을 벗어나 조업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맥아더 라인’으로 명명된
이 선은 강화조약 발효와 동시에 폐지될 터였습니다.
1952년 1월 18일. 100일 뒤면 동해는 일본 어민들의 텃밭이 될 판이었습니다.
바로 이날 바다 건너, 6.25전란에 휩싸인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부산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확정한 국제적 선례에 의거하고 국가의 복지와
방어를 영원히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될 요구에 의하여’ 해안에서 50∼100마일에
이르는 해상에 선을 긋고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을 한 것입니다.
일본으로선 아연실색할 노릇이었습니다. 일본은 이를 ‘이승만 라인’이라 부르고
철폐를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우방인 미국, 자유중국도 비난했으나 이승만은
까딱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일 간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며 ‘평화선’으로
불렀습니다.
일본 정부가 어민들에게 ‘이승만 라인’을 무시하라고 하자 한국 정부는 군함까지
동원해 ‘평화선’을 넘는 일본 어선을 가차 없이 나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
어민 1명이 숨지기도 했습니다. 1961년까지 나포된 일본 어선은 300척이 넘고
억류된 일본인은 4000명에 가까웠습니다.
평화선은 어업 보호의 절박함이 낳은 산물입니다. 당시 국내 어선을 모두
더한 총톤수는 10만 t. 그나마 대부분이 무동력선이었는데 일본은 총톤수
200만 t에다 그중 상당수가 한국 경찰선보다 빠른 ‘첨단’이었습니다.
맥아더 라인이 사라지면 한국의 어업이 침몰할 것은 뻔했던것 입니다.
그렇다고 평화선이 어업의 보호만을 노린 건 아닙니다. 평화선 안에 독도를
포함시킨 것이 절묘했습니다.
강화조약의 ‘일본이 포기할 지역’에 독도를 넣어 달라는 요구가 거부되자
선수를 친 것입니다. 다급해진 일본은 열흘 뒤 ‘한국의 일방적인 영토 침략’이라며
‘독도 문제’를 쟁점화했으나 이미 기선을 제압당한 뒤였습니다.
항일 투사 이승만의 쾌거인 평화선이 한일 국교정상화 조약 조인(1965년 6월 22일)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 우리 국민은 울분을 토했는데. “얻은 것은 돈이요,
잃은 것은 평화선이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