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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봄/여름 시즌-그러니까, 프라다가 다리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멍 숭숭 뚫린 레이스로 히트친 바로 그 시즌- 이후로 분명히 깨달은 것은,
우리는 현재 ‘스포츠웨어’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굳이 패션용어를 따지자면 ‘스포츠웨어(Sportswear)’는 활동에 알맞은 의상을
통칭하는 말이고, 우리가 흔히 부르는 운동복은 ‘액티브웨어(Active Wear)’라고 써야 옳다). 편안한 스웨트셔츠, 니트 원피스, 느슨한 코트,
레깅스, 데님 팬츠와 같은 스포츠웨어를 즐겨 입는 미국 디자이너들은 몇 시즌 전부터 이를 하이패션의 영역으로 가져오려는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보여왔는데 이번 시즌 그 노력이 제대로 빛을 발해 도시를 불문하고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랄프 로렌식 남부 귀족 룩도, 타미 힐피거식
아메리칸 프레피룩도 아름답지만 이번 시즌엔 마이클 코어스가 가장 정확하게 럭셔리 아메리칸 클래식을 보여주었다. 아이템 하나하나는 물론
이거니와 스타일링 역시 하나도 버릴 것이 없었다. 이 룩을 완성하는 데 가장 필수가 되는 것은 역시 질 좋은 캐시미어 니트와 미국식 캐주얼에
빼놓을 수 없는 셔츠드레스. 잘 빠진 팬츠를 더하면 포멀하게, 데님이나 레깅스를 더하면 위크엔드룩으로 활용하기 좋다. 어느 편이든 가죽 벨트로
허리선을 적당하게 드러내는 편이 멋스러우며, 마무리는 그러데이션이 적절히 들어간 선글라스(미국이니까!)면 적절할 듯하다.
개인적으로 가을/겨울 시즌에는 늘 밀리터리 룩으로 근근이 연명해온 터라 이를 굳이 ‘유행’이라고 부르기도 멋쩍다. 前 카고팬츠 마니아
출신으로 학창 시절엔 휴가 나온 병장 선배의 국방색 가방을 강탈, 남자 학우들의 눈총을 한 몸에 받았으며, 벌써 몇 년째 빨치산 남부군 같다는
폭언 속에서도 총알 구멍이 숭숭 난 ‘야상’을 묵묵히 고집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나이도 지긋해졌으니 예비역 포스의 밀리터리 룩은 끊어야 할 때가 온 듯싶다. 무엇보다 나긋나긋한 여성미의 주입이 절실한 시점. 아름다운(?) 밀리터리 룩의 변신을 위해 찾은 재료는 꼿꼿한 어깨와
미끈하게 빠진 허리 라인의 조화가 근사한 더블 브레스트 코트와 바로크풍의 티어드 장식 시폰 미니 드레스. 그리고 무뚝뚝한 가죽의 진중함이
돋보이는 메신저백과 날렵한 실루엣의 헌팅 부츠를 곁들일 생각이다. 물론 묵직한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시계를 더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고.
정중하고 여성스러운 이미지, 이것이 2010년 버전 밀리터리 룩의 테마다.
티셔츠와 청바지 몇 벌이면 일년이 끄떡 없던 시절, 헬무트 랭 재킷을 보고 사랑에 눈이 먼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처음 알았다.
그게 미니멀리즘인지, 뭔지 알 턱은 없었지만 그냥 그걸 몸에 걸쳤을 때 나는 더 솔직해지고, 당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눈먼 사랑이 집착이 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순간부터였고, 결국 나는 패션을 하는 사람이 됐다. 미니멀리즘이 복귀를 선언한 이번 시즌, 헬무트 랭의 ‘잔재’가 여기저기서 엿보였다. 조용히 위시 리스트 노트를 펼쳤다. 일단은 폭이 넓은 검정 팬츠부터 : 부티와 스니커즈를 번갈아 매치할 수 있는 중성적인 디자인으로.
얇은 실크 블라우스도 필수 : 여성스러운 건 질색이지만, 매니시한 룩에 ‘반전’의 아이템으로는 효과 만점. 마지막으로 오버사이즈 코트와
클래식한 백 : 코트는 짧은 길이의 코쿤 실루엣으로, 백은 천년 만년 들 수 있는 디자인으로!
나는 매니시한 룩을 입을 때도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여자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패션은 내게 주어진 특권이자 즐거움이니까.
그 최고의 룩중 하나가 50년대의 글래머러스한 레이디룩이다. 이번 시즌 미니멀리즘과 함께 빅 트렌드로 부상한 이 룩을 연출하려면 준비해야 하는 아이템들이 있다. 바로 꽃처럼 만개한 풀 스커트, 요조숙녀처럼 들어야 하는 빈티지 스타일의 토트백, 날씬한 상체를 만들어줄 타이트한 니트 혹은
재킷, 허리를 잘록하게 강조해 줄 가는 벨트, 그리고 이 풍성한 룩을 매끈하게 정리해 줄 스틸레토 힐이다. 그리고 이들보다 더 중요한 또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신감 있는 태도가 그것이다. 겉 모습으로만은 결코 아름다워질 수 없다.
그것이 바로 현대의 성형 미인들이 50년대 팜므 파탈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남들이 다 미니멀리즘을 외칠 때, 맥시멀리즘의 매력을 주창하는 청개구리 기질이 발동한 것은 아니다. 다만 가을/겨울이 빚어내는 풍성함이야말로 ‘보호 시크’의 감성적인 룩을 연출하기에 제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난2월, 뉴욕에서 목도한 랄프 로렌 컬렉션은 보헤미안적인
자유분방함을 우아하게 길들인 히피들의 잔상을 짙게 남겼다. 롱 니트 카디건과 두툼한 코트에 매치한 플라워 프린트 원피스. 더구나 땅에 닿을 듯
말 듯 찰랑거리는 맥시 드레스는 꽤 근사했다. 생전 처음으로 맥시 드레스의 ‘우아한 위엄’을 시도해볼까 하는 마음까지 먹을 정도로. 물론 미디
스커트에 니트 소재의 레그웨어와 레이스업 부티를 곁들이는 것만으로도 보헤미안 랩소디가 흐르는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을듯. 만약 겨울까지
전천후 히피 스타일을 연출하려면? 프린지 장식이나 퍼 소재가 돋보이는 에스닉한 백 하나만 더하면 된다.
2010 F/W 시즌이야말로 개인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는 때임을 깨달았다. 시즌 트렌드 중 밀리터리 재킷, 테일러드 수트, 플라워 프린트 원피스 등은 이미 즐겨 입는 것들인데, 유독 ‘그것’만큼은 시도하지 않았던 무드이기 때문. 바로 승마복을 연상시키는 7부 길이의 팬츠와 체크
패턴의 재킷, 즉 브리티시 무드의 스타일링 말이다. 먼저 종아리 부분을 조여주는 7부 길이의 조퍼스 팬츠는 체크 패턴 초보자인 만큼 패턴이
잔잔한 것으로 고를 것이다. 여기에 발목 부분에 여유가 있는 앵클 부츠로 종아리 부분을 드러내 둔한 실루엣으로 둔갑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체크 포인트. 그리고 새틴 블라우스로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체크 재킷이나 아우터를 매치하여 콘셉트를 확실하게 드러낼 것이다.
여기에 가죽으로 만든 닥터백이나 에르메스의 켈리백처럼 단정한 디자인의 백으로 고상한 분위기를 더해 완숙미를 풍겨볼 참이다.
출처 | www.wkore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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