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촌 經濟' 숨통 좌지우지 ‘슈퍼 파워’
<스페셜> 美國 대륙의 유대인(7)-석유
기사입력시간 : 2013/06/16 [22:15:00]
소정현기자
▲ 메이저 석유회사들은 모두 원유의 굴착과 생산으로부터 정제, 수송 그리고 석유제품 판매까지 산업의 전 과정을 사활을 걸고 수중에 넣었다.
로열더치셸·BP·엑손·모빌·셰브론·텍사코·걸프 최선봉 굴착과 생산, 정제와 수송, 제품 판매등 전과정 장악록펠러 스탠더드오일 해체 후 독립회사 메이저 두각 現 엑슨모빌·셰브론·BP·로열더치셸 4강 구도 재편성 ‘엑슨모빌’ 세계 제1의 회사 석유왕 록펠러가 그뿌리 유럽대륙 로얄더치쉘 로스차일드가 후원아래 급신장 중동전과 이란혁명에 석유수출국기구로 영향력 반전산유국 자원민족주의· 국유화 현실 ‘메이저 절치부심’
▲ 석유 메이저는 석유개발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태반이 유대 재벌들에 의해 운영된다.
● 반세기 이상 무소불위 초권력 ‘일곱 자매들’ 일곱 자매들(Seven Sisters)! 이탈리아 국영 에너지회사인 ENI의 초대 총재인 ‘엔리코 마테이’(Enrico Mattei)가 미국과 영국에 의해 전적으로 주도되는 세계의 7대 석유 회사에 붙인 별명이다. 국제 석유 시장에선 이들을 ‘석유 메이저’(Oil Majors)라 호칭한다. 그간 일곱 자매들은 그동안 국제 유가를 좌지우지하는 등 초월적 파워 구사에 주저하지 않아 왔다. 세계의 석유 사업 회사들 중에 규모와 영향력이 매머드급인 극소수 국제적 석유 회사를 오일 메이저라고 일컫는데, 석유의 탐사·개발·생산·수송·정제·판매의 全분야에 걸쳐 일관 체제를 구비하고 광범위하게 에너지 사업을 전개해왔다. 그리고 이들 메이저는 석유개발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태반이 유대 재벌들에 의해 운영된다.
▲ 일곱 자매들(Seven Sisters)! 이탈리아 국영 에너지회사인 ENI의 초대 총재인 ‘엔리코 마테이’(Enrico Mattei)가 미국과 영국에 의해 전적으로 주도되는 세계의 7대 석유 회사에 붙인 별명이다.
로열더치셸(Royal Dutch Shell),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 엑손(Exxon), 모빌(Mobil), 셰브론(Chevron), 텍사코(Texaco), 걸프(Gulf) 등 7개 회사는 지난 1920년부터 초대형 석유회사로 등장하여 1970년대 초반까지 세계 석유시장의 70% 이상을 확고히 장악하였다.영국·네덜란드의 합작회사인 로열더치셸(Royal Dutch Shell)과 영국의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ritish Petroleum)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계이다. 세계 7대 메이저 석유회사 중 6개가 유대계의 아성이다. 엑슨, 모빌, 스탠더드, 걸프가 록펠러 가문에 지배받아 왔으며, 쉐브런(Chevron)과 텍사코(Texaco) 또한 유대인 록펠러가와 노리스가의 관할 하에 있다. 로얄 더치쉘(Royal Dutch Shell)은 로스차일드가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으며, 브리티시 패트롤리엄(BP) 역시 유대 자본의 큰 영향 하에 있다.최초의 국제 석유 카르텔 결성은 1928년 영국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의 전신인 앵글로-페르시아, 로열더치셸, 美 뉴저지의 스탠더드석유회사(엑슨의 전신) 등 3개사가 서남아시아의 석유 이권에 관한 ‘아크나카리 협정’(Achnacary Agreement)을 맺으면서 시작됐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뉴욕 스탠더드석유회사(모빌의 전신), 캘리포니아 스탠더드석유회사(셰브론의 전신), 걸프석유회사, 텍사코 등 4개 미국 석유회사가 추가 편입되면서 일명 일곱 자매들은 국제 석유시장에서 범국가적 파워를 공고히 하여왔다.주지하다시피, 7대 메이저 석유회사들은 모두 원유의 굴착과 생산으로부터 정제, 수송 그리고 석유제품 판매까지 산업의 전 과정을 사활을 걸고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이들은 석유산업 전반을 수직 통합하였을 뿐 아니라 그 사업의 영역 또한 범글로벌적 이었다. 이들은 서로 치열한 접전을 벌이면서도 적과의 동맹 맺기조차 서슴지 않았다. 이들 메이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때는 공산권을 제외한 전 세계의 석유 시장을 거의 지배하였으나 1973년 중동전쟁과 1979년 이란혁명을 계기로 각각 1, 2차 오일쇼크가 발발하면서 유가 결정권이 OPEC(석유수출국기구)으로 넘어가면서 인수와 합병을 통해 그 영향력 유지에 절치부심하여 왔다.
▲ 엑슨은 모빌과 합병하고, 셰브론은 걸프와 텍사코를 연이어 병합함으로써 세븐 시스터스는 현재 엑슨모빌, 셰브론, BP, 로열더치셸 넷만 남았다.
특히 1980년대 중반부터 저유가 흐름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유전개발 투자가 침체에 빠지면서 적자생존을 위해 대대적 구조조정을 추진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비용절감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석유 기업 간 인수 합병의 물결이 활발하게 진척됐다. 엑슨은 모빌과 합병하고, 셰브론은 걸프와 텍사코를 연이어 병합함으로써 세븐 시스터스는 현재 엑슨모빌, 셰브론, BP, 로열더치셸 넷만 남았다.2천년대 이후 세계석유산업 환경은 자원 확보 및 다각화로 특징지운다. 유전확보를 위한 광구매입 또는 유전을 확보한 개발기업에 대한 M&A가 활발하게 탐색되면서 그 주체가 메이저와 산유국 및 소비국의 국영기업 등으로 다핵화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고 있다.또한 非메이저 기업들은 메이저가 접근하기에 비효율적인 소규모 유전이나 노후유전을 매입하는 형태로 유전규모를 확대해 나가는 추세이다. ● 세계 제1의 기업 ‘엑슨과모빌’ 탄생 비화
▲ 2012년 5월 7일, 美 경제잡지 ‘포춘’(FORTUNE)은 2011년 매출액 기준으로 미국 500대 기업 순위를 조사한 ‘포춘500’을 발표했는데, 엑슨모빌은 1위를 차지했다.
2012년 5월 7일, 美 경제잡지 ‘포춘’(FORTUNE)은 2011년 매출액 기준으로 미국 500대 기업 순위를 조사한 ‘포춘500’을 발표했는데, 엑슨모빌은 1위를 차지했다. 엑슨모빌의 매출액은 전년대비 28% 늘어난 4529억달러를, 이익은 35% 증가한 411억달러를 기록했으며 주가는 1년 사이 20% 상승했다. 엑슨과 모빌이 합병하여 태동된 엑슨모빌! 석유와 천연가스의 탐사, 생산, 공급, 운송, 판매의 주축인 엑슨모빌의 조직은 크게 석유 채굴, 정제와 판매,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세 부문으로 구성돼 있다. 석탄과 미네랄을 채집, 가공하는 하위 업종들은 별도로 운영된다. 엑슨(Exxon)과 모빌(Mobil)의 전신은 미국의 '석유 왕'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가 1882년 세운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Company)이다. 록펠러는 1882년 뉴저지에 ‘저지스탠더드’(Jersey Standard), 뉴욕에 ‘소코니’(Socony, Standard Oil of New York)라는 법인을 각각 설립하는데, 이들 두 회사는 각각 엑슨과 모빌의 모태가 되었다. 엑슨과 모빌의 역사적 소급 배경을 세밀하게 심층적으로 파악하여 보기로 한다.
▲ 근대 석유산업의 태동은 1859년 ‘오일 크리크’(Oil Creek)에서 철도 승무원 ‘에드윈 드레이크’(Edwin Laurentine Drake)가 암반 아래 21m까지 굴착하여 하루 30배럴의 원유 생산에 성공한 것에서 촉발됐다.
근대 석유산업의 태동은 185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Pennsylvania 州) ‘오일 크리크’(Oil Creek)에서 철도 승무원 ‘에드윈 드레이크’(Edwin Laurentine Drake)가 암반 아래 21m까지 굴착하여 하루 30배럴의 원유 생산에 성공한 것에서 촉발됐다. 이곳에서 생산된 원유는 배럴당 20달러로 판매되었고 대륙 건너 유럽까지 수출되었다. 그러나 오일러시에 따른 생산과잉은 가격 폭락을 가져와 많은 개발회사들이 파산하면서 드레이크도 무일푼이 됐다. 검은 황금을 배경으로 록펠러라는 석유업계의 황제가 등장한다. 록펠러는 석유 발견 자체는 일확천금이 가능하나 실패할 확률이 많아 안정적 사업원이 될 수 없다고 공언했다. 그 대신 정유업으로 석유산업의 무한확장이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 록펠러는 1870년 美 클리블랜드에 ‘오하이오 스탠더드석유회사’를 설립하였는데, 표준의 품질로서 생산된 제품을 공급하겠다는 모토 하에 사명(社名)을 ‘스탠더드’(standard)라 하였다.
이에 록펠러는 1870년 美 클리블랜드에 ‘오하이오 스탠더드석유회사’를 설립하였는데, 표준의 품질로서 생산된 제품을 공급하겠다는 모토 하에 사명(社名)을 ‘스탠더드’(standard)라 하였다. 또한 정유업의 성패는 철도에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수 년후에는 송유관과 철도화차까지 수중에 넣음으로써 1882년 미국의 정제 및 판매시장의 90%를 독점하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standard oil trust)로 급성장하였다. 생산, 수송, 정제, 판매단계의 모든 작업을 관리·통제하는 '일관성'을 갖는 대회사를 트러스트라고 부른 것은 스탠더드 회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 회사의 가파른 성장이 근대 석유산업 성립에 결정적 분기점을 이룬다.미연방 대법원은 1911년 스탠더드 오일이 미국의 반(反)독점법을 위반했다고 판결하고 이 회사를 여러 개의 회사로 독립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스탠더드 오일은 34개의 기업으로 분리되었는데, 저지스탠더드(Jersey Standard), 소코니(Socony), ‘스탠더드오일 오브 캘리포니아’(SOCAL)를 포함한 34개 회사들로 분리되었다.
▲ 록펠러는 정유업의 성패는 철도에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수 년후에는 송유관과 철도화차까지 수중에 넣음으로써 1882년 미국의 정제 및 판매시장의 90%를 독점하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standard oil trust)로 급성장하였다.
▲ 스탠더드 오일은 34개의 기업으로 분리되었는데, 저지스탠더드(Jersey Standard), 소코니(Socony), ‘스탠더드오일 오브 캘리포니아’(SOCAL)를 포함한 34개 회사들로 분리되었다.
록펠러 본인은 ‘스탠더드 오일 컴퍼니 오브 뉴저지라’(Standard Oil Company of New Jersey)는 기업만을 소유하게 됐다. 이 기업은 간단히 '저지 스탠더드'라고 불렸다. 1920년 저지 스탠더드는 최초의 상업적 정유 제품인 ‘이소프로필 알코올’을 생산했다. 1937년 오늘날의 타이어, 수술 테이프, 보호막 등을 만드는 원료인 화학고무를 최초로 생산했다. 1952년에는 자동차 오일을 첫 생산했다. 1972년 저지 스탠더드는 공식 이름을 엑슨(Exxon)으로 바꿨다. 한편, 스탠더드 오일에서 떨어져 나온 기업 중의 하나인 ‘소코니’(Socony)는 1931년 베큠(Vacuum) 정유사를 인수하며 세를 키워나갔다. 1955년 ‘소코니-베큠’(Socony-Vacuum) 기업은 자사의 상표 이름을 따서 ‘소코니 모빌’(Socony Mobil)로 회사명을 바꾼 뒤 1966년 다시 모빌(Mobil)로 명칭을 정했다.
▲ 생산, 수송, 정제, 판매단계의 모든 작업을 관리·통제하는 '일관성'을 갖는 대회사를 트러스트라고 부른 것은 스탠더드 회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1998년 엑손과 모빌은 최종적으로 합병을 결정하였으며, 740억 달러 규모의 합병 협정을 맺음으로써 새로운 회사의 이름을 엑손모빌로 정했다. 그리고 조정을 거친 후인 1999년 11월 30일 합병이 완료되었다. 2010년 ‘엑슨모빌’은 에너지업체인 ‘엑스티오’(XTO)를 인수하여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 개발과 생산에 투자하고 있다. ● 걸프와 텍사코 ‘셰브런’에 인수되다
▲ 셰브런(Chevron)은 1911년 미국연방법원의 독과점금지법에 따라 존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컴퍼니가 34개의 기업으로 해체되면서 출현한 ‘스탠더드오일 오브 캘리포니아’(SOCAL, Standard Oil of California)의 후신이다.
▲ 쉐브론은 생산량 대비 수익률이 가장 높고 성장 전망도 최고로 평가된다.
미국에서 제2위의 정유업체 쉐브론이 시가총액 기준으로 유럽 최대 원유업체 로열더치셸을 추월했다. 현재 쉐브론의 시가총액은 약 2300억달러(약 256조5190억원)로 2120억달러(약 236조4436억원)의 로열더치셸을 웃돌아 미국 경쟁사 엑손모빌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석유회사가 됐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금년 3월 17일 보도한바 있다. 쉐브론은 생산량 대비 수익률이 가장 높고 성장 전망도 최고로 평가된다. 셰브런(Chevron)은 1911년 미국연방법원의 독과점금지법에 따라 존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컴퍼니가 34개의 기업으로 해체되면서 출현한 ‘스탠더드오일 오브 캘리포니아’(SOCAL, Standard Oil of California)의 후신이다.
▲ 1906년에는 오클라호마에서 거대한 유전을 발견했다. 이 회사는 멕시코 만의 이름을 따서 ‘걸프’라고 했다.
1933년 사우디아라비아는 소칼(SOCAL)사에 석유채굴권을 부여했고, 1938년 석유가 시추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초반 소칼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당시 세계 최대의 유정을 개발했다. 히브리어의 ‘chibur(결합)’에 어원을 둔 ‘셰브론’은 후일 걸프와 텍사코를 연거푸 인수하면서 사세 확장의 결정적 분기점을 이룬다. 이를 상세하게 조망하여 본다.20세기 초 전후라 할 수 있는 1901년에는 미국 텍사스州 ‘스핀들탑힐’(Spindletop Hill) 지역에서 하루 10만 배럴을 생산하는 거대한 유전이 발견되어 이를 계기로 하여 ‘걸프’와 ‘텍사코’의 탄생을 가져왔다. 우선, ‘걸프오일’(Gulf Oil Corporation)의 기원은 1901년 5월 텍사스주(州) 보몬트 근처 ‘스핀들탑힐’(Spindletop Hill)에서 오일이 발견되자 시작되었다. 스핀들탑힐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록펠러의 스탠더드 독점시대에 방점을 찍고 텍사스 석유산업의 탄생의 서막을 열었다.
▲ 1920년대에 미국 재무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앤드류 멜런’은 멜론 뱅크, 걸프 석유 등을 소유한 재벌이자 거부(巨富)였다.
텍사스의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고 확신한 피츠버그의 은행가인 멜런 가문의 ‘앤드류 멜런’(Andrew Mellon) 등 일단의 투자자들이 스핀들탑힐 유전을 인수하면서 현대적인 정유시설을 발전시켰다. 1906년에는 오클라호마에서 거대한 유전을 발견했다. 이 회사는 멕시코 만의 이름을 따서 ‘걸프’라고 했다.1920년대에 미국 재무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앤드류 멜런’은 멜론 뱅크, 걸프 석유 등을 소유한 재벌이자 거부(巨富)였다. 우선, 걸프오일은 1913년 피츠버그에 자동차를 타고 들어가 주유할 수 있는 주유소를 개업함으로써 가솔린 시장에 진출한 최초의 석유 회사가 되었다. 또한 텍사스, 오클라호마, 루이지애나, 나아가 멕시코와 베네수엘라의 유전을 속속 개발함으로써 1923년에 이르러서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유소로 성장하였다. 1941년 미국의 제조업체 순위에서 8위를 기록했고, 1979년에는 9위에 오른 ‘걸프’는 1985년 SOCAL(Standard Oil of California)에 합병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이때부터 셰브런(Chevron Corporation)으로 바꾸었다. 이어, 텍사코(Texaco) 역시 ‘셰브런’에 인수되었다. 텍사코의 태동 연원은 이러하다.
▲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의 직원인 ‘조지프 컬리넌’(Joseph cullinan)은 텍사코를 태동시킨다.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의 직원이었던 ‘조지프 컬리넌’(Joseph cullinan)은 1901년 3월 오일의 저장과 수송을 담당하는 텍사스 퓨얼 컴퍼니(Texas Fuel Company)를 설립했다. 1902년 컬리넌은 법적이고 재정적 연유로 텍사스 컴퍼니(The Texas Company)라는 새로운 회사를 세웠는데 이는 앞서 회사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텍사코는 이내 스탠더드 오일 컴퍼니에 못지않은 기업으로 성장했다. 1911년 스핀들탑힐 유전에서 석유를 생산하게 되자 ‘일리노이州에 정제소를 설립하여 처음으로 텍사스 밖으로 진출하는 분기점을 마련한다. 한편, 스핀들톱힐 유전이 고갈되자, 20마일 떨어진 ’사우어 레이크‘(Sour Lake)에서 대형 유전이 발견되면서 메이저로 가파른 성장세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1928년 미국 석유 회사로서는 처음으로 48개 연방주 모두에 제품을 판매했고, 1931년에는 1904년 ‘헤브메이어 오일 컴퍼니’(Havemeyer Oil Company)에서 출발한 윤활유 브랜드 ‘ 볼린’Havoline)을 인수했다.
▲ 1987년 텍사코는 395억 달러라는 미국 기업 사상 최대 액수로 파산하면서 2001년 셰브론에 흡수.
1930년대에는 해외로 진출하여 콜롬비아, 캐나다, 베네수엘라 등지로 범위를 넓혀갔다. 1959년에는 사명을 ‘텍사코’로 바꾸었는데, 1980년대에 이르러 ‘미국 메이저’의 원유조달의 미국 회귀가 진전됨에 따라 텍사코도 국내 유전확보에 들어가, 1984년 유력한 독립 석유회사인 ‘게티오일’(Getty Oil)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치명적 악수를 두게 된다. 1984년 텍사코는 美 최대 윤활유 업체인 ‘펜조일’(Pennzoil)과 ‘게티오일’ 사이에 이미 구두로 매각 협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게티를 인수했다. 이로 인해 텍사코는 1985년 텍사스 법정으로부터 111억 달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손해배상금을 펜조일에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 후폭풍으로 1987년 텍사코는 395억 달러라는 미국 기업 사상 최대 액수로 파산하면서 2001년 셰브론에 흡수되면서 ‘셰브론-텍사코’(Chevron-Texaco)가 태동하였으며, 2005년에는 셰브론 브랜드만 쓰기로 했다. 1992년 셰브론은 NGC와 합병을 성사시켜 ‘다이너지’(Dynegy Incorporated)를 세우면서 천연가스 부문을 확장시켰다. NGC는 1994년부터 천연가스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였다. 셰브론은 2005년부터 5년 동안 미국 전체 기업들 가운데 최상위 5위 안에 계속 선정되었다. 주요 제품으로는 석유, 천연가스, 석유화학제품, 연료, 고무제품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칼텍스(Caltex)는 셰브론의 전신인 소칼과 텍사코가 1936년 합자 형식으로 세워진 회사이다. GS그룹과 칼텍스가 합작해서 만든 정유 회사가 GS 칼텍스이다. 엘지정유에서 엘지칼텍스로 바뀌었다 다시 GS칼텍스로 바뀐 것이다.상세하게 살펴본바, 록펠러의 스탠더드석유로부터 분리·독립한 모든 회사를 ‘독립계(Independent)’라고 불렀는데, 일부는 종합 일관회사로 성장하여 메이저에 반열에 올랐으며 점차로 석유산업의 상류부문인 탐사·개발 사업만 영위하는 기업을 의미하게 되었다. ● 유럽대륙 석유산업의 발원과 부흥
▲ '로얄더치 셀’은 영국의 운송 및 무역회사였던 ‘쉘’(Shell) 사와 네덜란드 회사인 ‘로얄더치’(Royal Dutch)가 합병되어 만들어진 회사이다.
유럽대륙에서 국제석유 메이저는 네덜란드계 회사인 ‘로얄더치쉘’(Royal Dutch Shell)과 영국의 ‘브리티시 페트롤리움’(BP)이다.현재 ‘로열더치셸그룹’은 윤활유 부문 시장점유율 세계 1위이며 유럽 최대의 석유회사로서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본사가 있다. ‘로얄더치 셀’은 영국의 운송 및 무역회사였던 ‘쉘’(Shell) 사와 네덜란드 회사인 ‘로얄더치’(Royal Dutch)가 합병되어 만들어진 회사이다. 1890년 4월에 네덜란드인 ‘얀스 질커’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유전을 개발하기 위해 네덜란드 국왕이던 빌헬름 3세(여기에서 로얄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됨)의 후원 아래 北수마트라의 광구에서 분출되는 석유를 생산·정제·수송·판매를 담당하기 위해 왕립회사인 ‘로얄더치’를 설립하였다.한편, 쉘社사를 창건한 사람은 ‘마커스 사무엘’(Marcus Samuel)이라는 유대인 상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유조선이 바로 19세기말에 쉘 사에 의해 처음 등장하게 된다.
▲ 쉘社사를 창건한 사람은 ‘마커스 사무엘’(Marcus Samuel)이라는 유대인 상인이다.
‘마커스 사무엘’은 부친은 동일한 이름을 이어받았다. 1870년에 마커스 새뮤얼과 샘은 부친의 사업을 물려받았다. 그들은 1880년에 사업을 기계, 직물, 쌀, 도자기 등의 수출입으로 확장하여 세계 각국을 항해하던 중에 러시아 카스피海 연안의 ‘바쿠(Baku) 유전’을 목도하면서 석유 사업에 이내 빨려든다.현재 사용되고 있는 ‘로얄더치쉘’의 가리비 조개 모양의 브랜드 로고는 1971년에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ewy)가 디자인했는데, 여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마커스 사무엘이 회사 이름으로 조개(셸)를 선택한 것은 부친의 영향 때문이다. 이름이 동일한 그의 아버지 마커스 사무엘은 런던에서 조그만 골동품상점을 운영했다. 그가 주로 판매한 것은 아시아에서 사온 장식용 조개들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은 아들 마커스 사무엘은 극동의 조개를 사려고 배를 타고 아시아를 빈번하게 왕래했다. 약술한바, 마커스는 석유의 가능성에 눈뜨게 된다. 그는 곧 원유 무역을 시작했다.1892년 사무엘 형제는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조개 이름을 따서 세계에서 가장 큰 유조선 ‘뮤렉스’(Murex)를 진수시키고 1897년에 로스차일드 은행의 지원으로 석유회사 '쉘 운송 무역회사(Shel" Transport and Trading Company)'를 설립했다. 이에 그가 소유한 선단을 ‘셸 라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개와 석유는 아무런 인연이 없으나 조개(Shell)가 세계 최대의 석유 에너지 회사의 이름으로 채택된 것이다.
▲ 부친의 영향을 받아 조개와 석유는 아무런 인연이 없으나 조개(Shell)가 세계 최대의 석유 에너지 회사의 이름으로 채택된 것이다.
1907년 2월에 영국의 쉘과 네덜란드의 로열 더치 석유회사가 합병하여 '로열 더치쉘 그룹으로 거듭나면서 일관 체제를 갖춘다. 인도네시아 석유는 당시 미국이나 러시아의 석유보다 품질은 떨어졌지만, 석유를 갈망하고 있던 극동시장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구비하고 있었다. 이에 쉘 사는 유조선으로 석유를 일본을 비롯한 극동으로 수송하는데 차별적 이점을 갖게 되었다.양사의 합병은 당시 세계의 석유를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한 고육지책이었다. 회사의 주식은 로열 더치와 쉘이 60:40으로 양분했다. 2005년 7월 20일에 회사는 이중 경영체제로 운영되던 네덜란드와 영국 모회사의 경영을 통합하여 '로열 더치 쉘 피엘시(Royal Dutch Shell plc)'를 설립했다. 회사의 주요 사업은 석유와 가스 탐사, 생산, 운송 판매, 대체 에너지 개발, 석유화학제품의 생산 등이다. 세계 140개국 이상에 진출해 있으며, 미국 텍사스州 ‘휴스턴’(Houston)에 본사를 둔 자회사 '쉘 오일 컴퍼니(Shell Oil Company)'는 쉘의 가장 중요한 핵심 사업체 중의 하나이다. 한국쉘석유의 전신은 1960년 세워진 극동정유공업이다. 1969년 극동정유는 네덜란드와 영국 합작 법인인 로열더치셸 그룹과 합작해 극동쉘정유(주)를 세웠다. 1987년 극동그룹이 극동쉘정유의 보유 지분 51%를 로열더치셸 그룹에 매각하면서 경영에서 손을 뗐다. 이 해에 회사 이름을 지금의 한국쉘석유(주)로 바꿨다.
▲ 1992년 셰브론은 NGC와 합병을 성사시켜 ‘다이너지’(Dynegy Incorporated)를 세우면서 천연가스 부문을 확장시켰다.
▲ 한국쉘석유의 전신은 1960년 세워진 극동정유공업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여러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획기적 전쟁이었다.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트럭, 그리고 적의 진지를 공격하기 위한 탱크, 적군을 공격하기 위한 비행기가 처음 등장하면서 석유는 핵심 에너지가 되었다. 이에 국가도 석유의 확보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투영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 미국, 독일 등은 석유의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미국의 경우, 텍사스나 캘리포니아 같은 국내의 대규모 유전이 있었지만 유럽 국가들은 국내에서는 전혀 유전이 생산되지 않았기에 해외에서 유전을 필사적으로 확보해야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이들 국가들이 주로 눈을 돌린 곳이 바로 중동 지역이었다. 오늘날 중동지역이 석유로 인해 그 전략적 가치가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페르시아 지역에서 원유가 발견되어 원유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였다.
▲ 영국의 BP사는 원유를 중동 지역에서 확보한 최초의 메이저 회사이다.
▲ 석유는 민간 기업에 맡겨두기에는 너무나 민감한 것이라고 영국의 지도자들은 단언했다. 이는 브리티시 페트롤리움’(BP)의 태동을 이끌었다.
이와 맞물린 것이 브리티시 페트롤리움’(BP)의 태동이다. BP사는 원유를 중동 지역에서 확보한 최초의 메이저 회사이다. 중동지역에서 최초로 석유를 발견한 영국인 사업가 ‘윌리엄 크녹스 다아시’((William Knox D'Arcy)가 1901년 이란(페르시아 왕국) 국왕으로부터 석유 탐사권을 확보하면서 비롯됐다. 60년간 배타적 조광권을 획득하고 1908년에 ‘앵글로-페르시안 석유회사(Anglo-Persian Oil Company)로 설립되었다가, 1932년 이란이 이 회사의 권리를 취소하면서 1935년에 앵글로-이란석유회사(AIOC, Anglo-Iranian Oil Company)로 개칭하였다.
▲ 중동지역에서 최초로 석유를 발견한 영국인 사업가 ‘윌리엄 크녹스 다아시’((William Knox D'Arcy)가 1901년 이란(페르시아 왕국) 국왕으로부터 석유 탐사권을 확보하면서 비롯됐다. 이는 BP의 반석이 되었다.
앞서, 1914년에는 함대연료를 석유로 전환하려는 영국 해군성이 다아시로부터 지분을 매입하여 이 회사의 소유주가 된다. 당시 해군성 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이 해군 함정의 원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교체하면서 석유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이 회사의 주식 51 퍼센트를 매입하였기 때문이다. 석유는 민간 기업에 맡겨두기에는 너무나 민감한 것이라고 영국의 지도자들은 단언했다.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이란 민족주의자들은 석유탐사 법안을 개정하라며 이란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1951년 친서방 성향의 ‘알리 라즈마라’(Ali Rasmara) 총리가 암살되자, 이란 의회는 민족주의 성향의 ‘모하메드 마사데크’(Mohammed Massadeq)를 후임 총리로 임명했다. 그 해 4월 이란 의회는 만장일치로 석유산업을 국유화했다. 영국 정부가 이란의 석유국유화법을 국제사법위원회에 제소했지만 기각되었다. 이 과정에서 1954년 앵글로-이라니안 석유회사는 ‘브리티시석유유한회사’가 되었다가, 1982년 상호를 ‘브리티시 페트롤리움’(BP, The British Petroleum Co)로 변경하였다. BP는 1965년 북극해에서 최초로 석유를 시추했다. 1981년부터 1990년 사이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은 민영화 정책에 따라 BP의 지분 전체를 매각했다. 본사는 영국 런던에 있다.
▲ 영국의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과 미국의 아모코(Amoco)社가 1998년 8월 11일 합병 계획을 전격 발표하면서 큰 주목을 끌었다.
그런데, 영국의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과 미국의 아모코(Amoco)社가 1998년 8월 11일 합병 계획을 전격 발표하면서 큰 주목을 끌었다. 세계 합병규모 사상 최대 규모인 이들 두 회사의 짝짓기의 산물인 ‘BP 아모코社'는 자산 규모는 1천1백억달러에 이르렀다.새 회사의 지분은 BP가 60%, 아모코가 40%의 지분을 소유하는데, BP사와 美 제5위의 석유회사이자 세계 최대 석유화학사의 하나인 아모코사의 합병은 세계 석유, 가스, 석유화학분야 등에서 업계의 판세를 뒤흔들었다. 아모코는 시카고에 본사를 두고 세계 20개국에서 석유 탐사 및 생산 활동을 벌여왔으며, 美 중서부와 동부, 남동부 등에 모두 9천3백 개의 주유소를 갖고 있다.또한 BP는 2000년 2월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정유시설을 보유한 美 ‘아코’(ARCO)를 흡수 합병함으로써 엑슨-모빌에 이어 세계 제2위의 민간 석유회사가 되었다.1870년 ‘찰스 록하트’(Charles Lockhart)가 설립한 ‘아코’는 美 알래스카州에서 최초로 상업용 유전 발견하였다. 세계 최대 규모의 정유시설을 보유하고 세계 각지에서 유전개발 사업을 해왔으나 경영난으로 석유화학사업부문은 매각하고 석유탐사 및 생산 사업에만 전념해 왔다.
▲ 거대 석유 메이저들은 이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무엇보다 거세게 불고 있는 자원민족주의 때문이다.
2001년 정식 명칭을 BP아모코로 바꾸고 광고 문구를 ‘석유를 넘어서(BP: Beyond Petroleum)'로 정하였다. 2010년 4월 美 남부 멕시코 만 석유시추 과정에서 송유관 유출사고가 발생했다. 두 달 만에 한반도 전체를 덮을 정도의 원유가 남부 해역을 뒤덮었다. BP아모코는 2010년 2분기 169억 7000만 달러의 손실을 봤고, 석유유출로 인해 322억 달러의 비용을 지출했다. 살펴본바, 거대 석유 메이저들은 이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무엇보다 거세게 불고 있는 자원민족주의 때문이다. 이들 메이저들이 추동력을 상실하면서 유전 개발권 등 세계 석유 생산의 지배권이 산유국의 국영석유기업들에 속속 넘어가고 있다. 이들 메이저들은 이전보다 열악한 조건으로 재계약을 강요받거나 해당 지역의 국영석유회사들과의 경쟁에서 배제되면서 중앙아시아·남미·러시아·아프리카 지역의 신유전 개발사업에서 점차 밀려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