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리 (石里)
석리는 대지면의 북부에 있는 마을로 대합면 소야리 월령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본래 지포면의 지역인 석리는 돌실, 석실, 석동등으로 불리게 된 것은 동리앞에 큰 바위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 큰 바위가 마치 마을의 문과 같아 보였으므로 석문동(石問洞)으로 불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호구총수]에는 석문동 보다는 작령촌(鵲嶺村)과 金泉村)으로 기록되어 있어 석문동이나 석리는 후기에 쓰인 지명이라 할 것이다.
작령촌은 마을 뒤의 고개 이름이 까치고개이였으므로 그것을 그대로 작령이라 기사 하였으니 대합면 월령리의 까치골, 장고개의 남쪽의 까치고개와 까치가 엎드려 졌다는 도작골(倒鵲谷), 까치가 죽어 묻혔다는 작령(鵲靈)등과 연결이 되는 곳으로 이 일대가 까치 형국이라 하는데서 지명들이 불리어 졌다.
석리 앞을 창녕 - 이방간의 1080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대지국민학교가 남쪽 들판에 있다.
행정리는 김천과 석동 2개리이다.
** 김천
쇠내라 불리는 석리의 동편 마을의 행정리 명칭이다.
** 쇠내(金泉)
예전에 토평천이 지금의 흐름과는 달리 맥산 잉어바위에 부딪친 다음 북쪽으로 틀어 옥산앞 산쪽으로 붙어 김천, 석동 앞으로 흘렀다 한다.
이때 이 마을 앞에 흐르는 내 이름을 쇠내라 불렀는데 그에 따라 마을이름도 쇠내가 되었다. 김천은 쇠내의 차자이다.
지금은 동리 앞에 칠년 대한에도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어 김천이라 하나 쇠내의 차자를 모르는 이의 말이다.
김해 김씨들이 많다. 만취정(晩翠亭 ; 盧沈 遊憩所(유게소))과 원후재(遠厚齋 ; 김해김씨 봉선소)가 있다.
** 석동(石洞)
돌실을 석실리라고도 부른다. 마을앞에 큰 바위가 있어 100여년 전에는 석문동이라 불리었다 한다. 그러다 마을앞 보리방우가 있어 석동으로 개칭되었다. 창녕 성씨의 세거지이다.
아석정(我石亭 ; 成圭鎬 書塾), 일신당(日新堂 ; 成樂安 遺亭) 등이 있다.
** 작령골(鵲嶺)
석동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이 근처가 까치와 연관이 있는 까치 형국이라 하여 작령이라 부른다. 이 마을 북쪽이 도작골이다.
골짜기 안의 마을이라 하여 골말이라고도 불린다.
** 오삭골
석동과 김천 두 마을사이에 있는 안 골짜기를 오삭골이라 부른다. 오삭골은 오작골(烏鵲谷)의 변화로 보이는데 까치골을 말한다.
** 아래담
** 만추산
** 당산등(堂山嶝)
석동 서편 창산과 경계선에 위치한 야산(칠봉산0으로 7개 봉우리중 6봉은 창산리에 속하지만 산(龍)의 머리(頭0가 석동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봉우리는 전에 창산부락에서 당산제를 지냈으므로 당산동이라 하는데 그 흔적으로 세로 1m, 가로 2m, 높이 60cm되는 석상(石床)이 있고 그 뒤에 고목이 있다. 지금은 당산제를 지내지 않는다.
** 진등
만추산의 산등으로 산 줄기가 길게 생겼으므로 진등이라 한다.
** 뒷고개
김천 북쪽, 마을의 뒷편에 있다하여 뒷고개라 부른다. 이 고개옆에는 대합면의 사람들이 창녕자으로 가는 길에 넘어야 하는 월령 마을 앞의 장고개가 있어 마주 보인다.
** 깐치고개
작령 마을 뒤의 고개인데 까치 형국이라하여 불리어진 고개이름이다.
** 갓들고개
까치고개라고도 부르는데 전에는 갓들고개라 불리었던 고개였다. 이 고개 이름이 마을 이름으로도 되었다. 지방도를 개설 할때 이 고개를 낮추기 위해 절단하였더니 피가 흘러 나왔다고 전한다. 이고개 마루에 둘레 한아름 되는 정자나무가 있따.
갓들이란 갓(나무를 해오는 산을 갓이라 한다) 에 딸린 밭을 가리키는데 고개를 넘으면 갓들이 있었다고 한다.
** 개야골(加陽谷)
김천 동편의 골짜기로 옥산과의 사이에 있다.
** 보리방우
석동 오삭골 동남편, 대지국민학교 뒤 석리 구역에 마치 보리알처럼 둥글납작한 바위들이 산기슭에 수 십개가 모여 있는데 이를 보리방우라 한다. 보리방우는 맥산과 관계가 깊다 하기도 한다.
** 석동지(石洞池)
석동 동편마을 앞에 있는 저수지로 김천 마을 사이에 있다.
** 석동보(--洑)
석동 앞들에 물을 대는 보로 보리미에서 시작하므로 보리미보, 모산보라 하기도 한다.
** 찬새미와 참샘보
석동 남쪽에 있는 샘으로 물이 아주 차고 삼복 더위 때도 차거운 물이 솟는다하여 찬새미라 불린다. [새미]는 샘의 이곳 토박이말이다. 이 샘은 한발이 극심할 때도 찬 물이 솟아서 마을의 식수난을 해결해주고 주위 수십 필지 논에 모를 심었다 한다.
지금은 보가 되어 석동 남서쪽 들에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