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회무위사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會無爲舍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동법성신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同法性身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 아약향화탕我若向刀山 刀山自摧折 我若向火湯
화탕자소멸 아약향지옥 지옥자고갈火湯自消滅 我若向地獄 地獄自枯渴 안녕하십니까. 저희들은 <천수경>을 공부하고 있죠. 열 가지 願과 여섯 가지 向함에 대한, 열 가지 願부터 공부를 해오고 있죠. 열 가지 원이 이제 두 가지가 남았습니다. 그 동안에 여덟 가지를 공부했네요. 원아조등원적산 (願我早登圓寂山)까지 공부했습니다.
어제는 계(戒)와 정(定)과 혜(慧), 불교 공부의 기본인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의 길을 말씀을 드렸고 또 그를 통해서 갈 곳이 어디겠는가. 우리 진실 생명의 자리로 가는 것, 그것을 확인하는 것, 본래 그러한 자리가 나의 참 모습이고 내 본래 면목이다 하는 것, 그것과의 만남, 진실 생명과의 만남, 진실한 나와의 만남, 그것이 원아조등원적산(願我早登圓寂山), 원적산(圓寂山)에 올라 간다고 하는 표현이지 뭐 다른 뜻이야 있을 수가 없죠. 그 산에 올라가는 데는 무슨 길을 통해서 가느냐, 계정혜 삼학의 길을 통해서 올라갈 수 밖에 없다 하는 것입니다. 참 시사하는 바가 많죠.
그 다음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 大慈大悲하신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원컨대 내가 속히 무위사(無爲舍)에 모여지이다. 無爲舍. 집이 있습니다. 산에 올라가고 나니까 집이 하나 있는데 그 산꼭대기에 있는 집이죠. 그 집을 이름해서 무위사(無爲舍), 함이 없는 집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집에 우리 다 함께 모여지이다. 나도 거기에 모여지이다, 이 말입니다.
圓寂山은 진실한 나와의 만남, 본래의 나와의 만남. 정말 부처님과도 조금도 차별이 없는 그리고 영원히 生과 死를 초월해 있는 不生不死 또 不增不減의 진실한 내 생명과의 만남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 다 함께 無爲舍에 모이는 일이다, 함이 없는. 그렇게 진실한 생명과의 만남 다시 말해서 깨달음이죠, 見性이죠. 눈뜸입니다.
이렇게 깨닫고 나서 하는 일은 사실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했을 때는 이런 저런 하는 일이 전부 하는 일이고 낱낱이 걸리지요, 사사건건 걸립니다. 걸려서 참으로 어떤 일의 양도 우리가 있고(?) 그렇죠. 그리고 너니 나니 하는 그런 분별이 있게 되어서 참으로 피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진실한 나와의 만남, 진정한 내 생명을 발견했을 때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작용, 또 삶, 이것은 함이 없는 것입니다. 작용하되 작용함이 없는 것이고 하되 함이 없는 그런 함이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無爲舍, 함이 없는 집, 참 집 치고는 아주 좋습니다. 높고 아주 근사한 오십평 육십평 되는 그런 아파트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저기 저 근사한 단독주택도 아니죠. 그런 것 가지고는 無爲舍라고 감히 간판을 달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이 無爲舍라고 하는 간판을 달려면은 최소한도 나의 진실 생명, 정말 보다 더 다른 차원의 어떤 삶에 눈을 좀 떠야 되고 꿈을 좀 깨야 되고 그래야 無爲舍라고 하는 그런 집에 살 자격이 있지 않겠나,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 모두가 사실은 무위사에 모여서 살아야 될 것입니다. 불교의 최종 목적은 바로 圓寂山에 올라서 다시 말해서 진실한 내 생명과의 만남을 통해서 함이 없는 삶을 펼쳐야 되는 것, 그것이 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다 이렇게 설명드릴 수가 있죠. 함이 없는 집. 깨닫고 나서는 무엇을 해도 다 함이 없는 것이다, 함이 있고 싶어도 함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종일 밥을 먹되 쌀 한 톨 씹은 적이 없다, 종일 말을 하되 말 한 마디 한 적이 없다, 그런 禪師들의 표현을 우리가 종종 접하게 되는데 바로 그런 하루종일 먹어도 먹은 것이 없는 것, 그게 無爲舍의 도리고 하루 종일 말을 해도 한 마디도 한 것이 없다는 뜻이 바로 無爲舍의 도리다, 이렇게 볼 수가 있죠.
그 다음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 그렇게 돼 있는데 大慈大悲하신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옵니다, 법성신(法性身)과 같이 빨리 되어지이다. 원컨대 내가 법성신과 같이 빨리 되어지이다. 法性身은 그대로 法性, 法 그리고 性品, 법성의 몸, 진리의 몸입니다. 진리의 몸과 같이 되어지이다. 내가 진리화 되어지이다. 진리화 되어지이다. 바로 진리로서의 삶을 살아가지이다. 이(것이) 최종 소원입니다.
열 가지 願 중에서 마지막 願이 내 자신이 진리화 되어지이다. 그대로 진리가 되어지이다. 이런 말인데 사실은 진리가 될 수 있는 길도 한면으로 생각해 보면은 본래 진리이기 때문에 내 자신이 진리와 같아질 수가 있는 것이지 본래 진리와 거리가 멀다면은 法性과 거리가 멀다면은 진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진리화 될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하나입니다. 본래부터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 본래 法性과 眞理와 내가 동떨어져 있는 것을 이런 길을 통해서 하나로 만들어 가는 그런 일은 절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이지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불교 공부라고 하는 것은 본래로 내 자신 속에 완전무결하게 갖춰져 있는 진리성, 그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일깨워 내는 것이고 그것을 내것으로 제대로 쓰는 일, 그것을 불교 공부라고 하는 것이지 무슨 뭐 새롭게 어디에 없던 것을 만들어 오는 것도 아니고 또 부처님이나 누가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습니다.
내 자신 속에 이미 완전무결하게 갖춰져 있는 그것을 내가 제대로 개발해 쓰는 그런 일입니다. 제대로 인식하고 또 그 인식을 통해서 아주 깊게 굳게 믿고 믿음을 통해서 거기에 눈을 뜨고 또 눈을 뜸으로해서 그것을 내가 내것으로 활용할 수 있고 쓸 수 있는 그런 일입니다. 사실은 누가 주는 것도 아니고 새롭게 만드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이건 정말 무시겁(無始劫) 이전부터 무한한 세월 이전부터 이미 그렇게 되어 왔던 일이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설사 우리가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그러한 사실을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무한한 미래까지 영원히 영원히 法性身으로 우리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인 것이죠.
여기서 굳이 ‘내가 法性身과 같아지이다’ 표현은 이렇게 했습니다마는 사실은 같아질려면 앞서 말씀드렸듯이 본래로 하나이기 때문에 같아질 수 있는, 같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로 하나가 아니면은 같아지지 않는다는 그런 이야깁니다.
그래서 불교는 사실은 부처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좋은 가르침을 통해서 제도를 했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제도한 것이 아니고 우리들 자신 속에 제도될 그런 씨앗이 이미 갖춰져 있고 제도할 능력이 갖춰져 있고 그런 입장으로 봅니다. 그래서 제도 했으되 제도한 것이 아니다, 하는 그런 표현도 흔히 쓰지 않습니까.
어떤 입장이든지 부처님이 제도를 시켰든지 아니면 내 능력으로 제도를 했든지 간에 어쨌건 법성신과 같아지이다, 이것이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또 수행을 하는 최종목적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거죠.
열 가지 願을 다시 한번 정리를 해 보면은 맨 처음에 일반적으로 일체법(一切法)을 알아지이다, 원아속지일체법(願我速知一切法).
그 다음에 일체법을 알고는 지혜로 승화되어지이다, 원아조득지혜안(願我早得智慧眼), 지혜의 눈을 빨리 얻어지이다.
그 다음에 일체중생을 빨리 제도하여지이다 (원아속도일체중願我速度一切衆).
모든 좋은 방편들을 빨리 얻어지이다(원아조득선방편願我早得善方便).
방편을 얻어서는 반야의 배를 빨리 타지이다(원아속승반야선願我速乘般若船).
반야의 배를 타고는 고해를 건너간다(원아조득월고해願我早得越苦海).
고해를 건너가고 나니까 길이 하나 나타나는데 그 길은 이름하여 戒定慧 三學의 길이더라(원아속득계정도願我速得戒定道).
그래서 그 길을 따라서 올라가다 보니까 산이 하나 나타났어. 그래서 그 산으로 올라가는데 그 산은 圓寂山이더라(원아조등원적산願我早登圓寂山).
그 다음에 그 원적산을 올라가고 올라가다 보니까 맨꼭대기에 집이 한 채 있더라, 그 집은 無爲舍라고 하는 집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죠. 무위사에 가서 무엇을 할려고 하는가, 우리 모두 속회무위사(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 빨리 無爲舍에 모여서
온 인류가 다 진리화 되어지이다. 진리로 살아지이다 하는 그런 뜻으로 연결이 되겠네요.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
이게 이제 우리의 공부의 어떤 길이고 순수한 불교적인 공부의 나아가는 길과 또는 도달해야 할 목적, 그것이 이제 여기서 열 가지 願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불교는 願이 많죠. 아주 願이 많습니다. 축원(祝願)이니 발원(發願)이니 所願(소원)이니 서원(誓願)이니 행원(行願)이니 하는 그런 願 자가 붙은 낱말이 많습니다. 뭐 뜻이 크게 차이 있는 거는 아닙니다. 소원, 축원, 발원, 행원, 이 원(願) 자들이 거의, 바란다, 소원한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들에는 반드시 그 바람이, 소원이, 희망하는 바가 있게 마련인 것이지요. 피나는 고행과 수행을 한다면은 그건 더 말할 것 없이 큰 바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그 바람은 보면은 대개 한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입니다. 물론 나를 위시한 모든 사람이 함께 성불하여지이다. 또 모든 사람이 함께 이고득락(離苦得樂), 괴로움을 떠나서 낙을 얻어지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깨달음, 여기서 法性身이라고 하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깨달음으로 나아가지이다 하는 거, 눈을 뜨고 사는 것, 꿈을 깨고 사는 것, 뭐 그것이 가장 불교에서 값있는 삶이고 바람직한 삶이지 설사 꿈 속에서 수만 냥의 황금을 얻었다 하더라도 꿈 깨고 나서 이를테면은 동전 한 닢보다 못하지 않습니까. 꿈 속에서 수만 냥의 황금도 꿈 깨고 나서 동전 한 닢만 못하다고 하는 사실. 그런 비유를 불교에서는 가끔 들죠.
그래서 불교의 최종목적은 결국은 깨달음이고 바로 그것은 진리화되는 것이고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래서 진리의 삶을 우리가 살자고 하는 것, 이게 불교의 최종목적이다, 이렇게 봐 집니다.
이런 방향으로만 우리가 이야기 하다보면은 일반성이 없어지죠. 우리가 사실은 불교에 몸담고 불교를 공부하고 불교를 믿고 한다 하더라도 뭐 깨달음 그렇게 어디 취미가 있습니까? 별로 그렇게 매력이 없습니다. 당장에 내 앞에 떨어진 불덩어리 그것이 급하고 지금 우리 집안의 지금 이런 저런 문제 해결 이것이 급하고 당장에 저 아직도 이 밤에 공부를 하고 있는 저 내 자녀의 대학의 진로가 지금 급하고 하는 그런 것이 사실은 우리들의 시급한 당면과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개인적인 소원과 바램과 뭐 욕심이라고 표현해도 좋습니다. 그런 욕심과 소망,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런 것이 인연이 돼서 차츰 차츰 우리의 정신도 승화되고 불교에 대한 안목도 높아지고 또 각자의 인생에 대한 어떤 안목과 또 인생에 대한 깊이와 이런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또 불교를 통해서 또 이러한 시간을 통해서 차츰차츰 나아지고 발전되면은 사실은 관세음보살과 같은 이런 자비, 불교의 자비를 통한 중생 제도, 또 중생 제도 할려고 하는 그 깨달음의 안목, 그러한 것들은 차츰 차츰 우리에게 다가오리라고 생각이 들고 또 그것은 어떻게 보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실 한 생각 차이지요.
그래서 정말 삶의 진정한 의미, 그것은 눈을 뜨는데 있다, 인생에 대한 올바른 눈을 뜨는데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날도 그렇게 멀지가 않습니다. 뭐 당장에는 급한 문제 때문에 지금 눈코 뜰 새 없고 깨달음이 뭔지 열반이 뭔지 성불이 뭔지 나 알 바 없다 라고 할른지 모르지마는 사실은 그러한 것들이, 그러한 문제가 정말 꿈을 깨고 사는 것, 눈을 뜨고 사는 것, 지혜의 안목으로 사는 것, 이것이 참으로 나에게 시급한 문제고 정말 절실한 문제구나 하는 것도 어느 결엔가 정말 마음에 가까이 아주 다가서는 날이 멀지 않으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불교의 원대한 소원과 또, 자질구레한 것은 아니죠, 참으로 시급하고 다급한 그런,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한 그런 여러 불자님들의 소원들, 이러한 소원들 모두 다 함께 大慈大悲하신 관세음께 귀의함으로해서 다 이루어지는 그러한 마당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기 열 가지 원을 우리가 이렇게 살펴보면서 온갖 인간에 대한 문제들, 이것이 깨끗이 소멸되고 다 해결되고 온갖 불행이 다 사라져버린 그러한, 여기에 펼쳐진 온갖 소원이 다 이룩되었을 때 그러한 세계가 바로 法性身과 같아지이다 하는 그런 세계가 아닌가 하는 그러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願이 참 많은데 단순한 여기에 소개된 열 가지 願 만을 우리가 이해할 것이 아니죠. 뒤에 가면 또 여래십대발원문(如來十大發願文)도 나오고 발사홍서원(發四弘誓願)도 나옵니다마는 말씀 난 김에 불교의 바람직한 願 한 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보현행원(普賢行願)이라고 해서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에 열 가지 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불자로서의 가장 바람직한 삶을 펼치는 그런 실천 덕목이다 이렇게 보아지는 건데 이것을 통해서 사실은 온갖 그런 그 원이 다 역시 충족되어지는 그런 길입니다. 여기의 열 가지 뿐만이 아니고. 보현보살의 열 가지 행원. 뭐 여기서 그것을 낱낱이 소개할 그럴 겨를은 없습니다. 제목만 이해해 외워 뒀다가 다른 기회에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보현십대행원(普賢十大行願)도 아울러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방송분)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 원컨대 내가 법성신(法性身)과 같이 되어지이다 라고 하는 그런 대목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육향(六向)이라고 해서 여섯 가지 내가 향하는 곳이 이와 같이 변해지이다 라고 하는 역시 원력(願力), 또는 서원(誓願)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마는 여기서는 대장경에 실려있는 <천수경>에서도 다 같이 실려 있는 여섯 가지 向입니다. 물론 十願과 六向은 전통적인 <천수경> 다시 말해서 장경 속에 실려 있는 <천수경>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역시 우리가 독송하는 이 <천수경>에도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섯 가지 향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만약 도산(刀山) 지옥을 향한다면 도산지옥은 저절로 꺾어지이다 라고 하는 이러한 형식이죠.
이것은 앞의 열 가지의 원이 충분히 성취됐을 때 또 그 원이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은 수행자로서 또는 불교인으로서 원이 성취됐다 라고 하는 것은 어떤 개인적인 사소한 그런 원이 성취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말하자면은 열 가지 원에서 이야기됐듯이 열반의 산에, 원적산에 올라가지이다, 열반을 증득해지이다, 또 함이 없는 그 집에 모두 모여지이다, 또는 법성신, 진리의 몸과 함께 되어지이다 라고 하는 이러한 내용의 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成佛을 뜻한다 이렇게 봐도 좋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 효과가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가, 우리의 수행과 공부가 한껏 무르익어서 완숙한 그런 수행자 또 완전한 인격자가 되었을 때 다시 말해서 성불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 사람의 어떤 그 효과, 불교를 공부하는 효과, 불교를 믿는 효과, 뭐 성불의 효과, 그것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나타나야 바람직하겠는가 하는 것. 그것을 여기서 六向으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위에 말씀드린, 끝내는 열 가지의 마지막 願, 내 자신이 진리의 몸으로 되어지이다, 내 자신이 진리화되어지이다 하는 그런 원이 마지막이었죠. 진리화 되었을 때, 내가 진리가 되었을 때 진리와 내가 하나가 되었을 때 영원한 생명체를 또 부처님의 한량없는 그 공덕생명이 완전히 나의 것으로 됐을 때 또 내 자신 속에 있는 그런 무한한 능력과 무한한 그런 지혜와 자비가 완전히 나의 것으로 쓸 수 있는 그러한 수행에 이르렀을 때, 뭐 이러한 경우라고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리면은 成佛을 했을 때, 또 <천수경>의 입장에서 본다면은 관세음보살과 같은 그러한 능력, 그러한 자비, 그러한 지혜가 충만했을 때, 그러한 때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이 어떤 불교를 공부하는 효과, 수행의 그 효과, 이렇게 이제 표현할 수가 있겠죠. 그랬을 때,
아약향도산(我若向刀山) 도산자최절(刀山自摧折)
아약향화탕(我若向火湯) 화탕자소멸(火湯自消滅)
아약향지옥(我若向地獄) 지옥자고갈(地獄自枯渴)
아약향아귀(我若向餓鬼) 아귀자포만(餓鬼自飽滿)
아약향수라(我若向修羅) 악심자조복(惡心自調伏)
아약향축생(我若向畜生) 자득대지혜(自得大智慧)
라고 이렇게 여섯 가지로 표현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부의 효과, 수행의 효과, 또 불교를 공부하고 믿는 효과가 어디 이 여섯 가지로 다 표현이 되겠습니까마는 그러나 대표적인 이 여섯 가지의 표현으로서 불교를 수행하는 효과는 또한 충분히 표현되었으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또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나올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아주 열심히 지송을 해서 그를 통한 능력과 공덕의 하나의 효과로도 또 볼 수가 있습니다.
낱낱히 해석을 해보죠.
아약향도산(我若向刀山), 내가 만약에 도산(刀山)을 향할 때, 도산이라고 하는 건 칼산입니다. 이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지옥을 뜻하는 것입니다. 칼산지옥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내가 만약 칼산지옥을 향했을 때, 그 칼산은 저절로 꺾여지이다(도산자최절刀山自摧折).
또 아약향화탕(我若向火湯) 화탕자소멸(火湯自消滅), 내가 만약 화탕(火湯), 끓는, 불이 끓는, 끓는 불 속을 향했을 때, 그 화탕은, 끓는 불은 저절로 소멸해지이다. 이것은 이제 불이 활활 탄다고도 해석이 가능하고 또는 불을 통해서 쇳물이 끓고 있다 이렇게도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불타는 모습과 또 불을 통해서 쇳물이 끓고 있는 그런 곳이죠.
그래서 화탕지옥, 火湯地獄 하면은 바로 쇳물이 펄펄 끓고 있는 큰 가마솥을 생각할 수가 있고 또 지옥의 그림들을 보면은 큰 가마솥에 쇳물이 끓고 있는데 거기에 사람을 담궜다 건졌다 하는 그러한 모습들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역시 그와 같은 고통스러운 지옥을 내가 만약 향했을 때 그 화탕지옥이 저절로 소멸해지이다 이렇게 돼 있고.
그 다음에 아약향지옥(我若向地獄) 지옥자고갈(地獄自枯渴), 이렇게 돼 있습니다. 내가 만약 지옥을 향했을 때 지옥이 저절로 고갈해지이다, 말라지이다. 이렇게 이제 돼 있습니다.
여기에 이제 도산(刀山), 화탕(火湯), 지옥(地獄), 이 모든 것은 역시 이제 지옥입니다. 도산도 지옥이고 화탕도 지옥이고 또 그 다음 지옥이라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지옥인데 기타 다른 많고 많은 지옥들, 이런 뜻으로 세번 째는 그냥 지옥이다 라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도산지옥, 화탕지옥, 이 두 가지를 들고 그 나머지는 그냥 지옥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했죠.
이런 지옥에 이 수행자가 또는 불교를 믿는 사람이, 불교의 어떤 수양이 충분한, 그를 통해서 인격이 완성된 그런 사람이 그런 상황을 만났을 때 그대로 글자대로라면 그런 지옥에 갔을 때 그 지옥은 저절로 소멸된다, 화탕지옥(火湯地獄)도 소멸되고 도산지옥(刀山地獄)도 소멸되고 기타 많은 지옥들이 소멸된다 라고 하는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할 것이 좀 많습니다. 뭔고 하니 지옥에 대한 문제구요, 또 이왕 지옥(地獄)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불교에서는 사실 이 지옥에 대한 이름이 아주 많고 천당이니 또는 극락이니 열반의 세계니 하는 그런 것의 어떤 반대적인 곳으로 지옥이라고 하는 것을 당연히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지옥이라고 하는 말을 아주 많이 쓰고 <지장경> 같은 데는 지옥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낱낱 이름들을 들고 있습니다. 여기는 기껏해야 도산지옥, 화탕지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마는 <지장경>에서는 아주 많은 지옥이 소개되어 있고 그 지옥의 고통받는 그런 내용에 따라서 그 지옥 이름이 여러 가지가 분류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