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고 태어나시다)
마태복음 1장 18-23절 "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은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고 그녀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다. 따라서 예수님도 육으로는 사륵스(육신)가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 되는 것은 영의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영이 육과 결합되어 사람이 되었으므로, 그 범죄한 영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세 전에 여호와이셨으므로, 육에 들어간 영은 성령으로서 죄와는 상관없는 분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부터 아들의 지위를 승낙받다)
마가복음 1장 9-12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 부터 모든 권한을 물려받으신다. 마태복음 11장 27절에서『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사탄으로 부터 시험을 받다)
마태복음 4장 1-11절『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사탄과 예수는 세상적으로 말을 하면, 검사와 변호사 역할이다. 하나님은 대통령으로 비유할 수 있다. 법에 따라, 대통령이 죄인들을 기소하는 역할을 검사제도를 만들어서 권능을 주었다. 온 세상은 죄인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감옥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대통령이 감옥에서 회개하는 자에게 사면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 사면의 권능을 변호사 역할을 하게 될 그의 아들에게 맡겼다. 그런데, 검사는 당연히 자신의 역할에 도전하는 이 변호사가 탐탉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정말 권능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게도 하고 해서, 앞으로 수없이 많이 만날 것인데, 변호사가 검사에게 자신의 직책을 소개하고, 검사는 변호사를 시험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검사와 변호사가 대면하게 해 주는 역할을 대통령 비서실장이 맡았다. 변호사는 죄인들을 사면하기 위한 대책을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성령은 대통령 비서실장을 상징한다.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여 주리다 라는 말은 변호사가 회개하는 죄인들을 발굴해야 하는데, 많은 준비를 했다는 말이다. 변호사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배가 고픈 것이다. 검사는 변호사에게 세가지의 질문을 하면서, 서로의 팽팽한 기 싸움은 진행되었다.
첫번째 질문은 당신이 죄를 사면할 권능을 가졌다고 하는데, 여기 죄인 한 사람을 데리고 왔으니, 어디 이 자리에서 사면해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변호사는 아무 죄인이나 사면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을 사면한다는 말로 대답했다. 회개하는 마음은 자기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를 깨닫고, 그 분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러나, 검사는 변호사의 말에 응수하지 못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이 돌들은 율법 아래 있는 죄인들을 의미한다. 떡덩이는 생명이 있는 떡으로서 죄를 벗고 의인이 된 자를 의미한다. 즉 죄인을 사면해서 의인으로 되도록 해 보라는 것이다. 이게 예수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변호사인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먹는 자가 의인이 되는 것임을 말한다.
떡(하늘의 생명)을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말씀은 구약성경일 것이다. 모든 죄인은 동물을 죽여서 희생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 희생제사를 통해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말이다. 말씀 속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두번째 질문이다. 당신이 죄인들을 사면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만일 당신이 죄를 범하면 당신 스스로 사면을 하게 할 것인가 묘한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은 변호사도 세상의 법 아래 있는 자라는 것을 은근히 유도한 질문이다. 대통령은 변호사를 세상이라는 감옥에 파견할 때, 세상법에 적용받지 않도록 정해놓았다. 그런데, 변호사가 만일 검사의 유도 질문에 넘어가면, 법 집행이 가능해지며, 언제라도 검사가 변호사라도 법의 규정을 어기면, 기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변호사는 검사의 유도 질문에 대해서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서 시험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을 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검사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사람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는 행위는 자살행위이다. 율법에서 금하는 것이다. 예수가 율법을 어기게 되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 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예수도 철저히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유도 질문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을 말하고 있다. 사탄의 질문에 넘어간 자들이다. 능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가 영생을 얻게 할 조건으로 죄인을 위하여 율법을 준수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수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가 죄의 형벌을 지불하여 그의 모든 백성의 부채를 갚음으로서 수난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스스로 고난과 죽음에 자신을 종속시킨 것은 그의 능동적 순종의 일부이고,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종속되어 살았으며 종의 형상으로 활동하셨다는 것은 수동적 순종의 일부라는 것이다. 능동적 순종의 의미 속에 내포하고 있는 사상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과 예수님의 율법적 순종이 합해져야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정말 이단적인 발언들이다. 예수님은 율법 위에 계신 분이었지만,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율법에 따라 죽으셨다.
세번째 질문이다. 대통령께서 죄인들을 기소할 수 있도록 모든 권한을 나에게 주었는데, 당신이 대통령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으면, 나의 권한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당신이 대통령이나 다를 바가 없으므로,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차라리 기소권을 당신에게 다 넘겨줄 테니 당신이 북치고 장구치고 하세요 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는 내가 비록 사면권을 부여받았지만, 대통령은 절차를 중요시하므로, 당신의 권한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을 풀어주어서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큰 결단을 내린 것이니, 대통령이 지시한 대로 당신이 맡은 바를 열심히 잘 하시요 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검사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으므로 그 자리를 떠고 말았다. 변호사도 대통령실 행정관의 안내를 받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된 이야기이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이 성경 귀절은 마태복음 4장 8-10절의 말씀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4장 5-8절을 보면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사탄이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라고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죄인을 기소하는 기소권을 넘겨준 것을 의미한다.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에서 “절하다”라는 헬라어는 프로스쿠네세스(προσκυνήσῃς 기본형은 프로스쿠네오) 라는 단어이다. 아첨하다, 부복하다, 예를 표하다, 예배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서는 절하다 라는 의미보다, 미안하다는 의미로 예를 표하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하나님과 세상을 겸히 섬기는가에 대한 시험이다. 이는 영적 간음에 해당된다.
오늘날 교회에서 영적 전쟁을 말하면서 거의 대부분 사탄과의 전쟁이라고 말들을 한다. 죄인은 감옥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당연히 검사와 다투게 된다. 죄인이 검사를 바라볼 때는 마치 저승사자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서 벗어나 하늘로부터 태어난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사탄(검사)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에 대해서 죽었으므로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의 적은 다름 아닌 육적 자아인 것이다. 영적전쟁은 사탄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육적자아인 것이다. 영적 자아가 육적 자아는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일곱 족속과 싸우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에 해당된다. 만일 육적 자아도 좋고 영적 자아도 좋다고 생각하면, 하나님도 좋고 우상도 좋은 영적 간음을 하는 모양이다. 비진리에 속지 말고 진리에 서야만 살 수 있다.
(예수님이 천국을 선포하시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서『이때 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구분을 해야한다. 히브리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하늘 왕국이라 번역했는데,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이다. 개역개정은 천국이라고 번역했다. 천국은 한자어로서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늘 왕국이다. 하나님이 가까이 오셨는데,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것이다. 하늘 왕국이 가까이 온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가까이 온 것이다. 회개하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이키는 자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관사없는 단수 우라논은 눈으로 보는 하늘이다. 관사가 없는 복수 하늘은 세상의 교회를 의미한다. 관사가 있는 하늘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고, 관사가 있는 복수하늘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돌로 된 옛성전이 무너지고 새성전인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하는 사건이 바로 새성전을 의미한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옛성전의 무너짐이고, 부활은 새성전의 세워짐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첫열매이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부활의 열매가 된다. 그래서 성도가 성전이 되는 것이다.
(제자를 세우심)
예수님이 제자를 세우신 이유는 예수님이 이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는데, 그 하나님 나라가 제자를 통해서 확산되도록 함이었다. 처음에는 열두 제자를 세웠지만, 그다음에는 칠십인 제자를 세우시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는 거의 사백명에 가까운 제자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끝까지 복음(천국을 세우는 것)을 전파하도록 명하신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된 성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천국을 심는 것이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없으며 마음에 있다고 했다. 그것은 심령 속의 성전이다. 그래서 전도의 목적은 사람들의 심령 속에 천국을 심는 것이다.
(각종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심)
병든 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시며, 귀신을 쫒아내고, 죄를 사해주시는 등의 활동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강론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하나님나라와는 다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왜곡되어 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림)
제자들은 예수님이 고난받아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수차례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자들의 영적 상태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로 자주 어린아이를 등장시켰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과 병을 치료하고, 죽은 자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하여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유대지도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제자들은 메시야를 로마를 무너뜨리고 새로은 왕국을 꿈꾸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영적 상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다 도망간 것이다.
(나귀타신 예수님)
마가복음 11장 1-6절에서『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예수님은 벳바게와 베다니를 자주 들르셨으므로 그 지역의 지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며, 주변에 누가 나귀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님이 그 지역에 도착해서 주변을 다니셨을 것이다. 베다니에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에서도 등장한다. 문둥병 환자 시몬이 살고 있던 마을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제자 둘에게 그런 지시를 한 것이다.
나귀를 타는 예수님은 많은 의미를 가지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나귀는 부정한 동물로서 제물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출애굽기 13장 13절에서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라고 말한다. 앞부분(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을 히브리어로 보면,
וְכָל־פֶּ֤טֶר חֲמֹר֙ תִּפְדֶּ֣ה בְשֶׂ֔ה
『웨칼(모든) 페테르(첫태생) 하모르(나귀의) 팁데흐(너는 대속할 것이라) 브세흐(양으로)』나귀의 첫태생은 목을 꺽어 죽인다. 그런데, 나귀는 부정한 동물이므로 제물로 사용되지 않지만,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양을 대신해서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출애굽 당시에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을 구하기 쉽지 않을 때, 하나님이 나귀 첫새끼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나귀새끼의 주인은 어차피 죽여야 하는 동물인데,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니, 흔쾌히 승낙하는 것이다.
초태생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사람이 손을 대거나 타거나 해서는 안되었다. 초태생이 태어나면 칠일 동안은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팔일이 되면 구별하게 된다. 그래서 목을 꺽거나, 제물로 바쳐질 때까지는 매여있게 된다. 출애굽기 13장 12절에서『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초태생인 나귀새끼를 타는 예수님의 모습은 두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초태생(장자)이라는 것이다. 장자는 죽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모든 세상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성경은 말해준다. 실제 출애굽 전에 죽음의 사자가 지나갈 때 문설주의 어린양의 피를 칠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외한 애굽의 모든 장자는 죽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 죽은 것이다. 희생 양이 대신 죽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도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귀를 탄 예수님은 죄인(장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둘째, 나귀새끼는 어린양을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한다. 나귀새끼를 탄 예수님은 어린양으로서 죄인을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11장 8=10절에서『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 장면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만에 부활할 것을 말해도 “누가 크냐” 라고 논쟁한 제자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러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데, 유대인들은 세상을 뒤엎을 메시야가 왔으므로 다윗을 언급하며,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상태가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의 상태임을 비유적으로 보여주셨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셨다.
마가복음 11장 15-17절에서『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성전은 기도하는 것인데, 유대 지도자들이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성전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므로 이제 돌성전 대신에 다른 성전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2장 19-21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이 다른 성전을 주는데, 이전의 돌성전은 다 무너지고, 하늘로부터 오는 성전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돌성전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의 죽어야 할 육체를 의미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성전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돌성전)는 첫사람 아담을 예표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하늘로부터 오는 성전)는 마지막 사람 아담을 상징한다. 따라서 돌성전(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같이, A.D. 70년 경에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마가복음 13장 1-2절에서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오늘날 성전은 교회의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지는 성전을 의미한다. 오늘날 교회는 성도들이 모일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런데, 교회 사람들이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말을 하면 여전히 그들은 돌성전에 머물고 있으며, 유대 율법주의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서『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은 성전이 세워지지 않은 것이다. 성령세례는 곧 부활을 의미한다. 성령은 예수와 함께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이다. 로마서 6장 5절『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오늘날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은 자는 여전히 율법 속에 있는 자들이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고,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것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재림도 믿지 않는 것이다. 이게 율법 속에 있는 자들이다.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로 유대 땅에 태어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당시 성전 안에서 물건을 매매하듯이, 오늘날 교회를 통하여 사업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을 앞세워 장사하는 격이다. 교회를 주식회사처럼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지도자들이 권력과 타협하고, 정치한 것을 보면서, 오늘날에도 유사한 일들이 나타나는 것은 많은 교회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없고, 세상의 부와 권력과 명예 더 중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교회가 다 그렇게 타락한 것은 아닐지라도, 오늘날 교회가 율법주의 인본주의에 물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유월절 만찬)
마태복음 20장 28절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고 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날에『내가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얼마나 원하였는냐』라고 하셨다. 유월절의 어린양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유월절 음식을 먹는 것은 예수님이 대속물로 죽는 의미를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6장 54절에서『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했다. 그런데 6장 40절에는『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하셨다. 즉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아들을 보고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믿는다』라는 것은 예를 들어서 다른 종교처럼 대상에게 의지하거나 그 사람의 말을 믿는 그런 말이 아니라,『연합한다』라는 말이다.
『인자의 살과 피를 마신다는 말은 예수와 연합한다』는 말이다. 내가 죄인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 모든 자는『예수와 연합하여, 내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을 믿는 것이다.
(새계명을 주심)
마가복음 12장 28절에서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프로테: 프로토스)가 무엇이니이까』
프로테(πρώτη)는 순서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중요성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12장 29-30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카르디아스 καρδίας)을 다하고 목숨(프쉬케 ψυχῆς)을 다하고 뜻(디아노이아스 διανοίας)을 다하고 힘(이스퀴오스 ἰσχύος)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여기서 네가지가 등장한다. 카르디아스는 마음으로 번역되었는데, 데살로니가전서 3장 13절에서 『너희 마음(카르디아스)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파루시아)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카르디아스는 영적 마음이다. 파루시아를 강림으로 번역했는데, 교회 사람들은 종말 때 예수님의 지상 재림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도의 심령 속으로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서(재림),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지는 성전에 임재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마음으로 번역된 것은 새사람의 몸을 입은 영적인 마음이다.
프쉬케는 혼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혼을 의미한다. 이 혼은 죽어야 할 혼이다. 옷을 갈아입듯이 이전의 혼(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다한다는 말은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라는 의미다.
디아노이아스는 에베소서 2장 3절에서도 표현되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디아노이아스)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θελήματα τῆς σαρκὸς καὶ τῶν διανοιῶν)으로 번역되었는데, 헬라어로 보면, “육신과 그것의 마음이 원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라는 것은 육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육적 마음인 것이다. 육적 자아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씨뿌리는 비유에서 농부가 굳었던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가꾸어서 열매를 얻을 수 있듯이 그 이치를 깨닫고 하나님나라 발견하라는 의미다.
이스퀴오스는 능력 권세 힘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는다. 마태복음 11장 27절에서『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성도 역시 그리스도로부터 이와 같은 권세를 받는다. 권세를 받는 성도는 하나님으로 오는 것임을 기억하라는 말씀이다.
『둘째(데우테라:데우테로스)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데우테라(δευτέρα)는 그 다음이라는 말이다. 가장 중심은 하나님 사랑이지만, 그 다음은 이웃 사랑이라는 말이다. 사랑(아가파오)이라는 말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죽었던 영을 살리는 일이다.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합되어 죽었음을 믿고, 함께 부활되어, 새혼을 입고, 영이 살아나므로,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씨뿌리는 비유처럼 굳어있는 육적 자아를 깨어(디아노이아스) 하나님을 발견하고, 옛혼이 죽고(프쉬케인 혼을 다하고), 새옷을 입은 영의 마음으로(카르디아스:영의 마음), 심령 속의 성전이 세워져 왕 같은 제사장의 권능(이스퀴오스)을 부여받고 죽었던 영이 살아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이웃(교회 신도)에게도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닫게 해주어서 죽었던 영을 살리는 것이 바로 아가파오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한 서기관의 질문에 대해서 답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바로 앞에 부활이라는 주제로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육적 부활이 아니라, 영혼(영과 혼)의 부활임을 설명하신 것이다. 그래서 상당히 비유적으로 네가지의 단어를 이용하여 영혼의 부활과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셨다.
그런데, 서기관은『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라고 말을 한 것이다. 제사장, 서기관 등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굳게 믿었는데, 예수님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 분이 참 메시야 라는 것을 마음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표현을 다르게 했지만, 유대지도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분명 하나님은 한 분인데, 서로 다르게 믿는다는 말이다. 오늘날 모든 교회 신도들이 하나님을 한 분으로 믿는다. 그러나 자기들이 원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시내산에서 모세가 계명의 돌판을 받으러 간 사이에 금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제사를 한 그런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기복신앙을 바탕으로 한 인본주의, 율법주의, 다른 종교와 비슷한 영지주의적인 생각이 바로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또 마음(카르디아스)을 다하고 지혜(쉬네세오스)를 다하고 힘(이스퀴오스)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12:33)
카르디아스는 영적인 마음, 쉬네세오스는 영적인 지혜, 이스퀴오스는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권능을 의미한다. 이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고 여러가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평상시에도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분이 여인의 후손인 약속의 씨 메시야이구나 라고 여겼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표현은 할 수 없었으나, 마치 니고데모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컸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막12:34) 예수님은 한 서기관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있지만 현재적으로 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앙을 버리고 예수께로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 당시 유대교의 출교는 죽음처럼 여겨지는 그런 시대였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다.
오늘날 교리에 젖어있는 신도들이 교리를 벗어나면 영적으로 죽는 것처럼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현재적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으면, 심령 속의 그리스도의 재림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모두가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된다. 율법 속에 있는 자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하며, 하나라도 어기면 심판을 받는다.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당시 한 서기관이 지혜롭게 대답하므로, 예수님이 그에게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다고 말을 했지만, 오늘날 교회의 대부분은 지혜롭게 답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4장 21절을 대하는 태도때문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이 ( ) 부분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ὁ ἔχων τὰς ἐντολάς μου καὶ τηρῶν αὐτὰς ἐκεῖνός ἐστιν ὁ ἀγαπῶν με· 이 부분을 다시 번역해 보면, 『나의 계명을 가지는(에콘 ἔχων) 자와 그것들을 지키는(테론 τηρῶν) 자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첫째되는 계명은『네 마음(카르디아스 καρδίας)을 다하고 목숨(프쉬케 ψυχῆς)을 다하고 뜻(디아노이아스 διανοίας)을 다하고 힘(이스퀴오스 ἰσχύος)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나의 계명을 가지는 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는 자』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이다. “지키다” 라고 번역된 테론(τηρῶν)은 기본형은 “테레오”로서 방어선을 지키다, 보호하다, 상태를 유지하다 등의 의미다. 즉 성경의 규정을 행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마음에 새겨 잃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를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적용시키는데 있다. 계명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 사랑하는 것을 규정과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규정을 지키듯이 완벽하게 지키는 자가 있는가?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규정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스스로 완벽하게 규정을 지켰다고 말을 한다면 무슨 근거로 스스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 완벽하게 사랑했다고 누가 인정하는가? 그렇게 말하는 자는 정말 완벽하게 지키고 있는가? 여기에 답하려고 한다면 율법주의자들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서『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이 말을 확대 해석하여 장차 종말에는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도록 하는 환란이 올 것인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인내로서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므로 이를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 주셔서 이를 지켜 나갈 수 있다고 말을 한다. 그래서 계명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신부가 될 수 있으며, 새하늘과 새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말도 “계명을 지키는 것”을 율법주의적으로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항에 대해 행동하는 것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2장 7절에서『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테론)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여기도 마찬가지로 “지키다” 라는 헬라어는 테론이다. 즉 보존하다, 유지하다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것이다. 이를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이단이 생기는 것이다.
이단들은 계명을 지키는 것을 십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적용한다. 말하자면 율법을 지켜 행하자는 말이다. 하나님이 십계명(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다가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대하여 죄인임을 고백하고 장차 여인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짐승을 죽이는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서 이 짐승을 대체하는 메시야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율법을 예수님 당시에 유대지도자들은 율법주의로 확대 해석하여,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한 것이다.
오늘날도 교리에서 예수님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학적 개념에서 학자들은 능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가 영생을 얻게할 조건으로 죄인을 위하여 율법을 준수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수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가 죄의 형벌을 지불하여 그의 모든 백성의 부채를 갚음으로서 수난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스스로 고난과 죽음에 자신을 종속시킨 것은 그의 능동적 순종의 일부이고,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종속되어 살았으며 종의 형상으로 활동하셨다는 것은 수동적 순종의 일부라는 것이다. 기독교 내에서도 능동적, 수동적 순종을 지지하는 파가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파가 있다.
율법을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국가적인 법 또는 도덕법 정도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 이전에도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명령하신 규례들이 있다. 율법은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진리를 말씀한 것으로 생명과 구원을 내포하고 있다. 생명과 구원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저 도덕법이라든가,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각 나라의 일반법과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율법을 율법 속에 담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의 규정에 얽매인 율법주의로 바라본다면, 생명과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의 의미는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며, 이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이것을 율법주의적으로 지키느니 마느니 말하는 자들은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계명을 마음에 간직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가 이단을 배척하면서도, 스스로 잘못된 교리를 말하거나 헬라어 성경과 다르게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자가 있다면 그게 이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이 하나이듯 제자들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다. 이 기도는 원래 하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하나였듯이 다시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제자들이 세상으로 나가서 사탄에 묶여있는 자들을 해방시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데 앞장서게 해 달라는 의미다.
하나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은『하나가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이 세상에 있으므로『하나님과 하나가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가 아닌, 다른 생각을 가진 존재들이다. 하나님 앞에서 내 생각, 내 뜻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것을 창세기에서는『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내 생각이 존재하게 되었다』라는 말이다. 하나님 없이도『내가 하나님 처럼 될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결과를 낳게되었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라고 하는데, 세상에 사는 인간들의 관점은 오직 악한 세상에만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서로 다른 두 생각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는 악한 하나를 버려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 나라를 가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육신의 연약함을 체험하심)
마가복음 14장 32-35절『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프로슠소마이) 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카디사테)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프쉬케)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기도를 하는 모습이다. 지성소 기도에 해당된다. 카디사테(καθίσατε)는 예수님은 기도하고 제자들은 앉아있는 모습이지만,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기도하라는 말이다. 프쉬케는 혼이다. 혼이 심히 고민되고 죽게 되었다는 말이다.
마가복음 14장 41절에서『마음(프뉴마)에는 원이로되 육신(사륵스)이 약하도다 하시고』 프뉴마(spirit)는 영(성령)이다. 그래서 영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며, 소마(육체)로부터 온 사륵스(육신)는 육의 마음(육적자아: 일곱 가지의 유형)이며, 프쉬케(soul)는 혼이다. 혼은 영과 육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생명체(옷으로 표현)라는 의미다.
그래서 혼의 마음은 생명체가 갖는 마음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영생(구도의 길)을 생각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옛혼(옛사람)에 대한 죽음이다. 그래서 새혼(새사람)으로 부활한다. 새혼을 그리스도의 옷이라고도 한다. 베드로전서 1장 9절에서는 혼의 구원에 대해서 말을 한다.『믿음의 결국 곧 영혼(프슈케)의 구원을 받음이라』영혼이라 번역되었는데, 혼이다.
예수님의 사례를 통해서 인간의 마음은 세가지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영(성령)의 마음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나가는 마음이다. 둘째, 육(사륵스)의 마음이다. 첫사람 아담의 흔적인 육적 자아(일곱가지 육적 속성)이다. 그리고 셋째, 혼의 마음이다. 이는 육과 영이 결합되므로서 나타나는 마음이다. 혼은 옷과 같은 것으로서 영이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를 입고 있을 때는 불완전한 혼의 마음이지만, 육적 옷을 벗고, 하늘로부터 오는 옷(그리스도의 옷:영의 몸)을 입을 때는 온전한 혼의 마음이 된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은 복잡하다.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영의 마음이 없으며, 오직 육과 혼의 마음만 존재한다. 육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노력으로 혼의 마음을 개선시킬 수 있다. 그러나 개선해도 불완전한 것이다. 타 종교의 예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혼을 개선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더러운 옷은 아무리 잘 빨아도 완전한 옷이 될 수 없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자에게는 성령이 임하시므로 모든 것을 성령이 인도하신다. 그러나 육으로부터 오는 마음은 죽을 때까지 그대로 나타난다. 다만 혼이 예수와 함께 죽고(불에 태워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늘로부터 오는 혼(그리스도의 옷:영의 몸)으로 갈아입을 때, 육체 속에 갇혀있던 영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도들은 영과 육과 혼을 정확히 이해하고 구분해야만 자신의 정체성을 알 수 있게 된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갈 때 고민하고 슬퍼했다고 말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위대하신 이 분도 죽음 앞에서 혼이 심히 놀라고 슬퍼했다. 육에서 비롯되는 혼은 그렇게 반응한다. 위로받고 싶어서 제자들을 동반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심지어는『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창세 전에 계획하신 분이 이런 발언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이 쉽게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혼은 그렇게 반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혼은 자기(옷)라는 존재다. 혼은 불태워져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신다. 불세례는 혼에 대한 죽음을 상징한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바로 혼을 바꿔 입으라는 것이다. 이전의 혼을 부인하는 것이 곧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마가복음 14장 36절에서『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아프 ἀπ’ 에모우 ἐμοῦ)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에고 ἐγὼ)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수 σύ)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여기서 문법적으로 에고(나는)는 주어이다. 에모우(나의)는 소유격이다. 아프는 ~으로부터 라는 전치사이다. 수는 주어(당신은)이다. 그래서 다시 번역하면,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나의 것으로부터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마시옵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의미상으로는 나로부터 옮기는 것이지만, 문법적으로는 나의 것으로부터 옮기는 것이다. 나의 것으로부터 옮기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것은 육적자아(사륵스)를 의미한다. 잔을 받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십자가의 사역을 바라보는 육적자아에서 영적자아로 옮겨 달라는 말이다. 영적자아는 성령의 인도를 받음으로 이루어진다.
41절에서『마음(프뉴마)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πνεῦμα πρόθυμον ἡ δὲ σὰρξ이 문장의 영어(kjv)로는 The spirit truly is ready, but the flesh is weak. niv는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 마음이라고 번역된 것은 오류다. 프뉴마는 영(성령)이다. 성령(프뉴마)이 이끄시지만, 육신(사륵스)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말을 한다. 십자가의 사역이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는 말이다.
헬라어 사륵스(σὰρξ)는 육체(body)가 아니라, 육신(fresh)이다. 육체는 살 덩어리이지만, 육신은 바로 육적자아를 의미한다. 육적자아는 육으로부터 비롯된 육적 몸(육신)을 의미한다. 이 육적 몸(육적자아)은 일곱가지의 형태로 등장한다.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이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육체의 본성(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고 그녀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다. 따라서 예수님도 육으로는 사륵스(육신)가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 되는 것은 영의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영이 육과 결합되어 사람이 되었으므로, 그 범죄한 영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세 전에 여호와이셨으므로, 육에 들어간 영은 성령으로서 죄와는 상관없는 분이라는 말이다.
영과는 상관없이 육적 몸(사륵스:육적자아)은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육의 흔적으로서 누구나 다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죄를 가지고 태어나므로 육적 몸이 죄성(탐욕)을 가지게 되지만, 예수님은 비록 육적 몸(사륵스)을 가지고 있어도 성령으로 태어난 분이므로 죄성 자체도 성립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육적자아로 인해서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는 흔들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서 이 사역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이다.
(십자가의 죽음)
마태복음 20장 28절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고 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날에『내가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얼마나 원하였는냐』라고 하셨다. 유월절의 어린양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유월절 음식을 먹는 것은 예수님이 대속물로 죽는 의미를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한다면 죄를 대신 죽는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다. 많은 천사들이『하나님 없이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나님 나라의 옷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영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이 세상에 쫒겨와, 육체 속에 영혼이 갇힌 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요, 죄의 결과이다.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지은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가야 하는데, 육체 때문에 생긴 두가지의 걸림돌이 있다. 바로 죄의 문제와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혼이라는 옷을 입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를 통해서 죄와 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비록 세례 의식이지만,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이요, 혼에 대한 죽음인 것이다.
물세례는 죄에 대한 죽음을 표현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것을 받아드려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물세례는 죄를 씻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죄의 씻음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물은 죄에 대해서 죽음으로 부활시키는 약속(표)이라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해결된 것이다. 노아의 방주는 물세례를 상징한다.
그래서 두번째로 부모로부터 받은 옛혼(옛사람)을 벗고 하늘로부터 오는 새혼(새사람: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 입어야만 한다. 옛혼을 벗는 것이 불세례이다. 새로운 혼으로 갈아입기 위해서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의미는 먼저 옛혼(가죽옷)이 불에 타 죽고 성령으로 다시 새혼(그리스도의 옷)으로 태어난다(부활)는 것이다.
마태복음 3장 11절에서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누가복음 12장 49-50절에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은 불세례를 상징한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받은 옛혼(옛사람)은 죽고, 성령세례로 하늘로부터 오는 새혼(새사람:영의 몸)을 받는 것이다. 이를 부활이라고 말한다. 이 성령세례를 오순절에 제자들이 받은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가 된다. 불세례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하고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한다. 참고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불세례 뿐 아니라 물세례도 포함된다. 즉 죄(육적자아)와 옛혼(옛사람)의 죽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