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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三山고을(2) - 三山고을의 발전사를 기억하자.
오늘날 비록 농촌인구가 많이 줄었지만 시골의 생활환경이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나아졌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결과, 그 파급효과가 서부 경남의 오지인 이곳 삼산고을에까지 미친 것이다.
삼산고을, 이곳은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아 태어나고 자란 우리의 터전이다. 더구나 이 고을을 감싸고 있는 허굴산(墟窟山, 681.8m)과 악견산(岳堅山, 634m)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일어나 정상 부근에 산성을 쌓아 왜군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금성산(錦城山, 592.1m)에는 왜구 등 남해안의 외침 상황을 신속하게 한양의 조정에 전달하기 위해 봉수대를 설치했던, 그야말로 호국(護國)의 기상이 서려있는 자랑스러운 고장이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이 세상의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도도히 흐르는 세월의 흐름 앞에 이 삼산고을 또한 여기서 비켜나갈 수 없지 않겠는가.
우리는 흔히 조선을 ‘기록의 나라’라고 말한다. 500년간의 역사를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기록으로 생생하게 남긴 것은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기록이 없는 역사는 암흑의 역사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그냥 추측만 무성할 뿐 제대로 된 사실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아주 오랫동안 내려오던 유교전통 사회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1960년대 이후 국가의 경제개발에 따른 성장기에 이 지역이 크게 변화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삼산고을을 변화시킨 동인(動因)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또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럼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자.
오늘날처럼 우리 삼산고을을 크게 변화시킨 동인(動因)으로 도로(초기에는 신작로新作路라고 불렀다) 개통, 학교 설립 등을 들 수 있겠다. 그 가운데에서도 중요한 것으로는 외지와의 소통 창구인 교통망을 우선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삼산 고을의 위치에서 보면 몸의 신경계라 할 수 있는 교통망이 과거에 비해 훨씬 좋아졌다.
부산, 합천으로 연결되는 성리방면 도로(지방도 1026호선)와 부산, 대구, 진주로 연결되는 양리방면 도로(지방도 1089호선)를 통해 이곳 삼산고을의 지역주민들이 외지로 드나들 수 있는 정기버스가 하루에도 수차례씩 운행되고 있다.
삼산고을에 인접한 곳에 위치한 합천댐*의 준공 역시 이 지역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댐의 건설을 계기로 황강을 따라 군청소재지인 합천읍까지 왕복 4차선 도로가 시원하게 개설돼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변했다. 용주면의 황계, 장전 등의 여러 마을을 경유해 40분 이상 걸리는 옛 도로(지방도 1026호선)와는 비교가 된다.
♠ 합천댐 : 공사기간 1983. 12~1988.12, 발전량 5만㎾, 본댐 높이 96m, 길이 472m)
오늘날에는 장단 마을에서도 생활권인 합천읍이나 대병면소재지까지 갈 수 있는 마을버스가 매일 10차례 정기 운행하고 있다. 또 인터넷이 들어와 있으며, 전화는 물론 TV 등 가전제품이 집집마다 들어와 있다. 마을 앞 들판은 농지정리가 되어 가뭄에도 크게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기반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필자가 어릴 적인 50여 년 전에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던 일이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이러한 지역 발전이 처음부터 단시간에, 또 갑자기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나라 형편이 어려울 때라 사회간접자본이 턱없이 부족할 시기를 과거에 우리는 경험했다. 이 어렵던 시기에 우리 지역의 눈 밝은 선각자들이 앞장서서 그 어려움을 헤치고 삼산고을에 발전의 단초를 열었다고 본다.
필자가 생각하건대 우리 삼산고을의 발전에 획기적으로 단초를 연 아이템을 들자면 먼저 도로 개설을 비롯해 초등학교 개교(당시는 ‘국민학교’였다), 전기 가설 및 전화 개통(새마을운동 포함), 경지 정리 등 네 가지로 압축해 볼 수 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러한 일을 앞장서서 추진한 분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그 공적을 보답하는 의미에서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오늘날의 실제 모습을 확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삼산초등학교 졸업사진을 제외하고는 지난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별로 없어서 매우 아쉽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촬영한 사진도 세월이 많이 흐른 훗날에는 또 다른 귀한 옛 자료가 될 것이므로 이에 다소 위안으로 삼고자 한다.
가. 도로 개설
서부경남의 대표적인 오지인 이곳 대병에는 합천과 연결하는 성리방면 도로(지방도 1026호선)와 역시 대병과 삼가를 연결하는 양리방면 도로(지방도 1089호선)가 있었다. 이 도로는 우리 삼산고을을 외지와 연결하는 주요한 통로였다. 이 도로를 통해 지역주민들은 부산, 대구, 창원, 진주, 거창 등 외지와 왕래하였던 것이다.
이 지역에 도로( '새로 난 길'이란 뜻으로 신작로新作路라 불렀다)가 뚫리기 이전에 우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좁은 오솔길과 냇가를 건너고 재를 넘어서 걸어 삼가, 합천, 대병을 오갔다. 옛날에는 우리 삼산지역은 삼가현에 속해 있어서 5일장이 서고, 또 행정의 구심점이었던 삼가(三嘉)를 주로 오간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이루어진 행정구역 개편(1914년) 이전에는 삼가가 중심지였던 것이다. 이 삼가를 오가는 길은 두 길이 있었다. 먼저 성리와 장단1구 주민들은 오늘날 벌터 마을을 지나 허굴산의 깊은 계곡과 높은 재, 특히 용천골 재를 통해 삼가를 오갔으며, 양리와 쌍암(맞바구) 마을 주민들은 주로 양리의 송정마을을 통해 가회 장대를 거쳐 삼가를 오갔다고 한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합천이 군청소재지가 되자 자연히 삼가보다는 합천(陜川)으로 왕래가 잦아질 수 밖에 없었는데, 이 경우에는 성리의 오동골 마을이 그 관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오동골 뒤산을 넘어 용주면의 둔덕동과 용지리, 손목을 거쳐 합천을 오갔으며, 장단리의 일부는 황계폭포와 황계리, 장전리를 이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병(大幷)의 면사무소나 5일장을 이용할 때는 양리 방면은 양리의 바랑거리(도현)를 이용하고, 성리 방면은 엿세미 재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런 오랜 생활 끝에 이 지역에 외지와 연결되는 도로가 개통되었다. 도로 개통은 이 지역사회를 바꾸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먼저 합천과 성리, 대병을 연결하는 도로는 오래 전인 일제 강점기 때인 1940년대 초에 개통되었다고 한다. 당시 우리 대병과 바로 이웃해 있는 봉산면 술곡리(오늘날 놋점마을 위)에 대규모 금광이 개발되었는데(1965년 폐광) 이를 반출하기 위해 합천읍에서부터 도로를 개설한 것으로 밝혀졌다. 아주 오래된 일이라 이 지역의 생존한 고령자에게 여쭤보고, 또 도로관리청인 경남도청 도로과에도 문의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정확한 개설 연도를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또한 양리 구간은 6.25전쟁이 끝난 후인 1958년경에 개통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까지는 삼가면에서 가회면 도탄리까지만 도로가 개설되어 있었는데, 6.25전쟁 중에 낙동강 최후 전선이었던 마산(현 창원시) 부근까지 진격해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던 북한군이 예상치 못한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부랴부랴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때 황매산 기슭의 도탄리에서 도로가 끝나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탱크, 대포 등 각종 중화기를 버려둔 채 가벼운 휴대용 총기와 부상병들을 둘러메고 황매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들은 나중에 지리산으로 건너가 그 악명 높은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의 일원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자유당정부 시절에 이러한 빨치산의 토벌을 위하여 군사작전용 도로를 황매산 기슭에 뚫었고, 그 이후에는 황매산에서 대규모로 벌채한 나무를 반출하기 위해 그 도로를 확장하면서 1958년경부터 일반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이에 비해 양리 삼거리 - 성리 삼거리 간 도로는 이 보다 훨씬 후인 1970년에야 개통되었다.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좁은 오솔길이었다. 이 무렵 장단1구 원장단 마을에 문을 열고 있던 삼산초등학교에 도로를 연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역 유지들 간에 처음 제기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성리삼거리(개목정)에서 도로를 개설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다 그 이후에 이왕 추진할 거면 양리 도현동(바랑거리)까지 구간을 확대해 교통난을 해소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의견이 대두돼 논의 끝에 결국 성리–양리 구간으로 확대 추진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꿨으며, 처음에는 장단1구의 한정울 마을 앞을 경유하는 것으로 구상하였으나 후에 역시 바뀌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당초 이 도로개설에는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 수 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1960년대 당시만 해도 농촌 인구가 많을 때여서 어려운 가정 살림에 한 톨의 쌀이라도 필요할 때였다. 따라서 도로 편입예정지의 논밭 주인들이 순순히 내 놓을 리가 없다. 도로개설의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내가 소유하는 논밭을 지나가는 것에는 결코 반가울리 없다. 오늘날과 똑같은 ‘내 뒷마당에서는 안 된다'(not in my backyard)는 ‘님비(NIMBY)현상’이 그 당시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도로 편입부지에 대한 정부의 보상이 오늘날처럼 제도화 되어 있지 않을 때가 아닌가.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 당시 신명석(辛命錫) 도로개설추진위원장의 남다른 헌신과 열정이 빛을 발했다. 신 위원장은 도로에 편입되는 양리와 장단리에 있는 자신의 문전옥답을 무상으로 솔선해서 내 놓았다. 당시에는 꽤 비싼 값이었을 것이다. 이런 연후에 반대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설득해 나갔다. 격하게 반대하는 어떤 사람에게는 그의 친동생을 추진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해 어쩔 수 없이 동의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방식도 동원했다고 한다.
고가의 중장비를 동원하는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의 건설공법 역시 너무나 열악했다. 당시에는 모두 지역주민들이 지게나 리어카를 이용하여 흙과 자갈을 파내 옮겼고, 양리와 장단리의 경계선에 있던 암반구간에는 폭약 발파로 일을 진척시켜 나갔다. 암반에 구멍을 낸 후 장치한 화약이 “펑~”하고 굉음을 내곤 했는데, 이때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부근의 논밭에서 일하던 농부들이나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알려 미리 대피시키기도 했다.
♠ 양리 - 장단리 경계선에 있던 급커브 구간의 암벽을 제거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가장 난공사였을 것이다. 이곳의 큰 바위에 홈을 깊게 파 화약을 넣어 폭파했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렇게 해서 1963년부터 시작해 1970년까지 7년간의 긴 공정 끝에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3.7㎞의 양리삼거리(도현동)와 성리삼거리(개목정) 간 도로를 개설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비록 비포장 도로였지만 만년 오지인 이 고장에 도로가 개설되어 마을 앞에서 편하게 버스를 타고 합천이나 대병을 오갈 수 있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참으로 감격적인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 1960대에 어렵사리 개통시킨 양리-성리 간 도로, 당시에는 비포장이었다. 요즈음 시골 정기버스가 10여회 다니며 촌로들의 다리역할은 물론 외지와 소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후 도로 폭이 조금 넓어지고, 인근의 합천댐 건설을 계기로 1984년경 아스팔트로 말끔하게 포장되었다. 비포장도로로 있을 당시에는 마을 주민들이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담당 구간에 나가 폭우 등으로 훼손된 도로에 흙과 자갈을 채워 넣어 보수하기도 했다. 이를 부역(賦役)이라 불렀다. 도로가 포장된 이후에는 이 부역이 폐지된 것은 물론이다.
이 도로는 합천군 주관으로 2017년부터 시작해 도로선형개선사업을 실시하고 있는 중인데, 전체적으로는 왕복 2차선으로 확장하고 일부 구간은 곡선을 완화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대표적인 S자 인 서재밑 고개와 연못 구간을 대폭 깍아내리면서 직선화하였고, 양리 바랑거리의 삼거리와 인접한 S자구간 역시 도로 폭을 크게 넓히면서 곡선을 완화함으로써 차량의 사고 예방과 함께 운행에 크게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요즈음 이 도로는 외지로 통하는 정기 버스, 승용차는 물론 여러 농기계 등이 통행하는, 그야말로 지역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날 이 도로 구간은 1988년 말 합천댐 건설로 인하여 대병면 회양리(율정) 앞 도로를 대신하여 지방도 1026호(경남 산청군 산청읍 산청교차로 ~ 합천군 대양면 정양삼거리)의 일부로 포함되었고, 특히 양리삼거리에서 성리삼거리까지의 구간 도로이름은 ‘대병3산로’로 명명되었다.
♠ 양리–성리 간 도로가 지방도 1026호임을 알려주는 도로 표지판이 아래 귀이목 마을 부근에 서있다.
나. 삼산초등(국민)학교 개교
광복 후인 1948년 3월에 대병면 장단1구 755번지에 삼산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였다)가 정식 개교하여 1998년까지 2,612명의 동문을 배출하여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요람이 되었다.
그 무렵 농촌인구가 조금씩 늘어나자 1940년 10월에 삼산간이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가 1942년 4월에는 대병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 장단분교로 승격 운영되었다. 그러나 학교 교실도 없이 인근 윗귀이목(상조항) 권씨 재실에서 공부하던 어려웠던 시절에 청강사(晴岡寺)를 창건한 故 정규락(鄭逵洛) 진사로부터 학교 부지와 건물 한 채를 기증을 받아 1948년 4월 1일, 삼산초등학교로 정식 개교하였다.
♠ 필자가 다니던 1960년대 당시 삼산초등학교 모습. 이후 현대식 건물로 개축돼 학교로 운영되고, 1998년 폐교 후에는 합천자연학교로 사용되다 근래 완전히 철거되었다.
삼산초등학교 통계를 보면 처음 학교 문을 연 초기에는 20~30명씩 입학을 하다 한창 농촌인구가 많을 때인 1970년 초에는 120여명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여기에서 배출된 많은 동문들은 고위공직자, 법조인, 언론인, 기업인 등으로 성장해 국가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 국가의 경제개발에 따른 인구 도시집중과 자녀 출산율의 감소로 학생 수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다 결국 1998년 2월에는 5명의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배출한 후에는 면소재지의 대병초등학교에 통합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이 학교 건물은 합천자연학교(陜川自然學校)로 15년간 운영되다 2014년 말에는 그마저도 문을 닫자 학교건물 일체가 완전히 철거되고 말았다.
오늘날에는 학교부지 일부가 지역 주민들의 건강 증진을 위한 게이트볼 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학교 정문 옆에는 2016년 5월 15일 전국의 학교동문들이 모금해 세운 ‘삼산초등학교 옛터’라고 새겨진, 약 2.5m 높이의 화강암으로 된 교적비가 학교터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언젠가 농촌인구가 늘어나 다시 삼산초등학교 문패가 다시 걸릴 그 때를 기다리며.
♠ "여기가 여러분의 모교 삼산초등학교 옛터입니다. " 1998년 폐교된 이후 2016년 5월 15일, 전국의 동문 400여명의 성금으로 세운 교적비가 정문 옆에 서 있다.
다. 전기 가설 및 전화 개통
대도시 등 외부 지역과의 소통역할을 하는 도로는 하드웨어라면 이 전기와 전화는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농촌지역이라 하더라도 도시 인근에서는 인프라가 도시에 집중되는 관계로 부수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런 반면에 대도시와는 멀리 떨어진 서부경남의 오지인 이곳에는 아무래도 후순위로 밀려 그 혜택이 훨씬 늦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지인 이곳에 전기가 들어온 때는 1973년경이다. 합천읍에서 시작해 용주면을 거쳐 대병면 성리와 장단리(맞바구 마을)까지의 구간이었다. 당초 성리에서 엿새미 재(嶺, 대병면 회양리와 성리를 연결하는 고개)를 거쳐 바로 대병면 소재지로 연결될 것으로 모두들 예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과는 달리 장단리 맞바구 출신인 신용운(辛容運) 추진위원장이 지역주민이 없는 엿새미 재(嶺)를 경유하는 것보다는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장단리 방면으로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논리로 한국전력을 방문, 강력하게 설득했다. 결국 이것이 받아들여져 결국 장단리 경유가 관철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장단2구 맞바구까지 먼저 전기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전기가 하루빨리 들어오길 학수고대하던 면소재지 주민들의 실망감이 엄청 컸으리라.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인 1975년부터 양리, 회양리를 거쳐 면소재지까지 연장 가설돼 문명의 혜택을 보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 장단리 지역을 통과하는 전선주 모습. 전기도입은 전통적인 호롱불 시대를 마감하고 비로소 삼산고을이 문명지역으로 편입되는 큰 계기가 되었다.
현대문명의 필수인 전기가 들어오자 마을에 활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전화가 설치되어 외지와 소통이 가능해지고, TV 시청도 가능해져 국내외 소식을 직접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행정리동마다 한 대씩 이장집에 설치했던 행정용 전화가 차츰 가정마다 다이얼을 돌리는 수동식 전화로 바뀌고, 또 흑백 TV가 들어오자 이를 처음 대하는 주민들의 기쁨은 참 대단했었다.
그 이전인 1970대 초에는 전국적으로 “우리도 한번 잘 살아아보자”는 새마을운동이 크게 전개되었다. 이 운동에 영향을 받아 삼산고을의 모습도 크게 달라 지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초가지붕 대신에 슬레이트나 함석으로 바뀌고, 담장을 새로 쌓았으며, 마을 안길을 정비하는 등 농촌마을의 외형이 많이 달라졌다.
또한 1980년을 전후해 새로 개발한 볍씨 품종인 ‘통일벼’가 대량 보급돼 어느 정도 식량 자급자족이 이루어져 오랜 가난을 벗어나고, 냉장고, 선풍기 등 전자제품을 사용하는 가정이 늘어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인 2002년부터는 전국적인 통신망 확충에 따라 현대문명의 총아라고 하는 인터넷망이 우리 삼산고을까지 깔리기에 이르렀다. 또 오늘날에는 노령의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대부분 개인용 휴대폰을 갖고서 도시의 자녀들과, 또 마을 주민들끼리 원활하게 소통할 정도가 되었다.
이로써 시골 오지임에도 전기 가설과 전화 개통으로 외부 세계와 소통이 가능해 지고, 지역주민들의 문화수준도 한 단계 높아질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
라. 경지 정리
서부 경남의 황매산 기슭이라 할 수 있는 양리, 장단리, 성리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던, 자연적으로 형성된 계단식 들판이 각기 있었다. 이 들판 사이에는 황매산 계곡에서 발원한 금성천(錦城川)이 관통하고 있다. 그 가운데도 특히 성리에는 “고지대 산골에도 이런 넓은 들판이 있구나!”하고 놀라울 정도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그런 이 고을에 1988~1990년 사이에 큰 이변이 일어났다. 이 시골 들판에 역사상 처음으로 경지정리라는 대변화가 생긴 것이다. 시행처는 관할 관청인 합천군청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경지 정리과정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던 하천(예전에 이를 ‘또랑’이라고도 불렀다)을 없애 농토로 전환시키는 대신 새로운 물길, 즉 인공 하천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이런 개발의 부작용일까. 물속까지 보이던 1급수로, 많은 종류의 물고기가 서식하던 하천이 이제는 시멘트 옹벽에다 농약 등 화학제품의 증가와 함께 생활 오수까지 더해져 수질이 전보다 나빠지고 물고기 수종도 크게 줄어들었다. 앞으로는 하천에 보(洑)를 시공하거나 보수할 경우에는 하천의 생태계를 크게 고려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앞선다.
아무튼 이 같은 경지정리를 계기로 논밭 사이에는 농로가 새로 만들어져 경운기는 물론이고 트랙터, 콤바인 등 현대식 농기계가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과거 오랜 세월 농민들이 힘들게 등에 지던 지게나 소규모 짐을 나르던 리어카를 사용하던 전통방식은 사라지고 영농 기계화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요즘 농촌 들녘에는 딸기, 참깨, 고추, 버섯 등 특수작물을 재배하는 대형 비닐하우스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겨울철 들녘에 양파, 마늘 등을 재배해 이 지역의 농가 소득을 올리는데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 잘 정리된 성리지역 들판 모습. 이 경지정리는 삼산고을의 영농기계화를 앞당기는 전환점이 되었다.
한편 한국농어촌공사가 이 지역을 관통하는 젓줄인 금성천의 상류인 대병면 양리와 가회면(佳會面) 두심리(杜心里, 또는 杜尋里) 경계지역에 농수용 저수지(댐)을 건설한 후 2010년부터 그 하류에 농업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 농수가 2018년부터는 성리 들판까지 공급될 수 있도록 허굴산 자락을 통해 인공 수로를 내고 있는 중이다.
자연 하천수와 곳곳에 설치되어 있던 소규모 연못이나 지하 관정(管井)에 의존하던 탓에 과거에는 해마다 물 가뭄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이로써 물 가뭄에서 완전히 해방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전에는 논에 벼가 한창 자라던 때에 좋은 위치에 있던 일부 논을 제외하고는 대개 물이 귀한 편이었다. 그로 인해 가뭄 때면 서로 수로(물길)의 물을 자신의 논으로 끌어오느라 인접한 논 주인 간에 심한 언쟁과 몸싸움을 벌이곤 했었다. 이제 큰 가뭄 속에서도 농수로에 물이 항상 흘러내릴 정도이니 과거와 같은 몸싸움은 이제 옛일이 되었다.
♠ 황매산 기슭의 대병 양리와 가회 두심리 경계구역에 설치된 농수용 저수지(댐) 모습. 앞으로 2018년부터는 배수관을 통해 성리 들판까지도 농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게 된다.
앞으로의 전망
오늘날 전국의 농촌지역이면 예외 없이 고령화 현상이 심각하다. 그만큼 젊은 층은 없고 노령층만이 고향땅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보니 농촌인 우리 고향 합천군의 인구 역시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한때인 1965년에는 19만 8천명이나 되는 웅군(雄郡)이라고 대내외에 자랑했지만 40년이 더 지난 2016년 말 현재는 4만 7천명까지 줄어들었다. 우리나라의 산업화로 젊은 층이 대도시로 떠난 후 고향을 지키던 노령의 부모님 세대마저 별세하여 해마다 1천여 명씩 줄어든다는 이야기가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그런 가운데 다행히도 합천호가 바라보이는 대병면 지역에는 수려한 자연환경 덕분에 외지인의 유입이 늘어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퇴직자의 귀촌 귀향, 투자 목적 등으로 전원주택이나 펜션 등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이러한 현상이 언제 삼산고을 쪽으로 바람이 불어올지 알 수가 없다.
또 장기적으로는 함양~울산 간 고속도로가 건설돼 오지인 이곳 서부경남의 개발로 이어질 것으로 주민들이 크게 기대를 걸고 있다.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와 연결된 함양을 시작으로 대병면 회양리와 금성산을 관통한 후 성리 들판을 가로질러 용주면 황계리를 거쳐 의령, 창녕, 밀양을 지나 울산까지 이어지며, 합천호수가 바라다 보이는 대병면 회양리에는 고속도로 휴게소가 자리 잡을 것이라고 한다.
다만 예산 사정으로 동시 개통이 어려운 대신 단계적 개통으로 아마도 2020년대 초반에는 전 노선이 개통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미 실시설계가 끝났고, 울산~밀양 등 일부 구간은 공사가 이미 진행 중이므로 언젠가는 전 구간이 개통될 것이다.
아무튼 함양~울산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황매산과 삼산, 그리고 합천호 등지의 관광객 증가는 이 지역을 변화시키는 또 다른 동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우리 합천군이 인근 서부 경남의 거창, 함양, 산청군과 함께 정부가 추진하는 항노화(抗老化) 및 웰니스(Wellness) 관광산업 육성대상 지역에 포함돼 있다. 따라서 앞으로 이러한 항노화 산업과 의료관광산업의 연계 발전 역시 이 고장의 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 내다보인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속도로 개통과 항노화 산업의 육성 등을 통한 이 지역의 변화는 전국 어디에 못지않게 환경과 개발이 잘 조화된 ‘살기 좋은 고장, 청정 삼산고을’이 되길 기대한다. 끝
☞ 2016년 말 최초 작성 이후 2019년 6월에 1차 수정 보완<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