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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는 도올 제7화
1. 얼따이 전격 해부
1억 위앤 정도의 재산을 가져야 얼따이라 불린다. 한화 177억 원 정도이며, 중국에서 6만 7천 명 가까이 된다.
얼따이 : 중국의 사회계층을 나타내는 신조어. 후얼따이(재벌 2세). 싱얼따이(연예인 2세) 등이 있음
후얼따이의 이색적인 취미가 유행하고 있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알파카를 애완동물로 데리고 다닌다. 중동 지역 갑부들이 사자나 호랑이를 키우지만 데리고 다니지는 못한다.
올해는 병신년 원숭이해를 맞이하여 ‘피그미 마모셋’이 유행하고 있다. 마리 당 530만 원 정도이다.
피그미 마모셋 : 성체 길이 14~16Cm. 가장 작은 영장류 중의 하나. 멸종 위기등급 IUCN 관심필요종
2. 중국의 빈부격차
그러나 너무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아주 좁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을 달팽이족이라고 부른다.
달팽이족 : 비싼 집값 때문에 비좁은 집에서 사는 사람
그뿐만 아니라, 개미족, 생쥐족, 컨테이너족과 같은 신조어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급성장하는 중국의 어두운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생쥐족 : 북경 시내 지하 방공호에 사는 저소득층을 가리킴.
생쥐족은 전쟁에 대비해서 만든 방공호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북경에만 10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3. 시진핑의 흑과 백
중국 역사상 모택동이 가장 높은 지지율로 주석이 되었다. 시진핑의 지지율은 99.86%였다. 젊은이들에게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반대 의견도 있다. 시진핑은 국가주석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인터넷 기사가 검열을 당해 법적 처분까지 받았다. 서방에서는 시진핑의 1인 체제에 대해 경계를 하고 있다. 반대로 중국내에서는 시진핑의 인기라고 평가하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선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 것이 자연스럽다. 99.86%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아니면 검열의 결과인지 확실히 판단내리기 어렵다.
여러 정보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서 충분히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이다.
4. 시진핑의 인생 삼경계
이번 차돌상에는 시진핑 주석 자신이 자기 인생을 총평한 글귀가 적혀 있다. 이 글을 해설하고, 수업을 시작한다.
시진핑이 자기 인생을 총평하는데,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왕국유의 말을 이용한다.
왕국유(王國維, 1877~1927) : 청말 민국 초기의 대문호. 신학문의 개척자.
왕국유는 못 말리는 천재였다. 문학, 미학, 사학, 철학, 금석학, 갑골문, 고고학, 물리학, 수학, 논리학 등을 취미로 공부했다. 일본 유학만 했는데, 10개 국어에 능통했다. 중국 젊은이들에게 심오한 영향을 준 사람이다.
어떻게 돌아가셨을까? 어느 날 갑자기 이화원 어조원(魚藻軒)이라는 누각에 가서, 곤명호수를 들여다보다가 자살을 한다.
이화원 : 북경 서교에 위치한 청나라 황실 별궁.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사상가들에게는 살아가는 상식의 세계를 이 세계가 너무 받아들이지 못할 때 오는 절망감이 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인간사화 (人間詞話, 1910년 출간) : 중국 문학의 경지를 서양의 철학, 미학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차원 높은 평론서.
이 분이 쓴 ‘인간사화’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古今之成大事業 大學問者 必經過三重之境界.
예나 지금이나 위대한 업적과 위대한 학문을 성취한 사람들은 반드시 세 차원의 경계를 거친다.
昨夜西風凋碧樹
어젯밤 서풍이 불어 푸른 나무조차 다 시들었네.
獨上高樓
나홀로 높은 누각에 올라
望盡天涯路
끝이 없는 길을 끝없이 바라보네.
이게 무슨 말일까? 어렵다. 서풍이 푸른 나무도 시들게 하는 험악한 세상에 던져졌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인간은 높은 이상을 향해 발돋음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왕국유의 인생삼경계 중 제1경계이다.
시진핑은 어려서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서풍이 불어오는 인생을 경험했다.
衣帶漸寬
몸이 말라 옷띠가 느슨해지더라도
이 사람이 섬서성에 하방당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終不悔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
爲伊消得人憔悴
너를 위한 근심에 초췌해지더라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이 왕국유의 인생삼경계 중 제2경계이다.
衆裏尋他千百度
군중 속에서 그대를 찾아 천 번 백 번 헤매었지
同頭雲見
문득 고개 돌려보니
那人却在 燈花爛珊處
스러져 가는 희미한 등불 아래 그대가 있었다.
이것이 왕국유의 인생삼경계 중 제3경계이다.
시진핑은 ‘내 인생을 이처럼 잘 표현해 주는 말이 없다. 중국의 젊은이들이여, 제발 왕국유의 <인간사화> 글귀를 되씹어다오.’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책을 보면 시진핑을 ‘사려 깊지만 교활한 카리스마’ ‘황제 자리를 두고 벌이는 인류 최고의 권력투쟁’이라고 쓰는데,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면 교활한 수준의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황제 자리를 놓고 권력 투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마지막 어느 순간에 고개를 돌려 보니깐 스러져 가는 희미한 등불 아래 그대가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우연히 주석 자리에 올라가게 된 것이다.
5. 산은 물이다?
왕국유의 인생 삼경계를 이해하려면, 우리 동양 철학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내가 오늘 이야기하는 것만 이해하면, 내 인생에서 추구해온 학문의 진리는 여기서 다 끝난다.
‘山是山, 水是水.’ 이게 무슨 말인가? 성철 스님이 말씀하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서 이 세계를 인식하게 될 적에 가장 소박하게 느끼는 인식 방법이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naive realism이라고 한다. 소박실재론이라고 한다.
naive realism. 소박실재론 : 사물은 우리가 지각하는 대로 존재하며, 지각하지 않더라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이론.
그 다음에 성철 스님이 도를 깊고 깊게 닦다가 ‘山不是山, 水不是水.(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고 깨달았다.
이 말의 예를 들면, ‘아름다운 나의 부인인 줄 알았는데, 아, 아름답지가 않구나.’ ‘믿을만한 남편인 줄 알았는데, 이 새끼 아니구나.’ ‘저기 아름다운 산이 있는 줄 알았는데, 산도 보이지도 않는구나.’ ‘공부만 하면 위대한 사람이 될 줄 알았더니 공부가 공부가 아니구나.’ 이런 것이 다 된다. 그런 인생의 절망감이 온다.
인간은 이 부정을 뛰어넘기 위해선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사랑이란? 결혼이란? 내 인생의 희망이란? 진정으로 내가 바라는 게 뭐냐? 이런 걸 생각하면서 추구를 한다.
그래서 고승이 깊게 도를 닦다가, 10여년이 지난 다음에 나온 계송은 ‘山是水, 水是山.’이다.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다.’이다.
이것은 무차별 경계다. 모든 만물은 경계가 없이 평등하다고 보는 것이다.
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보면, 아파트가 숲처럼 보이고, 숲이 아파트처럼 보인다. 사람이 개처럼 보이고, 개가 사람처럼 보인다.
‘아,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구나.’ ‘우리 와이프가 나쁜 여자도 아니구나.’ 이렇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경지가 높아진 것이다.
그렇지만 이 고승이 여기서 수련을 멈출 수는 없다. 성철스님이 마지막 순간에 내놓은 통찰이 뭐냐?
‘山是山, 水是水’였다. 이게 네 번째 게송이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우리 동양 사유의 근본에는 서양인들이 말하는 초월이라는 개념이 없다.
오늘날 칸트, 헤겔,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모든 서양 철학의 기둥은 transcendence(초월)이다.
하지만 우리 철학에는 초월적 존재가 따로 없다. 항상 현실세계로 돌아오는 것이 동양철학이다.
그 어렵게 그 높은 고루(高樓)에 올라가고, 고생을 해서 의대(衣帶)가 다 헐렁헐렁해졌는데, 어느 순간, 등불이 희미한 데 거기에 그 사람이 있더라. 이게 어느 경지겠는가?
마지막 경지다.
시진핑이 자기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는 그 경지는 인정해줘야 한다. 중국의 수천 년을 쌓아온 역사는 무시할 수 없다.
하물며 우리 한국 사람들이야말로, 중국인들보다도 고조선으로부터 더 깊은 문화적 소양과 철학을 쌓아온 사람들이다.
오늘 이렇게 천박한 정치 행태 속에서 얄팍하게 살아가는 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시고, 시징핑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보자.
6. 출세를 걷어찬 청년, 시진핑
시진핑은 아버지의 고양인 섬서성에 가서, 엄청난 고생을 했다. 시진핑은 어려서부터 잘 먹고 잘 컸기 때문에 체력이 좋았다. 그래서 솔선수범해서 농사일을 했다. 그리고 취사, 세탁, 재봉 같은 것들을 스스로 해결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사람은 그런 일을 하는 게 몸에 배어있다고 한다.
그러다 10번의 시도 끝에 11번째에 공산당 입당에 성공한다. 마침 운 좋게 1975년 청화대 화학공학과에도 입학한다. 그래서 다시 4년간 북경에서 생활하는 행운을 얻는다.
청화대 4년을 끝내고, 껑빠오의 비서가 된다. 껑빠오는 당시 국무원 판공청과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을 맡고 있었다.
껑빠오(1909~2000) : 중국의 전 국방부장. 국무원 부총리를 지냈으며 시 주석의 아버지와 오랜 전우 사이
껑빠오가 그 당시 굉장히 실력이 좋았다. 그래서 실력자인 껑빠오의 비서로 3년 간 근무하게 된다.
그런데 거기서 3년 간 있다보니깐,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중앙에서 이렇게 살다간 당 기관의 사무원밖에는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단을 내린다.
이 사람은 껑빠오 밑에서 좋았다. 미국도 갔다 오고, 대통령도 만나고, 돌아오면 우쭐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 병신이 된다.
‘이렇게 붕 떠서 지내다간 내 인생도 갈피를 못 잡겠다.’고 생각한다. 이게 시진핑이라는 젊은이의 과감한 선택이다.
그러면서 시진핑이 쓴 유명한 시가 있다.
7. 시진핑의 뿌리는 민중
여러분 양주팔괴라고 아는가? 양주라는 곳은 여러 중국 문인들의 로망이 담겨 있는 곳이다.
양주팔괴 : 청나라 양주에서 활약했던 여덟 명의 화가를 지칭하는 말.
그 팔괴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정판교(鄭板橋)라는 사람이 있다.
정판교(鄭板橋, 1693~1765) : 원명은 정섭(鄭燮), 호가 판교(板橋). 난(蘭), 죽(竹)에 뛰어났던 중국 청대의 문인 화가
동양미술을 전공하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정판교는 아주 유명하다. 왜냐? 대나무 그림은 이 사람이 최고다. 대나무 그림을 모범으로 삼을 때, 전부 정판교의 그림을 가지고 공부를 한다.
거기 시(詩)가 이런 것이 있다.
咬定靑山不放鬆
꼿꼿한 대나무 청산을 꽉 물고 놔주질 않네
立根原在破巖中
바위를 뚫고 그 뿌리를 내렸기 때문
千磨萬擊還堅勁
천 번 부딪히고 만 번 때려도 흔들림 없이 서 있네
任爾東西南北風
동풍, 서풍, 남풍, 북풍이여 마음대로 불어라.
아무리 불어도 끄떡없으리.
얼마나 멋진가! 시진핑은 정판교의 시를 이렇게 바꾸었다.
人根原在群衆中
내 뿌리를 군중 속에 내리겠다
任爾東西南北風
동풍, 서풍, 남풍, 북풍, 마음대로 불어라.
누가 나를 쓰러뜨리랴! 나는 꼿꼿이 설 수 있다. 이 정판교의 시를 가지고 이야기하면서 ‘나는 시골로 가겠소!’라고 한다.
껑빠오는 ‘시진핑, 너는 그러지 말고 군대로 들어가 장성까지 가라’고 한다. 그렇지만 시진핑은 위대한 선택을 한다. ‘나는 시골의 면서기로 가겠소.’라고 한다. 인민과 함께 인민 속으로 가겠다고 한다.
8. 성실한 일꾼, 시진핑
그래서 간 곳이 하북성 정정현이다.
시진핑, 1982~1985년까지 하북(河北)성 정정(正定)현에서 부서기, 서기로 근무
그래도 한학의 소양을 가지고 자란 사람들은 생각하는 스케일이 다르다. 처음에 고생을 한다. 부임 초기에는 막막했다. 그런데 군지(郡誌)를 읽어보니까, 거기가 바로 삼국지의 가장 유명한 장수인 조자룡의 고향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상산 조자룡이야말로 삼국지의 실제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상산(常山) 조자룡(趙子龍) : 삼국시대 촉나라의 무장으로 유비를 보좌하여 장비, 마초 등과 더불어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으로 불림.
조자룡은 상산(常山)이라는 지명을 호로 쓴다. 이 상산이 정정현의 한 부분이다.
상산(常山) : 오늘날 하북(河北)성 정정(正定)현의 한 지역 이름
상산 조자룡의 고향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뭘 하면 이 지역이 좀 살아날까?’ 고민하다가 조자룡을 활용해서 테마파크를 만든다.
영화 세트장 ‘롱꾸어후우’도 조성한다. 드라마 <홍루몽>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기도 한다. 그래서 지역 관광명소로 발돋음하게 된다. 그러면서 정정현의 경제 여건 개선에 기여한다.
그러다가 복건성으로 가게 된다.
복건성(福建省) : 중국 남동부 연안, 대만해협에 면해 있는 성. 해상교역의 요충지. 풍부한 자원과 역사
복건성에서 자그만치 17년동안 근무한다. 그 당시는 중국이 개혁개방 시기로 지역 개발을 위해 해외 기업 유치가 중요한 일이었다. 시진핑은 기업유치에 열을 올렸다.
심천이라는 유명한 경제특구가 있다. 가보면 굉장하다.
심천(深圳) : 중국 광동성에 위치. 최초 경제특구로 지정. 중국경제발전의 신호탄으로 평가받음.
70년대 후반 심천 거주민들이 경제 활동을 위해 배를 타고 홍콩으로 밀항을 했었다. 예전에 홍콩으로 가는 것이 금지된 시절, 사람들이 여기서 보트피플(Boat people)이 되어 홍콩으로 도망가곤 했다.
‘여기에 홍콩 못지않은 특구를 만들어서 노동자들이 마음 놓고 이상을 펼치게 해 주자!’고 해서 심천 경제특구를 만든 장본인이 시진핑의 아버지 시종쉰이었다.
시진핑은 복건성에서 탈 없이 일을 아주 잘했다.
하문(厦門)시 : 복건성 남부에 있는 도시. 1980년 경제특구로 지정. 중국 6대 경제특구 중 하나.
하문시가 그 당시 경제특구로 지정이 되어서, 시진핑이 하문시에 해외기업 유치를 위해 한국에도 온다. 당시에는 기업이 와달라고 구걸하는 입장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라. 이때 우리가 잊지 못할 대접을 했더라면, 지금 보답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1985년 하문시 부시장 -> 2012년 중국 국가 주석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역사를 배우는 이유다.
본건성 재임 시절, 해외 자본 유지, 대규모 공업촌 설립 등의 성과를 올린다.
9. 시진핑의 행운 숫자, 151
그리고 일반적으로 각 성의 서기급 인물은 중앙위원으로 선출이 된다. 그래서 1997년 제15차 당대회가 열리는데, 중앙위원 193명중에 리커치앙은 바로 들어간다. 그 당시 리커치앙의 위치는 공청단의 제1서기였다. 엄청난 것이다.
리커치앙(李克强, 1955년~) : 현 중국 국무원 총리. 제17, 18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그런데 1997년 당시 시진핑은 복건성 부서기였다. 중앙위원에도 못 들어가고, 후보위원 150명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때 시진핑의 순위는 151위였다.
나중에 검사를 해보니까, ‘어? 여기 왜 시진핑이 빠졌냐?’고 해서, 1997년 그 해만 특별히 151명을 뽑았다. 사람 운명은 모르는 것이다. 이만큼 시진핑은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시진핑을 좋게 평가했던 당 간부들이 있었다. 그래서 특별 선발을 한 것이다. 중앙위원 후보위원에 선발된 것만으로도 천행이다.
그 뒤로 2002년에 절강성 부서기 겸 성장대리 부임한다. 복건성과 절강성은 위상이 다르다. 절강성은 대단히 급이 높다. 남경, 항주가 모두 절강성이다. 절강성 부서기로 부임한 것은 대단한 것이다.
절강성(浙江省) : 중국 남동부 해안 지역에 있는 성. 성내 총인구는 5,400만 명 이상으로 성급 행정구 중 10위. 중국의 성(省) 가운데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 중 하나.
10. 혁명 영웅 아버지의 마지막 선물
여기 오게 된 과정도 재미있다.
절강선 부임 전인 2002년 5월 아버지 시종쉰이 돌아가신다. 아버지가 워낙 존경을 받으셨고, 심천 경제특구도 만드는 등 국가에 사심 없이 헌신을 하신 분이기 때문에 국장(國葬)을 치룬다.
상무위원 급 국장을 치르니깐, 당대 최고 권력자인 지앙쩌민, 후진타오, 원지아빠오 등 당대 상무위원급 의원들이 모두 문상을 온다.
그때의 상주는 당연히 시진핑이었다. 당시 상무위원들은 시진핑에 대해 별로 알지 못했었다. 그 많은 사람과 한 자리에서 인사를 하고, 만날 수 있었던 일은 정말 아버지의 선물이고, 시진핑에게 정치적 호기였다.
‘시종쉰한테 저런 아들이 있었냐? 어디서 뭐 해? 복건성에 있대요. 그래. 성실하게 생겼네.’ 이런 것이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그 해 10월 절강성 부서기로 부임하게 된다.
11. 발로 뛰는 시진핑
이 사람이 부임한 후, 절강성에 90개의 현시가 있는데, 9개월 동안 69개의 현시를 시찰한다. 그러면서 모든 기업들의 문제점, 민생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은 무엇인지 찾았다.
그리고 민생 기업 시찰의 결과를 공표했다. 모든 민원은 공정하게 의논해서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그래서 시진핑 주도로 절강성에 새로운 기풍이 잡혔다.
그리고 평안절강(平安浙江), 법치절강(法治浙江), 녹색절강(綠色浙江)이라는 통치이념을 내세워서 인기가 좋았다.
그리고 2007년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된다.
시진핑은 2002년 시종쉰의 장례를 계기로 상층의 모든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지게 된다. ‘시종쉰, 괜찮은 아들이 있었네...’ 이런 식으로 의견이 한 번 돌았다.
12. 상해 권력쟁탈전
그리고 2007년에 츠언리앙위의 사건이 터진다.
츠언리앙위(陳良宇, 1946~) : 前 중국 상해시 당 서기. 상하이빵의 핵심인물
상해 당서기는 중국 권력 위계에서 매우 높다. 실제로 No.2나 같다. 그런 츠언리앙위는 누구의 사람이었을까?
츠언리앙위는 상해 출신 장기 집권 원로인 지앙쩌민의 심복이었다. 원래 지앙쩌민은 2007년 시진핑이 올라간 자리에 차세대 리더인 츠언리앙위를 올리려고 했다.
츠언리앙위는 포스트 중국의 지도자감으로 우수한 인물이었다. 상해 사람들에게 상당히 구미에 맞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 중국의 모든 개혁개방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과도하게 성장 중심주의, 관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중국 성장률이 매년 10% 이상이었다. 성장 중심, 개혁개방 찬양의 풍조가 만연했다. 성장률이 6%가 되면 세상이 망하는 걸로 여겼다.
하지만 후진타오는 무지막지한 성장 위주, 개혁개방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다. 국정의 원칙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것은 올바른 지적이었는데, 지앙쩌민 파벌은 자신들을 견제하려는 술책으로 보았다.
그래서 츠언리앙위은 용기 있게 후진타오의 ‘개혁개방 문제점 제기’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자전거가 계속 가야지, 멈추면 쓰러진다. 우리 중국은 방법이 없다. 페달을 더 밟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후진타오는 ‘내가 지금 국가 주석인데 그렇게 대놓고 당파적 입장에서 비판을 해? 그리고 전 주석 지앙쩌민은 상왕처럼 정책까지 관여해서 우리를 옥죄일 수 있느냐? 츠언리앙위 조사해!’
그래서 츠언리앙위의 엄청난 부패 스캔들이 들어나게 된다.
츠언리앙위 스캔들 ‘상해 사회보장기금 사건’
사회보장기금 중 329억위앤(약 4조 6천억)을 횡령한 것이 2006년 발각됨.
츠언리앙위 18년형 선고
부패로 들어가버리니깐 지앙쩌민은 할말이 없었다. 그래서 츠언리앙위는 낙마한다. 그래서 츠언리앙위의 감옥행으로 상해 제1서기 자리가 비게 된다.
이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2007년 제17차 당대회를 앞두고, 새롭게 상해시 제1서기 자리에 앉는 사람은 차기 주석이 보장되는 것이었다.
이 자리를 가장 노린 사람이 누구였겠나?
뿨시라이와 후진타오 측은 공청단의 핵심멤버인 리커치앙이었다. 당시 상해 제1서기 후보 명단에 시진핑은 없었다.
인생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운이 찾아온다.
13. 시진핑의 킹메이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쩡칭홍(曾慶紅)이라는 사람이다.
쩡칭홍(曾慶紅, 1939~) : 2003~2008 중국 국가 부주석. 제16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쩡칭홍에 대해 우리는 잘 모르지만, 오늘의 시진핑을 만든 장본인이다. 요새 우리말로 하면 킹메이커였다. 시진핑이 주석이 된 것은 100% 쩡칭홍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람은 시진핑보다 14살이나 나이가 많다.
쩡칭홍 1939년생 시진핑 1953년생
쩡칭홍과 시진핑은 어려서 종난하이에서 같이 자란 사이다. 어려서부터 형이라고 하면서 따랐다. 시진핑이 중앙군사위 판공청 비서 시절, 쩡칭홍은 바로 옆에서 국가계획위원회 판공청 비서로 함께 근무를 했다.
쩡칭홍은 1984년 상해시 서기 비서장으로 발탁이 되면서, 지앙쩌민의 오른팔로 등극한다. 이 사람의 특징은 지앙쩌민 라인이면서도 후진타오 라인과 엄청 친했다. 양쪽 모두와 원만했다. 그래서 양쪽이 싸우고 있을 때, 양쪽을 설득할 수 있었다.
“각자 자기 사람을 밀려고 하지 말고, 아직 당대회까지 시간이 있으니깐, 이 자리는 시진핑에게 주면 좋을 거 같다. 이 아이가 참 괜찮다.”라며 양쪽을 설득한다. 이렇게 갑자기 쩡칭홍은 시진핑을 상해시 제1서기로 천거한다.
그러자 지앙쩌민이 결정적으로 시진핑을 ok한다. 지앙쩌민 주변에는 천거할만한 인물이 마땅치 않았다.
쩡칭홍의 위대함이란 뭐냐? 어려서부터 시진핑이 크게 될 사람인 것을 알았고, 평생을 관찰하면서 시진핑을 국가 주석으로 만들겠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러면서 그 시기에 시진핑을 도와주고 , 2007년 시진핑이 상해 제1서기에 올라가는 것을 보고, 2008년 국가부주석에서 자발적으로 퇴임한다. 멋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가 쩡칭홍을 잘 모르는 것이다. 진정한 킹메이커다. 구질구질하지 않다.
14. 2007, 운명의 비밀투표
아무튼 당시 쩡칭홍이 시진핑을 천거하자, 후진타오, 리커치앙 진영은 다급해졌다. 그래서 수를 낸다. 중국의 고위 간부들을 북경에 소집한다.
그래서 2007년 제17차 당대회를 앞두고, 지앙쩌민을 비롯해서 당, 정, 군 지도자 400여명이 북경의 모처에 모두 모였다.
그런데 거기서 방법이 없으니깐 후진타오가 제안을 한다. ‘차기 상무위원을 투표로 뽑자!’고 한다. 그때까지 투표는 없었다.
후진타오는 지앙쩌민을 물 먹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투표라고 생각했다. 후진타오는 완벽한 신념이 있었다. 투표를 공정하게 하면, 리커치앙이 100% 승리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지앙쩌민에 대한 여론이 나쁘니까, 지앙쩌민이 추천한 시진핑은 불리할 것으로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공개투표를 하면 100% 리커치앙이 승리할 것으로 예감했다.
그래서 2007년 6월 25일 무기명 비밀투표를 실시했는데, 거기서 압도적으로 시진핑이 선출된다.
이게 이상한 게 아니다. 왜냐? 그만큼 시진핑의 진실이 소리 없이 먹혀들어간 것이었다. 시진핑의 인생에 배어있는 진심이 통한 것이다. 그렇게 되니깐, 투표 결과는 뒤집을 수 없었다.
그 당시 후진타오는 지앙쩌민를 멋있게 곤두질을 치려고, 민주적 투표제를 최초로 도입했는데, 역으로 당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회심의 미소를 지은 지앙쩌민은 시진핑을 업고 돌진한다.
여기까지가 대강 시진핑이 주석이 되는 과정이었다.
질문 : 후진타오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군과 모든 권력을 한꺼번에 이양한다. 지앙쩌민도 2년이나 걸렸다. 시진핑은 자기편도 아닌 사람인데, 마지막에 어떻게 그런 신임을 보여줄 수 있나?
도올 : 그렇게 함으로써 지앙쩌민의 권력을 끊으려 했던 것이다. 결국 논개가 되는 방법밖에 없었다. 후진타오도 마지막 전략으로 지앙쩌민에게 승리한 것이다. 결국 중국 정치사에 무게를 더하는 나름의 합리성이 구현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진핑이라는 훌륭한 인물이 중국의 지도자로 부상한 것이다.
15. 시진핑의 대권 전략
질문 : 시진핑은 2002년부터 주석을 향한 야망이나 목표가 있었나요?
도올 : 시진핑은 2002년에서 2007년까지 절강성 성주을 할 때, 스스로 국가주석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았다. 그런데 상해 서기가 되고서는, ‘이제 나의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상해시 서기 재임 기간은 7개월밖에 없었다.(2007. 3월~10월) 그 시절 시진핑의 작전은 무엇이었냐?
모든 연설을 반드시 써서 낭독만 했다. 즉흥적인 연설 없이 신중한 문구만 골랐다. 7개월 동안 단 한 번의 애드리브가 없었다. 그래서 상해시 서기 재임 당시 시진핑에 대한 평가가 유명하다.
“그의 언행에는 풍채가 없고, 특징도 없고, 강직함도 없었으나, 일체의 허물이 없었다.”
바로 대권을 잡는 방식이 이런 것이었다. 이 사람은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기다린 것이다.
16. 도올, 시진핑에게 바란다.
시진핑을 우리가 연구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알기 위해서다. 우리 입장에서 중국에 대해 바라는 것을 몇 가지만 말한다.
우선 임기까지 모든 정책을 잘 수행해주길 부탁한다. 그걸 위해서 개인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체중을 좀 빼시라는 것이다. 너무 뚱뚱하다. 다이어트를 하시라는 것이 첫 번째 부탁이다.
둘째는, 시진핑이 지금 과도하게 반부패 전략을 관철시키면서, 그 반작용으로 과도한 모택동 숭배론을 들고 나오고 있다. 이것이 시진핑의 허약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2015년 반파시즘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이에 대해 많은 나라들이 중국의 패권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시진핑은 이 열병식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발언을 한다.
2015년 9월 3일 북경 천안문 광장 : 중국 인민 항일 전쟁 및 세계 반파시즘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대회
30만 감군을 세계에 선포한 것이다. 7개 군구를 5개의 전구로 축소시켰다. 별이 우르르 떨어진다. 그리고 군수 출납에 관한 모든 과정과 예산을 공개하게 했다. 또한 군대 소속 기업을 일괄 정리했다. 대대적 제도 개혁이 진행 중이다. 사람만 치는 게 아니다.
상식적인 인간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제도적 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원칙을 고수한다고 강력하게 표방해야 군대도 군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려면 모택동 찬양을 다시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으로 역사의 후퇴다.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에 대해 전면 부정하는 ‘역사 결의’를 한다. 11차 대회 6종 전회에서 나온 선언이 있다.
1981년 6월 중공 11기 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역사 결의”
“문화대혁명의 이론과 실천은 모두 착오적인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의미맥락에서도 혁명 또는 사회진보로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영도자 모택동의 한판 착오 발동일 뿐이며 반혁명집단에게 이용당한 것일 뿐이다. 그것은 당과 국가, 인민에게 엄중한 재난을 가져온 내란(內亂)일 뿐이다. 모택동은 주요 책임을 져야 한다. 단지 그의 착오는 한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 인간이 저지른 착오일 뿐이다.”
이게 공식적인 ‘역사 결의’다.
그러면 나는 이걸 지키라는 것이다. 중국의 사회주의 원칙, 평등주의 원칙에 대해 나는 찬성한다. 반파쇼, 프롤레타리아 혁명도 좋다. 이것의 모든 사상적 근거를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 경전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중국의 새로운 세대를 중국선진철학으로 교육시켜 나가야만 중국의 미래가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17. 중국, 시진핑 그리고 우리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진핑의 임기 동안에 우리가 따낼 것이 너무도 많다. 시진핑 세대까지는 한국에 대한 애착이 있다.
일제 강점기를 통해서 중국 공산당을 도와주면서, 오늘의 중국혁명정부를 수립하는데 우리 조선의 젊은이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끈끈한 정이 있다. 시진핑은 그런 역사적 하중을 모두 알면서 한국을 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면 이런 시대에 우리는 남북 대립이 아닌, 진심으로 평화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세계 만방에 전해야 한다.
여러분들은 후손들에게 전쟁을 물려주고 싶은가? 이것은 보수, 진보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절대로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남북 대결을 원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든 우리의 국가비전으로 평화를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18. 차이나는 시청자 퀴즈
시진핑이 주석에 오르기까지 이 사람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지앙쩌민 전 국가주석의 측근으로 중국 정계를 좌지우지했던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쩡칭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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