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서파문과 정한론의 준동
2. 국서파문과 정한론의 준동(蠢動)
일찍이 임진왜란이 침략괴수인 풍신수길의 사망과 왜군의 패전으로 끝나고 패잔병들이 왜열도로
몰려들어가자, 왜열도의 최고 실력자중 하나인 덕천가강(德川家康;도꾸가와 이에야쓰)은 오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끝내기 위하여, 자신의 사위가
영도하게 된 풍신수길의 잔당을 소탕한 후 덕천막부시대를 열었다. 막부주도하에 왜열도의 평화를 유지하고자 조선과의 평화공존을 모색한 덕천막부는
패권장악 이후 10여년간 꾸준히 노력한 끝에, 서기 1609년 6월 28일에 광해임금 집권한 조선 측과 기유조약(己酉條約)을 맺는 결실을
보았다. 그리하여 인조이후로는 일본에서 막부의 최고실력자인 장군(將軍;쇼궁)이 새로 계승할 때마다 막부측에서 승습고경을 위한 대차사를 조선에
보내면, 조선조정에서는 장군계승을 축하하기 위한 수신사(修信使)를 3년 이내에 파견하는 관례가 정해졌다.
수신사 일행에 대한
예우는 일본최대의 행사로서, 모든 예우의 방식과 절차에 있어서 조선을 상국(上國)에 준하여 예우했다. 수신사의 규모 또한 대단하여 일행의 정원이
580여명에 달했고, 수신사의 한 번 행차에 소요되는 경비 또한 무려 백만냥에 달했는데, 그 모든 경비는 일본의 각 제후들이 부담했다. 이는
막부 관학(官學)의 중심세력이 성리학을 숭상했고, 그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 이 황등 조선의 유림을 크게 공경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그리고
또한 이 행사는 새로 계승한 막부의 장군이 조선을 통하여 동아시아에서 국제적으로 그 권력을 인정받는 행사이기도 했기에 막부로서는 최대의
경축행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조이래 150여년간 장군이 바뀔 때마다 일본에 가는 수신사의 과다한 접대비용에 질린 막부와 제후들은
경비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나중에는 조선사절단이 전달하는 국서를 일본의 전권(全權)이 대마도에서 받고, 또한 대마도에서 수신사 일행을 대접하는
소위 '역지행빙'을 행하기로 하였다.
그러한 추세에 따라서 대마도주는 역지행빙에서 오는 이익을 중간에서 독점하려고 23년간
막부와 꾸준히 교섭을 벌인 결과, 서기 1811년 5월에는 마침내 대마도에서 조선사절단을 맞이할 수 있었다. 막부는 대마도주에게 백만냥을
접대비로 내어 줌으로써 대마도주는 거대한 중간이익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서기 1837년에 장군이 다시 바뀌어 일본으로부터 승습고경을
받은 조선 측에서는 전례대로 수신사를 파견하려 했으나, 막부와 대마도주 사이의 갈등과 일본의 국내사정 등으로 거듭 연기되면서 서기 1866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개국 후에 국내사정이 몹시 불안정했으므로 다시 10년을 연기하게 되었다. 여하간 식량의 절대 부족으로 조선으로부터
매년 일정량의 쌀을 하사받는 등 조선과의 관계로 조선 측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대마도주는, 두 나라간의 교섭에 있어서 항상 중개적
역할을 담당하며 양측으로부터 이익을 추구해 오고 있었다.
서기 1867년 10월 14일에 장군 덕천경희(德川慶喜)가 명치왕에게
정권을 반환하며 조선과의 국교를 염려하여 그 다음날로 조선에 사절을 파견할 것을 촉구했다. 그런데 왕정복고 이후에도 그 특유의 외교술로 여전히
양국간의 외교권세습을 인정받은 대마도주는, 일본 국내의 변화에 발맞춰서 종래의 국서양식(國書樣式)을 조선 측과의 어떠한 사전교섭도 없이 임의로
변경하여, 갑자기 조선을 하대(下待)하는 무례한 국서를, 그것도 대마도주 자신의 명의로, 명치왕의 왕정복고 통고서(王政復古通告書)를 송달했다.
예전에 없던 형식과 문구로 가득찬 오만한 국서를 본 조선 측에서는, 그러한 국서양식이 기유조약에 대한 명백한 위반임을 알리고, 접수도 하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 그리하여 일본외무성과 대마도주간에는 심한 갈등이 빚어졌다.
대마도주의 실책으로 왕정복고통지서의 접수를 조선
측으로부터 거부당한 명치정부는 크게 당황했고, 일본국서의 접수를 맡았던 동래의 왜학훈도(倭學訓導) 안 동준에게 통사(通詞)를 보내어 교섭과
절충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문제가 된 국서의 문구들 중에서 황실(皇室)을 조정(朝廷)으로 고치는 등 협의가 그런대로 잘 진행되어 가서, 안
동준이 동래부사를 통해서 조정의 재가를 얻은 후 그 결과를 서기 1870년 6월 1일까지 회답하기로 했다. 조선정부측도 예전과 같은 수준에서의
일본과의 교린을 원하고 있었던 때문이다.
그런데 서기 1870년 5월 3일(양력 6월 1일)에 일본주차(駐箚) 북독일연방
대리공사인 브란트가 독일군함을 타고 일본의 구주를 시찰한 후 왜인 5명과 함께 부산에 입항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브란트는 왜인들 중에서
조선인들과도 잘 아는 통역관 중야(中野)를 데리고 동래부사 정 현덕을 만나서 조선과의 통상을 교섭하려 했다. 정 현덕이 부하를 파견해서 브란트의
방문목적을 물으니 그는 왜인통역을 통하여 자신의 의사를 밝혔으나 정 현덕은 자신이 처리할 사항이 아님을 알렸으므로 브란트의 의도는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그동안 독일군함은 함포를 쏴 대면서 시위를 한 후 다음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소식을 들은 대원군 집정하의 조선인들은 대노했고,
'왜놈들이 양인(洋人)을 데리고 다니며 조선을 침해하려 한다'고 보고 일본을 크게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조선인들은 왜(倭)와
양(洋)을 하나로 보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던 명치정부는 조정된 국서협의안을 보고 기뻐하면서, 서기 1870년 11월에 수정한
내용대로 다시 조선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이미 척왜(斥倭) 기운이 높던 조선정부 측은 그 국서의 접수도 거부하고, 기유조약에 준해서 원칙대로 할
것을 명치정부 측에 통보했다.
그런데 서기 1871년 7월 14일에 일본국내의 모든 번(藩)을 해체하여 현(縣)으로 만드는
중앙집권적인 폐번치현이 단행되면서, 그동안 소속이 불명했던 대마도가 졸지에 일본의 일개 현으로 강제편입되어 버리자, 외교권은 명치정부의
외무성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기유조약대로 하자면 대마도주가 양국간의 국서전달을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폐번치현에 의해 대마도주의 외교권을
접수하려 한 일본 외무성이 직접 교섭해 온 것이 새로운 문제가 되었다. 난관에 봉착한 명치정부는 서기 1872년 7월에 대마도주에게 외교권
취소처분을 내렸는데, 그러자 대마도주는 조선의 예조참판에게 '대마도주의 조일 외교세습권이 폐지되었다'고 사실대로 통보했다. 그러나 왜학 훈도 안
동준은 자신의 재량으로 그 통보를 접수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서 국서접수의 경과를 지켜보며 부산의 왜관에 체류중이던 왜인들은, 각자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사태를 진전시키려고 시위운동까지 벌였으나 아무 성과도 얻지 못했다.
이 무렵 왜열도에서는 왜인들 자신의 생존을 위한 큰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명치유신이래 졸지에 실직자로 전락한 50여만 명에 달하는 전직 무사(사무라이)들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자,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들의 불만을 해외공략으로 해소하려는 불순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국수주의자들은 그 궁극적인 공략의 방향을
조선으로 삼고, 치밀한 계획을 추진해 가고 있었다.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이라는 괴논리가 등장한 것이다. 저들은 동래부의 관헌 몇몇을
매수하여 조선의 국정을 세밀하게 정탐하고 분석한 후, 30개 대대를 동원하여 50일이면 완전 정복이 가능하다는 등 몽상에 빠지기도 했다. 그에
대한 반대도 적지 않았지만, 대체로 호전적인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서기 1871년에 영국공사 웨이드의 후원으로 청국과 대등한 관계의
수호조약을 체결하자, 기고만장해진 명치정부는 조선을 위압적인 방법으로 개항시키는 방향으로 작전을 바꾸게 되었다. 실상 그동안 300여년 간이나
아시아의 종주국임을 자타가 공인해 온 청국과 대등한 조약을 맺음으로써 대외적으로 국격(國格)이 높아진 명치정부로서는, 더이상 저자세로 조선에
대해 국교교섭을 애걸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대원군 집정하의 조선정부에서도 언제까지고 일본의 상국행세를 할 수는 없게 된
주변 정세의 변화를 예의주시하여, 가능한 한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서기 1873년 4월에 명치정부의
외무출사(外務出仕)인 광진홍신(廣津弘信)이 동경의 큰 회사인 삼월상사(三越商社) 직원 3명과 함께 부산에 와서, 관례에 어긋나게 왜관밖으로
나와서 조선상인들과 활발하게 상거래를 벌였다. 이에 동래부사는 5월 중순에 군관을 파견하여 이를 단속하고, 재범할 경우에는 식량과 연료의 공급
및 상거래를 중단시키겠다고 경고했다.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자 명치정부는 자신들의 불법행위는 제쳐두고, 조선정부가 조선땅에서 왜인들을 다
축출하려 한다는 여론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명치정부의 군부경(軍部卿)인 서향융성은 내각회의에서 정한론을 들먹이며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러한 정한론의 배경에는 소위 명치유신 이후 이미 7년여가 지났으나 서구열강과의 불공정무역으로 인하여 민생은 더욱
어려워지고, 때마침 공포(公布)된 국민개병제(皆兵制, 즉 의무징병제)에 대하여 50여만 명에 달하는 실직 무사들이 크게 반발해서 국민을 선동하여
관동·북월·구주(關東·北越·九洲) 등 전국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던 사정이 있었다. 서향융성 등 정한론자들은 바로 그러한 무사들을
조선으로 쏟아내 버림으로써 300년 전 풍신수길의 모범(?)을 따르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주 병력은 육군
11,600명과 군함 15척(철갑선 2척 포함)등이었으나, 언제라도 강력한 전투집단이 될 수 있는 수십만 실직 사무라이들의 존재야말로 정한론의
숨겨진 배경이었다. 단지 개국이후 국가재정의 파탄으로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는 경제력은 전무(全無)했던 것이 약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서양열강과의 통상조약에 의거한 '정상적 교역행위'로는 명치유신을 백번 한들 일본의 경제력이 회복될 가망성은 없었다. 따라서 서양열강과 같은
식민지 확보정책이 성공할 경우에만 일본경제는 회생할 수 있다는 대외인식이 팽배해 갔고, 그 구체적 표현이 서향융성 등의 저돌적인 정한론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구미열강을 2년간 시찰하고 돌아 온 암창구시와 이등박문 등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강력히 반대했으므로, 서향융성은
실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후진들을 양성하며 명치정부와 반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명치정부는 일단 조선 측의 요구에 맞추는 선에서 외교교섭을
시도하려 하는 한편, 같은 무렵인 서기 1874년 3월에는 대만에서 발생한 유구인 살해사건을 빌미로 대만에 약 4,000여명의 침략군을
파견하였다.
이 때 청국의 대만등처해방대신(臺灣等處海防大臣)인 심보정은 같은 해 6월 24일에 조선정부에 왜군의 동향에 대한
일련의 불안한 정보를 제공했다. 즉 그는 프랑스의 푸로스펠 지켙의 말이라고 하며, '나가사끼에 5,000여 병력이 대기하고 있는데, 일본이
대만에서 군사를 되돌리면 반드시 조선을 공략할 것이며, 그럴 경우 프랑스와 미국은 조선에 대한 적대감이 있으므로 군함을 보내어 일본을 원조하게
될 것이니 조선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전했던 것이다. 이에 영의정 이 유원, 우의정 박 규수등은 크게 우려하여 양국간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대책을 모색했다. 그리고 대원군의 강변일변도 정책에서 빚어진 파국을 맞기 위해서는 그동안 의견이 분분했던 국서접수 문제를 더이상 미룰 수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기실 명치정부는 청나라와도 이미 대등한 국격의 수호조약을 맺은 후였으므로, 같은 형식의 일본국서를 조선에서만 거부하고 있다는
것도 외교관계상 무리한 면이 없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왜인들의 수치심과 자격지심이 역효과를 내어 정한론이 크게 일어난 면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급변하는 조선주위의 정세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던 개화정책의 태두인 박 규수 등이
이끌고 있던 조선조정은 일본과의 국교재개를 지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조정은 대왜(對倭) 강경책을 도맡다시피 했던 동래의 왜학훈도 안 동준이
부정사건에 연루되어 있음을 밝혀내어 처벌하는 한 편, 전임 경상도관찰사인 김 세호를 '왜학훈도의 말만 믿고 조일 양국간에 불화를 조장한 혐의'로
견책 파면하고, 대원군의 수하였던 동래부사 정 현덕은 함경도 문천군에 유배했다. 이러한 조선조정의 정책변화에 고무된 부산왜관의
삼산무(森山茂;모리야마 시게루)도 양국간 교섭을 빨리 진행하려고 신임 왜학훈도 현 석운과 상의하여, 서기 1871년에 일본 외무대승(大丞)이
조선 예조판서에게 보냈던 '대마도 종씨(宗氏)의 조일 외교세습권 폐지에 관한 통고서'에 쓰여진 황·칙(皇·勅) 두 글자를 없앤 후 조선 측에서
수리하기로 서기 1874년 8월 9일에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같은 해 3월에 대만침공을 단행한 명치정부가 동년 9월
22일(양10.31)에 주청 영국공사 웨이드의 알선에 의해서 대단히 유리한 조건으로 청국과 강화협상을 종결지으면서 조선에 대한 태도는 일변하고
말았다. 양국간 국교정상화를 위해 조선 측에서 제시하여 명치정부가 받아들이기로 했던 모든 조건들을 일순간에 파기한 후, 명치 측의 요구만을
일방적으로 강행하기로 한 것이다. 심보정이 제공한 정보가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