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8일 금요저녁예배
설교본문: 역대하 35장 20-27절
설교제목: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떻게 죽어야 하나요?
우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 활기차지는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 마음이 무겁고 별로 듣고 싶지 않게 됩니다.
그럼에도 누구나 만나게 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만큼 관심을 가지지 않다보니 죽음에 대해 오해하기도 쉽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정해진 생각의 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한 자의 죽음은 해피앤딩이어야 하고,
복된 죽음은 “수명을 다하고 편하게 죽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반대로 사고로 죽게 된다면 이것은 불행한 일이 됩니다.
그래서 가족의 사고사를 당하게 되면
가족의 신앙이 흔들리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왜 저 아이들이 저렇게 죽어야하나” 의문을 가졌습니다.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악한 자들은 항상 어렵고 힘든 죽음을 맞이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도 부요함과 평안함 속에서 안락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선한 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애도를 받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형태가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과 사람이 바라보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시야는 선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전쟁에서 활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 역시 불행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요시야의 아버지 아몬왕은 왕이 된지 2년 만에 반역자들에 의해 죽임 당합니다.
국민들은 반역자들을 다 처단하고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나이 8세에 갑자기 왕이 된 요시야는
16세에 비로소 하나님을 구했고,
20세 때 모든 우상을 제거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에게 말씀하신대로
요시야는 북이스라엘까지 올라가서 모든 우상들과 제단들을 무너뜨렸습니다.
이스라엘 왕 중에서 가장 넓은 지역에서 철저한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입니다.
어쩌면 그의 아버지 아몬이 하나님을 떠난 일과
할아버지 므낫세가 앗수르로 끌려갔다가 돌아와서 종교개혁을 했던 일이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26세가 되어서야 종교개혁은 절정에 이릅니다.
요시야는 성전의 수리를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수리를 하다가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말은 그 전에 어느 시점부터 성경이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잃었던 나라에 다시 여호와의 말씀이 돌아왔습니다.
요시야는 그 율법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며 회개했습니다.
또 백성들에게도 율법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들과, 나라를 잃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지킨 유월절이었습니다.
이처럼 요시야왕은 여호와의 율법을 읽고 듣고 말씀대로 준행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기이합니다.
애굽왕이 군사를 이끌고 싸우러 유다를 향해 올라옵니다.
전쟁의 대상은 유다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애굽은 바벨론과 중동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총력전을 펼려고 했습니다.
유다 나라를 지나 북쪽 바벨론으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에게는 길만 내어달라는 것인데
요시야는 애굽과 맞서 싸우기 위해 진을 쳤습니다.
유다는 애굽과 싸울 힘도 없었고,
또 굳이 싸울 필요도 없는 상황에서 왜 요시야는 나선 것일까요?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유다 입장에선 정말 통과하려는 것인지,
가나안으로 세력을 확산하기 위해 공격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2)애굽과의 전쟁을 피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 전쟁에서 바벨론이 승리한다면
길을 열어준 유다는 친애굽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은 애굽을 몰아낸 뒤에
친애굽 나라인 유다를 먼저 공격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요시야는 애굽과 맞서게 되었습니다.
이때 애굽 왕 느고의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35장 21절입니다.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로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물론 애굽 왕이 하나님을 믿거나 계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상황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 앞 일들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 요시야는 변장하고 전쟁에 나갔다가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게 됩니다.
병거로 속히 이동했지만,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는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시야는 이방인도 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으니
불순종으로 인해 죽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의 해석은 다릅니다.
여선지자 훌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34장 28절을 보면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요시야의 죽음을 비록
멋진 영웅처럼 마무리하지는 않으셨지만
그의 왕국의 멸망을 보지 않게 하심으로서
마음의 고통, 삶의 고통에서부터 그를 건져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형태에 대해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어떤 모양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이 세상에서
더 좋고 행복한 천국으로 옮기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긍정적인 죽음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복이라고 말씀하신 경우가 또 있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중한 병이 걸렸습니다.
여로보암은 아내를 변장시켜 눈이 어두운 선지자
아히야에게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이 알려주셨기에 찾아온 자가 왕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일어나 네 집으로 가라 네 발이 성에 들어갈 때에 그 아이가 죽을찌라.”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는 것은 얼마나 서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본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서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우리는 사고나 질병과 같은 부자연스러운 죽음을
형벌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하나님이 이 세상 환난을
면케 하시려고 부르시는 경우도 있음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죽음을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설교도 장례식 때나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 우리의 죽음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늘 죽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 뒤에 펼쳐질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달라지게 됩니다.
세상의 욕심은 줄어들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됨을 기억하며
주를 위해 최선을 다해 섬기고 주를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별세 신학을 주창했던 이중표 목사는 그런 점에서 기억할만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라는 말씀을 붙들고
“날마다 죽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주장하셨습니다.
양복 두 벌도 사치라고 여기셨고,
죽기 전에 자신의 물건들을 사랑이 담긴 손편지와 함께 나눠주셨습니다.
평생 개척교회와 외국인 노동자, 불우청소년들과 같이
어려운 이웃을 섬기며 사셨습니다.
그의 죽음 역시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30대부터 담낭질환으로 고생하시다가
67세, 비교적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고해서 그의 죽음이 불행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90세 천수를 누려도 자기만을 위해 산 사람보다
그의 죽음이 초라하다고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줘서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가 영원한 기쁨을 맞이했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와 같이 동행한 삶이었고,
주님 곁으로 돌아가는 죽음이라면
그 어떤 형태의 죽음이라도 복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기다라고 계신다면
믿는 자의 모든 죽음은 복된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믿는 이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심일 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심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나를 만족시키는 인생이 아닌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요시야의 두 어깨에 나라에 대한 고민과
참된 신앙의 개혁을 위한 커다란 짐이
주님 부르시는 그 때 다 벗겨졌음을 생각한다면,
그의 죽음은 얼마나 홀가분할까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인정해주셨다고 하니
더 없이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달려가지 않았을까요?
우리도
땅에서 다 누리다가 주님 앞에 못 가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기쁨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