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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
2. |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
3. |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
4. |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
5. |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
6. |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
7. |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
8. |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
어제, 한 뉴스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5월 9일 대선이 끝난 후 모든 언론이 대통령을 향해 집중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 5년 여 만에 만나는 영부인에 대한 관심도 큽니다만 이 기사의 중심은 영부인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한 억울한 민원인이 사저에서 아침부터 와서 외쳤고, “아침부터 왔다. 배가 고프다”고도 말했다고 합니다.
청와대로의 이사를 준비하던 김정숙 여사가 이 소리를 듣고는 그녀에게 다가갔습니다.
민원인이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하자, "몰라 몰라. 자세한 얘기는 모르겠고, 배고프다는 얘기 듣고서는…. 나도 밥 먹을라 그랬는데 들어가서 라면 하나 끓여 드세요"
그리고 둘은 사저 쪽을 향해 갔다고 합니다.
그녀는 곧 돌아 나왔는데 대통령 사저로 들어가는 것은 어려워서 라면만 받아 나왔다고 합니다. 다만 그 짧은 시간이라도 영부인이 자기 억울한 내용을 들어주어서 마음이 풀렸나봅니다. 12년 전 사건 때문에 전임 대통령을 만나려고도 했으나 경찰소로 끌려가기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 이야기도 다 전했고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까닭은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강하고 힘센 곳을 향하기 쉽습니다. 그것은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약육강식’의 자연법칙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강자는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세상의 강자는 그 시선이 더 강한 자에게 향하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또 재산과 지위를 지키기 위하여 더 강한 자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약자에 대해서는 하대하거나 무시하고, 더 나쁘게는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든 만물의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은 오히려 낮은 곳을 향해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오히려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에게 한없이 인자하고 공평하고, 사랑의 자세로 대하기를 원하십니다.
다윗 왕은 말하길(삼하23:3-4)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말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하고 공정하게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왕이 되면 거대한 궁전을 짓고 그곳에서 일하는 많은 일꾼들과 화려한 연회들, 매일 값비싼 음식으로 채우고, 군대를 만들어 자신을 지키게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부러워하고 서로 빼앗으려 살인까지도 저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셨는데 천막에 거하시길 부끄러워 아니하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사랑으로 다스리셨고 그들이 필요한 것을 직접 채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과 달리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보면 군주는 “나라를 지키고 번영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며 그렇게만 하면, 무슨 짓을 했든 칭송 받게 되며 위대한 군주로 추앙받게 된다.”고 말함. 즉, 정치를 윤리나 종교로부터 분리시켜서 국가의 이익을 얻는 것을 이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인간 세상의 법칙임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은 하나님 성품대로 다스려지는 나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런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마음이 율법에 담겨있습니다.
율법에서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말씀은 여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인 약자이며 도움이 필요한 손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위로받고 하나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니 약자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잊지 말라는 의도에서 여러 번 반복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강조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절대 지키지 않을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명령 중에는 약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밭의 곡식을 한번만 거두고 나머지를 얻기 위해 다시 바닥을 훑지 말라고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이것으로 약자들이 양식을 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인데 그 속에는 약자에 대한 배려 뿐이겠습니까? 짐승들도 떨어진 곡식을 주어먹게 하시려는 짐승에 대한 사랑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기적 마음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면서 다른 이들을 위해 배려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되돌려 받거나 보상받을 수 없는 일에 선뜻 나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약자들을 대접하라면서 꼭 붙이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신24:18).
즉, 우리가 값없이 받은 것이 엄청나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나누는 것이 오히려 작은 것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이집트의 노예였으나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그곳에서부터 이끌어내셔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또 유랑객으로 광야에서 끝날 인생이었지만 여리고성을 무너뜨려주시고, “그들은 거민이요, 우리는 메뚜기 같다”는 강하고 거대한 민족들을 점령하여 가나안 땅의 주인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땅에서 나온 곡식을 가난한 자와 객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아주 작은 일임을 기억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은 이집트 노예 사건을 경험하지도 않았고 가나안 땅을 받은 자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나그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오늘 말씀 속에서 그는 더운 시간이 되는 오정에 장막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표준새번역은 실감나게 번역하고 있는데 “한창 더운 대낮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장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이 더운 날씨에 세 사람이 맞은 편에 서 있었습니다. 즉, 아브라함을 향해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동 중에 아브라함 장막을 보고 멈추어 서 있다면 어떤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객에게도 세심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이들이 ‘여행 중에 지쳐서 쉼과 음식이 필요하여 우리 장막을 바라보는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그네에 대한 관심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을 보자마자 땅에 엎드려 절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많은 종이 있었음에도 그는 겸손히 세 명의 객을 가장 낮은 모습으로 맞으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발 씻을 물과 먹을 것을 내오겠다고 말을 합니다.
또 고운 밀가루 세 스아= 22리터 정도를 가지고 빵을 만들라고 합니다. 원문에서는 굵은 밀가루(케마흐)와 가는 밀가루(솔레트)를 섞어서 만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도 고운 밀가루와 굵은 밀가루를 섞어 빵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왕상 4:22) 손님을 접대할 짧은 시간에 얼마나 세심하고 정성되게 음식을 준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7절에는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해 음식을 만드는데, 얼마나 바삐 만들었는지 “짐승 떼에 달려가서”, 또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여 나그네들이 주려 많이 배고프지는 않을까, 급히 만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들을 바쁘게 만들었습니까? 그곳에 임금이나 권력자가 찾아온 것도 아닌데. 또 이들이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 존재인지도 잘 모르면서 이토록 극진한 대접을 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에게 그들이 누군지는 중요치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것을 얻을 것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충분히 나누어 가질 만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라고 믿었기에 아낌없이 나누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계속 반복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우르 땅에서 이끌어내실 때에도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가나안 땅에 기거할 때 심한 기근을 만났습니다(12:10).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바로 왕에게 자기 부인을 빼앗겼습니다.
그 상황은 결코 축복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내를 되찾았을 뿐 아니라 이집트에서 많은 재물을 얻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또 그의 나이 99세 때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셨는데 ‘고귀한 아버지’에서 ‘많은 무리의 아버지’로 바꾸신 것입니다.
‘여주인’이라는 뜻인 사래 역시 ‘열국의 어머니’란 뜻인 사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좁은 지역에 머무는 작은 무리의 족장이었고 아직은 사라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지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특징은 현재 받은 축복도 컸지만 앞으로 얻을 축복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는 믿음 속에서 아직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음에도 ‘이미’ 가나안 땅을 얻은 자였고 열국의 아비였음.
그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 속에서 그 권세를 남용하는 자가 아니라 처음 보는 자들에게도 절을 하며 높이는 자였습니다. 나그네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치 않을 뿐만 아니라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아브라함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약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으며, 또 무엇을 받을 것으로 믿어야 합니까?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4-5)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그 순간, 우리는 이전의 삶이 얼마나 허망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단지 먹고 마시는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 또는 수고하고 애쓰는 그 어떤 것으로도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없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예수를 통해 얻는 참된 삶,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있게 되며, 그것으로 기쁨을 삼게 됩니다.
주님을 통해 새 생명 얻은 자는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은 높고 높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를 주신 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 주님을 선물로 받은 자들은 우리보다 더 작고 연약한 자들을 섬기게 됩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눅9:48)
누구에게나 귀한 자를 대접하는 일은 모두가 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작고 연약한 자, 사회에서 소외받은 자를 향해 대접하는 것은 전적인 헌신과 사랑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감히 사랑할 수 없는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대가 없는 사랑을 남에게 베푸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힘, 지혜, 재물, 여러 능력이 나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주님이 주신 축복이라 여길 때 우리는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자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교로 지원하며 기도하는 김** 목사님은 페루에서 ‘머슴선교’라 하여 헐은 집과 교회, 학교 수리를 돕고 또 어디든 찾아다니며 무료로 기독교 영화를 상영해 줍니다.
본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많기 때문에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
이 말씀은 약자에게 선한 일을 행한 일만으로 칭찬 받은 것으로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구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선한 일을 행함으로 인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바로 앞에 기록된 달란트 비유를 볼 때 본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이렇습니다.
주인으로부터 종들은 각각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 받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주인을 대신하여 충성되게 일을 하여 이윤을 남긴 종은 칭찬을 듣고 일을 하지 않은 자는 맡은 것을 빼앗기고 쫓겨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주인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먼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장막집과 수많은 재물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달란트입니다. 아브라함은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기꺼이 바치는 일도 행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나그네를 돕는 일은 오히려 작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타인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기억할 때 가능합니다.
페루에서 선교하시는 김** 목사님은 저보다 더 많은 달란트를 받은 사역자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내가 그 분보다 적은 달란트 받았다고 시샘하겠습니까? 성경 예화 속에서 가장 작은 달란트를 맡은 종은 한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한 달란트는 34kg. 즉 금 1000돈에 가까운 무게입니다. 그렇게 계산하면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현재 시가 15~20억의 돈을 맡은 자입니다.
만약 우리 눈으로 작게 보이는 것들을 한 달란트라고 말한다면, 나에게 맡기신 작은 교회, 다른 이를 위해 기도의 사명을 주신 것, 매일 전도하는 것, “주 안에서 행복한 하루 되세요”라는 인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이런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것들이 한 달란트라고 한다면 이것이 과연 적은 것이겠습니까?
내게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또 우리가 그 일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충성된 종’이라 부르십니다. 반대로 그 일을 무시하고 자기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갈 때는 ‘게으르고 악한 종’, ‘무익한 종’이라 부르십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의 힘으로 선한 것을 이루려고 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줄 것이 없습니다.
특별히 주님께서는 우리가 예수의 복음을 나누기를 소망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선물이 얼마나 큰지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 5:15)”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5:17)
우리는 이 땅에서 구원이라고 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으며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귀한 은혜를 누리며 삽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허망한 것을 좇지 않고 참되고 진실한 것을 따르게 하십니다. 예수를 붙잡고 날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보이지 않은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한다고 하니 ‘왕’이라는 직위로 인해 기뻐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 지위가 우리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이 우리의 첫째 기쁨이요, 둘째는 아담에게 맡겨졌던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회복되는데 다시는 실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신대로 우리가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기쁘게 합니다.
이것을 기억할 때 우리에게 주신 이 세상은 잠시 잠깐의 장막집과 같습니다.
이 세상은 때로는 날이 덥고 가끔은 길고 긴 가뭄과 같은 순간을 지나게 됩니다.
때때로 내게 찾아와 앞에 선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굶주림으로 찾아오기도 하지만 영혼의 지침과 굶주림 때문에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 받은 무한한 사랑을 꺼내어 나누어줄 수 있겠습니까?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13:2)
육신의 연약한 자들을 위해 위로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있으니 영적으로 지친 자들을 만날 때 우리는 주님께 받은 달란트대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또 격려하고 힘을 주며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장막집 앞에 찾아온 나그네는 누구입니까?
그에게 나는 무엇을 나누어주어야 합니까?
오늘 조용히 이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시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