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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성경은 어떤 고대 문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신뢰할만한 문서라는 것을 고서 검증법을 통해서 확인했으며, 성경의 핵심인 예수와 관련된 기록도 역사적인 실제 사건이라는 것을 다른 자료들을 통해서 증거했다.
이제 성경의 신뢰도를 확인하는 세번째 방법으로,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들이 고고학적인 발견이나 유물로 확인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비평가들은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이야기가 한낱 신화나 전설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가 계속될수록, 성경의 인물, 나라, 도시, 사건들이 실재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이제 몇가지 사례들을 살펴보겠다.
진화론자들은 초기 인류가 동물처럼 미개한 원시인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초기 인류는 매우 발달된 문명을 갖고 있었다.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은 농사와 목축을 했고, 가인은 도시를 건설했으며, 아담의 7대손인 두발가인은 동과 철을 사용했고, 노아 때에는 대규모의 방주를 만들기도 했다.
“가인이 성을 쌓고” (창 4:17)
“그 (두발가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창 4:22)
고고학자들은 초기 인류가 발달된 문명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성경에 동의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집트와 수메르 등 경이로운 문명의 갑자스런 출현은, 그들이 노아와 그의 자손들로부터 홍수 이전의 기술들을 전수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만일 전 세계적인 홍수에서 파괴되어 버린 문명이 이집트와 수메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가장 단단한 화강암으로 된 피라미드, 스핑크스, 조각품, 조상(彫像)들, 그리고 글을 쓰는 능력, 고도로 조직적인 정부, 모든 종류의 기능과 기술들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그 근거를 오파츠(OOPARTS, Out Of Place ARTifactS) 에 관한 연구에서 찾는다. 오파츠는 고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있어서는 안 될 장소에 있는 유물, 또는 시대와 일치하지 않는 인공물들을 말한다.
고고학자 르네 누어버겐은 이렇게 말한다.
“많은 경우 오파츠의 기술적 정교성은 그들의 유물들이 발견되어지는 고대인들의 발명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인류의 문명이 원시적인 시작에서부터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하는 정통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지금 매우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다. 반면 초기 조상들이 놀라운 문명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는 날로 커져가고 있다. 오파츠, 고고학, 지질학, 고생물학 등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성경에 의하면, 니므롯은 수메르 지역에 최초로 통일제국을 만든 사람이다. 니므롯은 통일제국을 만든 뒤 여러 이질적인 종족들을 통합해 다스리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하면서 높은 탑을 쌓았다. 탑의 건축에는 자신을 신격화해서 숭배받고자하는 목적이 있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의 나라는 사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창 10:8, 10)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성경 이외에 바벨론 전승에서도 바벨탑은 처음에 니므롯이 축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랍 사람들은 오늘날 까지도 이 탑이 있는 지역을 Birs Nimrud, 즉 '니므롯의 땅'이라고 부른다.
여러 나라의 고고학자들이 니므롯 지역을 발굴한 결과 수많은 장식들로 뒤덮힌 찬란한 고대도시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니므롯이 죽자 그의 아내 세미라미스는 니므롯이 마르둑 신으로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사람들은 니므롯이 변신했다는 마르둑신을 섬기기 시작했다. 마르둑 신은 그 지역에서 숭배받았던 많은 신들 중에서 으뜸신이다.
수메르 시대의 풍요로운 도시국가들은 마르둑 등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구라트를 만들었다. 바빌론, 우르크, 우르와 같은 주요 도시들에서 30여개의 거대한 지구라트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수백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별히 바벨론 지역에 세워진 지구라트는 바벨탑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니므롯이 바벨탑을 세우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들을 뿔뿔히 흩으심으로 완성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기록한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쌓기를 그쳤더라” (창 11:8)
칼데아인(갈대아인)의 비문에 기록된 내용도 성경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 사원의 건축은 신들을 화나게 했다. 한 밤에 신들은 지어진 것을 무너뜨려 버렸다. 신들은 그들은 멀리로 흩어버렸고, 그들의 말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들의 진보로 저지되었다.”
유적에 의하면 바벨탑의 건축에는 벽돌과 역청이 사용되었는데 이것도 성경 내용과 일치한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11:3)
실제로 팔레스타인의 지역 특성 상, 그곳에서는 건축 시에 흔히 사용되는 돌들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돌 대신에 불에 구워진 벽돌이 사용되어 왔다.
이후에 바벨탑의 재건이 시도됐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며, 미완성의 층탑은 오랫동안 고대 세계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600년쯤 지나서야 바벨탑이 다시 세워진다. 고 바벨론의 초대왕 니므롯이 미완성한 것을, 신 바벨론의 네브카드네자르 왕이 완성한 것이다.
BC 625년 나보폴라사르가 앗시리아를 패망시키고 강대한 바벨론 제국을 이룩하며 신바벨론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의 아들 네브카드네자르 2세(BC 604~ 562년 재위)는 당시 중동, 소아시아, 이집트, 지중해 일대에서 가장 세력이 강대했던 제국으로 현재 이라크를 중심으로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다.
네브카드네자르는 성경의 느부갓네살과 동일인으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과 역사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BC 586년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 수만명을 포로로 잡아 수도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그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저가 여호와의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으니.. 저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를 사로잡아 가매” (왕하 24:10, 13-14)
그는 자신을 신으로 여겨서 거대한 금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게 하고, 전쟁포로들을 동원해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불리는 바벨탑, 공중 정원, 성벽, 이슈타르 문 등을 축조했다.
느부갓네살이 재건한 바벨탑에는 ‘에테메난키’라는 고유이름이 붙여있는데 '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BC 458년 바빌론을 방문한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 바벨탑을 보고 이렇게 묘사한다.
”네모반듯한 밑그림에 탑이 서 있는데, 탑 위에 탑이 올라붙고 그 위에 또 다른 탑이 올라붙는 식으로 모두 일곱 개의 탑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 맨 꼭대기 탑 위에는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탑은 모두 벽돌을 구워서 쌓은 것이고, 꼭대기에 있는 신전의 지붕에는 파란 유약을 발라 구운 기와와 황금을 씌웠다. 멀리서 도시로 들어서는 나그네의 눈을 눈부시게 했다.”
네브카드네자르는 이런 헌시를 지어 바벨탑에 새겼다.
“내가 발견하고 건립한 영원한 집인 탑이여
나는 은,금, 다른 금속과 돌, 에머럴드 벽돌, 전나무, 소나무로써 그 외관을 완성시켰다. 땅의 기초인 그 집을 나는 바빌론의 가장 고대적인 기념비로 지어 끝을 맺었다. 나는 구리로 싸인 벽돌로 된 끝 부문을 높이 찬양한다. 이 건물은 이 땅의 일곱 빛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볼쉬파, 가장 기릴 만한 것이여 고대 왕이 그것을 세웠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고대에 사람들은 지시하는 그들의 말 표현이 없어서 완성을 포기해야 했다. 그 때 이후로 지진과 천둥으로 태양에 말린 진흙이 다 분쇄되었다. 벽돌은 쪼개지고 내부 흙은 무더기로 흩어졌다.
메로다취, 위대한 신이 나의 마음을 동요 시켜 이 건물을 복원하게 하였다.나는 위치를 바꾸지 않았고 기초를 옮기지도 않았다. 축복된 달에 상서로운 날에 나는 원래 벽돌 뭉치와 타버린 벽돌 주위에 주랑을 세웠다.
나는 둥근 형으로 개조해서 키틸 주랑에 나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나는 끝나도록 손을 쓸 것이고 탑 끝을 찬양할 것이다. 고대에 그랬던 것 처럼 나도 그 완성을 찬양할 것이다.”
(윌리암 로푸터스의 저서 Travels and Researches in Chaldea and Sinai 에서. 호퍼트 교수 번역)
여기서 이교도 왕인 느부갓네살은 "이전의 왕이 이것을 지었으나 그는 그 끝을 완성하지 못했다"라며 성경과 일치하는 내용을 언급한다.
그는 또 바벨탑을 볼쉬파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언어탑’을 의미한다. 그 탑이 완성되지 못했던 이유를 "고대시대에 사람들은 지시하는 그들의 말 표현이 없어서 완성을 포기했다”라고 밝혔는데, 이것도 성경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는 바벨탑을 다시 세우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메로다취, 즉 마르둑신이 나에게 에테메난키의 기초를 지구 중심까지 닿도록 단단하게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래야만 하늘까지 오를 수 있는 건물을 만들 수 있다.”
높이 90m의 7층 탑에는 8천5백만개의 벽돌이 사용되었는데, 유적에서 발견된 벽돌 한장 한장에는 놀랍게도 그들이 섬기는 신 “마르둑”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오늘날 이라크 지역에서 이 벽돌들로 지어진 지구라트를 볼 수 있다. 현대의 네브카드네자르라고 자칭한 후세인이 관광목적으로 지구라트를 복원한 것이다.
이 지구라트에는 신을 섬기기 위한 제단이 있었다. 일반인은 1단까지만 접근이 허용되고, 맨 위의 신전은 신관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엄격한 종교의식으로 인신제사가 거행되곤 했다.
수많은 지원자 중에서 엄선된 한쌍의 남녀는 지구라트 위의 신전 앞에서 엄숙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식이 끝나면 부부와 수행원과 가족들은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는 두개의 관이 있는데 이곳에서 신랑과 신부는 성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그들이 관속에 뉘어지면 수행원들도 독약을 마시고 부부를 따라갔다. 곧 가축들을 죽여 제물로 바친 후 무거운 돌문을 닫는 것으로 의식은 끝이 났다. 이들의 성스러운 죽음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신들의 은총이 내려져 풍요와 영원한 삶이 보장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신제사까지 행한 신에 대한 엄청난 헌신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강의 바벨론 제국은 채 100년도 안되어서(BC 625~539년)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니므롯이나 바벨탑 등의 성경 기록은 결코 신화나 소설이 아니라 역사상에 실재했던 인물과 사건이라는 사실이 고고학적인 여러 자료로 밝혀졌다.
런던 대학의 앗시리아학 교수인 도날드 와이즈만 박사는 “창세기 11장의 기록은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설명에 대한 모든 흔적들을 갖고 있다” 고 자신있게 말한다.
니므롯이 스스로 하나님과 비기려고 바벨탑을 세우려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합케 해서 흩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인류의 다양한 언어의 기원이 하나라는 것이다.
“온땅에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성과 대를 쌓아 대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니... 그들이 성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하니...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 11:1-9)
언어의 기원을 연구하는 언어학자들은 무수하게 다양한 언어들이 하나의 언어에서 파생해서 서로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지구 전체의 수 천 개 방언과 언어를 고대의 언어 기원에까지 거슬러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알프레도 트럼베티 교수는 모든 언어의 공통적인 기원을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동양언어 학자인 막스 뮬러도 모든 인간 언어는 하나의 기원으로 역추적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헤롤드 스티거 박사도 이렇게 결론내린다. ”어림잡아 3,000 여개의 무수한 언어와 방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두가 모체 언어로부터 파생되었다는 것은 주요 언어 계보의 경계들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이것은 공통의 조상 언어가 있었음에 틀림없음을 가리킨다.”
1849년 아시리아의 니느웨 유적에서 약 3만점 이상의 점토판 문서가 대량으로 발굴되면서 수메르 문명이 알려지게 되었다.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알려진 수메르 문명은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발달한 것인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수메르 문자의 발견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는 수메르 사람들이 쓰던 쐐기문자(설형문자)로 알려지고 있다.
대영박물관의 조지 스미스가 평생을 바쳐 설형문자를 연구하여 '길가메시 에픽'에 관한 기록을 해독하게 되었다. 수메르의 길가메시라는 족장이 기록한 서사시인데, 그 내용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내용이 거의 같다.
수메르의 점토판에는 그외에도 성경에서 언급된 에덴동산, 바벨탑, 모세의 율법, 욥의 이야기 등과 유사한 내용이 들어있다.
수메르 점토판의 기록연대는 BC 2,250 년경으로 추정되고 성경기록은 BC 1,500년 경부터 모세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성경은 수메르 신화를 모방한 것이라며, 고고학의 발견이 성경과 기독교의 허구를 드러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유적과 유물의 발굴이 성경의 진실성을 더욱 분명히 입증해주고 있다.
성경에서 언급된 천지창조, 에덴동산, 노아의 홍수 등은 모두가 역사 가운데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이다.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랜동안 구전되며 이야기들은 각색되고 변형되었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은 각 지역이나 나라의 영웅들의 이름으로 대치되어 마르둑, 엘릴, 브라만, 반고, 단군 등으로 불리우며 각종 신화들이 만들어졌다. 신화들은 지역과 언어에 따라서 각색되어서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지만 실제 사건에서 나온 것이므로 서로 유사한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신화가 각색되고 구전되며 에리두 창세기, 길가메시 서사시, 에블라 창조기록 등이 점토판에 기록되었다. 이 신화들은 천지와 인간이 위대한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며 엄청난 홍수로 인해 멸망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에블라의 점토판 기록에서는 하늘, 땅, 태양, 달이 창조되었다는 순서가 성경과 동일하다.
BC 1500년 경,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서 오래 전에 이 모든 사건들이 있었음을 일러주시고 그 이유도 밝혀주시며 정확하게 기록하게 하셨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것이 성경이다. 신화와 성경에 비슷한 내용이 있다는 것은, 그런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각종 신화들이 이런 저런 모양으로 구전되다가 모세 때에 와서야 비로서 성경으로 기록된 것은,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적절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동안 인간의 입을 통해 전승된 여러 모양의 신화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와 선지자들을 불러 계시로 알려주시고 기록케 하신 성경 안에만 완전한 진리가 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온다. BC 2000년경 우르에 살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75세에 고향을 떠나 명하신 가나안으로 갔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속의 역사가 시작된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창 11:31)
비평가들은 이 이야기를 설화처럼 생각하며 사실로 믿지 않았다. 그러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가 지역에서 수메르 문명의 유적이 발견되면서 그곳이 우르라는 도시였음이 밝혀졌다.
아브라함 시대에 해당하는 BC 1900년 경의 거주지 우르에서 성경의 사실과 조화되는 여러 유물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세밀한 지도들이 그려진 많은 점토판들을 볼 때, 그들은 아주 정밀한 수로를 만들어 그 지역의 농사를 위해 물관리를 철저히 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태양빛에 말린 고운 흙가루로 만든 진흙 벽돌의 이층집, 흙을 구워 만든 도기로 깐 안뜰, 물통과 대야가 놓인 로비, 붉은 도기 배수관을 가진 수세식 화장실, 화로와 맷돌이 놓인 부엌,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식 층계, 10여 개의 방을 가진 이층집의 흔적 등도 발굴되었다.
앞으로도 살펴보겠지만 성경에는 사건뿐만 아니라 지명과 인명들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설화나 신화처럼 어떤 목적으로 지어내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는 말이다. 고고학의 발전과 유적의 발굴은 이런 지명과 인명과 사건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계속 증명해주고 있다.
1974년 시리아 북쪽에서 에블라의 문명을 알려주는 17,000 개의 점토판이 발굴되었다. 13년에 걸려서 발굴된 이 서판은, 유사시대를 소급하고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밝히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서판에 의하면 에블라는 BC 2,300년경 수도인 하란을 중심으로 매우 큰 세력을 펼치던 나라로 260,000명의 인구가 있었다. 시리아 북부, 터어키 남부에 위치했던 하란은 바로 서판이 묻혔던 곳이기도 하다. 서판에 의하면 하란이 매우 발달한 문명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최신의 고고학에서야 존재가 밝혀진 하란이라는 도시는 이미 성경에 언급되고 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창 12:4)
그외에도 에블라 서판들에 언급된 수백 개의 지명, 역사적 참고 사항, 경제 문제에 대한 설명, 정교한 법령 등을 포함한 종교적, 사법적 관례 등이, 성경의 지명, 인명, 내용과 일치한다.
성경이 여러가지 신화의 복사 내지는 짜깁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신화의 어디에도 성경에서 언급되고 고고학이 밝혀낸 이런 지명이나 인명이 나오지 않는다.
에블라 서판으로 밝혀진 사실들 중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비평가들은 BC 1,500년경의 모세 시대에는 아직 문자가 제정되기 이전이라며 모세가 모세오경을 쓸 수 없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에블라 서판은 모세의 기록보다 약 1,000 년이나 앞서 있다. 에블라 서판은 셈어로 기록되었고, 구약성경은 셈어의 파생어인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가나안’이라는 지명이나 ‘테홈’ (the deep) 이라는 단어는 모세시대보다 먼 후대에나 쓰였던 단어이므로,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했다는 사실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 모세보다 1,000년이나 앞서 기록된 에블라 서판에서 이미 가나안과 테홈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성경은 노아의 아들 셈이 에벨의 조상이라고 기록한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창 10:21) 셈의 후손이자 아브라함의 6대조인 성경 속의 에벨은, 큰 문명국가를 이룬 에블라 왕국의 왕 에벨과 동일인으로 추정한다.
에블라 백성들이 믿었던 유일신의 이름은 '야'로 기록되었다. 아마도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동뿐 아니라 세계 도처의 유물들을 볼 때, 원래 최초의 정착자들은 ‘위대한 신(High God)’이라는 유일신의 존재를 숭배했으나, 이러한 원시의 일신론은 곧 범신론, 다신론, 정령신앙 등으로 타락해 버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에블라 백성이 유일신을 경배하는 히브리인의 조상일꺼라고 추정하는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서판에 기록된 에블라의 법률과 풍습들은 신명기에 기록된 규율들과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서판에는 식량 배급과 재고 명세서, 세금 명부, 곡물과 가축 문서, 특산물인 금속과 섬유류에 대한 국제 무역 명세서 등, 에블라의 행정과 경제에 대한 기록이 아주 많다.
학자들은 역사의 초기에 이와 같이 광범위한 교역이 이루어졌다는 것에 대해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에블라가 교역했다는 가자, 므깃도, 멜기세덱, 소돔, 고모라 등의 고대도시는 모두 성경에도 언급되고 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과 여러 왕들이 연합해서 다섯 왕들과 싸워 이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에블라 서판에도 이 나라들 이름, 왕의 이름, 위치, 풍습, 연대들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창 14:1,2)
메소포타미아 여러 곳에서는 BC 2,000년 안팎의 연대가 쓰인 점토 계약 문서에서 아바라마(Abarama), 아바암라암(Abaamraam) 등으로 불리는 당대의 사람들의 이름이 나타났다. 아브람(창 12:1), 후에 개명된 이름인 아브라함(창 17:4, 5)은 모두가 당대의 구음에 어울리는 실제적인 인명이었음이 입증되었다.
1936년 안드레 패롯이 유프라테스 중부 지역의 마리에서 발굴한 마리 서판에서도 성경에 기록된 인명과 지명들이 발견되었다. BC 1,700년경 마리 왕국의 것으로 추정되는 수천개의 설형문자 서판에는 도시 하란과 나홀, 하피루 (히브리) , 마리의 왕인 아리육 (아리옥) 등 성경에 나타난 이름들이 보인다. 마리의 한 족속으로 언급된 ‘바누 야미나’ (벤쟈민)은 성경에 나오는 벤야민과는 다르지만, 그런 이름이 그 지방에서 흔히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온 후, 가나안에 큰 기근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때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하고자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창 12:10)
1824년 영국의 고고학자 윌킨슨은 이집트 중부 지방의 베니하산 유적지에서 크눔호텝이라 불리는 한 애굽 귀족의 무덤벽화 여러개를 발견했다. 벽화에는 이집트인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독특한 턱수염과 화려한 무늬로 짜여진 통치마를 걸친 셈족 유목민들이 애굽에 들어오는 장면 등이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BC 1,900년 경으로 추정되므로 성경의 족장시대와 일치한다.
이러한 그림들은 당시에 가나안과 애굽의 왕래가 자유롭게 이루어졌음을 설명한다. 큰 강이 없는 가나안 지방에 기근이 들면 아시아 사람들은 나일 강의 혜택을 누리는 애굽의 동부 쪽으로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는 것은 다른 기록들에서도 밝혀졌다.
쟈크 모르강이 지휘하는 프랑스 발굴단은 1,901년 페르시아의 옛 수도 수사에서 8피트 높이에 달하는 검은색 섬록암 입석을 발굴했다. 이것은 구 바벨론의 함무라비 왕이 세운 것으로 여기에는 39단 3,624행으로 된 282조의 고대 법문이 새겨져 있었다.
함무라비(BC 1,728~1,686) 법전은 모세의 법보다 200년 정도 앞선 것이다. 이 법전이 발굴됨으로써 아브라함 등 족장 시대의 사회적 배경과 이후에 쓰인 모세의 율법(민법)이 역사적, 사회적, 법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한 예로서, 함무라비 법 145조에 보면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면 남편은 그와 이혼하든지 낮은 신분의 다른 부인을 얻을 수 있으며, 아내 스스로 자기 여종 중의 하나를 택하여 남편에게 첩으로 주라는 규정이 있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그의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준 것은 후자를 택한 당시의 사례인 것이다(창 16:1~3). 후에 야곱의 부인 라헬이 자기의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준 것도 같은 사례이다(창 30:3).
최근 소돔과 고모라 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잔해들이 사해 남동지역의 바베드라와 누메이라에서 발굴되었다. 그곳은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각판의 분기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토양은 아스팔트와 유사한 역청 성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데, 역청에는 다량의 유황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성경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이렇게 묘사한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창 19:28)
연기가 났음은 유황같은 유류성 화재가 발생했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옹기점 연기’같은 것은 지하 토양이 거대한 압력으로 인해 갈라지면서 새어 나오는 유황 연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성경에서 묘사한 사건은 이곳의 지질적 특성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토양이 지진으로 심한 압력을 받아 갈라지며, 틈을 통해 유황이 분출되고, 분출된 유황이 대지 표면의 조그만 불꽃 등으로 인해 발화하면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어서 도시들을 덮쳤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유적에서는 지붕부분만 집중적으로 불에 탄 건물들의 흔적들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하늘에서 유황과 불이 내렸다는 성경기록과도 일치한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창 19:24)
성경은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으로 변했다고 기록한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창 19:26)
번영했던 도시를 아쉬워해서 뒤돌아보다가 뒤쳐지며 혼자 재앙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폼페이가 화산폭발로 멸망할 때 주민들이 용암과 떨어지는 화산재에 묻혀서 화학적 대체과정이 일어났듯이, 롯의 아내도 그런 과정에서 소금기둥으로 변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이 지역에는 거대한 소금 구성물이 많다. 사해는 평균 해면보다 훨씬 더 낮다. 그래서 배수구가 없어 물이 계속 증발하므로 염기의 농도가 매우 짙어져 소금바위, 소금기둥들이 생성되는 것이다.
1799년 나폴레옹의 원정대군은 이집트 북부 로제타 지역에서 일명 로제타 스톤을 발견한다. 모양이 다듬어지지 않은 길이 114㎝, 폭 72㎝의 검은 현무암의 상단에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중간에는 이집트 속자(俗字)가, 하단에는 그리이스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BC 205~180)의 은혜를 기리는 내용이 세 가지 문자로 표기된 것이었다. 왕의 재위 9년째에 즉위를 기념해서 멤피스 사제들에 의해 씌어진 비문으로 추정된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샹폴리옹은 기념비에 새겨진 그리스어를 읽고 다른 2개의 문자를 비교분석해가며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부호 읽는 법을 알아낼 수 있었다. 로제타 스톤의 비문을 통해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가 해독되면서 이집트 5천년 역사를 규명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마련된 것이다.
이전까지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단지 그리이스어 문헌이나 구약 성서에 의해서만 알 수 있었다. 이후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으로 미이라나 오벨리스크의 수수께끼도 풀리게 되었다.
로제타 스톤은 발굴되자마자,1801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에 의해 영국으로 반출되어 지금은 영국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성경에는 에돔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본래 에돔은 이삭의 아들 에서의 땅이었는데, 후에 호리족속이 점령하여 살다가 BC 13세기 경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이 이곳에 나라를 세웠다.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세일의 자손 중 호리 족속으로 말미암아 나온 족장들이요” (창 36:21)
1816년 스위스 탐험가들이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서남쪽에 위치한 세일산 지역에서 BC 4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에돔의 수도였던 페트라의 유적을 발견했다. 에돔은 붉다는 뜻이고, 페트라는 바위를 뜻한다. 실제로 이곳은 ‘붉은 장미빛 페트라’라고 불리우는 것처럼 붉은 바위 속에 세워진 도시였다.
고대 세계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넘는 거대한 문명을 이루고 살았다. 고대 도시 페트라도 천연의 요새로 사방이 절벽으로 방어된 채 극장, 온수 목욕탕,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집트의 피라밋과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불리우는 이곳은,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최근에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 - 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유명해 졌다.
바위 틈에 있는 천연요새로 외부 침략이 쉽지 않고 또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던 강국 에돔의 수도 페트라였지만, 그러나 교만함으로 패망될 것이 예언되었다. 그 예언대로 에돔은 완전히 패망해 버렸고, 그 유적은 오랜 세월동안 모래 속에 묻혀 있어야 했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옵 1:3-4)
성경에는 헷 족속에 대한 기록이 28번 이상이나 나온다. 그러나 다른 근동지방의 문서에서는 헷족속(히타이트족)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음으로 그것은 상상에서 만들어 낸 지명이라고 비난받아왔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창 15:18-20)
“ 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 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하였더라” (창 23:20)
그런데 1892년 루우샨을 중심으로 한 조사단이 터키의 보가즈코이에서 헷족속의 도시들과 역사적 기록들을 발굴함으로써, 성경에서 언급된 헷족속은 정확한 역사성이 있다는 것이 다시 입증되었다. 헷족속은 강력한 철기 문명을 바탕으로 해서 심지어는 이집트까지도 점령하며 대제국을 형성했음이 밝혀졌다.
이집트 한 무덤의 벽화에서도 상형문자로 기록된 헷 족속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애굽이 헷 족속들과 20여 차례나 전쟁을 했다는 사실까지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요셉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는 매우 극적이어서 설화처럼 취급되곤 했다. 그런데 속속 발견되는 유물들은 성경의 기록이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것이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성경에 요셉이 은 20개에 팔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K. A. Kitchen의 연구에 의하면, 그 전에는 노예 값이 대략 은 10-15개 정도 였으나, BC 18세기 때는 노예를 파는 평균값이 은 20개였다고 한다. 은 20개에 요셉이 팔렸다고 하는 기록은 시대적 정확성을 갖고 있다.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 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창 37:28)
요셉이 히브리 노예에서 애굽의 수상으로 올라갔다는 기사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며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고고학자Howard Vos는 나일 지방의 유적을 통해서 이와 비슷한 일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가나안 사람 Meri-Ra는 왕의 갑옷 드는 사람이 되었고, Ben-Mat-Ana는 통역관의 높은 직위를 얻었으며, Yanhamu는 Amenhotep의 부수상 직위를 얻어 삼각주 지역의 곡창 지대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굼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창 41:41)
성경은 애굽에 7년 풍작에 이어서 7년 흉년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창 41:47, 53-54)
이 기록을 확인해주는 흥미로운 석판이 19세기 사우디아라비아 남동부의 민주예맨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한 성곽의 대리석판에는 요셉 당시 기근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풍년 뒤에 따른 기근과 흉작의 시기에 찾아든 황폐함을 탄식하는 이 기록은 BC 1,800년 경에 씌어진 것으로, 야곱과 열 두 아들에 관한 성경의 기록과 일치한다. 7년이라는 구체적 증언도 성경과 일치한다.
“우리는 오랜 기간 이 성에서 편히 거주하였다.
우리는 욕심도 없었고 포도원의 주인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수 백마리 낙타가 매일 저녁 우리에게 돌아왔고
낙타의 눈에도 이곳은 쉼터로서 매우 좋은 듯 보였다.
우리 양은 낙타 수의 두 배 였고
느리게 이동하는 소도 흰 양과 같이 많았다.
우리는 이 성에서 7년을 아주 안락하게 살았다….
그런 생활을 다시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상황인가!
악마의 해가 스쳐 지나가는 그 때에 황폐한 시기가 들이 닥쳤다.
또 다른 해가 지나갔다.
우리는 다시는 좋은 시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발이 있거나 굽이 있는 동물도 남아 있지 못했다.
하나님께 감사히 여기지 않고 먹는 사람은
삶의 터전에서 몰살되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성경은 요셉이 다가올 기근을 대비하여 풍년 시기에 남은 곡식을 수거해 비축했다고 기록한다.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축하되 각 성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 중에 저장하매…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 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식물이 있더니…” (창41:48, 53)
고고학자 조지 배론은 나일 강가에서 발견된 돌에서 이런 기록을 발견했다. 마치 요셉 자신이 기록한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나는 옥수수를 모아 들였다. 나는 씨를 뿌리는 시기 동안 잘 주시하여 보았다. 기근이 발생하여 여러 해를 계속하였을 때, 나는 옥수수를 나누어 주었다. 나일 강이 7년 동안이나 범람치 않았고, 식물들이 말라붙었다. 창고들이 지어졌다. 그 속에 있는 것들이 다 나누어졌다.”
에븐헤샴은 이 기근 기간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 부유한 예맨 여인의 무덤을 발견했다. 많은 보석들과 함께 발견된 석판에는, 이집트의 7년 기근 시기에 보물로도 양식을 살 수 없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비축된 양식을 처리하는 사람으로 요셉의 이름도 언급한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으로,
함야의 하나님 두쥬 세파의 딸인 나 타야는
나의 종을 요셉에게 보냈습니다.
종의 귀환이 지체되어 나는 내 여종을 보냈습니다.
밀가루를 가져오게 하려고 은을 실려서:
식량을 조달 받을 수가 없어서 나는 금을 실어 여종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받지 못하여 다시 진주를 보냈습니다.
역시 식량이 도착되지 않아 그것들이 밀가루가 되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어서 나는 여기서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누구든지 이 소식을 듣는 사람은 요셉이 나를 불쌍히 여기도록 해주시오.
나의 장식물로 몸치장을 할 수 있는 어떤 여인도
나 같은 죽음으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reported in Niebuhr’s Voyage en Arabie, PL.LIX. Translation by Rev. Charles Forster )
성경에 의하면 요셉의 4대 이후에 히브리인들은 그 시대의 대규모 건축계획에 따라 애굽 새 왕조의 벽돌공장에서 일하는 종이 되었다. 그들의 중노동은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의 건설에서 절정에 달했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출 1:11, 14)
애굽의 파피루스에서 성경과 일치하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라메셋 2세의 거대한 신전 건축을 위해 돌을 끌고 일정한 양의 벽돌을 만들었던 아비루 (히브리인)들과 벽돌 만들 짚도 주지 아니한 간역자들에 관한 기록이 있다. 성경이 언급한 애굽의 바로(파라오)는 라메셋2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라메셋 2세가 건설한 동부 삼각주의 유명한 비라메세의 자리에 국고성 라암셋이 위치한다는 사실도 성경의 사실을 확인해준다.
테베에서는 토기 파편에 기록된 ’작업 일정표들’이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노동자들이 일한 날과 쉰 날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그의 아내가 병들다", "감독과 함께 맥주를 만들다", “전갈에 쏘이다" 등등 노동자 개개인의 결근사유가 구체적으로 덧붙여져 있었다. "자기 신에게 제사하는"사람의 명부 혹은 어떤 지방의 종교축제에 며칠씩 단체로 참가한 자들의 명부도 볼 수 있다.
성경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430 년간 노예생활을 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기적적으로 출애굽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삼십 년이라” (출 12: 37, 40)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에서 고대 제사장이며 학자인 메네소와 케레몬의 기록을 인용하며 성경의 역사성을 확인해 준다.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집트 역사에서 요셉과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칭해졌으며, 이스라엘인들은 시리아 남동쪽 (고대 팔레스타인의 이집트식 이름)으로 이주해 갔다. (Flavius Josephus, Josephus Against Apion. I., 26,27,32 )
또 람세스 아들이자 세토스의 아버지인 아메노피스가 제 18왕조 말기를 통치했는데 그의 재위기간 중인 BC 1,500년과 1,400년 사이에 이스라엘이 갑작스럽게 이집트를 탈출했다고 메네소는 기록한다. 이같은 기록은 출애굽 사건이 BC 1,491년 경에 발생했다는 구약 성경의 연대기적 날짜를 사실로 증거해 준다.
BC 80년 사람인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러스 시큐러스의 방대한 저서에서도 성경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는 고대사건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중동지방 전역을 여행하며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들을 자세하게 기록했는데, 그의 책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고대 이집트에 큰 재앙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재앙의 원인을 하나님 탓으로 돌렸다. 그 하나님은 그 땅에 사는 이방인들 때문에 이집트인들을 벌하곤 하였다. 이 이방인들은 자신의 신을 예배할 때 그들의 의식과 예식을 거행했다.
이집트인들은 이방인들이 자신의 땅에서 밀려 나가지 않으면 재앙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집트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시대에는 거주지가 아니었던 현재 유대라고 불리는 곳으로 물러난 이런 이주민들을 모세가 이끌었는데 그는 지혜와 전술에 매우 능하였다. 모세는 이들에게 법을 주었고 그는 또 모든 것을 주장하고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유일한 하나의 신만 있다고 하여 신의 어떠한 이미지도 만들지 못하는 법을 제정했다.” ( Diodorus Siculus, Library of History, lib.1., ap Pho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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