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四始)란 역사상 우리 권문(權門)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네 가지 일을 말하며, 그것은 다른 어떤 가문에도 없는 일이며, 매우 자랑스러운 일인 동시에 우리 일족의 영예이고 긍지이기도 하다.
1) 기로소(耆老所)에 처음 입소(入所)함.
기로소(耆老所)란 조선시대에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기구인데, 처음에는 경로당과 같은 친목기구의 성격을 띠었으나 1765년(영조 41)부터는 독립관서가 되었으며, 여기에는 왕도 참여하였으므로, [대전회통]에는 관부서열 1위로 법제화하였다.
원칙적으론 문과 출신의 정2품 이상 전직·현직의 문관으로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으며, 이들을 기로소당상이라 하였고 인원의 제한은 없었다.
숙종은 59세에, 영조와 고종은 51세에 각각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조선시대 전대를 통하여 여기에 들어간 사람은 7백여명에 불과했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을 더할 수 없는 영예로 여겼다.
그 청사는 서울의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었다.
그러한 기로소에 가장 먼저 입소한 분이 바로 우리 권문(權門)의 14세손 권중화(權仲和)공과 15세손 희(權僖)공이 었다.
권중화(權仲和:1322∼1408 고려충숙왕 9∼조선태종8)공은 고려말·조선초의 문신이며 서예가이시다.
자는 용부(容夫), 호는 동고(東皐), 시호는 문절(文節)인데, 1353년(공민왕 2)에 문과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우왕(禑王) 때 문하찬성사에 이르렀는 분이시다.
90년(공양왕 2) 이·초(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유배되었 으나, 곧 풀려 나와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92년 조선개국 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올랐으며, 1407 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고사(故事)·의학·지리·복서(卜筮)에 통달했으며, 서체 가운데 특히 전서(篆書)를 잘 썼다. 전해지는 작품으로는 1377년(우왕 3)에 건립된 [회암사선각왕사나옹비(檜巖寺禪覺王師懶翁碑)]가 남겨 졌는데 고려시대에는 보기 드문 예서로 되어 있다.
자경(字徑)은 3촌 7분이며 왕희지·구양순류(類)의 서체가 휩쓸었던 신라와 고려시대 서예계의 흐름에서 볼 때 매우 특이 한 예로 조형이나 필획에서 해서(楷書)의 요소가 엿보이나 획 이 가지고있는 순수하고 고졸(古拙)한 맛은 한(漢)대의 장천비 (張遷碑)를 능가한다는 평이 있다.
권희(權僖: 1319∼1405 고려 충숙왕 6∼조선 태종 5)공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검교시중(檢校侍中) 고(皐)의 아들이며, 음보(蔭補)로 기용되, 홍주도병마사(洪州道兵馬使) 등 여러 벼슬을 거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러 영가군 (永嘉君)에 책봉되었고, 조선이 개국된 뒤 1393년(태조 2)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이 되었다. 1400년 태종이 즉위하자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 에 올랐다. 공의 사후 왕은 공을 추모해서 3일 동안 조회를 하지 않았다 한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2) 권문(權門)에서 처음으로 대제학(大提學)에 오름.
대제학(大提學)은 조선시대 때 홍문관(弘文館), 예문관 (藝文館)의 정2품 벼슬이다. 조선 건국시대에는 없었던 제도 였는데,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러 관직을 정비 보완할 때, 예문관에만 한 곳에만 대제학을 두었으나, 1420년(세종2)에는 집현전(集賢殿)에도 대제학을 두었고, 56년(세조 2년)에 집현전을 홍문관으로 고쳐 대제학을 두었다.
예문관대제학은 홍문관대제학이 겸임하였다. 홍문관 대제학 은 홍문관이외의 타관이 겸직했는데 주로 이조판서나 예조판 서가 겸임했고 겸직한판서가 승진되어 좌상이나 우상이 되어 도 그대로 대제학직을 겸임했다. 대제학이 되려면 전임자가 학식 있는 사람 중에서 뽑아 추천해서 전임·현임정승과 이조판서 등이 투표로 결정해 왕의 재가를 얻어 임명한다. 한번 임명되면 함부로 퇴임되지 않으며, 임기가 없고 본인이 사임하지 않으면 종신토록 그 직을 가진다.
문장과학문의최고관리 자로서 특별 대우를 받았으며 궁중의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관리하고 문서를 처리하며, 왕의 자문에 응하는 홍문관의 수장(首長)이다.
가장 먼저 대제학(大提學)이 된 분이 바로 우리 권문(權門) 의 16세손 양촌(양촌(陽村)이며, 이씨 조정에서는 모두 3명의 대제학(大提學)이 우리 문중에서 나왔다.
3) 호당(湖堂)에 가장 먼저 입소하였음.
호당(湖堂)이란 조선시대에 국가의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건립한 전문독서연 기구를 말하며, 일명 독서호당 이라고도 한다.
처음 호당이 설치된 것은 1426년(세종 8년)인데 그 뒤, 성종은 서거정(徐居正)의 청을 받아들여 1492년(성종 23)에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을 개설해서 인재를 길었는데 1504년 갑자사화의 여파로 잠시 폐쇄되었다가 1507년에 다시 부활되었고, 중종은 1517년에 또한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동호독서당은 75년 동안 인재 양성과 학문연구와 도서열람의 도서관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호당 즉 독서당은 연구기관으로서 역대 왕들의 많은 총애를 받았다. 호당의 권위를 높이려고 입소하는 인원을 줄이고, 입소하는 자격과 규정을 엄격히 해서 인원을 선발했다.
선발연령은 연소문신(年少文臣)이 원칙이었으며 대제학은 독서당을 거쳐야만 가능했다. 운영은 국비이며 호당 원생수는 1426년부터 1773년까지 약 350년 동안 총 48차에 걸쳐서 320명에 불과했다.
우리 권문에서는 권채(權採)를 위시해서 권건(權健), 권운(權雲), 권경유(權景裕), 권달수(權達手), 권중경(權重經) 등 6명이나 된다.
4) 가장 먼저 족보를 만듬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도표식으로 나타낸 한 종족의 계보(系譜)를 족보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족보를 만들어, 조상을 존경하고 종족의 단결을 도모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촌수의 멀고 가까움에 관계치 않고 화목의 기풍을 이루게 한 것이 바로 우리 안동권씨이다.
1476년(성종 7) 간행된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족보인 성화 보(成化譜)는 현재 전하는 한국의 족보 가운데 가장 먼저 편찬된 것이며, 우리 나라 족보는 권문(權門)에서 가장 먼저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 권제(權嗇)공이 중국의 [소씨보(蘇氏譜)]를 참고로 하여 편찬한 것을 아들 권람(權擥)이 자료를 수집, 더 상세하게 보완하려하였으나, 일을 마치지 못하고 일찍이 죽자, 권제공의 생질인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박원창(朴元昌)과 최호원(崔灝元)의 도움을 받아 마무리 편집과, 교열한 뒤에 경상감사 윤호(尹壕)를 시켜 안동부에서 간행하였다.
서문에서 서거정은 조상을 찾아 조상으로 섬기고 친척과의 친목을 이루는 보첩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다. 약 9,000명의 인물이 등재되어 있으며, 본손뿐 아니라 외손까지도 가계를 기록하고 있어서 만성보(萬姓譜)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족보에 나타난 각 인물마다 당시의 관명을 기재하고 있어서, 국기가 안정되고 제도가 정비됨에 따라 조선 초기의 관명이 변하였음을 보여주어 관명의 변천사항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모두 3책으로 되어 있으며, 목판본으로 지금 규장각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우리 가문에서 그간 편집되거나 간행한 대동보(大同譜)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성화보(成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