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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구조에 따른 분류
전제주의 despotism
민주주의 democracy,
국가의 모든 권력을 왕이나 귀족 또는 개인 독재자 등 소수의 지배자가 법이나 제도의 구속을 받지 않고 개인의 의사에 따라 정치를 하는 제도
국가의 모든 군력을 국민이 지배하는 제도로 귀족제나 군주제 또는 독재체제에 대응하는 정치형태로 민주주의라는 말은 그리스어語의 demokratia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demo(국민)와 kratos(지배)의 두 낱말이 합친 것이다.
왕권주의, 봉건주의, 절대주의, 독재주의 등의 정치체제를 뜻한다. 전형적인 전제주의는 중세 말(15, 6세기)부터 근세 초(17, 8세기)에 걸쳐서 있었던 절대주의 독재국가형태에서 볼 수 있다.
그 특색은 루이 14세가 "짐은 국가이다"라고 했듯이, 군주가 무제한으로 전제권력을 행사하거나, 대지주(大地主) 또는 귀족들이 봉건적 신분을 유지하면서도, 군대와 관료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을 유지하면서 통치하는 정치형태를 의미 한다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의회정치 등을 외면하고 한 사람 또는 일부 소수자가 국가 권력을 독점하는 독재정치로 현대에 있어서도 경제기반이 약하고 민주주의 제도가 미비한 중동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지에는 왕권주의 전제주의가 있으며 과거 나치 독일, 군국주의 일본, 공산당 독재 등이 그것이다.
직접민주주의
간접민주주의
고대 씨족사회나 부족사회에서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정치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예가 적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발전한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들이 '입법의원'이 되어 직접 참여하는 단순한 직접민주주의였다.
고대사회에서는 인구가 1만 명 내외의 소규모 도시국가에서 실시되는 민주주의였으므로 모든 시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었고 초기 그리스에서는 시민권을 가진 남자들의 다수결원칙 아래 정치적 결정에 직접 권한을 행사하는 정부형태를 의미하였다.
국민개인이 직접 정치결정과정에 참여하지는 않고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을 통하여 정치결정 권한을 대리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것을 간접민주주의 ‘대의(代議)민주주의’라 한다.
1776년 7월 4일 채택된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조물주로부터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권리가 부여되었고, 삶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천부적으로 타고났다"고 역설하였고 1787년 제정된 미국의 헌법은 인류 최초로 삼권분립을 명시하였으며 자유민주제도를 성문화하였다.
서구 민주주의는 정치제도가 도입되기 전에 사회가 먼저 경쟁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시장경제원리가 성숙된 생활여건에 맞도록 발생한 것이 서구사회의 민주주의이다. 자유주의가 성숙된 서구사회에서 개인은 종교를 마음대로 선택하고, 생활방식을 자신의 취향대로 이끌며, 결혼대상자를 자유로이 선택하고, 직업을 원하는 대로 찾을 수 있도록 되었다.
민주주의의 필수 요건 :
첫째, 국민은 1인 1표의 보통선거권을 통하여 절대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둘째, 최소 2개 이상의 정당들이 선거에서 정치 강령과 후보들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국가는 모든 구성원의 출판 결사 언론의 자유가 포함되는 민권(民權)을 보장해야 하며 적법절차 없이 국민을 체포 구금할 수 없다.
넷째, 정부의 시책은 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다섯째, 국가는 효율적인 지도력과 책임 있는 비판을 보장하기 위해 정부의 관리들은 의회와 언론에서 반대의견을 들어야 하고, 모든 시민은 독립된 사법제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여섯째, 정권교체는 평화적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경제체제에 따른 분류
자본주의capitalism, 資本主義
공산주의communism, 共産主義 '
자본주의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사적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고 개인의 자유경쟁을 수단으로 개인의 제산사유를 인정하는 경제제도로 사적 지배권을 가진 경제주체인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노동자 즉 서로 다른 두 인구군(人口群)이 시장에서 결합되어 함께 활동하여 영리주의(營利主義)와 경제적 합리주의(經濟的合理主義)에 의해서 지배되는 하나의 유통경제적 조직(流通經濟的組織)이다.
자본주의는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예를 들면 이윤획득(利潤獲得)을 위한 상품생산이라는 정도의 뜻으로도, 단순히 화폐경제(貨幣經濟)로도 쓰이며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경제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현재 서유럽과 미국, 대한민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국민들은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 아래서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① 사유재산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
② 모든 재화에 가격이 성립되어 있다는 것,
③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하여 상품생산이 이루어진다는 것,
④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는 것,
⑤ 생산은 전체로서 볼 때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공산주의는 사회의 모든 재산은 사적 소유를 부정하고 개인의 재산이 인정되지 않고 사회의 소유로 되며, 사회 구성원들은 이들을 누릴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계급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려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공산주의 코뮤네(commune)'라는 말은 본래 공유재산을 뜻하는 '라틴어의 조어(造語)로서, 사유재산제를 철폐하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재산을 공동 소유하는 경제제도를 의미하였다.
공산주의를 태동시킨 사람은 마르크스로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사회 역사의 발전단계는 각 사회의 계급투쟁의 산물이며, 전 세계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자본가에 대항하여 투쟁함으로써 이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공산사회는 반드시 도래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성공적으로 완수될 것이라 예언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공산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킨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1840년대 이후 서유럽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하여 창시된 마르크스주의를, 레닌이 20세기 초 러시아의 특수한 조건하에서 발전시킨 사상 및 이론의 체계와 실천운동으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 즉 공산당(共産黨)이 수립한 과거 소련·동유럽,·중국, 북한, 인도차이나반도 등지의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공산주의란, 단순한 재산의 공동소유가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한 인간소외의 극복, 인간성(인간의 본질)의 적극적인 회복을 의미하였다.
자본주의의 폐해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주장하고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제를 주장하는 자본주의는 개인의 치부를 위해 발생되는 사회적 타락과 도덕적 부정, 소득의 불균형으로 인한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나타난다.
그로 인하여 개인의 자유 (주거, 신앙, 사상 집회, 결사 등의 자유)는 만끽 할 수 있으나 인간본질의 요구인 평등이 무너지고 권력, 금력, 종교, 임의집단 등의 지배 권력이 갑질로 나타나 인간성의 말살 등 불평등이 심회되는 폐해가 나타난다.
공산주의의 폐해
공산주의혁명인 러시아혁명은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주도되었으나 모든 노동계급이 참여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에 의하여 조직된 소수 전위대에 의한 것으로서 민주주의 특성을 상실하였다.
그래서 노동계급의 국가가 아니라 전위대 국가로 출발하게 된 것이며, 전체 소련 인민에 대한 소수 당원의 독재체제로 발전한 것으로 평등을 최우선의 목표로 추진된 혁명은 개인의 자유를 상실할 뿐 아니라 계층 간의 평등조차 무너져버렸으며 재화의 국유화는 빈곤과 통제사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사회주의 socialism 社會主義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로 사회 속에서 공동체를 구성하여 살아가게 되므로 개인의 의사와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보다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중시여기는 사상으로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개인의 능력과 인성은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고, 공동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도 제한될 수 있으며, 개인의 자유는 사회 속에서 인정되고 향유될 수 있는 가치로써 시민 혁명이후 등장한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논리로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모순과 병폐들, 즉 생산의 무정부성, 자본의 집중, 자원의 낭비, 실업과 빈곤의 증대, 주기적 공황 등이 나타나는 것은 개인주의에 근본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산업화의 진전으로 등장한 사회적 불평등과 경제가치 배분의 불균형,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대립은 두 계급 간의 갈등으로 나타났고, 이들의 갈등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자 이러한 혼란 속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대안이 모색되었고, 그 중 하나가 사회주의이다.
사회주의는 경제적 불균형이 사유재산제에서 발생한다고 보아 불균형 해소를 위해 생산 수단의 공유화와 국가적 통제를 제시하며 생산 수단의 공유 또는 국유화로 개인의 노동으로 실현된 이익을 배분함으로써 불평등의 원인을 해소하고, 분배의 형평성을 높임으로써 물질적 결핍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계층 간의 갈등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자유, 평등, 사회정의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 또는 운동으로 사화주의 운동은 봉건적 사회가 해체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던 때부터 싹텄고, 산주의 사화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무정부주의(아나키즘) 등의 다양한 사회주의 형태가 연구 발전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
민주시회주의
democratic socialism
무정부주의anarchism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관리에 의한 사회 개조를 민주주의적인 방법을 통해서 실현하려고 하는 운동이다.
자본주의란 원래 개인 이윤을 목적으로 개인 소유 위에서 개인의 쟁에 의하여 운영되는 경제적 개인주의이다.
19세기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자유 평등을 실현하지 못하는 원인이 자본주의의 개인주의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자유·평등의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하려면 자본주의의 개인주의를 사회주의로 바꾸어야만 된다고 믿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주의로 바꾸기 위하여 폭력혁명을 방법으로 삼은 데 대하여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폭력이 아닌 민주주의적 방법을 통하여 그 목적을 실현하려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고비로 사회민주주의의 주장에 개량주의적 수정주의적 요소가 증대되어 가자, 사회민주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지 않는 사회주의 사상을 뜻하게 됨으로써 마르크스-레닌주의 즉 공산주의와 결별하게 되었다.
레닌혁명 이후 1940년대 중반까지 소련에서 생산수단의 국유화에 국가자본주의의 출현으로 사회개조의 실패, 소련 독일 이탈리아 등의 독재의 해악(害惡) 등이 알려지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재평가 재인식의 기운이 크게 일게 되어 마침내 1951년 6월 서독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자유세계의 약 30개 사회민주주의 정당대표들이 회동하고, 7월‘민주사회주의의 목적과 임무(흔히 민주사회주의선언 또는 프랑크푸르트선언으로 불림)’를 채택·선포하였다.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 폭력혁명을 부정하고 국제공산주의와 대결함을 강령(綱領)으로 하면서 사회주의의 이상을 의회주의를 통하여 추구하려는 사상을 말한다.
① 민주정치는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이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인민의 중대한 관심사이며 이것을 견지하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다(민주사회주의선언)”
②“모든 독재정치는 국민의 자유와 세계의 평화에 위험하다”고 규정하여 모든 독재정치를 부정·배격하고 있다.
③ 사회주의적 계획은 전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예상하지 않으며 농업 수공업 소매업 중소기업 등 중요한 부문의 사적 소유와 양립한다.
공산주의가 사회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은 잘못이다. 공산주의는 새로운 제국주의의 도구이므로 그것이 정권을 장악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자유와 자유를 획득할 기회가 파괴되고 있다. 공산주의는 군국주의적 관료주의와 공포경찰제도에 기초를 두고 새로운 계급사회를 만들어냈다
⑤ 민주주의를 확대·발전시킴으로써‘최고형태의 민주주의를 실현해 나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⑥“미래는 공산주의의 것도 자본주의의 것도 아니고 ‘최고형태의 민주주의를 지향함으로써 새로운 미래상(未來像)을 제시하고 있다.
⑦ 민주사회주의에서는 최고형태로 발전하였을 때의 민주주의를 사회주의라 부름으로써 사회주의의 본질과 방향이 종래와는 전혀 다름을 밝히고 있다.
아나키즘은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지배가 없는 자유로운 사회, 특히 국가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사상과 운동의 총칭으로 정치적 지배인 국가권력뿐만 아니라 자본이나 종교, 조합 등의 모든 영역의 지배를 부정하는 사상 조류로 다섯 가지의 특징으로 규정해 볼 수 있다.
① 인간은 본래 선(善)의 능력을 가진 착한 존재인데, 관습·제도·권력 따위가 타락하게 만든다.
②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로서 공동체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며, 자발적으로 서로 협력할 때 가장 인간다워지므로 이런 사회가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
③ 사회의 여러 제도 가운데에서 사유재산과 국가는 인위적인 것으로는 이것들은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착취하게끔 하는 것이다. 민주 통치나 사회주의적 경제체제 등 모든 권위적인 요소들은 개인을 억압하는 것이다.
④ 모든 사회변화는 자생적이고 직접적이며 대중적인 기반을 둔 것이라야 하며, 이와 반대되는 모든 조직화된 운동은 권위의 조작에 의한 산물에 불과하다. 조직화된 혁명은 하나의 억압을 다른 하나의 억압으로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변화는 외부적인 통제가 없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지는 대중의 자연적인 표출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⑤ 산업문명은 생산수단의 소유형태가 어떻든지 간에 인간의 정신을 파괴한다. 기계는 인간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든 산업문명 위에 세워지는 것은 인간의 내적인 힘을 누르는 것이다.
보수주의
진보주의
보수주의는 기존사회의 전통과 질서를 존중하고, 인간의 자유와 권리 행사에, 확실성과 안정성을 추구하며, 검증되지 않는 새로운 사상이나 개혁에 대해서 소극적 성향을 가지며. 사회 질서 속에서 인간은 윤리적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인식하고, 인간의 권리 행사도 이 체제 내에서 국한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혁신에 대하여 회의적이고 소극적 입장을 취하게 됨으로 기존 체제에 대한 신뢰와 전통에 대한 고착화를 강조하며, 기존질서의 안정을 위하여 정치체제뿐만 아니라 종교와 결합하여 심리적 또는 종교적으로 기존 체제의 우수성을 주장하고 새로운 학문이나 사상, 정치 체제에 대한 불신과 우려를 주장하며, 전통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한다.
신사상과 주장에 대해서도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며 때로는 지나친 보수의 기득권 주장은 사회의 반목과 갈등을 야기 시켜 사회 분열을 초래하고 치유될 수 없는 갈등국면으로 몰고 가게 됨으로 기존사회 질서에 대하여 반감을 가진 계층으로부터의 혁명을 야기하는 심각성도 가지고 있어 극단으로 치닫게 되고, 변화에 대한 논의조차 용납되지 않는, 과거 집착적인 태도를 보이는 형태를 수구(守舊)라고 한다.
수구는 사회를 주도하는 계층이 사회의 희소가치를 독점하고, 이를 배타적으로 수호하기 위하여, 기존 질서에 대한 완강한 수호의 의사를 가지게 된다. 물론 보수이든 수구이든 간에 기존의 질서를 옹호하게 됨으로써 사회 안정화에 기여하기는 하지만 안정적인 사회는 변화의 가능성을 약화시키며, 정체화 된 사회를 탄생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보수주의는 변화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또는 체제안정을 위해 일정정도의 한계 내에서 변화를 수용하기도 한다.
이는 스스로의 체제가 생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하는 것으로써, 때로는 과감한 변화적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 기존의 보수가 더 개혁적이고, 진보가 더 보수적이 된다는 말은 이러한 형태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말이다.
진보주의는 기존의 사상이나 사회 질서, 제도, 정치, 경제체제 등을 개혁하고 이를 통하여 변화를 시도하는 주장이나 사상으로 현재 사회의 주류적 가치에 안주하지 않고 혁신을 통하여 보다 바람직하고, 올바른 것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임으로 기존 질서와 체제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으로 접근하며, 기존사회의 모순에 저항하며, 새로운 이념이나 체제를 대안으로 내세우게 된다.
안정성보다는 변화를 통한 발전을 고민하고, 한걸음 더 발전된 사회를 조망하며. 이들의 주장은 기존의 사회 질서를 주도하는 사상이나 체제 또는 그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갈등과 마찰을 일으켜 사회적 갈등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어 사회혼란을 야기하는 측면은 있지만 갈등의 과정에서 기존에 대한 비판은 새로운 것에 대한 고민과 발전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대안의 모색과 발현의 형태로 기존 질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기존 질서가 가지지 못한 점들을 극복하게 된다.
진보주의는 그 정도에 따라 개혁주의와 급진주의로 나누며. 개혁주의는 기존 사회질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를 바로잡아 사회 발전과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데 목적이 있다.
개혁을 기존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이루며, 기존질서 한계 내에서 개혁을 수행하는 특징을 가지므로 정치체제나 사상 등의 급격한 변동에는 소극적이며 또한 개혁의 주체는 지배층이 되고, 개혁의 방향은 위에서 아래로의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급진주의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부정하고 근본적인 체제의 변혁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기존 질서의 가치관을 부정하고 이에 반대되는 가치나 체제를 주장하게 된다.
기존의 질서의 모순을 그 사회 체제 내에서는 극복하지 못한다고 보며,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제도권에서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근본적 체제 변혁을 주장하게 된다..
급진주의는 주로 기존 질서에서 소외된 계층을 중심으로 나타나게 되지만 급진주의라도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관철하기 위하여, 때로는 속도나 강도를 조절하여, 온건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좌파(좌익)와 우파(우익)
좌파 우파의 어원은 프랑스 혁명기에 소집된 국민공회에서 등장하였는데, 이 회의에는 의장을 중심으로 급진파인 쟈코뱅당이 왼쪽에 자리했고, 온건파인 지롱드당이 오른쪽에 자리한데서 유래되었다. 이후 현대 사회로 오면서 좌익과 우익은 서로 분파하여 다양한 형태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게 되고, 이에 따라 정치적 성향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급진 좌파, 중도 좌파, 급진 우파, 중도 우파 등으로 불리 우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형성은 기존질서에 대한 시각과 그들이 추구하는 정치 성향에 따라 불러지는 이름이다.
우파(우익)
좌파(촤익)
우익(우파ㆍ右派)는 오른쪽 날개'라는 뜻으로 보수, 자본주의적 사상이나 경향을 뜻한다. 우파는 우선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이념적으로 보수적이고 국수적인 형태를 띄고 전통과 자유를 중시여기는 정파 또는 파벌이다.
우파는 정치적으로는 점진적ㆍ보수적 정파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중시여기고 보수적인 성향을 나타내며 경제 문제에 있어서 시장 원리를 신뢰하고, 자율을 바탕으로 경제적 효율성을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공기업에 대한 민영화 주장, 규체 철폐를 주장하고 또한 국가 부문을 최소화 할 것을 주장하고, 국가의 개입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각을 드러낸다.
복지정책에 있어서는 경쟁원리에 따라 성장 우선의 논리와 성과에 대한 차등 분배를 옹호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우파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신봉자라는 뜻으로 구분되어 왔다
좌익(좌파ㆍ左派)은 왼쪽 날개'라는 뜻을 진보, 혁신 또는 사회주의적 사상이나 경향을 가진 인물이나 단체로 좌파는 사상적으로 급진적이고 개혁적이며 평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며 변화를 주장하는 정파 또는 파벌을 말한다.
좌파는 정치적으로는 급진 진보적 정파로 사회주의를 중시 여기고 경제 정책에서는 시장에 대하여 국가의 개입을 강조하며 시장의 자율성보다는 국가 개입을 통하여 형평성을 강조하는 형태를 주장하며, 국·공기업의 확대를 통하여 이를 수행하고자 한다.
또한 평등과 분배를 강조하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여 국민들에 대한 복지 정책의 확대를 강조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좌파는 공산주의 체제의 신봉자라는 뜻으로 구분되어 왔다
보수와 진보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일제 강점기 때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민족운동의 한 방편으로 나타났다. 민족운동가 신규식(申圭植)은 청년인재를 양성하고 중국혁명가들과의 유대를 위해 동제사(同濟社)라는 단체를 조직 운영하였다. 그런데 당시 스톡홀름에서 국제사회주의자대회(제2차 인터내셔널)가 열리는 시기여서, 그곳에 한국의 독립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1917년 8월 중국 상해에서 '동제사'란 이름을 '조선사회당'으로 개칭하였던 것이 한국 사회당의 시초이다. 즉, 이념적 측면보다는 민족운동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 1년 뒤, 1918년 6월 이동휘(李東輝) 등이 러시아의 하바로브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후에 상해로 옮겨 '고려공산당'이 되었다. 한편, 1918년 1월에는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金哲勳) 등에 의해 한인공산당이 조직되었는데, 이는 후에 '전로고려공산당(全露高麗共産黨)'으로 개칭되어 볼셰비키 공산당과 직결되는 조직으로서, 상해파와 대립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1922년 이후 코민테른에 의해 모두 해체되고 말았다.
국내에서의 사회주의 움직임은 3·1운동 이후에 항일운동과 민족 재생의 방편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전통적 민족주의 운동에서 벗어나 계급적 사회주의 운동으로 일제에 대항하려 하였다. 일본 유학생 중심의 사회주의 조직인 흑도회(黑濤會)가 조직된 후(1921. 11. 29), 풍뢰회, 흑우회, 불령사, 북성회, 북풍회, 일월회, 무산자동지회 등 여러 조직이 출현하였다가 소멸되기를 반복하였다. 이들 조직들은 고학생이나 무산자, 무산계급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한 결 같이 무산자계급 해방과 계급투쟁을 주장하였다.
1923년 7월 7일, 신사상을 연구한다는 목적으로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한 후, '화요회'(마르크스 생일이 화요일)로 바꾸었다. 후에 상하이에서 조봉암(曺奉岩), 박헌영(朴憲永), 김단야(金丹冶) 등이 귀국, 동참하여 강화되고, 북풍회와 유대관계를 맺고,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조직시에 핵심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도 토요회, 조선노동당, 서울청년회, 사회주의자동맹, 혁청당 등이 출몰하였다. 그러나 각 조직의 분명한 사상적 기저가 분명치 않았고 항일투쟁의 과정에서 공동의 목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 경계선이 모호하여 이합집산이 거듭되었다.
항일운동 과정에서 민족주의 단체와 사회주의 단체가 단결을 꾀하였으나 실패한 역사가 있다.
첫째, 신간회(新幹會) 운동으로, 1927년 2월 항일운동을 위해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협동으로 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조직되었으나 결국 두 세력 간의 비난과 갈등으로 두 이념이 결합된 대중적 민족주의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1931년 5월 해체되어 통일전선이 불가능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둘째, 조소앙(趙素昻)의 삼균주의(三均主義)이다(1946). 그는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3대 사상을 종합하여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균등을 핵심 실천요소로 하고, 개인, 민족, 국가 간의 평등을 기본 목표로 하는 독창적 모델을 제시하며 민족이 대동단결할 것을 강조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광복이후에는 1945년 8월 15일 원세훈(元世勳)이 발기한 '고려민주당'이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 최초의 정당이었다. 그러나 직후에 여운형(呂運亨), 장건상(張建相) 등이 조직한(1945. 11. 12) '조선인민당'이 비공산주의적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을 이루었다. 이 당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반동분자만을 제외하고 노동자, 농민, 소시민, 자본가, 지주까지도 포함한 전 인민을 대표하는 대중 정당'이라고 노선을 밝혔다.
그러나 이 당은 신탁통치문제,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미·소공동위원회 등의 대책에서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에 동조함으로써 본질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삼균주의를 주장했던 조소앙은 김구(金九)와 결별하고 '사회당'을 창당하였다(1948).박헌영이 다시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신민당을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을 결성하자, 여운형은 백남운(白南雲), 이영, 이상백(李相佰), 장건상, 김성숙(金星淑) 등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여 대립하였다(1947. 5. 24).
그러나 그 해 상대당원에 의해 여운형이 암살되자 당은 해체되고, 6·25전쟁 이후 좌파성향의 백남운, 이영 등은 월북하고, 우파성향의 장건상, 김성숙 등은 남한에 잔류하였다. 광복 직후 정치적 혼란기에 사회주의를 표방한 자라고 하더라도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멀어 오늘날의 이념적 잣대로 명확이 분류하기는 어렵다.
남북으로 이념적 분단이 된 상황에서 남한에서는 민주주의 체제로 독립 국가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 속에서 민주적 사회주의 성향의 정당인 '진보당(進步黨)'이 조봉암, 서상일(徐相日), 윤길중(尹吉重) 등에 의해 결성되었다(1956. 5). 조봉암은 국민적 지지를 받아 제3대 대통령에 출마하여 이승만과 대결하였다. 그러나 진보당은 조봉암계와 서상일계로 분열되었다.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반독재 민주화투쟁과 국민 대중의 복지향상을 위해 투쟁하다가 이른바 '진보당 사건'이 발생하여, 20여명의 지도자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당은 불법화되었다(1958. 2. 25). 대법원의 재판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조봉암만은 사형 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었다(1959. 7. 30).
남한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어려워짐을 나타내는 사건이었다. 4·19 혁명 이후에도 사회주의 운동은 맥을 이어, '사회대중당'이 형성되어 원내에 진출하였고(1960. 7. 29), 통일사회당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남한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은 빈사상태에 빠졌다.
북한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폭력적 공산주의 혁명을 달성하고, 사상 면에서 유일체제의 독재국가로 변모하였다. 북한의 남한에 대한 무력행사는 남한 국민들로 하여금 공포감과 증오감을 갖게 하였고, 비공산주의적 사회주의마저 경계하게 되었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에의 과정 정도로 간주되어, 그 결과 서유럽 사회 등에서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사회주의가 냉전시대의 대립점 분단국가인 한국사회에서는 뿌리내릴 수 없게 되었다
아나키즘 운동
근대에 이르러 아나키 개념은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다. 종교 전쟁, 국가 간의 전쟁은 아나키를 억제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이다. 주권국가 내부의 절대적 질서는 주권 국가 간의 아나키를 필연적으로 수반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원성에 만족하지 않는 계몽의 조류도 존재하였다. 아나키는 통치자의 부재를 의미하지만 질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지배자가 자연의 질서를 붕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근대의 아나키즘 사상의 선두주자는 프랑스 혁명의 시기에 활약한 영국의 W.고드윈(William Godwin)이다. 고드윈은 디센타즈(비국교회파)의 영향을 받고 자라 지식의 진보가 진정한 질서를 발견함으로써 향후에는 통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논의를 저서 『정치적 정의』에서 전개하였다. 그때 고드윈은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사적 판단뿐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사회를 허구의 일체성이라고 보고 그 편견에 사로잡힌 정부를 비판하였다.
한편, 프랑스 혁명 후의 프랑스 초기 사회주의 속에서 아나키즘 사상의 형성에 힘이 되었던 것은 푸리에(François-Marie-Charles Fourier)의 영향을 받은 P. J.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이었다. 프루동은 개인재산을 ‘도둑질’이라고 비판함으로써 주목을 받았으며 다음 해에는 내셔널리즘을 비판하고 자치단체 등에 의한 연합주의를 주장하였다.
동일한 시기에 헤겔 좌파에서 나온 독일의 M. 슈티르너(Max Stirner)는 헤겔적인 보편 이념을 비판하고 에고이즘의 입장에 서서 가장 개인주의적 색채가 강한 아나키즘을 주장하였다. 마르크스(Karl Marx)는 슈티르너 및 프루동에 대해 논쟁하고 스스로의 체계를 수립하지만 그 논쟁을 계승한 것은 러시아 귀족출신인 M.A. 바쿠닌((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акунин)이였다. 바쿠닌은 그때까지 독립적으로 출현하였던 아나키즘을 하나의 사상과 운동의 계보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그 때까지의 서구적 한계를 넘어 민족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결부시켰다. 또한 개인주의적이기 보다 집산주의(集產主義)적인 점에서도 아나키즘의 성격을 바꾸었다.
바쿠닌 등의 노력으로 19세기의 노동운동에서 위력을 갖게 된 아나키즘은 남유럽, 북미 등 산업화의 주변적 지역을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운동으로서는 테러리즘으로 향하는 경향 외에 노동 조합운동과 연계된 아나코 생디칼리즘(anarcho syndicalisme)이 20세기 초에 활발하였다. 현재는 정치세력으로서는 분산하였지만 프랑스 현대사상의 일부 등에도 아나키스트적 사고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아나키는 지배 없는 자유로운 사회이며, 이것을 추구하는 이가 아나키스트라는 등의 긍정적인 해석이 나타난다.
다만 아나키스트를 자인하는 사람들이 다수 나타나게 되는 것은 1870년대 후반부터이다. 더 나아가 그들이 아나키즘이라는 말을 빈번히 사용하는 것은 1880년 이후이며, 그 주요한 목적은 국가를 중심으로 하여 사회주의의 실현을 지향하는 세력과 구분지어 아나키라는 이념을 내걸고 그들에게 대항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대립의 단서는 제1인터내셔널의 분열에 있다. 총평의회의 권위주의를 비난한 쥐라연합은 노동자계급에 의한 정치권력의 획득을 거부하고, 국가의 파괴 및 자유와 연대에 기초한 생산자 그룹의 연합체를 목표로 삼았다. 또한 바쿠닌은 '전 인민의 봉기'와 '아래로부터 위로의' 조직에 의해서만 자유는 실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 후 쥐라연합에서는 최종 목표는 자치단체(코뮌)의 연합이지만, 혁명 직후에는 다양한 사회시스템이 병존한다는 견해와, 또는 생산력이 증대한 결과 각자의 노동에 따라 생산물을 분배하는 시스템(집산주의)으로부터 각자의 욕구에 따른 자유로운 소비가 실현되는 시스템(공산주의)으로 서서히 이행한다는 등의 생각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1880년이 되자 이 연합에서는 집산주의가 배척되고 공산주의가 기본 원칙으로 채택된다.
이 원리는 유럽 각지에서 지지를 얻게 되지만, 동시에 집산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대립을 초래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에는 프루동의 사상 등에서 배운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도 영향력을 갖기 시작한다. 그들은 재산의 공유화와 폭력혁명에 반대하고, 화폐의 발행과 토지 소유에 대한 국가의 독점권의 폐지, 더 나아가서는 관세나 저작권 등의 철폐 등을 통해 사유재산이 보장된 국가 없는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개인주의자를 제외한 아나키스트들 사이에서는 1870년대 후반부터 '행동에 의한 프로파간다'가 주장되었다. 이 말은 상징적 행위에 의해 사상을 광범위하게 전하는 방법을 의미하는데, 애초에는 봉기 등을 의미하고 있었지만, 1880년대가 되면 개인에 의한 테러를 의미하게 된다. 프랑스 혁명은 이와 같은 행위가 대중의 '반역의 정신'을 각성시켜 발발했다고 크로포트킨은 주장했다. 당시 아나키스트들은 공황이나 전쟁 등을 단서로 하여 혁명이 발발한다고 생각하고, 그때까지 준비하는 일을 중시했다.
미국에서는 노동자의 무장조직이 결성되고, 또한 노동조합에 대한 영향력 확대가 시도되었다. 모스트와 『프라이하이트(Freiheit, 자유)』파는 폭탄 등의 제조와 사용 혹은 공장이나 주택 점거를 전술로서 지지하고, 또한 점거한 사람들에 의한 조직이 새로운 사회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하며 아나키에 이르는 경로를 제시했다.
하지만 1886년 이후에는 미국의 운동이 탄압으로 붕괴하고 폭력혁명 노선에 한계가 보이기 시작하는 한편, 크로포트킨이 공산주의 이론을 구축하여 점차 영향력을 강화시켜 나가던 시대이기도 했다.
19세기 중엽 프루동을 대표자로 하여 형성되고 바쿠닌, 크로포트킨 등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주로 프랑스ㆍ이탈리아ㆍ스페인 등의 노동운동 내부에 퍼졌던 쁘띠 부르주아적 조류. 그 기초는 추상적인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자율성을 절대화하며 조직적인 정치투쟁을 부정하고,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관계없이 모든 국가를 반대하여 모든 국가의 조속하고 완전한 폐지의 실현을 꿈꾸는 것이다. 그 실현 수단으로서는 대부분 개인적인 테러와 비조직적인 폭동 등이 주장된다. 무정부주의 사상은 극단으로 치우쳐 거꾸로 선 부르주아 개인주의 사상이다.
쁘띠 부르주아의 위기감의 역사적인 단계에 의해 사상 형태는 다양하지만, 자본주의적 착취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사회발전의 법칙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자 계급과 그 정당의 역사적 사명을 부정하였다.
특히 노동자 계급의 정치권력의 확립을 향한 정치투쟁을 부인하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무정부주의는 제1인터내셔널의 바쿠닌주의에서 보여지듯이 국가를 파괴하면 자본주의를 타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 유일한 수단으로서 일규주의적(一揆主義的) 총파업을 주장하였다. 노동조합과 파업투쟁은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치투쟁의 의의는 부정하였다. 또한 노동조합운동과 파업투쟁을, 노동자 계급의 일상적 이익을 획득하고 동시에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하는 방향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고 정치의 부정(否定)이라는 말로 노동자 계급을 부르주아적 정치에 종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의 무정부주의운동[無政府主義運動]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항일민족의 한 형태로 무정부주의 운동이 한 때 나타났다. 1922년 12월 박열(朴烈)이 중심이 되어 일본에서 풍뢰회(風雷會 - 후에 흑우회 黑友會로 개칭)를 조직하여 확산되었다. 국내에서는 1923년 서동성(徐東星)이 대구에서 진우연맹(眞友聯盟)이란 단체를 조직하여 시작되었다. 이 조직은 무정부주의적 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아나키스트 운동이라 하는데, 일제의 강압통치에 저항하여 자유를 옹호하는 한 수단으로 파괴, 암살 등을 필요조건으로 보고 급진적 폭력주의를 택하여 강한 항일운동의 한 면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실제 이들의 항일운동으로서 큰 성과를 나타내지는 못하고 한 때(1920년대)의 항일운동의 면을 보여준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전통 속에서 하나의 자각된 이론으로 성숙한 것은 조선시대의 서경덕(徐敬德)에서 찾을 수 있다. 서경덕은 송나라 주희(朱熹)의 주리설(主理說)에 주기설(主氣說)로써 대립하였다. 주희의 주리설은 이상기하(理上氣下) 이주기종(理主氣從)의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였다. 이에 대해 서경덕은 “기의 밖에 따로 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라는 것은 기 가운데 있는 자기통제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통제한다 함은 밖으로부터 와서 이를 주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기의 작용이 스스로 능히 그러함의 똑바른 것을 잃지 않음을 가리켜서 한 말이다.”라고 설명하였다.
기는 운동력이요, 생산력이다. 기는 자기의 운동법칙을 자기 스스로의 속에 포함한다. 이 말을 인간 사회로 옮겨놓으면,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의한 생산 활동의 자율적 통제, 즉 자주관리(自主管理)를 의미한다. 이 밖에 백성 위에서 백성을 지배하는 계층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경덕의 철학적 주기설을 사회·경제 정책으로 구체화한 것이 정약용(丁若鏞)의 여전제(閭田制)이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농사를 하는 자는 토지를 얻고 농사를 하지 않는 자는 토지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기본 골격으로 한다.
농사에 종사하지 않는 자는 상업이나 공업을, 혹은 농사 시험이나 농공업 또는 교육에 종사할 수 있도록 직업 선택의 여지를 두었다. 그러고 원칙적으로 놀고먹는 착취계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인구 밀도 및 토지 생산력의 차이로 인해 여(閭) 상호간에 빈부격차가 있는 것이 문제였다. 정약용은 이 문제가 사람들의 자유로운 전출과 전입으로 자연히 조절될 것으로 보아 “백성이 이로운 것에 따르는 것은 물이 낮은 데로 흐르는 것과 같다.” 라고 하였다. 경작지는 많은데 일손이 모자라거나 경작지는 적은데 주민이 너무 많거나 하면, 물이 낮은 데로 흐르듯이 행정적 강제가 없어도 전출입이 이루어져 인구 밀도는 저절로 고르게 조절될 것이라는 것이다.
정약용은 여기에 일체의 독점적 소유와 강제적 권력을 배제했다. 나아가 인간의 자유의사에 의한 직업의 선택, 그리고 거주와 여행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무정부주의의 전형적 표현이었다. 이 제도는 현대 산업사회에 더욱 적절히 적용될 것이다. 대규모의 생산시설이야말로 일련의 공동 작업과 공동 관리를 불가피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이념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 1894년의 농민혁명이다. 최제우(崔濟愚)의 “사람이 곧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人乃天 事人如天).”는 이념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반상(班常)·적서(嫡庶)·노주(奴主)·빈부(貧富) 등 일체의 차별이 용납될 수 없다. 농민군이 표방한 “보국안민 광제창생(輔國安民 廣濟蒼生)”은 곧 반봉건·반강권(反强權)·반착취의 선언이었다.
1894년 4월 전봉준(全琫準)의 창의문(倡義文)에서는 “공경(公卿) 이하 방백(方伯)·수령(守令)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위급은 개의치 않고 일신의 영달과 가문의 윤태(潤態)에만 혈안이 되어 과거(科擧)의 문은 돈벌이의 길로 통하고 응시의 마당은 교역의 시장으로 변하였다.……나라의 누적된 빚은 아랑곳없이 교만과 사치와 음란한 작태로 쉴 날이 없으니, 팔로(八路)의 백성은 고기밥이 되고 만민이 도탄에 빠졌다.……우리가 비록 초야(草野)의 유민(遺民)이라 할지라도 토지를 경작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자인지라 나라의 위망(危亡)을 어찌 좌시할 수 있겠는가! 팔로가 마음을 함께하여 백성의 뜻을 모아 지금 여기에 보국안민의 의기(義旗)를 올려 생과 사를 맹세하노라.” 라고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나라 2,000년 역사를,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 가해지는, 왕권으로 대표되는 토지지배층의 수탈관계라는 관점에서 개관해볼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몇 번의 왕조 교체는 단지 토지 지배층의 재편성을 의미하였을 뿐, 수탈관계 자체에는 아무런 본질적 변동이 없었다. 이 사실을 고발한 것이 서경덕의 주기설과 정약용의 여전제요, 갑오농민군의 의거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노쇠하고 부패한 지배층은 농민의 혁명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타민족의 침략군을 불러들였다. 이리하여 우리 민족은 색다른 지배자 아래 다시 반세기의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1910년대의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직후 자본주의 열강의 침식이 계속되었다. 이 난국은 민족의 단결, 정치의 민주화, 경제의 근대화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청조(淸朝)를 타도하고 서세동침(西勢東侵)을 막아 한족(漢族)의 민족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염원으로 나타났다. 중국 무정부주의자들도 이러한 시대적 과업을 외면할 수 없었다. 문제는 다만 이 과업 수행에 무정부주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1919년에 일어난 우리나라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은 이러한 공통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이 공통된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이었다.
일본의 사정은 달랐다. 1900년대에 일본은 이미 약 반세기의 근대화 과업을 성취하고, 청일전쟁(1894)·러일전쟁(1905))에서 승리한 후에는 점차 제국주의의 단계로 넘어가 자본주의 열강의 일원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노동계급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내의 우리 무정부주의 운동은 저절로 민족해방전선을 계급해방투쟁에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중국 내의 우리 무정부주의 운동은 계급해방전선보다 해방과 자주독립을 위한 통일공동전선을 앞세우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후자가 민족주의적 색채를 짙게 하고 있었음에 비해, 전자가 일본의 노동운동과 결속하여 현저히 좌경화된 것은 중국과 일본의 정치적·사회적 정세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국내운동의 성격은 해외에서 성장한 두 조류가 흘러 들어와 서로 합류하는 데서 규정된다. 따라서 그것은 민족해방전선과 계급해방전선이 상호 작용하고 있었다.
대체로 192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약 반세기간의 우리나라 무정부주의 운동은 1945년 8월을 고비로 양분되어 현저히 다른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즉, 민족 항일 기에는 시종일관 반제(反帝)·반군국(反軍國)·반강권·반정부·반국가의 전면적 저항과 파괴를 강행하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저항의 대상이요, 파괴의 목표였던 일제가 패퇴한 1945년 8월 이후에는 우리나라 무정부주의자들은 새 나라의 건설에 어떻게 무정부주의를 적용할 것이냐 하는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특수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우리나라 현대 무정부주의 운동은 3·1운동 후 1920년경으로부터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한 인사들,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간 유학생과 노동자들 가운데서 싹트기 시작해 점차 국내로 스며 들어왔다.
중국에서는 신채호(申采浩)의 『조선혁명선언』으로, 일본에서는 박렬(朴烈) 등의 세칭 ‘대역사건(大逆事件 : 일본 천황 폭살미수사건)’으로써 우리나라 현대 무정부주의 운동의 막이 열렸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만주로 탈출한 이회영(李會榮) 일가는 만주에 이주한 동포들을 모아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1911년에는 독립운동가 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 신흥무관학교 전신)를 세워 둔전양병(屯田養兵)을 꾀하고 있었다.
이회영은 국내외의 독립 운동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국경을 넘나들면서 국치 후 10년 동안 인심세태의 변천을 경험하였다. 이회영은 세태가 변했기 때문에 운동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고질적인 파벌싸움을 지양하고 일치단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 때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4월 임시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문제가 대두하였다. 이회영은 운동의 구심점은 있어야 하겠지만 우리나라그것을 정부 형태로 만드는 데는 찬성하지 않았다.
필요한 조직은 행정체제로서의 정부가 아니라, 각 계열의 각 파가 협력할 수 있는 연합기관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부를 조직하면 잠정적 임시정부라 할지라도 자리다툼과 세력 싸움으로 인해 독립운동에 적잖은 지장과 혼란을 초래할 것이 빤히 내다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를 만드는 데로 대세가 기울어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회영은 ‘소련식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는 인민에게 평등한 의식주를 보장해준다지만,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그런 식의 평등한 생활은 실상 일일삼식을 고루 나누어주는 감옥생활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사람은 물론 평등해야 하겠으나, 그런 위에 다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독립운동이라 하건 혁명운동이라 하건 이 조건을 결(缺)한다면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라는 입장이었다.
이런 문제를 중심으로 이회영과 신채호는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회영이 신채호·유자명(柳子明)·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정화암(鄭華巖) 등과 민족의 자주독립과 새나라 건설에 대한 격의 없는 의견을 교환하는 가운데,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유로운 연합에 의한 사회가 장차 세워져야 할 조선의 이상적 모습으로 뚜렷이 인식하였다. 이 때 백정기(白貞基)도 일본을 거쳐서 합류하였다. 이리하여 1924년 4월 이회영·유자명·이을규·이정규·정화암·백정기 등은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로서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간하였다.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한 신채호는 중국 및 대만동지들과 협력하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1929년 7월 난징(南京)에서 조선,·중국, 필리핀, 일본, 대만, 안남(安南) 등 각국 무정부주의 대표자들에 의해 동방무정부주의연맹으로 확대되어 기관지로서 《동방東方》을 발행하였다.
윈난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를 졸업하고 만주로 돌아온 김종진(金宗鎭)은 스터우허쯔(石頭河子)의 김야봉(金野蓬), 산시(山市)의 이달(李達)과 이덕재(李德載), 하이린(海林)의 이붕해(李鵬海)와 엄형순(嚴亨淳), 신안전(新安鎭)의 이준근(李俊根), 미산(密山)의 이강훈(李康勳)과 김야운(金野雲) 등과 더불어 1929년 7월 하이린소학교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다. 위원장 김종진이 신민부 대표 김좌진(金佐鎭)과 협의한 결과 신민부를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로 개편하기로 하였다.
김좌진이 “우리(신민부)와 그들(연맹)이 표리가 되고 이신동체(異身同體)가 되어…… 교육과 사상지도 및 생활개선은 연맹에서 맡도록 하고 개편되는 총연합회에는 그들 전원이 참가하도록 하자.”고 제의해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져서 두 단체의 합작이 이루어졌다. 한족총연합회의 조직대강(組織大綱)을 보면, 의결기관이 있고 집행부가 있어 그것은 일종의 정부였다. 그러나 타민족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자본주의적 정부도 아니고, 전자본을 국유화하여 관료주의적으로 관리하는 공산당식의 국가자본주의적 정부도 아니다. 이 정부는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들 자신의’ 무강제(無强制)·무지배·무착취를 보장하는 무정부라고 할 수 있었다. ‘무정부’라는 역설적 표현보다 차라리 인민의 자치기관이라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한족총연합회 조직은 재만 교포들의 환영리에 급속도로 확대되어 예기한 이상의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살길을 찾아 이주한 백만 동포가 있고, 식민지통치의 직접적 지배를 벗어난 신천지라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갑오농민혁명의 해외판 부활이라고 할 수 있고, 무정부주의 사회의 실현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다시 한 번 입증했다는 의의가 있었다. 만주에서의 무정부주의 운동은 이회영에 의해 착수되고 끝을 맺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이라는 전투체제로 개편되었다. 이 연맹은 일본침략세력 저지작전과 밀정 섬멸작전이 임무였다. 1937년 10월 중일전쟁 때는 두 개의 전지공작대(戰地工作隊)를 조직, 활동하였다. 하나는 정화암·유기석·유자명·이강(李剛) 등에 의하여 학도병 귀순공작과 포로구출작전을 담당하였다. 다른 하나는 나월환(羅月煥)·이하유(李何有)·박기성(朴基成)·김동수(金東洙)·이재현(李在賢) 기타 대원으로 구성되어 실전에 참가하였다. 그 뒤 후자는 광복군 제2지대로 개편되었다. 1940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겨진 뒤 1942년 10월 유자명과 유림(柳林)이 임시의정원의원으로 참여하였다. 유자명은 제1분과(법제·청원·징계)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유림은 1934년 10월 제35차 의회에서 대한민국임시헌장 개정안 작성에 참여하였다.
1923년 9월 동경에서 박렬 등의 불령사(不逞社)의 세칭 대역사건에 관련된 홍진유(洪鎭裕)·서상경(徐相庚) 등이 예심에서 석방된 뒤 귀국하였다. 1924년 12월부터 흑기연맹(黑旗聯盟)의 조직을 추진하다가 이듬 해 5월 초 일제히 검거되었다.
1925년 9월 대구에서도 진우연맹(眞友聯盟)이라는 무정부주의자 비밀단체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에도 역시 불령 대역사건 관련자 서동성(徐東星)이 창립맹원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또, 창립맹원 방한상(方漢相)은 그 해 11월 일본으로 건너가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 수감 중인 박렬과 가네코(金子文子)를 위문 차 방문하고 귀국 후 구호금을 모금해 송금하였다. 이런 일들이 경찰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여 1926년 진우연맹 맹원들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같은 해 1월 허무당선언(虛無黨宣言)이 서울 시내에 배포되었다. 이 밖에도 1927년 평안남도 용강군 다미리에서 김호구(金豪九)를 중심으로 흑전사(黑戰社)가 조직되었다.
1929년 강원도 이천에서 이은송(李殷松)을 중심으로 100여 명의 청년이 비밀결사인 이천자유회(伊川自由會)를 조직하였다. 특히, 이천자유회는 단순한 사상적 계몽운동을 벗어나 대중의 조직적 실천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5월 초부터 충청남북도 전역에 걸쳐서 일대 수사망을 펼친 경찰은 충주문예운동사(忠州文藝運動社)의 사원들을 검거해, 6월 8일 전원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하였고, 1930년 3월 5일 제1차 공판이 열렸다. 사원들은 문예운동사는 순전히 문예운동단체라고 주장했으나, 검사는 무정부주의 운동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라면서 치안유지법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제 검사는 그들의 구형을 정당화할 만한 증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문예운동사는 피고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형식상 결코 비밀결사일 수 없었고, 순전히 문예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가 무정부주의적 문예창작과 이론을 위한 기관지 운영에 있었고, 장차 국체의 변혁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기 때문에 일제는 문예운동사를 탄압했던 것이다.
한편, 무정부주의 운동의 자금 궁핍을 타개하기 위해 신현상(申鉉商)은 미곡상 최석영(崔錫榮)이 거래처인 호서은행에 상당한 신용이 있다는 데 착안하고, 1930년 2월 양곡거래조건으로 호서은행 본 지점에서 15회에 걸쳐 5만 8000원을 인출하였다. 중국으로 탈출했지만, 같은 해 5월 1일 톈진(天津)에서 10명의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유기석(柳基石)과 이회영이 백방으로 뛰어 신현상과 최석영을 제외한 전원이 석방되었으나, 두 사람은 남은 돈과 함께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제주도에서도 무정부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7년 3월고병희(高秉禧)는 조대수(趙大秀)·강기찬(康箕贊)·김형수(金炯洙) 등과 우리계(宇利稧)를 조직하였다. 제주도의 젊은 무정부주의자들은 일제 식민지라는 제약의 범위 내에서나마 우리나라 전통의 습속을 살려 최대한의 상호부조적 자유사회를 실현해보겠다는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우리계를 조직했는데 비밀결사도 아니었고, 혁명을 당장 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계원들은 경찰관을 제외한 도청·은행·금융조합·학교 등의 공무원과 각종 실업가 기타 도민 유지들이 제주도 일원의 12포(浦) 별로 총망라되어 있었다. 경찰은 처음에는 65명을 검거할 계획이었으나 사건을 축소해 15명을 검거하고 고병희 외 5명을 주모자로 기소하였다. 이 조직은 국체의 변혁을 계획한 음모 조직도 아니고 사유재산제도의 전복을 획책한 혁명 조직도 아니었다. 계원들은 다만 식민지통치의 제약 하에서나마 가능한 범위 내에서 자유연합적 상호부조 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관서·관북 지방에서도 1926년 이래 원산청년회, 원산본능아연맹(本能兒聯盟), 원산 일반노조, 평양·안주·철산·단천 등 각 지방에서 흑우회(黑友會)가 조직되고 있었다. 평양의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는 1929년 8월 8일 임시총회를 열고,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全朝鮮黑色社會運動者大會)를 11월 10·11일 이틀간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대회일자가 가까워지자 평양경찰서는 집회 금지를 통고했다. 각지에서 평양으로 온 동지들의 기대가 컸으나 일본 경찰의 체포·구금·추방 등 극심한 탄압으로 대표자들은 대면조차 못한 채 대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전열을 다시 정비해 같은 해 11월 10일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 북쪽 송림에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비밀리에 결성하였다. 그러나 1931년 4월 조직이 탄로되어 연맹원 최갑룡(崔甲龍)·조중복(趙重福)·이홍근(李弘根)·임중학(林仲鶴)·강창기(姜昌磯)·안봉연(安鳳淵)·유화영(柳華永)이 잡혔으며, 김대관(金大觀)은 원산청년회사건으로 이미 구속 중이었다.
일본 동경에서는 박렬·정태성(鄭泰成)·김중한(金重漢)·홍진유·최규종(崔圭淙) 등이 불령사를 조직하고 기관지 《불령선인不逞鮮人》을 발행하였다. 이 모임에는 일본인 구리하라(栗原一男)·노구치(野口品二)·오가와(小川茂)·가네코·아라야마(新山初代) 등이 가담하고 있었다. 1923년 9월의 동경대지진 당시 이들은 전원 세칭 대역사건으로 검거되었다. 박렬과 가네코는 사형선고를 받은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다가 가네코는 옥사하고 박렬은 22년 뒤 1945년 10월 맥아더사령부에 의하여 석방되었다. 가네코의 옥중 변사는 한때 일본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밖에 동경과 대판(大阪)을 중심으로 흑우연맹·동흥노동동맹(東興勞動同盟) 기타 각종 무정부주의 단체가 조직되었으며, 《흑색신문黑色新聞》·《자유코뮨》·《토민土民》 등이 창간·발매금지·폐간·복간·재 발간을 되풀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