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등급을 모를 수가 있나.."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뒤늦게 각성되더라도 보통 등급 정도는 다 알고 계시던데. 정말 몰라요? 의아해하며 호석씨가 되묻자 호석씨를 뚫어져라 바라본 내가 격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푸스스 웃어보인 호석씨는 알았어요. 뭐라도 마실래요? 여기 오는 동안 힘들었을텐데.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차례로 술병, 물, 음료수 등등을 권했다. 전 오렌지 주스요!
"아직 현장엔 안나가 보신 것 같네. 술을 안드시는 것 보니까. 그치."
엉거주춤 일어나지도 앉아있지도 않은 자세로 호석씨를 기다리고 있을 때, 조금 전 수건차림이었던 남자가 잠옷으로 갈아입고선 거실로 나오며 말했다. 그에 덩달아 피식. 웃어 보인 호석씨는 그러게. 아직 안나가보셨나보네. 하며 내게로 다가왔고, 오렌지 주스와 얼음이 든 투명한 유리잔을 내게 건넸다. 그에 감사합니다. 하고 답한 뒤 잔을 받아들자, 얼음이 유리잔에 붇딪히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형 이름 아는 거 보니까 통설명은 했나봐요?"
"아뇨. 그냥 두 분 대화하시는 거 들었어요."
"아, 그렇구나. 전 박지민이예요. 올해 스물다섯. 그리고 이 형 이름은 정호석이예요, 올해 스물여섯. 둘 다 센티넬이고요."
"아...."
"석진이형 이름은 알죠?"
참고로 스물여덟. 생각보다 나이 많죠? 석진씨 이름을 아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다 나이를 듣고서 깜짝 놀란 내가 입을 쩍하고 벌렸다. 그에 내 모습을 보며 푸스스 웃어보인 호석씨는 되게 밝으시다. 이쪽으로 넘어왔다는게 안타깝네. 하며 중얼거렸고, 지민씨는 날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쪽은요? 이름이 뭐예요?
"이름은 김여주이고 나이는 스물다섯. 지민씨랑 동갑이예요."
"정말요? 난 스물하나인줄 알았는데. 나랑 친구네?"
"그러게요. 신기하다.."
"말은 놓고 싶을 때 해요. 편할 때. 어차피 밖에 나가면 서로 존대 써야하니까 굳이 말 놓을 필요 없기도 하고."
"아아... 꼭 존대 써야하는거예요?"
"대치상황이 전부 녹화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존댓말을 쓰는게 좋죠. 가끔 평가 자료로 쓰이기도 하니까."
"평가요?"
"등급 올리기 평가죠. 여기선 등급이 영원한게 아니라서. 노력에 따라 등급이 바뀔 수도 있어요. 신기하죠."
"그럼 저도 등급 떨어지면 시급 깎이는건가."
네? 누가 그래요. 시급 깎인다고. 지민씨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에 석진씨가 그랬는데. 제일 낮은 등급 시급은 8350원이라고... 하며 답하자, 지민씨와 호석씨가 동시에 아, 미치겠네.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뭐야. 뭐가 그렇게 웃긴건데요.. 나도 좀 같이 웃자..
"석진이형이 그래요? 8350원이라고?"
"네? 네... 아니예요?"
"순진한 신입 놀리고 싶었나보다. 저희는 등급 차별 같은 거 없어요. 모든 등급이 똑같은 시급에 똑같은 월급, 똑같은 연봉."
"..........."
"다만 주 몇회 출근해야하는지가 다를 뿐이예요. 일하는 수준도 조금씩 다르고."
"..........."
"딱 보니까 석진이형한테 사기 당한 표정인데. 무슨 사기 당했어요? 그 형 거짓말 되게 잘하거든요. 앞으로 조심해요."
".......김석진 씨발.."
#6
"다녀왔어."
"뭐야. 언제부터 우리집 식구가 이렇게 많았어? 뒤에 따라지들은 뭐야?"
한참이 지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온 석진씨가 축 처진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지민씨의 말을 가뿐히 무시하고선 내 곁에 앉아 가이딩. 딱 세글자 말하고는 날 꽉 끌어안았고, 난 그대로 석진씨의 품에 안겨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뭐야. 이렇게 불쑥불쑥 안아주고 뽀뽀하고 키스해야하는 직업인거야? 그것도 한 명도 아닌 여러명을? 저 분들은 또 뭐고..
"저 따라지들은 뭐냐니까? 무슨 4명씩이나 데리고 왔어. 여기가 무슨 하숙집이야?"
"팀장님 명령이야."
"뭐?"
"따라지인 내가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나도 여기 오고 싶어서 온거 아니거든? 이상한 가이드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거라고. 도대체 누구야? 등급도 없는 가이드가."
한 눈에 봐도 튀는 오렌지빛으로 염색을 한 남자 하나가 말을 끝내고선 주위를 둘러보다 나와 두 눈이 마주쳤다. 그리곤 날 꼭 감싸 안고 있는 석진씨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나를 향해 시선을 옮기며 아~ 그쪽이구나? 등급 없는 가이드가. 하곤 씩 웃었고, 내게로 다가와 내 손에 든 오렌지 주스를 낚아채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그거 내 오렌지 주스인데...
"좀 알아듣게 설명해봐. 등급 없는 가이드라니. 그딴게 어딨어."
지민씨의 말에 내 오렌지 주스를 다 마시고서 해맑게 웃어보인 남자분이 입을 열려고 하자, 석진씨가 먼저 내게서 떨어지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곤 무덤덤하게 등급 없는거 맞아. 그래서 쟤네들 데려온거고. 하며 입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캐리어를 질질 끌고 들어온 나머지들이 하나둘 쇼파에 자리 잡아 앉기 시작했다.
"팀장님이 여주씨 진료 기록을 더 찾아본 결과, 기록마다 각각 등급이 다르게 나왔다고 하셨어."
".....그게 가능해?"
"가능한지 확인해 보려고 얘네들 데려온거야. 나랑 호석인 S, 지민이 넌 A, 전정국은 B, 김남준 C, 김태형 D, 민윤기 F."
".........."
"등급별로 데려왔으니까 이 중 가이딩이 별로인 등급은 아닌거겠지. 일단 3달만 같이 지내보라고 하셨으니까 각자 인사들 해. 난 가이딩 좀 마저 할게. 피곤하다."
설명을 끝낸 후 다시 두 눈을 지그시 감아 보인 석진씨가 손목에 찬 시계까지 풀어헤친 뒤 탁자 위에 올려놓고선 그대로 날 끌어안았다. 그에 곧바로 다시 석진씨의 품에 안기게 된 나는 꼼짝 없이 석진씨의 품에 안긴채 여러사람의 눈초리를 받아내야했고, 그 중 지민씨는 기가 차다는 눈빛으로 석진씨를 바라보며 어련하시겠어요~ S등급께서 퍽이나 피곤하시겠다. 매번 밤새도록 게임이나 하던 사람이. 하곤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그럼 지금 연기라는거야?
#7
"아 참, 말 안한게 있는데."
"........"
"여주씨는 각인될 수가 없대."
"뭐??"
"호르몬이랬나.. 뭐가 불안정하다고 했어. 그래서 아무리 각인 시도를 해도 각인이 안된대."
"........."
"그렇다고 여주씨랑 뭐 해볼려는 새끼는 죽는다. 알아서 처신해."
"아니, 진료 기록이 잘못된거 아냐? 그게 도대체 가능해?? 어떻게??"
자러가려는 건지 내게서 떨어진 후 자리에서 일어난 석진씨가 방으로 가려다 말고 뒤돌며 입을 열었다. 석진씨의 말에 지민씨가 크게 반응했지만, 보아하니 모두가 적지 않게 놀란 눈치였다. 그에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제일 착할 것처럼 생긴 토끼상의 남자에게 저... 각인이 뭐예요..? 하며 소곤소곤 묻자, 씩.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인 남자가 얼굴을 가까이하며 여기서 알려드려요? 하고 답했다. 아뇨. 뭔진 몰라도 알고 싶지 않네요. 사람 잘못 봤어요. 죄송해요. 안궁금해할게요.
"그래서 내 방은 어딘데. 어디서 자야하는지는 알려줘야 짐을 풀지. 나 여기서 자라고?"
"2층 올라가서 빈 방 중에 아무거나 쓰시면 돼요~ 그리고 언제 봤다고 반말을 하세요~ 존나 예의바르시네."
"제가 사회성이 조금 없어서. 먼저 올라가봐도 되죠?"
말을 끝마친 제일 마르고 새하얀 피부를 가진 남자분이 캐리어를 질질 끌고선 2층으로 향했다. 그러자 오렌지빛 머리의 남자분이 걸음을 뒤따라 옮겼고, 조금 전 토끼상의 남자분은 걸음을 옮기기 전에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전 맨 오른쪽방 쓸거예요."
"......네?"
"맨 오른쪽방 쓸거라고요."
".......그걸 왜 저한테.."
"잘자요. 몸 조심하고."
"..........."
도대체 알 수 없는 말들만 남기고서 걸음을 옮기는 저 남자에 영문을 모르는 나는 연신 머리를 긁적일 수 밖에 없었다. 자기 좋은 방 쓴다고 자랑하는건가...? 무슨 뜻이지?
#8
"이 방이예요. 바로 옆방은 제 방이고, 화장실은 방마다 있고 2층으로 가는 계단 옆에 하나 더 있어요. 부엌은 나와서 오른쪽. 더 궁금한거 있어요?"
처음부터 다정하게 날 대해준 호석씨가 역시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내게 물었다. 그에 사르르 눈 녹듯이 긴장이 풀린 내가 베시시 웃으며 하나도 없어요! 하나도. 하고 답하자, 그럼 짐풀고 쉬어요. 피곤할텐데, 잘자요. 하며 끝까지 호석씨는 내게 친절을 베풀었다. 저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행복하게 가이딩할 수 있지. 갑자기 호석씨한테 밤새 가이딩해주고 싶고 그러네. 응? 이게 바로 꿀직장이란건가.
"뭐가 그렇게 좋아요?"
"그냥 다 좋,아니,네??"
"정호석 좋아해요? 내가 보기엔 좀 별론데. 차라리 내가 낫지 않아요?"
"아니 다짜고짜 남의 방에 들어와서는.. 누구세요?"
"첫째 그쪽 방인지 몰랐고. 둘째 난 새로 이사 온 집 구경 중이었고. 셋째 날 못 본건 정호석과 여주씨고."
"........."
"넷째 내가 정호석보다 낫다는건 팩트."
김남준이라고 해요. C등급 주제 잘생겼죠? 내뱉는 말마다 엄청난 자기애가 느껴지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괜히 분한 마음에 네. 그렇네요. 하고 시큰둥하게 반응해 보인 나는 남준씨를 지나쳐 침대 옆 빈공간에 캐리어를 가져다 놓으며 저 옷갈아 입을건데. 보고 계시려고요? 하고 물었고, 남준씨는 그럴까요? 하며 답했다. 미친걸까.
"농담인데 정색하시네."
"안재밌어요."
"죄송해요. 전 얼굴이 재밌어서. 농담은 그냥 하는 말이예요."
"......수습하는 것 같은데."
"티 나요?"
"네."
"야박하시네. 알았어요. 미안해요. 금방 나갈게요."
"지금 바로 나가는게 아니고요?"
"네. 이왕 만난김에 가이딩 좀 해줘요. 저도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힘들었는데."
"하나도 안피곤해 보이는데요?"
"엄청 피곤한데 티 안내고 있는거예요. 그래서 가이딩 안해줄거예요? 나 지금 엄청 힘든데?"
"..........."
"뭐야. 진짜 안해줄 거예요? 그럼 내가 먼저 키스해도 돼요?"
"네? 키스요? 손부터 잡는거 아니였,"
"전 항상 키스로 받는 타입이라. 길게 해도 돼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9.11.25 00:47
첫댓글 너무너무 재밌어여ㅜㅜㅜ 얼른 후편이...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9.11.25 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