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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어떤 기여나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는 느낌도 중요하다. 노화에 영향을 주기때문이다. |
이런 맥락에서 조루증 같은 임상학적 실례들처럼
의학계에서 발견되고 있는 기이한 현상들과 최면실험을 되짚어 보면서
이것들이 던져주는 의미도 살펴볼 것이다.
또 노화를 계층적 현상의 측면에서 살펴보고
노화와 성과 나이도 생각해 볼것이다.
나아가 의식자체의 본질에 대한 지식을 활용해서
사실과 환상들을 다시 검토하고 정의내려 볼것이다.
누구나 나이가 들수록
노화의 전 영역에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의식지도는
인간의 행동과 '나는 누구인가'하는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다시 살펴보면 의식지도는 하나의 수치모델로
각 의식단계의 에너지 장이 지닌 방향과 상대적인 힘을 보여준다.
이 상대적인 힘은
0(죽음)에서부터 시작해 지복(600)에까지 이르는데,
무감정(50)은 두려움(100)보다,
두려움은 용기(200)보다 훨씬 약한 에너지를 지닌다.
중립의 단계에서는 무엇이든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랑(500)의 단계보다 에너지가 작다.
용기 즉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단계밑에서는
에너지 장이 부정적인 방향을 향한다.
반면에 이 결정적인 단계 이상에서는
모든 에너지 장이 위를 향한다.
긍정적인 에너지 장이 삶을 보살피고 지지해주며
삶을 가치있고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해주는 것이다.
200이하의 에너지 장들은
삶에 적대적이므로 삶을 지지해 주지 않는다.
실제로 맨 아랫부분의 에너지 장들은 삶에 아주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에너지와 영혼의 상실, 낙담, 위축, 노예화, 팽창같은
부정적인 작용을 불러일으키고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든다.
또 신을 매우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거나 신성을 부정하게 만든다.
몸과 마음, 영혼의 관계가 갖는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도록 이것들의 관계를 다시 설명해보자. 이 셋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노화과정을 받아들이는데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
먼저 몸은
스스로를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을
내면의 성찰과 사색을 통해 이해하고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아무리 되풀이해도 모자랄 만큼 중요하다.
몸은 자신을 경험할 능력이 없다.
몸과 몸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인식은 오감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오감자체도 자신을 경험할 능력은 없다.
몸이나 오감, 감각기관보다 더욱 큰 어떤 것속에서 경험되어야 한다.
이 어떤 것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 덕분에 우리는 오감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식하고
오감은 몸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려준다.
그러나 아주 기이하게 여겨지겠지만
마음에도
자신을 경험할 능력이 없다.
생각은 자신이 생각임을,
느낌은 자신이 느낌임을,
기억은 자신이 기억임을 경험하지 못한다.
마음도 더욱 큰 어떤 것속에서 경험되어져야 한다.
마음보다 더욱 크고
포괄적인 의식(consciousness)의 에너지 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의식하는 것을 아는 방법과 의식자체는 자각이라는 무한하고 제약없는 장에서 비롯된다. 이 자각 덕분에 우리는 의식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의식덕분에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음 덕분에 오감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식하고 오감덕분에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다. |
결과적으로 본래의 나를 가리키는
①자각의 주체,
②본원적인 나가 가리키는 것,
③무한한 큰나,
④의식자체는
몸에서 몇단계 떨어져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몸이 마음속의 생각들을 그대로 표현하고 따른다는 것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마음이 몸을 꼭두각시 인형처럼 조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몸에 이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의식지도를 보면,
신체적인 몸의 상대적인 에너지는 지구와 같은(200)인 반면
마음은 400대 이상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
또 몸의 에너지 장은 중립적이다.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그 물리적 작용을 들여다보면
400의 에너지 장에서 품은 생각이
200밖에 안되는 에너지 장의 몸을 지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인해 몸은 마음속의 ①믿음과 ②개념, ③생각, ④양식, ⑤대본을 받아들여서 구체적인 외양속에 반영하기 시작한다. |
* 마음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마음이 믿음 개념 생각 양식 대본이 내 마음이란 걸 알아야 하갰습니다.
이것은 다양한 병들을 내려놓는 방법에 대한 논의에서 이미 설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원리는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더욱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이 장의 뒷부분에 이 원리를 스스로 확인하는 방법들과 구체적인 예들을 소개한다.
중년에 대한 근거없는 통념들과
노년에 이르면 노쇠해지고 건강이 나빠질 것이라는 생각들,
사실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인데도
이 모든 일들을 몸의 불가피하고 본질적인 작용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체계를 지워버리는 방법들이 그 예다.
최면같은 간단한 임상학적 예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들어 아주 허약한 노인이 최면을 받으러 사무실에 들어와
"여기 의자에 앉아도 될까요?"라고 묻는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을 기운도 없는 사람처럼 털썩 주저 앉는다.
최면요법 전문가는 최면을 걸어
그에게 서른 다섯살밖에 안됐다고 말하고
이 암시를 기억하지 못하게 기억상실증을 유도한다.
그러고는 노인이 최면상태에서 깨어나면
"물한잔 마시겠어요?"라고 묻는다.
그러면 노인은 "네 한잔 마셔야겠네요"라고 말하고
분수식 식수대로 가서 물을 한컵 받아 자리에 앉는다.
허약하기 이를데 없던 노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말이다.
와들와들 떨어대던 모습은 어디로 간걸까?
그 허약하고 쇠잔했던 노인의 모습은 어디로 간걸까?
힘없던 노인에게 무슨일이 일어난 걸까?
노인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이 임상학적 예는
몸이 최면상태에서 받아들인 믿음을 정확히 반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있는 자세부터 자신을 지탱하는 방식,
몸에 대한 태도에 이르기까지 마음속 생각들을 몸은 그대로 반영한다.
노인은 자신의 몸을 노쇠한 것처럼 생각했다.
어딘가에서 떨어져 엉덩이를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계속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아마도 실제로 그런 일을 겪게 되었을것이다.
다른 예는 다중인격의 사례에서 볼 수 있다.
다중인격환자는 하나의 인격이 건강과 삶, 노화에 대해 다른 인격과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갖고 있을 수있다.
이런 경우 몸은 당시의 지배적인 다른 시각을 갖고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몸은 당시의 지배적인 인격이 지닌 맏음들을 반영한다.
몸에 들어와 있는 인격이 천식에 걸렸다는 믿음을 갖고 있으면
몸은 실제로 천식증세를 보인다.
그러다 심신증 따위는 믿지 않는 한결 유쾌한 인격이 이 인격을 대체하면
천식은 사라지고 알레르기 증세도 나타나지 않는다.
신체적인 몸이 무의식적 믿음체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체계들이 생기게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애초에 잘못된 판단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자신에게는 어떤 선택권도 없으므로
몸과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마음은 자신의 힘을 달력에게 넘겨주고 만다.
그리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몸도 필연적으로 늙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조로증이란
이것을 보여주는 아주 흥미로운 임상학적 예다.
조로증이라는 유전병에 걸리면 다섯살부터 아홉살까지 서서히 늙어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극심하게 노쇠해서
열살에 완전히 쇠약한 노인의 모습으로 죽기도 한다.
불과 10년 사이에 진행된 노화가 실제로 죽음까지 불러오는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인 시간을 원인으로 보고
신체적인 몸이 달력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정보를 제공하는 이유는 마음의 문을 열고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음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우리가 믿고 받아들인 것들이 근원과 프로그램,
각본이 되어 신체적인 차원에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일뿐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신체적 차원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마음은 그 순진함으로 인해 몸의 차원에 원인이 있다고 결론내린다.
신체적 영역과 시간, 계절의 흐름속에서
A가 B를 읽으키고, B는 C를 일으킨다라는 식으로
신체적 차원에서 인과관계를 파악한다.
이로 인해 신체적 차원에서 실제로 몸의 노화과정이 일어난다.
그러나 사실은
더욱 높은 차원의 무언가가
연속적으로 A와 B 그리고 C를 모두 불러일으킨다.
A--> B --> C와 같이 이어진다는 개념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우리는 물질계에서 먼저 A를 본다음에 B를, 그다음에 C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좌뇌는 선형적으로 생각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자신의 개념을 투사하기 때문에
A가 B를, B가 C를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A, B, C의 인과관계가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은 절대 품지 못한다.
원인의 차원
즉 힘을 지닌 차원은 마음이다.
물질계는 결과의 세계다.
ABC를 창조해내는 것은 마음이라는 말이다.
예를들어 어린 시절에 본 노인들의 모습때문에
노인의 모습은 이러이러할 것이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으면
물질적 차원에서 실제로 ABC를 즉 노쇠한 사람의 모습을 창조해낸다.
여든 살때의 모습은 어떠하리라는 생각을 분명하게 갖고 있으면
여든 살이 되었을때 실제로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
누군가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그가 생각하는 노인의 모습을 확인해보면
지금 우리앞에 서 있는 노인의 모습과 똑같을 것이다.
그가 생각한 노인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마음속의 믿음이
여성의 월경주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실험결과도 있다.
연구자들이 여성에게 가짜약을 주사하고
다음 달에 월경을 건너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약 85%의 여성들이 다음 월경을 건너뛰었고
15%는 월경 시작일이 많이 늦어졌다.
이런 예들은 결코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은 근본논리에 있으며 이런 현상은 늘 일어나고 있다.
마음속의 믿음과 양식들을 몸은 끊임없이 반영한다.
최면과 연구실험에서 나타난 임상학적 예들은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적인 예에 지나지 않는다.
최면상태에서 몸은 마음이 믿는 그대로 행동한다.
예를 들어 최면상태에서 장미에 알레르기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최면에서 깨어난 후 피최면자의 코는 막혀버린다.
이런 식으로 그는 최면 요법가의 사무실에서
금방 꽃가루 알레르기나 천식발작을 일으킬 수 있다.
역사상 이런 실험은 수차레 실시되어 왔으며 정신분석 연보에 실리기도 했다.
이런 일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다.
이제 지속적인 프로그래밍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중년과 노년에 대한 기대,
중년이나 노년에는 어떠어떠하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순진함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의식의 근본원리들 가운데 하나는
의식의 본질적인 순진무구함에 있다.
마음을 주의깊게 살피고 지켜야 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자기 마음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마음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와 같아서 세상으로 나가 무엇이든 들리는대로 보이는대로 믿어버린다. |
광고나 선전, 사람들의 말을 들리는대로 보이는대로 믿어버린다.
그것들을 평가할 방법도 모르고, 분별력도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책임을 지고
이렇게 말할줄 알아야 한다.
"내 마음이 본질적으로 순진무구하다는 걸 알아.
아이같은 순진무구함이 평생 나와 함께할거야.
그러니까 이제
내 마음이 받아들인 것들을 잘 살펴봐야겠어"
창조적인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면
특이하게도 구십대까지 건강하게 살았음을 종종 발견한다.
개중에는 여든다섯에 결혼을 하고
아흔살에 아이를 가진 이들도 있다.
존 다이어몬드 박사는
그의 저서 행동신체운동학의 한장을 전부 할애해서
이 문제와 생명 에너지를 이야기했다.
그는 지휘자나 작곡가, 연주자처럼
고전음악에 헌신한 사람들의 삶의 양상을 연구해
모두가 아주 늙은 나이까지 생산적인 삶을 살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여든여섯살까지 교향악단을 이끌었던 어느 지휘자는
서른 네살짜리 부인과 어린아이까지 두고 있었다.
이런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용인된 일이었다.
연구자나 물리학자, 배우, 작가들 중에도 장수를 누린사람들이 많았다.
조지 번즈와 프레드 아스테어 같은 배우들도 오래도록 생을 누렸다.
요컨대 생활연령 자체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정말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①나이에 대한 우리의 믿음,
②나이를 받아들이는 방식,
③나이에 따라붙는 온갖 믿음체계를 대하는 방식,
④오랜 세월 흡수한 믿음체계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사람은 여든살에 춤을 추고 공연을하는데
어떤 사람은 고작 쉰아홉에 무덤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내게도 쉰아홉살 밖에 안되었는데도
일흔 다섯살처럼 보이는 친구가 있다.
그는 마치 삶을 다 산 사람처럼 보인다.
심장동맥 바이패스 수술도 두번이나 받았다.
가만히 있을때 힘없어 보이는 모습과
몸의 전체적인 자세는 노년의 변화에 대한 그의 믿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점은 바로 이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선택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늙어갈 수 있다.
그러려면
가족으로 인해 생겨난 믿음체계를 내려놓아야 한다.
과거를 되짚어 보면 중년과 노화과정에 대한 믿음체계들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발견할 수 있다.
무엇이 이런 믿음체계를 만들어 냈을까?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관계를 되돌아보고,
조부모님이 중년시절 모습을 관찰해보면
마치 사진과 같은 분명한 양상을 발견할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중년은
맥주를 많이 마셔서 불룩하게 나온 배나
피곤하고 의기소침한 얼굴로 집안에 눌러앉아 있는 모습,
텔레비전을 보면서 "무슨 일에도 더이상 기운이 안나"라고
불평을 늘어놓는 모습을 의미할 것이다.
음 이미 한물갔어라고 생각하거나 서로 눈을 찡긋해보이며
'어이 조지 뭐라고?" 너도 지금 거기가 맛이 간거야'라고 묻는 모습을 의미할 수도 있다. 중년이 됐으니 이제 성생활 같은 것은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전부 순진한 어린아이의 예민한 마음속으로 들어가
피곤에 찌든 얼굴에 지저분한 옷차림을 한 어머니와 같은 모습으로 늙어가게 만든다.
더이상 외모를 가꾸지 않고 미용사를 찾아가지도 않는다.
중년이 됐다면 삶에서 은퇴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은퇴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삶으로부터 물러서는 것을 포함해서
이 은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한번 살펴보자.
이들의 전체적인 태도는 다음과 같다.
이제 선셋 힐스에 가서 느긋하게 해가지기를 기다리는 거야.
느린 소멸을 위한 노인들의 클럽에 합류해 기운을 서서히 잃어 가면서
서로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봐주는 거지.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조지 번즈는 이런 선택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앨런 그린스펀이나 프레드 아스테어도 마찬가지였다.
세계를 지배했던 모든 위대한 권력자들과
정치가, 작가, 작곡가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육십, 칠십, 팔십대까지 건강하게 잘 살았다.
늙어갈수록 힘과 지혜,
세상에서의 능력이 악화되기는 커녕 더욱 강해졌다.
그러므로 몸에 일어나리라 여겨지는 변화들에 대한 모든 믿음과 사고체계들,
노화가 불러오리라는 에상하는 일들에 대한 모든 생각들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자신이 그리는 노년의 모습과 부모님의 관계를 되돌아 본다.
여러분은 부모님을 정말로 사랑하는가?
흥미롭게도 동일시의 원인은 바로 사랑에 있다.
부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모방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아버지를 존경하는데
아버지가 전형적인 중년 남자의 모습을 갖고 있다면,
우리도 이런 모습을 선택하고 동일시 하게된다.
어떤 부정적인 이유때문이 아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 순진무구함과 가족애 때문에 모방하는 것이다.
조부모와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
이들을 보면서 노년에 대한 상을 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나는
중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노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노년을 손꼽아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예순여섯에도 지붕위에 올라가 새지붕을 얹었고,
할머니는 위엄있고 우아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기대하며 노년을 기다렸다.
할아버지가 되면 최고급 각반에 최고로 멋진 모자,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귀족처럼 멋진 삶을 살수 있을것 같았다.
늙어서 만큼은 내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을테고
삶이 머지않아 끝날 것이므로 더이상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을 듯 했다.
정말로 우아하고 사랑스러우며 멋진 사람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내가 생각하는 노년은 비틀거리는 노쇠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사람들은 노년을 노쇠하고 약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듯하지만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사랑하고 동일시 하는 사람과 관련이 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받아들이는 모든 프로그램과
노화가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도 문제다.
텔레비전의 상업광고들은 의도적으로 노화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한다.
물론 두려움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고, 마음속에 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노년에 대한 두려움,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로 그 일들은 결국 겉으로 표면화된다.
이럴때 이런 심상들 가운데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을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으면 매우 유용할 것이다.
어떤 상을 갖고 있든 이것은 기필코 삶속에서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자기 마음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마음이 진실로 무엇을 믿고 있는지 잘 살피고 파악한 다음,
마음이 오랜 세월 무엇을 받아들였건 용서해주어야 한다.
마음이 자신의 순진무구함을 몰라서 온갖 프로그램과 이야기,
각본들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것들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받아들인 삶의 각본을 알고 싶다면
지금의 삶과 신체모습을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신체야말로 우리가 받아들인 것들의 반영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머리위로 빗발쳤던 말들을 잊어버린 탓에
이런 것들을 받아들였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할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억을 들여다보고도
"이런 믿음을 갖고 있었다니 기억도 안나"라고 말한다.
사실 삶의 많은부분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다.
넘쳐나는 기억들로 삶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린다.
예컨대 하루가 몇초로 이루어져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하물며 매일, 매순간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제 아침에 먹은 음식이 기어간다면 운이 좋은 것이다.
즉시 기억해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잊힌다.
하지만 몸을 살펴보면
우리가 받아들인 프로그램들이 어떤 것인지,
어떤 믿음체계를 갖고 있는지
우리가 가치있게 여기거나 사랑하는 것
혹은 그 반대의 것이 무엇인지,
마음속의 두려움으로 몸이 어떤 징후를 드러내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노화의 양상은 계층에 따라서도 분명하게 달라진다.
노년과 노화과정을 생각할때 장수를 떠올리는 이들이 늘고 있다.
게다가 아주 늦은 나이까지 활동적으로 맡은 역할을 다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제는 노년을 위상과 가치가 높아지는 시기로 본다.
이것은 힘과 가치가 신체에서 나온다고 보며
노화의 양상도 더욱 급속한 분야의 사회적 시각과 대조를 이룬다.
예를들어
서른둘이면 벌써 노장취급을 받는다.
마흔이면 노인으로 간주된다.
그런가 하면 어떤 계층의 노동자들은 예순다섯이 돼야 은퇴를 한다.
이 나이가 되면 이미 많은 것들이 끝나므로
선셋힐스로 옮겨가 힘도 흥미도 활력도 없이 나태한 생활을 지속한다.
직업에서의 은퇴가
삶에서의 은퇴라도 되는 양 삶을 포기해버린다.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 일뿐이었는데
더이상 노동자로 분류되지 않으므로
세상에서 아무런 가치도 지닐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더욱 전인적이고 전체적인 시각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한다.
또 직장에서의 생산성과 월마다 집에 월급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능력말고는
다른 것에서 가치를 찾지 못한다.
아이들의 엄마가 부양자가 아닌 다른 존재로 자신을 바라볼 줄 모른다.
여성들은 아이들이 성장해 집을 떠나면서 본격적인 노화과정이 시작된다.
삶으로부터 갑자기 물러나 남편과 함께 은퇴자처럼 살아간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은퇴하고 어머니는 아이들을 기르는 일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이제 할일을 잃은 두 사람은 자신들의 가치가 줄어들었다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쓸모있는 존재가 되기위해 간간이 어떤 시도를 하기는 하지만 ,
스스로도 이것을 믿지 못한다.
이로 인해 노화속도가 서서히 빨라져
많은 사람들이 은퇴후 몇년도 안돼 죽음을 맞이 한다.
이런 믿음체계들을 일찍 확인하고 이것들에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일이 중요하다. |
그래야 삶에서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직장에 다니든 안다니든 월급봉투를 집에 가져달 줄 수 있든 없든,
아이들을 기르고 있든 아니든,
중산층의 안정적인 삶의 양식을 유지하든 아니든
삶을 변함없이 가치있게 받아들인다.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자신의 삶에 의미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타인들과 기꺼이 삶을 공유하고 스스로 열정의 원천이 되며,
주변사람들의 삶에 기여할수도 있다.
삶의 가치를 다시 평가하고 재맥락화해서
다른 삶의 방식과 지각을 받아들여야만,
스스로 삶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서
더욱 긍정적인 시각으로 자신의 에너지 형태를 향상시킬 수 있다.
마음속의 생각들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은 앞으로 수차례 이야기했다.
자신의 믿음체계와 사고방식들을 확인하고
이것들을 바꿀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선택은 우리 개개인에게 달려있다.
선택에 따라 나이가 들어서도 적극적이고 활기찬 모습을 유지할 수 있으며
의미와 가치가 있는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건강한 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누구나 다른 삶의 각본들에 환상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프로그램들의 장점을 눈여겨본다.
이것들을 선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득이 되지 않는 프로그램들을 기꺼이 내려놓고 있는지 살펴야
다른 프로그램들이 주는 이득과 장점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삶과 몸,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결국 마음속에 들어있는 생각의 투사물이다. |
물질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체계가 경험을 낳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 겉으로 구체화되는 양상을 파악하면
긍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의 경험이 생각의 결과물임을 인식하면,
생각을 바꿔 경험까지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잘못된 믿음체계를 버리고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진실은 바로 우리가 무한한 존재이며, 마음속에 품은 생각들만 실제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
부정적인 믿음들이 드러날때마다
이것들을 지워버리고 진실을 강력히 주장해야 한다.
집단의식과 세상의 에너지 장에 끊임없이 반기를 들어야 한다.
세상이 우리를 다시금 집단의식으로 프로그래밍하려 들 것이기때문이다.
우연한 말일지라도 한번 들으면 그것에 다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속의 모든 부정적 믿음체계를
지워버리려면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시력과 안경을 쓰는 일에서도 똑같은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50년 동안이나 이중 초점안경을 썼다.
물론 우리사회에는 중년이 되면 시력이 나빠진다는 믿음체계가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중년이 되면 독서안경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독서 안경을 쓴 모습이 중년의 한 전형이 되었다.
잡지에 나오는 은퇴자들도 거의 언제나 안경을 쓰고 있다.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
중년이 되면 누구나 안경이 필요할 거라고 추측하기 때문이다.
안경 쓴 지적인 책벌레 이미지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이미 안경을 갖고 있었다.
청소년 시절 내 이미지의 한 부분에 안경을 쓰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안경을 쓰고 있었다면
중년에 이르러서는 시력이 더욱 나빠져 결국엔 이중 초점안경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다 중년 후반에 이르면 분명히 삼중초점안경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내게는 의식본질을 탐구하는 연구에 전념하던 시기가
바로 삼중초점안경이 필요하던 때였다.
어느 날 수업중에 의식의 기법들을 이용해
온갖 신체적 질병들을 내려놓은 경험을 이야기 해주었다.
언급한 병명이 열다섯가지나 스무가지쯤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학생이 물었다.
'음 그런데 왜 여태 안경을 쓰고 계신 거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음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입니다.
정말로 나는 안구자체와 안구의 보는 능력,
즉 시각의 전체 메커니즘도
이것에 대한 믿음체계의 재현물일 수 있음을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이후 나는 믿음체계를 들여다보고 부정적인 것들을 지워버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한한 존재이므로
안경이 필요하다는 믿음체계를 비롯한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이 과정을 6주간 계속했는데 그 기간동안에는 아무것도 볼수가 없었다.
안경을 아예 안썼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경을 다시 쓰지 않았다.
이 6주동안 몇미터 앞에 잇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것도 보이지 않아서 움직임에 제약을 받았다.
근시, 원시, 난시까지 있었기 때문에
읽기는 고사하고 멀리 떨어진 것도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래도 6주동안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부정적인 믿음체계를 내려놓는 훈련을 했다.
그 과정에서 드디어
그저 순응하고 믿음체계에 대한 저항까지 내려놓는 것이
이 기법의 한부분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신있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하느님!.
제가 다시는 볼수 없게 된다해도 그저 그러려니 할 것입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고차원적인 힘에게 완전히 내맡긴 것이다.
당신의 뜻이 무엇이든 그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신의 뜻이 무엇일까?
완전하고 완벽한 행복, 온전함, 하나됨이다.
신의 의지에 내맡기고 나자
갑자기 일순간에 시력이 돌아왔다.
오랜 세월 안경을 쓰고 살았는데도
시력이 완벽하게 회복된 것이다.
이처럼 어떤 믿음체계를 얼마나 오래 갖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몇년전에 내려놓은 믿음체계도
평생 내 삶에 존재하면서 나의 시력을 제한하던 것이었다.
이 예는 의식자체의 차원에서 경험할 수 있는 원리를 잘 보여준다.
즉 몸은 우리의 믿음을 반영하므로
이 믿음체계들을, 마음자체를,
이마음이 경험되는 자리를 향해 직접 말을 걸면 믿음체계를 지워버릴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럴 자유와 선택권이 있다.
중년과 노화, 노년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체계로 돌아가 보면,
두가지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노화가 불러오는 것들에 대한 믿음체계가 있고,
이것들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입장이 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아니라 이것들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다. 사실이나 사건이 갖는 중요성은 이것들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생겨나며, 이런 태도가 환경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
이런 환경은 우리의 존재방식을 형성해주며,
사건이나 결정 혹은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느낄지 미리 결정지어 버린다.
의식지도를 보면
다양한 에너지 장과 의식의 단계들이 있다.
지도의 맨 아랫부분의 무의식적인 단계로
진실에서 가장 먼 반면 죽음과는 가깝다.
위로 올라갈수록 진실이 강해지기 때문에
맨 꼭대기에서는 생명, 진실, 살아있음의 느낌에 감응한다.
지도의 꼭대기에는 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감정은 우리가 처해있는 단계의 에너지 장을 반영해주며
이 에너지 장에서 세상은 물론 신을 보는 특정한 시각이 생겨난다.
지도의 맨 아래에는
가장 저급한 에너지 단계들이 있는데
이런 에너지는 소극적 자살을 불러오기도 한다.
예를들어 노년의 죽음은 많은 경우 고령에 원인이 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소극적 자살의 양상을 띠고 있다.
희망의 상실로 인한 포기의 결과인 것이다.
죄책감도 한몫한다.
그래서 흔히들 고령과 노쇠, 병을
자신이 지은 죄나 삶의 실패에 대한 벌처럼 받아들인다.
이 모든 것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자기 혐오로 파멸을 선택한다.
이런 사람들은 삶고 세상을 죄와 고통의 장으로 본다.
그리고 실제로는 죽음을 두려워 한다.
죄책감때문에 신도 처벌을 일삼는 가혹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또 노년을 파멸의 과정으로 보는 시각과 더불어
노년에 대한 두려움도 느낀다.
이런 두려움은 이들을 파괴적인 시각의 영역속으로 떨어뜨리는
믿음체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소극적인 자살을 불러오는 에너지 장에서 약간 위,
그러나 여전히 아주 가까이 존재하는 에너지 장에서는
자신을 충분히 돌보지 않는 식으로 죽음을 허용한다.
바로 무감정의 에너지 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여기서도 가망없음과 절망같은 부정적인 태도가 지배적이며
이로 인해 에너지를 잃어버린다.
노년을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면 모든 상황이 가망없게 여겨진다.
낫을 든 해골 모습으로 말을 타고 달리는 죽음의 신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 같고
노년과 노년의 모든 조건들, 신체적인 요소들이 절망적으로 느껴진다.
이런 시각은 자연히 에너지 상실을 불러온다.
가망없음과 절망에 빠져 현재의 삶을 제대로 살아낼 기운도 못낸다.
사적인 삶이든 공적인 삶이든 모두 가망없다고 보고
신도 무신경한 존재로 받아들인다.
다음의 한결 고차원적인 에너지 장에서는
중년이나 노년을 슬프게 받아들인다.
이것은 아주 일반적인 시각이다.
중년을 슬프게 인식하며, 젊음의 부재를 끔찍하고 커다란 상실로 받아들인다.
활력과 성생활, 신체적 매력, 유혹적인 성적 능력, 정신의 기민함,
세상의 지위와 힘을 잃어버리는 상태라 여기는 것이다.
상실했다고 인식하는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슬픔은
후회의 감정을 야기하고 중년과 노년의 시기를 쇠퇴기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 결과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인간의 삶 전반에 대해서도 의기소침해진다.
삶과미래, 서서히 진행되는 노화를 슬픈일로 받아들이고
신이 자신을 무시해서 노화과정에는 신경도 안쓴다고 여긴다.
다음은 두려움의 에너지 단계다.
두려움의 에너지는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늙음이 아니라
부정적인 믿음체계가 불러오는 결과들이다.
위험은 나이자체가 아니라
마음속에 품고있는 부정적인 믿음체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노년 자체를 두려워해서 걱정과 근심이 가득하다.
슬픔은 과거와 , 두려움은 미래와 연관되어 있다.
두려움으로 노년을 바라보며 미래에 대해서 근심과 걱정을 품는다.
그러므로 세상과 노화과정 전체를 두렵게 여긴다.
의지할 신도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욕망의 장이다.
욕망의 장에서는 이 모든 것을 바꾸고픈 강렬한 갈망과 바람이 생겨난다.
그 양상으로 젊음에 집착하고 젊음이 있는 곳에 삶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젊음을 지나치게 찬양하기도 한다.
젊음을 붙잡으려는 광적인 욕망으로 노년에 대한 두려움을 표출하는 것이다.
또 부적절한 행동들에서 드러나듯 어떤 이들은 우아하게 늙어가지 못한다.
젊음을 삶으로 오인하는 태도와
젊음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존재한다.
어린시절에 갖고 있던 삶의 에너지는 노인에게도 똑같이 존재한다.
다음의 에너지 단계는 분노다.
이 단계에서는 점진적인 노화과정 전반에 영향과 지배를 받으며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또 세월이 자신의 삶을 마음대로 휘두른다고 느낀다.
그래서 분노를 느낄 수 밖에 없다.
이런 생각들은 모두 부정적인 에너지 장에 들어 있으며
실제로 이런 장은 보통 다른 장들과 뒤섞여 있다.
어느 하나의 단계만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다.
예를들어 분노에는 약간의 슬픔과 약간의 가망없음, 약간의 죄책감이 섞여 있으며 이 모든 감정들은 함께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
노년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 억울함이 같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노화의 과정과 젊음의 상실에 혐오와 분노를 함께 느낀다.
또 조부모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아서
노인들을 싫어하는 젊은이들도 많다.
이들은 노인들 주변에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런 분노에서 갈등과 경쟁으로 얼룩진 세상이 만들어지며
신에게 투사된 분노는
무의식적인 죄책감과 신이 보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불러온다.
부정도 노화를 대하는 또다른 방식이다.
위에서 언급한 선택권을 거부하고
노화과정에 약간은 오만하고 우쭐대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태도는 우리를 완전히 부정적인 단계에 위치시킨다.
이 모든 것들은 진실과 관련이 깊다.
이것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이 부정적인 입장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들에 저항하거나 집착하거나 가치를 부여하는 일을 내려놓으면
이 입장들에서 벗어나 중년과 피할수 없는 노화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 신도 자유를 선사하는 존재로 보고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을지 모른다는 점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나아가 이제는 노화과정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그것에 동의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면 중년과 노화, 세상 모두 호의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세상의 신은 희망을 주는 믿음직한 존재이다.
수용의 단계로 올라가면 이제 자신의 힘을 되찾기 시작한다.
진실을 받아들이려는 자발적인 의지가
에너지 장을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주기 때문이다.
진실은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근원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이다.
믿음체계들을 삶속에 흡수하고 받아들여 스스로 근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선택권도 있다.
이 점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것이 조화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신도 자비로운 존재로 여겨진다.
이제는 사랑의 상태로 옮겨가 책임있고 진실되게 자신을 사랑한다.
부정적인 사고방식들에 빠진 자신을 용서하고 지지하고 보살펴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부정적인 사고방식들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천진함과 순진함때문이다. 상황이나 일을 원래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고 의문을 제기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의식이 깨어있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예를들어 설명해주어야 '와 선택권이 있는 것 같네요'라고 말한다. 음 저사람은 유전적으로 원래 저래 라거나 나도 저렇다면 아흔살에도 즐겁게 살아갈텐데 라고 말하기를 멈춘다. |
사랑의 에너지 장에서는 변명을 멈추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이
우리가 삶속에 끌어들인 믿음체계때문임을 진심으로 인정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갑자기 열리는 것같은 이런 경험은 거의 계시처럼 다가온다.
제한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발적인 의지와 열린 마음으로 선택사항들을 살펴보고,
자신에게 실제로 선택권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도 사랑이 가득한 곳으로 보인다.
중년과 노년의 장점들을 발견한 덕에 미래의 전망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 많은 이들이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십대 시절의 불안과 여드름, 무지, 방황, 서투름, 사람들과 어울릴때의
끈임없는 걱정과 자의식을 다시 겪고 싶지 않습니다.
이십대도 마찬가지에요.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가 될지몰라 내가 대학을 졸업할 수 있을까?
하며 하염없이 불안에 시달리고 싶지는 않아요.
삼십대로 돌아가 다시 고군분투하는 것도 싫습니다.
가정을 포함해서 온갖 것들을 안정적으로 다지기 위해
또 다시 싸우고 싶지 않거든요.
이제 과거가 현재보다 좋았다고 말하는 대신에 이렇게 선언한다.
"이봐 바로 지금, 바로 여기 현재속에 멋진 선택사항들이 있어"
그러면 갑자기 온 세상이 새롭게 열리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
예순살에도 다시 태어날 수 있어.
안될게 뭐가 있어?
부정적인 에너지 장에서
긍정적인 에너지 장으로 옮겨 가면 진실에 더욱 가까워진다.
그러면 자신이 경험자이며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실제로 경험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서서히 깨닫는다.
우리가 컴퓨터의 하드웨어라면
경험은 소프트웨어와 같은 것이다.
하드웨어는 소프트웨어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경험하는 주체는 경험에 휘둘리지 않는다.
본래의 우리는 나이를 먹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며
노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내면의 경험자는 몸안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때로는 이런 변화를 충격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댜봐도 그 이유를 알아채지 못한다.
내면에서는 시간의 경과를 경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기, 실제의 자기는 노화같은 것을 전혀 경험하지 않는다.
우리가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진실안에서 늙는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점진적으로 자각하면
선택의 자유는 물론이고 진정한 자기와 하나가 될 가능성도 커진다.
한 예로 노년이 돼도 성욕이 전혀 감퇴되지 않으며,
때때로는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왕성하게 남아있음을 깨닫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내 친구도 일흔여섯살에 성생활이
그 어느때보다도 황홀하고
젊었을때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질도 향상되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젊은 시절 그는 유연체조나 곡예, 행위예술에 심취해 있었다.
하지만 나이들어 성숙하고 지혜로워지자
더욱 중요한 문제들에 관심이 쏠렸다.
은밀하게 털어놓기 , 섹스가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는데 정말로 믿기지 않으며,
섹스에 대해 발견한 것과 섹스의 질에 스스로도 놀랐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사회에 너무도 흔하게 퍼져있는 믿음체계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남녀을 불문하고 믿음체계들은 갱년기에 발생하는 성적현상도 연관이 있다.
어느 임상실험에서 연구자들은
서른명의 여성들에게 가짜 약을 주사하면서
이 호르몬제로 인해 월경이 2주나 일찍 시작될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복부팽창, 몸무게 증가, 트림, 복통, 산통 등
많은 여성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월경전증후군이 2주나 일찍 나타났다.
이들의 마음속에 이런 고통이 생기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실험은 우리에게 강력한 피암시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또 중년기에 발생한다고 여겨지는 여러 증상들과
월경전 증후군을 전적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도 말해준다.
예를 들어 열감처럼 폐경기가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는 모든 증상들은
최면으로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것은 수차례 입증된 사실이다.
젊은 여성을 최면상태로 유도하고 나서
단경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는 실험을 했다.
그러고 나서 증상을 묻자,
그녀는 실제로 단경을 경험중인 여성들과 똑같은 증상들을 보고했다.
페경기 증후군은 문화에 따라 같은 문화권 내에서도 계층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불가피하다고 믿는 것들이
어디서나 실제의 증상으로 이어진다는 점은 같다.
마음이 여성들을 희생자로 삼고 있는 것이다.
마치 마음이 원래 이럴땐 이런증상들이 나타나는 거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말에 굴곡하고 받아들이고 휘둘려서
결국은 자신의 힘을 내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년기 남성들도 마찬가지다.
수족냉증과 피로, 의기소침, 에너지와 리비도의 상실,
게실염이나 통풍같은 질환들을 포함해서
중년기와 관련된 온갖 현상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원인은 순진한 마음을 받아들인 믿음체계들에 있다.
순진무구함으로 인해 온
갖 믿음체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인간적인 약점을 인정하면,
이런 믿음체계를 받아들인 자신을 용서하려는
자발적인 의지와 연민의 마음이 일어난다.
원인은 그저 그 어떤 것도 달리 인식할줄 몰랐던 것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목적은
그동안 발견한 사실들, 즉 우리에게는 선택과 선택권이 있으며
우리 스스로가 희생자가 아니라는 점을 나누기 위해서다.
이런 믿음체계들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신의 선택으로 의식지도 아랫부분에서
위로 올라가 상황이 절망적이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다.
학습만으로도 이런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기만 해도
삶이 절망적이지 않음을 알게 된다.
마음은 여전히 자신의 책임에 변명을 늘어놓고 싶을 테지만 말이다.
의식지도를 약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의식의 단계가 낮은 사람들은
소유를 근거로 삶과 자신, 타인을 평가한다.
소유는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중요하다.
그래서 소유를 근거로 자신과 타인의 가치를 평가한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가 가치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갖기 위해
나이가 들수록 소유에 더욱 집착한다.
소유를 우선시하는 우리 문화에는 이런 하위집단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들이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
타인보다 더 많은 돈을 갖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갖고 있던 돈을 전부 잃어버리면
그 사람을 사회에서 따돌리기도 한다.
진실과 용기에 더 가까운 중간단계의 에너지 장에서는
삶을 기회로 본다.
개척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해서
그 모든 거대산업체들을 일궈낸 것도 이런 태도 덕분이었다.
이 단계에서는 강력한 에너지 중심이 생겨나며 자신의 행위를 중시하게 된다.
이처럼 행함을 중시해, 자신이 하는 행위를 원인으로 여긴다.
자신이 하는 일 때문에 자신이 중요해질 수 있으므로 행함에 더욱 역점을 둔다.
그러나 행함은 원인이라기 보다는 결과다.
마음속의 믿음체계에서 행위가 비롯되므로 행함은 원인이 아닌 결과인 것이다.
<오늘의 말씀중 최고>
우리가 행복하거나 건강한 것은 테니스(마라톤)를 치기 때문이 아니다. 테니스(마라톤)를 통해 살아있는 기쁨을 표현하기 때문에 행복하고 건강한 것이다. |
그러므로 의식의 단계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그토록 중시하던 행함은 중요성을 잃어버린다.
본래의 모습을 자각하는 단계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문제가 더욱 중요해진다.
삶에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현재의 달라진 모습을 중시한다.
이것은 다른 문화집단에서도 마찬가지다.
본래의 모습, 지금의 달라진 모습,
우리가 지적하는 것, 우리의 존재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수준이 높은 집단에서는
소유에 관심을 갖지도 않고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또 소유가 행함의 결과물이라는 것도 누구나 안다.
물론 누구든 열심히 일하면 원하는 소유물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행함은 선택권을 행사하는 문제일 뿐이다.
누구든 온갖 위원회에 가담해 녹초가 돼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행함도 더이상 지위나 가치를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가치는 지금의 변화된 모습과 삶의 원칙들에서 비롯된다.
우리를 갈수록 의식있고 깨어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원칙에 헌신하는 것,
덧없는 것들을 초월한 보편적인 것들과 영적인 원칙에 헌신하는 것,
덧없는 것들을 초월한 보편적인 것들과 영적인 원칙들에 전념해서
우리가 진실로 한부분을 이루는 점진적인 자각을
드디어 확인하는 것이 가치를 가져다 준다.
의식의 이런 점진적인 성장으로 우리는 더이상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다.
존재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더이상 무언가를 소유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이미 자각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몸도 다른 입장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제는 몸과 우리의 본질적인 관계를 살피고
몸과 우리가 같지 않음을 몸은 그저 우리가 가진 것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몸을 우리에게 속한 어떤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제는 몸을 즐길 수 있으며,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것도 이해하기 시작한다.
몸을 우리에게 소속된 즐거운 문제로 보고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하기 위해 몸이 존재한다는 것도 깨닫는다.
이렇게 몸과의 동일시를 내려놓고
몸이 우리가 아님을 깨달으면 몸을 경험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도 이해할수 있다.
덕분에 선택권을 되찾아 선택을 한다.
몸을 즐기기로 마음먹거나 몸이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늘상 하던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바라본다.
병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믿음체계들을 지워버리면
이 모든 것들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으면
나이가 들수록 더 건강한 몸을 즐길수 있다.
현재의 몸이 30년전보다 훨씬 건강해진 듯하다.
세상이 말하는 노화과정을 점진적으로 겪으면서 몸이 갈수록 좋아졌다고 느낀다.
덕분에 마흔살이 었을때보다 예순살에 내 몸을 잘 즐기게 된다.
마흔살이었을때 나는 너무나 피곤했다.
편두통에 궤양, 게실염, 대장염, 치질, 부은 발목,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 통풍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동차 뒷자석에 지팡이를 싣고 다녀야 할 지경이었다.
이처럼 마흔살에도 내 몸은 아주 노쇠했다.
그러나 나이가 훨씬 많은 지금은 모든 병들이 사라져 몸을 더욱 많이 즐기게 되었다.
모든 믿음체계들과 한계를 내려놓은 덕분에 몸
을 만끽하면서 행복을 표현하는 도구 같은 것으로 몸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몸도 서서히 약화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품고 있으면
이런 생각에 영향을 받는다.
반면 우리에게 성장과 의식자각의 자유를 주는 공간으로 시간을 인식하면
시간도 우리의 친구가 돼준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중년과 노년의 몸이 갖고 있던 질병들도 사라져 버린다.
우리에게는 잘못된 믿음체계로
자신을 제한하는 태도를 버릴 수 있는 선택권을 탐구하고 자각할 시간이 아직은 있다.
이런 기본적인 전제들을 지속적으로 적용하면
많은 질병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삶의 조건들에서도 벗어날 수있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자체에 내재해 있는 일반적인 상황들이
이런 가능성을 제한하기도 한다.
인간의 몸은 원형질적인 동시에 유전자들을 물려받고 있으며
카르마의 영향과 성향,
인류의 집단의식속에 내재되어 있는 프로그램들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댓글 삶에서 기여나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마음속에 있는 것 믿음, 개념, 생각, 양식, 대본
물질의 세계는 결과의 세계
마음은 순진무구한 어린이 같아서 세상에 나가서 들리는데로 보이는데로 믿어 버린다.
믿으면 (믿는만큼의 프로그램이 어린이에게 작동되는 것이다)
직업에서 은퇴가 삶의 은퇴라도 되는 양 한다.
절대 그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