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지은 안복초 묘비명] - ‘죽산안씨 안원형파 카페’에서 옮김.
<숭정대부좌찬성 죽산안공복초 || 배정경부인함안윤씨지묘 ||묘좌>
공의 휘는 복초요, 본관은 죽산인이시다. 공은 고려 때 문하부 문하시중을 지낸 죽산안씨 시조 죽성군 안원형공의 증손이며, 정당문학 대승상 흥령군 면 공의 장손이시며, 고려 공민왕 21년(1372년) 진사에 장원하시고 우왕 2년(1376년)에 문과 대과에 급제한 후 문하사인 보문각 제학과 경기도 안렴사 태종 원년에는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셨으며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신 노생공의 장남이시다.
노생공은 배 군부인 인천이씨와의 슬하에 3남을 두셨으니 복초공은 장자요 차남은 영해부사를 지낸 복지공이요 삼남은 경기감사를 지낸 복언공이시다.
복초공은 조선조 때 문과 대과에 급제하시어 회양부사 예조참판을 지내시고,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영경연 동지 의금부판의금에 증직되셨다.
배 정경부인 함안윤씨로 문과 좌보궐을 지내신 윤장의 따님으로 슬하에 3남을 두셨다.
공의 장남 맹손 공은 성균관 유생으로 학문에 전념하시다 단종손위 사건에 선고와 뜻을 같이 하기로 성균관 유생의 벼슬을 버리고 광주읍 발산에 우거하셨으며 광주 함평 문중 파조이시다.
공의 차남 철손 공 또한 세종 신유년 문과대과에 급제하시어 충청도 감사 이조참판을 지내셨으며 세조대왕의 총애를 받아 세조대왕으로부터 선고 복초 공을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영경연 동지 의금부 판의금에 증직케 하셨으니 천하의 효자라 아니할 수 없다. 전북 진안 용담문중의 파조가 되신다.
공의 삼남 신손 공은 단종 원년 계유년에 문과 대과에 급제하시고 예문관 대교 겸 춘추관 기사관을 지내셨으며 경기 용인문중의 파조이시다.
이렇게 복초공 후손들이 광주 함평 전북진안 용담 경기 용인의 세 문중에서 문무 생원 진사의 벼슬이 대를 이어 배출되어 문중이 크게 융성하였다. 세종실록 52권(1431년)과 69권(1435년)에는 공께서 조정에서 정사에 도모했던 기록이 상세히 보전되어 있다. 세종대왕이 직접 지시하고 명을 받은 것으로 봐도 공께서는 한없이 청렴강직한 성품임을 알 수 있다.
공께서는 말년에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장곡리 방하동에 낙향하시어 후학양성과 가문의 종사에 몰두하셨다. 시경에 이르기를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서 너의 부모에게 욕됨이 없게 하라. 또 너의 조상을 잊지 말라. 오직 그 덕을 닦아라”고 하셨다. 이 시 정신을 살려 현대를 살아가며 자기 실현에 힘써 자랑스런 후손이 될 것을 다짐하며 오랜 풍우에 마모된 구 석물은 역사로 간직하고 새로이 후손들의 뜻을 모아 삼가 이 비를 세운다.
서기 2008년 10월 죽성군 23세손 안재풍 삼가지음
헌성;송학문중 진안문중 오치문중 예동문중 나산문중 안백순 안수웅 안용호 안성복 안병문
건립추진위원장 ; 안재풍 // 부위원장 ; 안당순 안상열
상임고문 ; 안종일 안택 안인수 안광영 안두환 안종관 안성준 안성호 안태균 안금주
감사 ; 안순용 안현 // 총무 ; 안영수 안재희
----------------------------------------------------------------
묘지(墓誌)는 돌에 새기거나 도자기에 구워서 무덤 주변에 묻음으로 위조나 변조를 막으려는 것.
묘갈(墓碣)은 돌에 새겨서(銘) 무덤(墓所)에 세우므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도자기에 구워서 무덤에 묻었던 안복초의 묘지가 도굴되어 세상에 알려진 내용이다.
묘지(墓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앞에 적혀있다.
유명조선 통정대부 회양도호부사 안(복초)공 묘지명
(有明朝鮮 通政大夫 淮陽都護府使 安公 墓誌銘)
天順元年丁丑正月二十九日戊午。通政大夫淮陽都護府使安公卒。
천순원년정축정월29일 무오. 통정대부회양도호부사 안(복초)공이 죽었다.
四月初四日丁酉。以禮葬于原平府治之南。新堂山西麓。從先塋也。
4월초4일 정유. 원평부(파주)에 장례하였다. 신당산 서쪽 기슭의 선조 묘역에.
既葬。子哲孫。以所撰家狀。
장례를 마치고, 아들 철손이, 자기가 지은 가장을 가지고,
授成均大司成陽城李承召。
성균관 대사성인 양성인 이승소를 찾았다.
"墓之有誌古也。將子是託焉。"
“예부터 墓에는 誌가 있는 것이니, 그대에게 부탁하노라.”
予考其狀。如公懿德醇行。
가장을 살펴보니, 공은 훌륭한 덕을 곧게 행하였더라.
不可不傳于後人。敢不諾而銘諸。
이를 후손에게 전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묘지)銘(명)을 짓노라.
[번역] 孝岩 安在弘
묘갈(墓碣)은 묘지(墓誌) 내용과 다르지 않다.
회양부사 안후[安復初안복초] 묘갈명
淮陽府使安侯墓碣銘
삼탄 이승소 지음(1457년)
공의 휘는 복초(復初)이고, 성은 안씨(安氏)이며, 죽주인(竹州竹山人)이다. 고(考)의 휘는 노생(魯生)이며, 가정대부(嘉靖大夫) 인녕부윤 집현전제학(仁寧府尹集賢殿提學)을 지냈다. 조(祖)의 휘는 면(勉)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광주 교관(光州敎官)을 지냈다. 증조의 휘는 원형(元衡)으로 중대광(重大匡) 광산군(光山君)이다.
부윤(魯生)공은 인천(仁川)의 망족(望族)인 전의감(典醫監) 이자충(李資忠)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약관의 나이에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아버지의 직임으로 보직(補職)되었다.뒤에 서흥(瑞興), 신천(信川), 이산(尼山)의 수령을 역임하고, 경시 영(京市令)과 함길도 도사(咸吉道都事)를 역임하였다. 뒤에 경력(經歷)으로 승진하여 종부시(宗簿寺)와 내섬시 소윤(內贍寺少尹)에 제수되었다. 외직으로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나갔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전농시 소윤(典農寺少尹)으로 옮겼다. 얼마 지나 다시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고, 고과(考課)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아 중훈대부(中訓大夫)가 되었으나, 뒤에 감사와 잘 맞지 않아 파직되었다. 이에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부족한 재주를 가지고 통현(通顯)의 지위에까지 올라갔으며 나이 또한 늙었다. 그러니 어찌 다시 위태로운 자리에 나아가 구차스럽게 승진되기를 구하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뜻을 결정해 교하현(交河縣)에 있는 별서(別墅)로 물러나 살면서 한가로운 가운데 자신을 수양하니, 사람들이 세리(勢利)에 대해서 담담함을 칭찬하였다. 나라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정사를 펴 직질(職秩)을 높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게 되었다. 나이 76세가 되던 해인 천순(天順) 원년 정축(1457, 세조3) 1월 아무 날에 병으로 졸하였다. 4월 아무 날에 장사를 지내어 원평부(原平府)의 치소 남쪽에 있는 신당산(新堂山)의 서쪽 기슭에 예장(禮葬)하였으니 선영(先塋)에 장사 지낸 것이다.
공은 성품이 충직하고 너그러웠으며 장중하여 말이 적었고 희로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올바른 법도로써 자제들을 가르쳤고 깊은 은혜로써 구족(九族)을 어루만져 주었다. 또한 청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생업을 일삼지 않았다. 관직에 임하여서는 청렴하고 신중하였으며, 백성들을 다스릴 때에는 일 처리를 관대하고 간략하게 하였다. 모두 네 고을과 두 부(府)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공이 떠나온 뒤에는 백성들이 그리워하는 마음을 품었다. 이산(尼山) 사람들이 일찍이 30년간의 치적을 올리면서 공을 첫 번째로 올린 것이 그 징험이다.
아내 윤씨(尹氏)는 중훈대부 양주부사(襄州府使) 윤장(尹將)의 따님이다. 덕을 쌓은 화려한 가문에서 자라나 대가(大家)로 시집온 뒤에 제사를 이어받아 궤전(饋奠)을 주관할 때 순리대로 하고 법도대로 하였다. 3남 4녀를 낳았다.
장남 맹손(孟孫)은 공보다 먼저 죽었고, 차남 철손(哲孫)은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이고, 삼남 신손(信孫)은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이다. 이들은 모두 힘써 학문을 닦아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원대하게 뻗어나갈 것으로 기대하였다.
장녀는 사정(司正) 장맹원(張孟元), 차녀는 언양현감(彦陽縣監) 서거광(徐居廣), 삼녀는 생원 최정평(崔井平),사녀는 부사정(副司正) 이효강(李孝綱)에게 시집갔다.
맹손은 호장(戶長) 조균(趙均)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두었으니 치중(致中)과 치화(致和)다.
경력(철손)은 필선(弼善) 최유종(崔有悰)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두었으니 종도(從道)이다.
대교(신손)는 상호군(上護軍) 이사민(李士敏)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두었다.
외손은 12명이나 모두 어리다.
[오원 註] 오늘날 신죽산안씨족보에는 (붉은 글자 부분에)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자손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내용은 새로 지은 안복초 묘비명에 보이며, 모두 새로 만든 자(子)들이고 손(孫)들로, 본디 자기 조상을 잘 모르던 者들이다.
명(銘)하노니.
재주 보면 뭔가 큰일 할 만하였고, / 維其才可以有爲
덕을 보면 크게 은택 베풀 만했네. / 維其德可以大施
그런데도 그 재주를 다 쓰지 못해, / 而用不盡其才
오른 지위 그 덕과는 맞지 않았네. / 位不稱其德
후손에게 의당 그 복 내려줬거니, / 宜其委祉于後
더욱 크게 번성하고 성대해지리. / 益繁且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