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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시장(柴場)
정의
난방과 취사에 소요되는 땔나무를 채취하는 공동 이용지.
개설
원칙적으로 시장은 특정 기관이나 개인이 사적으로 점유하거나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각사와 왕실은 시장을 일정하게 배정받아 땔나무로 쓰는 풀 시초(柴草)의 공급지로 활용하였다. 이는 시장을 사적으로 점유하는 빌미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시장은 절수(折受)의 형태로 궁방·아문의 사적인 지배의 대상이 되어 갔다.
내용·특징 및 변천
조선시대 시장은 통상 ‘산림천택’의 범주에 속하여 백성의 공동 이용지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실상은 양반이나 왕실은 과전(科田)에 입각하여, 아문은 시초장(柴草場)에 입각하여 신(薪)·탄(炭)·초(草)를 조달하고 있었다. 이는 이미 고려시대 전시과에서 시지(柴地)를 지급하는 전통과도 관련이 있었다.
『경국대전』에 나타난 관서별 시장의 규모는 봉상시·상의원·사복시·군기시·예빈시·내수사의 시장은 둘레 20리, 내자시·내섬시·사재감·선공감·소격서·전생서·사축서는 둘레 15리, 사포서는 둘레 5리로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각 관서는 이 규정을 준수하지 않고 이보다 많은 시장을 차지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더구나 성종 때부터 왕이 왕자·공주에게 시장을 사여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점차 시장은 사점(私占)의 대상이 되어 갔다. 그와 더불어 권세가·토호 등도 시장을 사점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시장을 사점하고, 노비를 통해 땔나무를 조달하거나 주민들에게 시장을 이용하는 대가로 땔나무를 수취하기도 하였다. 사점의 대상이 된 시장은 대체로 서울 주변이나 한강변으로 인구가 조밀하여 땔감의 수요가 많은 지역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시장의 사점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궁방·아문 등은 절수와 입안(立案)의 방식으로 시장을 확보하여 운용하였다. 사점한 시장에서는 땔감뿐 아니라 봉밀(蜂蜜)·마포(麻布) 등 갖가지 물품을 수취하였다. 한편, 인구의 증가와 농지의 개간으로 시장에서는 화전(火田)의 개간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제 시장의 사적 점유는 시장 자체보다 시장에 있는 화전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옮아가기 시작하였다[『현종개수실록』 4년 5월 25일].
시장의 소유와 거기서 발생하는 이익이 땔나무에 국한되지 않게 되자, 시장 절수 지역도 땔감 운반에 용이한 곳에 국한될 필요가 없어졌다. 이로 인해 심지어는 시장이라는 명목 없이 산전(山田)·화전을 직접 절수하는 경우도 크게 늘어났다. 시장과 화전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궁방과 아문은 절수를 통해 확보한 시장과 화전을 둔전으로 만들었고 여기에서 호세(戶稅)·화전세(火田稅)를 비롯하여 다양한 현물을 거두어들였다. 원칙적으로 시장은 지역민의 공동 이용지였고 화전세는 지방 재정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이 때문에 시장의 절수를 둘러싸고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정부에서도 시장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종대에 화전 수세 기준이 강화·개선되고 시장의 상당수가 혁파되었다. 하지만 화전 절수가 계속되고 있는 상태에서 시장을 혁파하는 효과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경종대에는 시장의 절수를 비변사(備邊司)의 서경(署經)을 받은 후 집행하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영조대에는 화전의 수세를 궁방이나 아문이 직접 궁차(宮差)나 도장(導掌)을 파견하여 수세하는 것을 지양하고, 수령이 답험수세(踏驗收稅)하여 이를 궁차나 도장에게 주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정조대에 들어서는 궁방의 궁차·도장 파견을 금지하고 지역 수령이 호조에 상납하면 호조에서 궁방에 이송해 주는 형태로 바뀌었다. 시장과 화전에 대해 취해진 또 하나의 조처는 종실집복(從實執卜), 수기수세(隨起收稅)의 원칙을 준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는 세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자연재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실제 경작이 가능한 실결수 중심의 수취를 통해 보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세금을 거두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참고문헌
송양섭, 「정조의 왕실재정 개혁과 ‘궁부일체’론」, 『대동문화연구』 76.
이경식, 「조선후기 왕실·영아문의 시장사점과 화전경영」, 『동방학지』 77·78·79합집, 1993.
김선경, 「조선후기 산림천택 사점에 관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실록연계
『현종개수실록』 4년 5월 25일
식읍(食邑)
정의
왕족이나 공신에게 수조권을 내려 주던 지역이나 호.
개설
식읍은 중국과 한반도의 왕조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토지분급제도였다. 왕족 혹은 특별한 공훈으로 관직이나 작위를 받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처우를 목적으로 국가에서 식읍을 내려 주었다. 식읍은 일정 지역이나 혹은 몇 호(戶)의 형태로 주어졌으며, 식읍을 지급받은 사람은 그 지역이나 호에서 조세를 거두어 쓸 수 있었다. 식읍은 주로 ‘식읍 몇 호, 식실봉(食實封) 몇 호’로 지급되었다. 앞의 식읍은 허봉(虛封)으로서 실제 내려 주는 양과 거리가 있는 명목상의 식읍이었고, 식실봉이 실제 지급하는 호수에 해당하였다. 조선을 개국한 후에도 식읍을 내려 주는 사례가 있으나 건국 초의 몇 차례에 불과하였다. 마지막으로 식읍을 지급받았던 사람은 수양대군이었다.
내용 및 특징
식읍은 삼국시대 기록에서부터 나타났다. 당시의 식읍은 수조권(收租權)뿐 아니라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권까지 포괄한 개념이었다. 식읍과 관련된 제도는 고려시대에 대부분 정비되었다. 고려 문종대에 훈작제도(勳爵制度)와 함께 식읍제를 정비하여 공후국공(公侯國公)에게는 식읍 3,000호, 군공(郡公)에게는 2,000호, 현후(縣侯)에게는 1,000호, 현백(縣伯)에게는 700호, 개국자(開國子)에게는 500호, 현남(縣男)에게는 300호를 주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식읍 지급이 규정대로 원활히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식읍을 지급할 때는 명목상의 식읍의 호수와 실제 지급되는 식실봉 호수를 아울러 표기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중국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데, 식읍이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조선 개국 이후에도 몇 차례 식읍을 지급한 사례가 보였다. 먼저, 개국공신 일부에게 식읍을 지급하였다. 개국공신 중 1·2·3위 위차(位次)에 해당하는 성산백 배극렴, 평양백 조준, 상락백 김사형 등에게 각각 식읍 1,000호와 식실봉 300호를 내려 주었다[『태조실록』 1년 12월 13일]. 이것이 조선에서 최초로 식읍을 지급한 사례였다. 개국공신 중에서도 일부에게만 식읍이 지급된 것으로 볼 때, 식읍은 일반적인 봉작보다도 더 명예로운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조준은 본인에게 내려진 평양의 식읍호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를 통해 볼 때, 식읍은 수여 대상자의 본관이나 혹은 세력 본거지에 거주하는 호들로서 지급된 듯하다.
두 번째 경우는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지방에 안치되었던 이방간(李芳幹)에게 식읍 50호를 내려 준 것이었다. 이 경우는 국가의 공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왕족의 생활 기반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식읍이 지급되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정종실록』 2년 2월 23일].
마지막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에서 공을 세운 수양대군에게 내려진 식읍이 있었다. 당시 지급 규모는 식읍 1,000호, 식실봉 500호였는데, 식실봉의 호수가 개국공신들이 받았던 액수보다도 많았다. 세조 집권 이후 식실봉에 편성되었던 500호는 모두 본래대로 국가에 환속되었다.
세조대 이후 조선에서 식읍 지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변천
식읍제도는 세조대 이후에는 시행되지 않았으나, 국가가 왕족이나 공훈이 있는 사람에게 식읍을 지급하는 이념은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효종대 서천군수 이무라는 사람의 상소에는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식읍이 없고, 왕자나 도위(徒尉) 등에게 지급되는 것은 『경국대전』에 규정된 220결이 전부이다.’ 하는 표현이 등장하였다. 이는 왕실이나 궁가(宮家)에 대한 경제적 대우가 없음을 강조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궁방전 등에 대한 지급도 국가 재정의 부담으로 다가오는 상황에서 식읍 지급은 현실적인 방안으로 고려조차 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실록연계
『태조실록』 1년 12월 13일
『정종실록』 2년 2월 23일
영남청(嶺南廳)
정의
경상도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난 후 영남에서 올라오는 대동세의 출납 업무를 맡아 보던 선혜청의 부속 관청.
개설
17세기 초부터 경기를 시작으로 강원과 호서·호남 지역에 대동법이 확대 시행되는 가운데 영남에도 대동법을 시행하자는 논의가 촉발되었다. 1623년(인조 1) 강원·호서·호남·영남 4도에 대동법을 시행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영남은 임진왜란 이후 지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황을 감안하여 당시 시행 지역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삼도대동법마저 1624년(인조 2)에 폐지되어 경기와 강원도에만 대동법이 시행되어 오다가 효종대와 현종대 호서·호남 지역에 대동법이 확대 시행되면서, 1677년(숙종 3) 대사간 이원정(李元禎)의 건의로 마침내 경상도에도 대동법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숙종실록』 3년 5월 19일]. 영남청은 경상도에서 올라오는 대동세의 출납을 관장하던 선혜청의 하위 관청으로 영남대동법을 시행하던 해에 선혜청 본청에 합설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경상도에서는 일찍부터 고을별로 사대동(私大同)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동법이 호서와 호남에 확대 시행되는 상황에서도 도민들 사이에 큰 반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더욱이 경상도는 다른 도에 비하여 거리가 멀고 지리적으로 불편하여, 대동미를 상납한다고 해도 조운제(漕運制)의 정비가 병행되어야 하였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하여 경상도의 대동법 시행은 다른 도에 비하여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1662년(현종 3) 전라도 산군에까지 대동법이 확대 시행되면서, 경상도에도 대동법을 시행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하였다. 여기에 경상도민이 전담하는 역(役), 이를테면 대마도에 보내는 공작미(公作米)의 증대, 화재로 인한 왜관 신축 등의 민역이 늘어나는 문제가 야기되었다. 이에 1677년(숙종 3) 이원정의 건의로 경상도에도 대동법이 시행되었으며, 곧바로 선혜청 내에 경상도의 대동세를 관리하는 영남청이 신설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남청은 경상도 지역에서 올라오는 대동세의 출납을 관장하던 선혜청의 부속 관청이었다. 경기·강원·호서·호남청과 마찬가지로 내청(內廳)과 강창(江倉)의 곳간을 독자적으로 확보하여 타청과 재원이 섞이지 않도록 관리하고 회계 처리도 따로 하였다.
현존하는 『영남도대동사목(全南道大同事目)』의 첫 조항을 살펴보면, 영남의 대동법은 호남의 예에 따라 마련하고 청사는 선혜청에 합설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대동법을 6도에 시행하고 난 후 『속대전』에 기재된 선혜청의 직제를 살펴보면, 도제조 3명과 제조 3명(호조 판서 1명 예겸) 아래 낭청 4명을 두어서 낭청 1명이 각기 ①경기청과 영남청, ②강원청과 호남청, ③호서청과 해서청, ④진휼청과 상평청의 회계 업무를 겸찰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선혜 각 청의 회계를 독자적으로 관리하면서도 관원은 사실상 두 청을 겸직하게 함으로써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한편, 급료성 경비를 줄이는 효과를 꾀하였다.
1753년(영조 29) 이후로는 균역청까지 선혜청에 합설하여 선혜청 낭청, 상평청과 진휼청이 합쳐진 상진청의 서리가 균역청의 업무를 겸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선혜청은 18세기 중반 이후 선혜 각 청과 상평청·진휼청·균역청을 합설한 거대 재정기구로 성장해 나갔다.
변천
갑오개혁기 호조로 재정기구가 단일화되기 전까지 영남청은 선혜청의 산하 기구로 경상도에서 올라오는 대동세의 출납 업무를 담당하였다. 영남청은 다른 청과 마찬가지로 내청과 강창을 독자적으로 확보하였고, 회계문서도 별도로 작성·관리하였다. 다만 필요할 경우 다른 청에 재원을 옮겨 줌[移劃]으로써 재정 운영의 효율성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호조로 재원을 옮겨 주는 경향이 확대되면서, 선혜청의 재정 운영에 여러 문제점이 야기되었다.
참고문헌
『속대전(續大典)』
『영남대동사목(嶺南大同事目)』
『영남청사례(嶺南廳事例)』
문광균, 「17세기 경상도지역 공물수취체제와 영남대동법의 실시」, 『한국사학보』 46, 2012.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실록연계
『숙종실록』 3년 5월 19일
요호부민(饒戶富民)
정의
조선후기 농업이나 상업적 경제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자들을 일컫는 말로 정부의 재정 보전정책의 주요 대상이 된 세력.
개설
조선후기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상공업 발달을 배경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을 요호부민이라 하였다. 정부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이들을 납속(納贖)정책의 주 대상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요호부민을 대상으로 공명첩(空名帖)을 판매하거나 이들에게 기민(饑民)을 돕도록[勸分] 장려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에 진휼에 필요한 재물을 자원하여 바치거나[願納], 또는 그들 개인의 곡식으로 진휼하는[私賑] 행위도 권면하였다. 하지만 부민이라는 이유로 지방관의 강매(强賣)·강탈(强奪)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신분 지위가 높지 않았던 요호부민들은 정부의 납속정책에 편승하여 신역을 면제받거나, 직임을 부여받아 향촌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성과를 이루지 못하자, 19세기에는 사회 변화를 꾀하는 민란의 한 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은 자급자족의 경제 구조를 가졌지만, 그중에서도 다양한 경제활동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요호부민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주로 농지 개간과 농장 경영, 농법의 개량과 상업 작물의 재배, 상공업 활동, 광산 개발, 국제 무역, 고리대금업 등을 통하여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였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경제 환경의 변화에 편승하여 요호부민의 수는 더욱 증가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는 이미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렸다. 호조(戶曹)의 재정이 200,000석(石)을 넘기 어려운 형편이었고, 재정 수요는 증가하는 반면 수입은 안정적이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갑작스러운 이민족의 침입이나 자연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긴급한 재정 수요는 늘 부유한 백성의 손을 빌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부유한 백성은 국가 재정 보용(補用)정책인 납속정책의 주 대상이 되었다. 부유한 백성을 대상으로 한 납속정책은 1480년(성종 11) 납속한 사람에게 관직을 주는 납속보관지법(納粟補官之法)에 대한 논의로 시작되었다[『성종실록』 11년 9월 12일]. 그 후 1485년(성종 16)에 이르러 지방 부민(富民)의 존재가 드러났다. 충청도 진천(鎭川) 지방에서 8,000석 정도의 곡식을 가진 사노비 임복(林福)이 곡식 3,000석을 바쳐 천민의 신분을 벗어나 양민이 되었던 것이다[『성종실록』 16년 8월 17일].
이후 임진왜란을 계기로 부민 가운데 납속자를 모집하는 정책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특히 선조대에 쌀 4,000석을 바쳐 수령이 된 평안도 개천(价川) 부민 이춘란(李春蘭)[『선조실록』25년 5월 23일], 광해군대에 10,000여 마리의 말(馬)을 바쳐 부총관(副摠管)에 오른 제주도품관 김만일(金萬鎰)[『광해군일기』 12년 8월 15일] 등이 부민으로 주목을 받았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흉년과 기근이 지속되면서 부민을 대상으로 재물 기부를 권장하는 권분(勸分)이 더욱 장려되었다. 이 시기 정부는 진휼이 이루어지는 설진(設賑) 지역 부민이 스스로 재물을 바치는 원납(願納), 부민의 개인 곡식으로 진휼을 돕는 사진(私賑)을 장려하였다. 그리고 진휼이 끝나면 각 도 감사가 진휼을 도운 사람의 거주지, 직역(職役), 성명, 납부한 곡식이나 돈의 수량을 기록하여 진휼청에 보고하고 포상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1732년(영조 8)에 「부민권분논상별단(富民勸分論賞別單)」이 제정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영조실록』 8년 7월 5일].
변천
경제적인 부를 축적한 부민들은 정부의 납속정책에 편승하여 천민의 신분을 면하거나 역(役)을 면제받아 신분적 속박에서 벗어나고, 관직을 얻어 관계(官界)에 진출하고자 하였다. 또한 양반을 사칭하거나 호적을 고쳐 신분 상승을 노렸으며, 향촌 사회에서 면임(面任)·향임(鄕任) 등에 차출되어 영향력 증대를 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민에 대한 수탈도 끊이지 않았다. 특히 공명첩 판매나 권분 과정에서 부민에 대한 강매·강탈이 관행화되었다[『영조실록』 8년 2월 20일]. 이는 수령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고과(考課)를 진휼의 성과 여부에 두는 제도적 모순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부민을 동원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은 빈민이나 부민 어느 한쪽도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주지 못하여 이들 모두를 경제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요호부민은 관권에 의하여 지속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면서 사회 불만 세력으로 성장하여 19세기 민란에서 자금 조달책을 맡는 등 민란의 주체 세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
『우서(迂書)』
『목민심서(牧民心書)』
고석규, 『19세기 조선의 향촌 사회 연구: 지배와 저항의 구조』,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賑政)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정석종,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상』, 한길사, 1994.
조상제·권인혁, 『한국 근대 농민 항쟁사』, 느티나무, 1993.
한국역사연구회 저, 『1894년 농민전쟁연구 2: 18·19세기의 농민항쟁』, 역사비평사, 1992.
서한교, 「영·정조대 납속 제도의 실시와 납속부민층의 존재」, 『조선사연구』 1, 1992.
안병욱, 「19세기 임술민란에 있어서의 「향회」와 「요호」」, 『한국사론』 14, 1986.
이세영, 「조선 후기의 권분과 부민의 실태」, 『역사문화연구』 34, 2009.
서한교, 「조선 후기 납속 제도의 운영과 납속인의 실태」,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실록연계
『성종실록』 11년 9월 12일
『성종실록』 16년 8월 17일
『선조실록』25년 5월 23일
『광해군일기』 12년 8월 15일
『영조실록』 8년 7월 5일
『영조실록』 8년 2월 20일
월과장인(月課匠人)
정의
조선시대에 지방관아와 군영에 속하여 군기를 제조해 바치던 장인, 혹은 와서 등 중앙관서에 속하여 매달 물품을 제조해 바치던 장인.
개설
고려말 왜구의 침략과 명과의 외교 마찰을 경험한 조선의 건국 세력들은 선초부터 군사 방어 체계를 정비해 나갔다. 중앙에 병기(兵器)와 기치(旗幟)를 관장하는 군기감(軍器監)과 전함의 건조(建造)를 책임지는 사수감(司水監)을 두고 경공장(京工匠)으로 하여금 군기를 제조하게 하였다. 또한 지방에는 각 도 관찰사의 책임 하에 매달(다달이) 진상용 군기를 제작하여 중앙에 봉진(封進)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방에서 상납하는 진상용 군기는 의례적인 성격이 컸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군사 방어에 필요한 무기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지방의 계수관(界首官)이나 도회소(都會所)에 공장(工匠)들을 동원하여 매달 방물진상용 군기를 제조하여 바치도록 하는 한편, 도내 영(營)과 진(鎭)에도 군기타조장(軍器打造匠)을 두어 매달 군기를 제작하게 하였다. 이때 부역한 공장들을 월과장인(月課匠人)이라 하였다. 이들은 전문적인 기술을 갖춘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천예(賤隸)나 일반 농민인 경우가 많았다. 태종대에는 3월부터 7월까지는 집에 돌아가 농사를 짓도록 하였고, 천첩소생(賤妾所生)은 직책을 받을 때에 품계를 제한하고 조반(朝班), 즉 양반에 섞이지 않도록 잡직(雜織)을 제수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5년 4월 20일].
한편 중앙관서에 속한 경공장 중 ‘월과장인’이라는 명칭으로 조선후기까지 역을 진 자들도 있었다. 1753년(영조 29)에 공인(貢人)들이 공물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겪는 문제점을 조사한 『공폐(貢弊)』에는 매달 기와를 구워서 진배하는 월과장인의 고충이 실려 있었다. 와서(瓦署)에 속해 가마에서 기와를 구워 만드는 번조역(燔造役)을 담당하던 월과장인은 9처의 영선도감과 2처의 자문도감에 각종 기와를 구워서 바치는 대신 호조와 선혜청으로부터 역가(役價), 즉 품삯을 지급받았다.
담당 직무
조선전기에 월과장인은 매달 군기를 제작하여 중앙에 방물진상용으로 바치는 한편, 지방 영·진에도 일정 수량을 바쳤다. 방물진상용 군기는 관찰사 영내와 계수관 그리고 군기의 원료가 산출되는 철장도회소(鐵場都會所) 등지에서 제작되었으며, 다수의 병력을 갖춘 지방 병영과 진에서도 군기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전문 기술을 지닌 장인과 그 밖의 농민들을 징발하여 자체적으로 군기를 만들었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와서에 소속되어 기와를 만들어 굽고 영선도감·자문도감 등에 바치던 장인을 월과장인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기와 번조역을 지는 대신 호조·선혜청 등 재정 관서에서 역가를 지급받아 생활하였다.
변천
조선전기에 중앙과 지방에 경공장과 외공장을 두어 행정·군사상 필요한 각종 수공품을 제작하여 수취하던 관영 수공업제는 조선후기에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특히 지방관아와 군영에서 매달 군기를 제조하여 바치는 월과군기제는 조선후기에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점차 폐지되었다. 『호서대동사목』에 따르면, “각 고을의 월과군기는 각 고을에서 그 값을 토지[民結]에 부과하였기 때문에 이번에 모두 대동세에 포함시켰다.”고 하였다. 즉, 군기를 제조하기 위해 매달 백성을 동원하거나 토지를 기준으로 역가를 부과하던 방식을 대동법 시행 이후 대동세를 걷는 방식으로 수정한 것이다. 더욱이 임진왜란 이후 조총·화약 등 신무기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삼남화약계와 같이 군기를 전문적으로 제조하고 이를 중앙군문과 병영에 상납하는 공계인층이 월과장인을 대신하게 되었다.
한편 와서에 속한 월과장인의 경우에는 조선전기처럼 상번(上番)하여 역을 지는 방식이 아닌 중앙의 재정 관서에서 역가를 지급받아 기와를 번조하는 역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공폐(貢弊)』
『호서대동사목(湖西大同事目)』
김일환, 「조선초기 月課軍器制 下의 軍器製造」, 『朝鮮時代史學報』 16, 2001.
유승주, 「朝鮮前期의 軍需鑛業硏究」, 『韓國史論』 7, 1981,
실록연계
『태종실록』 15년 4월 20일
은결(隱結)
정의
불법적으로 전세 부과 대상에서 누락된 토지.
개설
은결은 본래 양전(量田)을 실시할 때 비옥한 전답의 일부를 원장부에서 누락시켜 그 조세를 사사로이 취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여결(餘結)은 전답의 면적을 실제보다 줄여 토지대장에 기록하고 그 남는 부분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곡물을 수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둘을 합하여 일반적으로 은결이라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양전은 토지의 소유자를 파악하고, 실제로 농사를 짓는 기전(起田)과 경작하지 않아 황폐해진 진전(陳田)을 파악하여 공정한 수세의 근거를 삼으려는 것이었다. 『경국대전』에서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법제상으로는 20년에 1번씩 양전을 실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양전 규정은 물론 전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양전은 도(道)를 단위로 도내 모든 경작지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대거양전(大擧量田)과 어느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선택적으로 실시하는 추생양전(抽栍量田)이 있었다. 숙종대까지는 대개 전국적인 양전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영조대 이후에는 전정(田政)의 문란이 심한 지역의 군현을 중심으로 진전에 대한 조사를 행하는 부분 양전이 주로 이루어졌다.
양전 문제와 관련되는 전정의 문란은 다양하였다. 그것들 중에 은결·누결(漏結)·진결(陳結)·경계의 문란 등이 있었다. 누결이란 일부 경작지를 토지대장에 기록하지 않는 것이며, 진결은 진전을 기전으로 기록하는 문제를 말하였다. 17세기에 특히 은결의 폐단이 심각하였다.
은결이 발생하는 요인은 첫째 양전 시 부(負)의 수(數) 조작, 둘째 새로 개간한 경작지인 신간전(新墾田)이나 묵혀 두던 경작지인 진전(陳田)에 농사를 지을 때 면적의 조작, 셋째 묵은 땅으로 처리하거나 재해를 입은 것으로 보고하는 진전 급재(陳田給灾)의 이용, 넷째 전세 부과 시의 가징(加徵) 등 다양하였다. 이 가운데 재해를 입은 것으로 보고하여 감세받는 급재(給灾)가 가장 빈번히 지적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 세력가·토호·이속(吏屬)들의 농간에 기인하는 바가 많았다.
은결은 발생 자체에 대해 “새로 기경(起耕)된 토지는 모두 읍리(邑吏)·면임(面任)의 개인 호주머니로 돌아갈 뿐, 공세(公稅)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였듯이 전정(田政)에는 이속들의 농간이 끼어들었다. 토호 역시 비옥한 토지를 겸병하고는 진전(陳田)인 것처럼 전품(田品)을 낮추어 가벼운 세를 부담하거나, 실소유지를 은닉시켜 탈세하는 등 전정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또 전답(田畓)을 강제로 빼앗아 묘진(墓陳), 즉 묏자리에 딸려 있어 조세를 면제받는 논밭으로 만드는 시도를 하였다. 또 양전을 새로 할 때에도 더 많은 땅을 진전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은결은 이전부터 내려오는 결수가 있고, 혹은 매년 연분(年分) 마감 후 남는 결수가 있었다. 은결은 지방에 따라 그 규모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어느 곳에나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그러한 농지가 점점 더 늘어났다. 다산 정약용은 “은결을 고치지 않는다면 나라는 나라꼴이 아니다.” 하였다.
은결은 지방의 관용(官用)을 돕거나 민역(民役)을 보충하는 재원으로서 중앙정부에서 사실상 묵인하고 있었다. 은결은 대체로 토호 지주들의 누결로 확보되고 있었기 때문에 수령은 그들의 누결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전 때에 당연히 이러한 은결을 조사·보고해야 했지만 수령들은 읍의 수입이 줄어들거나 혹은 전직 수령이 죄를 입을 것을 염려하여 보고하지 않았다. 토호들의 누결은 결국 빈농들에 대한 백징(白徵), 즉 세금을 낼 이유가 없는 사람에게도 억지로 세금을 내게 하는 폐단으로 이어졌다.
한편 지방관은 양안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토지를 은결 또는 은여결(隱餘結)이라는 명목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은여결도 양안에 기록된 토지와 똑같이 거두어들이고 그 수취액을 각 군현의 재정이나 지방관의 재량에 따른 비용에 충당하였다. 따라서 지방 수령은 은여결이 공식적인 원장부 결수로 파악되어 표면에 드러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대동법 성립 이전까지 조선에서 ‘지방 재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범주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크게 달랐다. 완전하지는 않아도, 지방 각 군현에서 집행되는 회계가 중앙정부가 점검하는 공적 영역에 포함된 것은 대동법이 성립된 이후였다. 그 전에도 각 군현은 행정적·군사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았지만, 그것들을 위한 재정적·제도적 뒷받침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그것에 따른 경비는 제도 밖에서 마련되어야 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은결이었다. 은결은 비록 중앙정부에 의해서 공식화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공적인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자연히 많은 부패를 동반하였다.
은결은 실제로 경작하면서도 국가의 파악에서 빠져나간 땅이었으므로 탈세가 가능한 토지였다. 대부분 토호나 서리들이 전결세(田結稅)를 중간에서 가로채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때로는 지방관이 관청의 수입을 늘리려고 조작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전국적으로 양전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여 은결이 크게 증가하였다. 당시 전결세의 수취는 군현 단위의 총액제(總額制)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은결이 된 토지에 부가될 전결세가 일반 농민의 토지에 부가되어 농민의 몰락을 촉진하였다. 이에 정부 관료들은 은결을 찾아 모으기 위해서 양전을 실시할 것을 거듭 논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토호층과 지방관청의 이속들은 양전을 반대하였다. 그 결과 보통의 경우 “양전을 하더라도 토호의 겸병이나 간활한 서리의 은닉은 모두 살피기 어렵다.”고 하거나 “이름 하여 개량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사리(私利)를 도모하는 단서가 될 뿐이고 원망하는 폐단만 덧붙일 뿐이다.”라는 말들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였고, 그 때문에 양전의 시행이 어려웠던 것이다.
변천
대동법이 시행되기 이전, 공물(貢物)을 현물로 납부하던 공납제(貢納制)에서 지방관청이 불시에 내려오는 과외의 역에 어떻게 대처하였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17세기 중반, 비록 적법은 아니어도 은결이 그 역할을 하였다. 조정도 은결이 수령의 치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비비로 기능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대동법의 실시와 더불어 각종 은결에 대한 정리 역시 불가피하였다.
은결은 조선전기부터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양전이 정기적으로 행해지지 않고 전세수취가 비총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더욱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권세층이 토지를 사사로이 점유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으나, 후기로 내려올수록 지방관리의 불법·부정행위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은결이 계속 증가하여 국가 재정이 크게 줄면서 전제(田制) 자체가 붕괴될 지경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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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섭, 『(증보판)한국 근대 농업사 연구(상): 농업 개혁론·농업 정책』, 일조각, 1984.
김용섭, 『(증보판)한국 근대 농업사 연구(하): 농업 개혁론·농업 정책』, 일조각,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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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철, 「반계 유형원의 전제 개혁론과 그 함의」, 『역사와현실』 74, 2009.
을해정식(乙亥定式)
정의
1695년(숙종 21) 절수의 방식에 의하여 폭발적으로 늘어난 면세결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 취한 조치.
개설
절수(折受)는 주인 없는 땅[無主地]이나 황무지[陳荒地]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점차 민전을 침탈하는 양상을 띠어 백성의 원망이 거세지고 국가 재정에도 곤란함이 초래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마침내 ‘을해정식’을 제정하여 절수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면세결 확대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을해정식은 기존의 절수제를 폐지하는 대신, 돈을 주고 토지를 매입하도록 하는 급가매득제(給價買得制)와, 궁방·아문에 민전의 수조권만을 이양한 민결면세제를 채택하였다. 아울러 절수지의 규모를 제한하고, 새로이 궁방전을 택정(擇定)할 경우 지역의 경제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한 후에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을해정식의 제정으로 궁방은 물론 군문·아문이 누리던 각종 특혜가 크게 제한받게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왕조 정부는 미개간지·무주지 등에 대하여 절수를 허용해 주거나, 입안(立案)의 형태로 불하하여 궁방의 재정원으로 삼게 하였다. 궁방은 토지뿐만 아니라 어염(魚鹽)·시장(柴場) 등도 비슷한 방식으로 확보하였으며 여기에는 면세와 면역의 혜택이 주어졌다. 궁방전의 폭발적 증가와 이로 인한 면세지의 확대는 국가 재정을 곤란하게 하는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더구나 원칙적으로 절수가 허용된 황무지·무주지 등이 꾸준한 인구 증가와 계속된 개간사업으로 인해 추가로 확보하기 어려워지자, 이제는 민전을 침탈하는 양상이 노골화되었다. 민전의 침탈은 주로 갑술양안(甲戌量案)상에 무주지나 공한지로 기재되어 있다는 핑계로 폭력적·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민전 소유자가 정규의 전세보다 낮은 지대를 기대하며 스스로 궁방에 투탁하는 형태도 있었다. 어떠한 형태이건 조선후기 절수 관행은 국가 재정을 좀먹고 민생을 멍들게 하는 중대한 요인으로 지목되었다.
왕조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절수제에 대해서는 현종조 이래 면세 결수의 제한이나 혁파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본격적인 개혁책이 마련된 것은 숙종대에 접어들어서였다. 숙종대에는 절수 문제를 둘러싸고 오랜 기간에 걸친 지리한 논의가 계속되었다. 이는 왕과 왕실, 궁방, 각 아문은 물론 정파별로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었다. 1695년(숙종 21) 을해정식은 그러한 논의의 마무리였다.
을해정식의 핵심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숙종실록』 21년 7월 23일][『숙종실록』 21년 7월 28일][『숙종실록』 21년 8월 3일]. 우선, 절수제의 금지와 급가매득제의 적용이었다. 이제 각 궁방은 매입을 통해 토지를 확보해야만 하였다. 급가매득제의 채용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토지 상품화의 진전을 배경으로 토지 확보 과정이 절수라는 형태의 정치적인 수단에서 경제적인 방법으로 전환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비록 일부 궁방의 경우에는 매우 제한적인 조치만 취해졌지만, 종래 사적 권력의 자의적인 운영에 의하여 국가 재정이 감축되고 민원을 불러일으켰던 절수가 을해정식을 통해 불법으로 규정된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였다. 아울러 민결면세제(民結免稅制)가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다. 민결면세제는 궁방의 소유권과 무관한 민전에서 호조수세분(戶曹收稅分)만을 궁방이 이양받은 형태였다. 이것은 후에 무토(無土)의 출현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둘째, 궁방 재정에 대한 대체 재원을 마련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절수지의 규모를 대략 200결 단위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절수라는 방식 자체를 부정하였음에도 이전의 절수지를 일거에 혁파할 수 없는 것은 이들 궁방에 대하여 별도의 재정지원이 곤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방의 절수지 규모를 줄이고 일정 규모로 제한함으로써 궁방전의 확대를 막고 이후 궁방 재정의 통제 근거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셋째, 절수 폐지의 후속 조치로 선혜청과 군자감에서 일정 액수의 재원을 지원하여 장토(庄土)를 매입하도록 한 점이었다. 이는 재무관서인 호조와 선혜청의 재정 부담이 가중되는 부작용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사재정적 성격이 강한 궁방이 재무관서의 지원에 의해 운영되도록 함으로써 왕실 재정에 대한 재정 통제의 근거를 마련하는 측면도 있었다.
넷째, 신궁(新宮)에서 장토 200결을 택할 경우, 잔읍(殘邑)이 아닌 대읍(大邑)에 설정하여 읍세(邑勢)가 약한 지역을 과중한 조세 부담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였다. 또 문권위조 여부를 면밀히 조사하여 민원의 소지를 줄이고자 하였다. 더구나 신결(新結)을 택할 경우 이를 해당 지역 수령과 함께 답험(踏驗)하도록 하여 군현제적 질서에 궁방 재정을 일정하게 포섭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을해정식은 국가 재정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던 왕실 재정에 대해 적극적인 규제책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재정 운영의 사적인 요소를 크게 탈각시킨 중요한 조치로 평가되었다. 왕권의 후광을 업고 있던 왕실 궁방은 물론 여타 군문·아문 등에도 적지 않은 파급을 가져와 이들이 행사하던 독립적인 재정 운영권도 함께 제한을 받기 시작하였다.
참고문헌
송양섭, 『조선후기 둔전 연구』, 경인문화사, 2006.
이영훈, 『조선후기사회경제사』, 한길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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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식, 「17세기 농지개간과 지주제 전개」, 『한국사연구』 9, 1973.
실록연계
『숙종실록』 21년 7월 23일
『숙종실록』 21년 7월 28일
『숙종실록』 21년 8월 3일
응가분(應加分)
정의
매년 고정된 액수를 가분하여 그 모조를 지방 아문의 경비로 사용한 환곡.
개설
가분(加分)은 이미 환곡을 분급한 뒤에라도 종자곡과 식량이 부족하면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한 후 실시하는 것이었다. 18세기 후반 들어 지역 간의 곡식이 고르게 분포하지 않아 항상적으로 가분이 시행되었다. 이때 연례적으로 가분하는 것을 응가분이라 하였다. 응가분은 각 아문의 비용 조달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보유한 환곡의 절반은 나누어 주고 절반은 창고에 보관한 반류곡(半留穀)에 대해서 시행되었다. 이러한 표면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응가분은 실제로는 새로운 환곡을 창설한 것과 마찬가지 운영 구조를 가졌다.
1810년대 후반 이후 각 지역의 가분제도가 응가분으로 변화하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환곡 총량의 감소로 인하여 1833년(순조 33) 이후에는 일부 지역에서만 가분이 시행되고 1853년(철종 4)에는 중지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8세기 후반 들어서 가분이 일상화되면서 해마다 일정액을 가분하는 응가분이 나타나고 있었다. 균역법 실시 이후 어염선세가 균역청에 이관되자 경상도 포항창의 운영비용을 위하여 매년 2,000석의 가분을 요청하였다. 특히 정조 연간에는 강화, 경상도 우병영 등에 비용 조달을 목적으로 응가분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렇듯 각 아문에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매년 일정한 액수를 가분을 하는 것이 관례화되었고, 이것이 응가분의 전형을 이루게 되었다. 응가분은 각 아문의 비용 조달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며, 반류곡 중에서 시행되었다.
내용
응가분은 반류반분의 환곡 중에서 시행하므로 자연히 비축의 성격이 강한 환곡 중에서 시행되었다. 또한 각 지역의 상황에 따라 비용 조달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 용도 또한 다양하였다. 1797년(정조 21) 당시의 응가분은 210,000여 석으로 파악되었다. 호조·상진청·비변사 세 기관의 환곡이 응가분 액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역별로는 황해도가 전체 액수의 약 절반 정도를 차지하였다.
응가분은 환곡 원곡에서 매년 일정 액수를 추가로 분급하여, 그 모곡을 각기 재정에 충당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므로 비록 반분질(半分秩)의 원곡에 속해 있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환곡을 창설한 것과 마찬가지 운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는 새로운 명목의 환곡을 창설하고도 문서에는 반분질에서 응가분의 형식으로 기재한 것은 조선왕조 정부가 호조·상진청·비변사 세 기관의 곡식을 기본적으로 반류반분의 형식으로 운영하려 했던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후기의 환곡 폐단 중의 하나가 환곡의 종류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인데, 이는 환곡이 재정에 보충되는 한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각 명색의 환곡은 그 모곡의 용도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재정 수요가 발생하면 별도의 환곡을 창설하거나, 세 기관의 환곡 중에서 응가분의 형식으로 재원을 조달하였다.
변천
응가분은 구체적 액수를 표시하는 경우는 드물고 단지 응가분 외 몇 석이라고 가분을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응가분이 시행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19세기 자료에서 응가분의 액수가 파악되는 지역은 충청도에서 쌀로 환산하여 1,200석 혹은 여러 곡식 2,000여 석, 평안도 34,600석, 전라도 쌀로 환산하여 7,000석으로 나타났다. 또한 19세기 초반 경상도의 가분 액수는 연간 100,000석 정도로 파악되었으며, 그중 응가분이 88,000석 이상이었다.
1810년대 후반부터 각 지역에서는 가분의 액수가 고정되었다. 매년 일정한 액수를 가분한다는 것은 가분제도가 재정 보충을 위한 응가분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뜻하였다.
가분제는 1833년 이후 충청·황해도·수원 등 일부 지역에서만 시행되는 변화를 보였다. 그 후에 환곡 총액의 감소와 허곡화 현상 그리고 각종 폐단에 따라 1853년에 가분 중지의 조치를 초래하였다. 즉, 곡총의 점진적인 감소가 가분을 시행할 여분의 곡식조차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응가분도 중지되었을 것이다.
의의
각 아문에서 비용 조달을 목적으로 매년 일정한 액수를 가분한 응가분은 비록 반분질의 원곡으로 환곡을 가분하였지만, 실재로는 새로운 환곡을 창설한 것과 마찬가지 운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반류반분의 환곡에서 응가분의 명목으로 추가로 환곡 분급이 이루어졌으므로 환곡의 분급률을 높이고 있었다. 이는 환곡에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 강화되는 것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서 환곡의 감축으로 인하여 가분제의 폐지와 함께 응가분도 사라졌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사정고(四政考)』
문용식, 『조선후기 진정과 환곡운영』, 경인문화사, 2001.
문용식, 「19세기 전반 환곡 진휼기능의 변화과정」, 『부산사학』 19, 1990.
오일주, 「조선후기의 재정구조의 변동과 환곡의 부세화」, 『실학사상연구』 3, 1992.
오일주, 「조선후기 국가재정과 환곡의 부세적 기능의 강화」 연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84.
이천둔(伊川屯)
정의
강원도의 군사적 요충지인 이천 지역에 유민을 모집하여 개간하고 이들을 군사로 활용하기 위하여 만든 둔전.
개설
강원도 이천(伊川)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연결하는 요충지로서, 17세기 중엽 유민(流民)들을 모집하여 화전(火田)을 개간하고 관이 소유권을 인정해 주는 형식으로 둔전이 설치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천둔이었다. 이천둔은 유민적 계층을 모집하여 이를 경작하게 하여 자립성을 제고시킨 후 궁극적으로 국역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졌다. 이는 당시 전형적인 모민설둔(募民設屯)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8세기 후반 정부는 이천둔에 대해 정총제(定摠制)를 채택하여 안정적인 수취액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천둔의 수취 과정에서 면·리의 조직을 중심으로 한 향촌 내 제 세력의 역할이 두드러졌으며 민전과 같은 작부제(作夫制)도 확인되었다.
내용 및 변천
강원도 이천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이천수령은 무신이 임명되었다. 이천 지역에는 애초에 훈련도감 둔전이 설치되었으나, 숙종초 남인정권에 의해 도체찰사로 이속된 후 첨사진이 되었다가 혁파되고 다시 이천부에 흡수·통합되었다[『숙종실록』 6년 4월 7일]. 17세기 이후 조선 정부는 군문·아문의 재정 확보는 물론 전쟁으로 발생한 대량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유민을 안집시키려는 목적에서 둔전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천둔전에는 유민으로 파악되는 부류가 집단적으로 취락을 형성하여 거주하였다. 1681년(숙종 7) 호적에 의하면 이천둔민은 2,000명 정도의 민호(民戶)에 남정(男丁)이 6,000여 명이었는데, 그중 유민이 6할을 차지하였다. 유민호(流民戶)와 원민호(元民戶)는 직역 구성상 차이를 보였다. 둔전민은 신역을 매개로 소속 기관에 강하게 예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천둔전은 피역자의 소굴이 되면서, 둔전민 역시 초기 예속민이나 유민적 존재에서 일반 농민과 사실상 동일한 존재로 변모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이천둔전 역시 정총제(定摠制)의 수취 방식을 채택하였다. 매해 농사 형편에 구애받지 않는 안정적인 수취액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둔전에 대한 수취는 수령이 주관하였는데, 이때에는 풍흉에 따라 수취량을 조절함으로써 수취 과정상 그리 큰 문제가 야기되지는 않았으나 몇 가지 무리한 이유로 결수 평가가 215결에서 330결로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정총제 하의 이천둔전 수취 과정에서는 면·리의 조직을 중심으로 한 향촌 내 제 세력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이천둔전은 민전과 마찬가지로 작부제(作夫制)에 의한 수취가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토호들이 호수(戶首)의 역할을 하면서 중간 수탈을 자행하는 이른바 양호(養戶)의 문제도 나타났다. 이 때문에 19세기 접어들어 호수는 혁파되고 결당 8냥씩 총 1,612냥 1전 4분을 거두었다. 둔전의 수취는 수령의 주관 하에 면·리의 조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기본단위는 리(里)였다.
참고문헌
송양섭, 『조선후기 둔전연구』, 경인문화사, 2006.
김우철, 「17세기 후반 강원도 이천의 직역 분포와 속오군의 편성실태」, 『군사』 36, 1998.
실록연계
『숙종실록』 6년 4월 7일
장인철계(匠人鐵契)
정의
궁궐과 정부 각사의 영건과 수리에 들어가는 철물을 바치는 공계인.
개설
조선전기에는 국용으로 쓸 정철(正鐵)·수철(水鐵)·유철(鍮鐵) 등의 철물을 마련하기 위하여 산지에 철장(鐵場)을 설치하고 주민을 모집하여 제련한 뒤 공물로 거두어 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납 방식은 현지 주민들에게 역이 편중되는 문제를 야기하였기 때문에, 세조대부터 쌀과 포로 대신 거두는 관행이 나타났다[『세조실록』 10년 12월 7일]. 이후 철산지에서도 정철을 본색(本色)으로 상납하지 않고 쌀로 대납하는 경향이 17세기까지 확대되었다. 대동법은 현물을 쌀로 대신 바치는 관행을 공식화한 조치로, 조선후기에 본색 상납을 대신하여 철물 조달을 전담하는 공인층이 대두하게 되었다. 장인철계(匠人鐵契)는 애초에 철물을 제련· 가공하는 기술을 지닌 장인들로서 대동법 시행 이후 철물 조달을 전담하는 공계인으로 전환된 자들로 여겨진다.
내용 및 특징
장인철계는 선공감과 같은 정부관서에 소속되어 공물가를 받던 주인층과 달리, 호조와 선혜청으로부터 직접 공물가를 받아 역사(役事)에 필요한 철물을 전문적으로 조달하던 공계인이었다. 장인철계에 관한 기사는 『조선왕조실록』에 1건이 나왔다. 『비변사등록』과 『승정원일기』에도 장인철계는 19세기 중반부터 그 실체가 확인되었다.
『비변사등록』의 기사에 따르면, 1852년(철종 3)에 행해진 공시인순막(貢市人詢瘼)에서 장인철계인들은 호조에서 받는 값이 시가(市價)의 절반에 불과하여 손해가 심하다는 이유로 비변사에 상언(上言)을 올렸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장인철계인들의 조달 업무가 과중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선공감 정철계인에 비하면 사정이 조금 나았던 것으로 보인다. 시기가 조금 뒤이긴 하지만, 1882년(고종 19) 1월 공시인순막 당시 선공감에 속한 정철계 공인들이, 철물이 품귀하여 해마다 밑진다고 하면서 장인철계의 예대로 공물가(貢物價)를 받게 해 달라고 청하는 일이 있었다. 이런 사정으로 보아 철물을 조달하는 공계인들 사이에서도 관서의 처우가 달랐던 것으로 생각된다[『고종실록』 19년 1월 8일].
변천
장인철계는 갑오개혁기에 호조로 재정기구가 단일화되고 선혜청을 중심으로 한 공물 조달 체계가 해체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유승주, 『朝鮮時代鑛業史硏究』,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3.
안병우, 「조선전기 鐵物의 생산과 유통」, 『동방학지』 119, 2003.
오미일, 「18·19세기 새로운 貢人權·廛契 창설운동과 亂廛活動」, 『奎章閣』 10, 1987.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전삼세(田三稅)
정의
조선후기 토지에 부과된 전세·대동세·삼수미세.
개설
조선후기 토지에 부과되는 전결세의 기본 세목은 전세(田稅)·대동세(大同稅)·삼수미세(三手米稅)·결작(結作)·모량미(毛糧米)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전세·대동세·삼수미세이며, 이들을 전삼세(田三稅)라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전세는 결당 4두(斗)를 거두었다. 전세에 대한 규정은 논일 경우 쌀로, 밭일 경우 콩[太]으로 세금을 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과정에서는 논밭의 구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세로 거두어들인 쌀·콩은 다음 해 6월까지 경창(京倉)에 수납하도록 하였으며, 포(布)·돈(錢)으로 거둔 경우 충청도·전라도·황해도는 다음 해 3월까지, 경상도·강원도는 다음 해 4월까지 호조(戶曹)에 상납하도록 하였다.
조선전기의 전세는 세종대 제정된 공법(貢法), 즉 토지의 비옥도에 따르는 전분6등(田分六等)과 당년의 작황에 따르는 연분9등법(年分九等法)에 따라 1결당 최하 4두에서 최고 20두까지 징수하였다. 이 법은 매우 복잡하여 당시에도 제대로 운용되지 못하고 있다가 16세기 이후에 들어와 크게 변하였다. 풍흉에 관계없이 토지의 등급에 따라 연분을 일률적으로 적용하여 1결당 4두 내지 6두을 징수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이는 1634년(인조 12) 『속대전』에 법제화되어 수세액이 해마다 1결당 논은 쌀 4두, 밭은 콩 4두로 확정되었다. 이 영정법의 실시로 조선후기의 전세는 정액세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대동세는 대동법에 의하여 공물을 전세의 형태로 부과한 것이었다. 대동법에 의하면 토지 1결당 일정한 양의 쌀을 부과·납입하게 하거나 지역에 따라 포(布)·무명(木)·돈(錢)으로 대신 납부하도록 하였다. 이때 토지에 부과된 양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달랐으나,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 외에는 대체로 쌀 12두 정도였다. 그런데 산군(山郡)과 연읍(沿邑) 간에 쌀값이 차이가 난다든지 혹은 조창(漕倉)까지의 과다한 운반비로 실질적인 역(役)이 커지게 되는 점 등을 고려하여 쌀 외에도 포·무명으로 부과하거나, 잡곡 등으로의 대납(代納), 혹은 돈으로의 대전납(代錢納)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대동세는 중앙 상납분과 지방 유치분으로 나뉘었다. 지방 유치의 사용 내역은 곳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지방의 경비와 상납 물종의 수송비로 사용되었다. 이는 종전에는 지방 관료의 봉급·요역·잡세(운송비 포함)로 설정된 것이었다. 대동법 이후 지방 유치분은 병선(兵船)의 개조(改造)·개삭(改槊), 특산물을 왕에게 바치는 방물진상(方物進上), 사신(使臣)이나 관찰사(觀察使) 접대 비용[使客支供], 그 밖의 비용 등에 활용되었다. 또한 그 나머지는 규정 외로 부과되는 각종 역의 대비재원[科外別役責應之資]으로 보관되었다. 그런데 18세기 중반 이후 중앙 상납분은 점차 증가하고 지방 유치분은 상대적으로 감소하였다.
삼수미는 1593년(선조 26)에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며, 훈련도감에 소속된 삼수병, 즉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를 양성할 재원을 조달하기 위하여 신설된 세목이었다. 호조가 이를 주관하였고,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6도에서는 1결당 쌀 2두 2승(升)을 세금으로 거두었다. 1634년(인조 12) 충청도·전라도·경상도는 1두를 감하여 1두 2승을 수납하게 하고, 경기도는 1636년 병자호란 이후 면제되었다. 1760년(영조 36)에 삼수미는 각종 면세전(免稅田)에도 부과 징수하도록 하였다. 삼수미는 태미(太米) 또는 전미(田米)를 수납하도록 하였으나 황해도에는 별수미(別收米)라는 명목으로 1결당 쌀 3두를 더 거두었다.
변천
삼수미와 대동세는 논밭 구분 없이 같은 양의 부담을 지지만 전세는 논과 밭의 부담 내용이 달랐다. 즉, 논은 쌀로, 밭은 황두(黃豆)를 내도록 법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대개는 논과 밭을 구별하지 않고 결세(結稅)를 책정하여 같은 양의 부담을 지게 하였다. 또한 위태와 조세로 내는 콩 세태(稅太) 모두 콩 2석(石)을 쌀 1석으로 환산하여 상납할 수 있게 한 규정을 악용하여, 밭에서도 논과 같은 양의 쌀을 거두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각종 전결세를 현물이 아닌 화폐로 징수할 때에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콩의 값[太價]과 쌀값[米價]을 같은 액수로 징수하기도 하였으며, 각 군현에서 결가(結價)를 책정할 때에 논과 밭을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백성의 저항을 야기하였고,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전반 충청도 서원현(西原縣)에서는 그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8결을 단위로 경작지를 묶어 1부(夫)로 하되, 1부 내의 논과 밭을 각각 6결, 2결로 고정시켜 그 비율을 일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 경작지를 부(夫) 단위로 묶는 과정에서는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속대전(續大典)』
고석규, 『19세기 조선의 향촌 사회 연구: 지배와 저항의 구조』,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2: 조선 후기의 정치』, 국사편찬위원회, 1997.
이철성, 『17·18세기 전정 운영론과 전세 제도 연구』, 선인, 2003.
정선남, 「18·19세기 전결세의 수취 제도와 그 운영」, 『한국사론』 22,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