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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고승, 무학대사(無學大師) (中)
Ⅱ. 무학대사의 불교계 위상과 선(禪)사상
1. 불교계에서의 위상
가. 출가스승과 문도
무학의 출가스승은 고려 말의 소지선사(小止禪師), 법장국사(法藏國師), 지공대사(指空大師), 그리고 나옹선사(懶翁禪師) 등이 있다. 무학은 18세 나이에 소지선사에게 출가하여 스님으로서의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후에 용문산 부도암에서 정진하며 법장국사에게 사사받고 「능엄경(楞嚴經)」을 공부하다 득도하였다. 그 후 3년간 원나라로 건너가 지공대사와 나옹선사를 찾아 참례하고 도(道)를 인가 받게 된다.
이 가운데 무학은 지공대사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준 것은 지공대사의 대표적인 문도인 나옹선사였다. 무학은 1354년(공민왕 3) 1월, 원나라 연도(燕都)의 법원사(法源寺)에서 나옹선사를 참례하고 선(禪)의 경지를 인정받았다. 그 후 무령(霧靈), 오대산(五臺山)을 유력한 후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 이르러 나옹선사와 재회하고 두어 해 머물면서 사사받았다. 그리고 귀국하기 전에 연도(燕都) 광제사(廣濟寺)에 머물고 있던 나옹선사를 찾아가 하직인사를 드리고, 귀국 이후에도 스승과 제자로서의 연(緣)을 이어갔다. 따라서 무학은 나옹선사로부터 사상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무학은 나옹의 대표적인 계승자이자 조선 초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왕사로서 다른 승려나 유생들과도 교류가 활발하였고, 또 원나라에서 3년간 유학한 바 있으므로 원나라 사람들과의 교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무학의 도반(道伴)으로는 축원지천(竺元智泉), 달공본적(達空本寂) 등을 들 수 있다.
축원지천은 무학과 함께 원나라에 유학하여 지공대사와 나옹선사에게 사사받은 인물이며, 비록 무학이 명성을 날리며 왕사로서 종풍(宗風)을 떨친 것에 비해 홀로 조용히 은둔하며 수행하다 입적하였는데, 후에 태조에 의하여 국사(國師)로 추존되고, 비석이 세워지기도 했다. 또 달공본적은 나옹선사가 입적한 후에는 무학과 더불어 나옹선사의 대표적인 법사가 되었다.
그리고 무학은 신조(神照), 조구(祖丘) 등 천태종 세력과 제휴하여 새 왕조창업에 동참하였으므로 천태종 승려들과도 교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무학이 입적한 후에는 그를 추종했던 문도들이 불교계를 주도해 나갔다. 그의 문도들은 무학 법맥의 전승 과정과 그의 불교사적 위상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무학의 문도로는 「태조실록」에 신총(信聰), 신당(信幢) 등 여러 명의 이름이 등장하나 이들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또 후에 영조 때 발간된 「해동불조원류(海東佛祖源流)」에는 함허기화(涵虛己和), 퇴은장휴(退隱莊休) 등 17명이 실려 있다. 이 밖에 진산(珍山), 무학의 행장을 쓴 조림(祖琳), 회암사 주지였던 조선(祖禪), 무학이 혁명의 뜻을 가진 것을 알고 있었다는 혜징(惠澄) 등도 무학의 문도였다고 하는데, 이들에 대해서도 역시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이들 가운데는 뛰어난 문도와 그 맥을 이은 법손(法孫)들이 불교계에 두각을 나타내 세조대 무렵까지 조선 불교계를 이끌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무학이 교류했던 인물로는 승려 외에도 유생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 가운데는 태조의 이복형제이자 조선왕조의 1등 개국공신으로 무학에게 서신을 보내고, 또 무학이 입적한 후에는 태종의 명을 받들어 무학의 유골을 회암사에 봉안한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1348 ~ 1408)와 태종의 불교 탄압이 본격화될 시기에도 무학의 법호와 비석을 세울 것을 주청한 평원군(平原君) 조박(趙璞) 등을 들 수 있는데, 아무튼 무학이 이성계를 도와 왕조를 창업하는 과정에서 많은 유생들과도 교류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나. 성보문화재 및 사적
왕사의 지위까지 오른 무학의 경력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조성한 성보문화재(聖寶文化財)는 적지 않으리라 생각되지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조차도 기록으로만 확인되는 것이 대부분이며, 실제로 무학이 조성했는지 확인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는 정사류(正史類)에서는 보이지 않고 문집류(文集類)라든가 시대가 매우 떨어진 시기의 기록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무학이 친히 남긴 자취와 관련된 흔적을 사찰, 전각, 불상, 탑 등의 성보문화재와 일반적인 유물, 유적 등으로 나눠 살펴보기로 하자. 그가 남긴 이러한 자취, 흔적은 대부분 사찰 주변의 수행 및 기도처가 적지 않겠지만 기록이나 실제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어 아쉬움이 크다.
(1) 성보문화재
(가) 전각(殿閣)
무학이 머물렀던 사찰은 전국에 걸쳐 70여 개소에 달하며 이 가운데 그가 창건 또는 중창하였다고 알려진 사찰은 다음에 보듯이 30여 개소에 달한다.(창건 13개소, 중건 16개소)
창건사찰 13개소
서울 성동구 청연사(靑蓮寺), 성북구 봉국사(奉國寺)와 개운사(開運寺), 구로구 호압사(虎壓寺)와 사자암(獅子庵), 경기도 시흥 자운암(慈雲庵), 강원도 이천(伊川) 보살사(菩薩寺), 경북 상주 동해사(東海寺), 경남 함양 은신암(隱身庵), 전북 임실 해월암(海月庵), 전북 무주 북고사(北固寺)와 안국사(安國寺), 함남 신흥 개심사(開心寺)와 보문암(普門庵).
중수사찰 3개소
경기도 안양 삼막사(三幕寺), 경남 함양 용추사(龍湫寺)와 합천 몽계사(夢溪寺)
* 1864년에 편찬된 「大東地志」(대동지지)에 황매산과 허굴산 사이에 ‘夢溪寺’(몽계사)가 보이고, 또 조선후기의 승려 鏡庵應允(경암응윤, 1743~1804)이 지은 「鏡庵集」(경암집)에도 ‘夢溪寺’란 사찰이 있다고 한다 .
중창사찰 11개소
서울 종로구 일선사(一禪寺)와 청용사(靑龍寺), 경기도 파주 보광사(普光寺), 의정부 회룡사(回龍寺), 포천 흥룡사(興龍寺), 강원도 철원 심원사(深源寺)와 남암(南庵), 충남 공주 용화사(龍華寺와 신원사(新元寺), 당진 영탑사(靈塔寺), 경남 의령 유학사(留鶴寺).
중건사찰 2개소
경기도 용인 백련사(白蓮寺), 충남 천안 성불사(成佛寺)
그리고 이 가운데 무학이 조성했다고 알려진 사찰 건물은 경기도 안양 삼막사(三幕寺)의 대웅전과 망해루, 경남 함양 용추사(龍湫寺)의 만세루, 충남 공주 신원사(新元寺)의 영원전 등이 있다.
(나) 불상
무학이 조성하여 모신 불상은 서울의 성북구 봉국사(奉國寺). 종로구 승가사(僧伽寺)와 소림굴, 경기 용인의 백련사(白蓮寺)와 의정부의 회룡사(回龍寺), 충남 서산의 간월암(看月庵) 등이 있다.
(다) 탑과 성물(聖物)
무학이 남긴 탑으로는 경기도 장단의 용봉산에 있었던 심복사(心腹寺)에는 그가 중창할 때 10층 다보탑(多寶塔)을 대웅전 앞에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이 탑에 대해서 알려진 바 없다.
그가 쓰던 물건으로는 경기도 장단군 화장사(華藏寺)에는 고려 말의 삼화상인 지공. 나옹. 무학이 이 절에 주석할 때 썼던 수저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존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또한 무학의 고향인 경남 합천 황매산의 몽계사(夢溪寺)에는 불상 앞에 그가 중국에서 가져온 향로 3좌가 있었다고 하는데, 언젠가 1좌는 도둑맞고, 2좌는 잃어버렸다고 한다.
(라) 토굴
무학과 관련이 있는 토굴은 안변 석왕사(釋王寺), 의정부 회룡사(回龍寺), 서울 천축사(天竺寺), 철원 심원사(深源寺) 등 몇 군데가 있다. 무학이 이 곳 토굴에서 수도를 하거나 새 왕조를 위한 기도를 하였기에 세부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안변 석왕사 토굴
무학이 10여 년간 수도를 하고 여기에서 이성계가 앞으로 왕이 될 꿈을 해석하였다는 곳이다. 이 때문에 釋王寺(석왕사)가 창건되었는데, 청허당 (淸虛堂) 휴정(休靜)의 「설봉산석왕사기」(雪峯山釋王寺記)에 자세하게 보인다. 즉
설봉산 토굴 속에 어떤 이상한 스님이 세상에 숨어 이름을 감추고 솔을 먹으며, 칡베옷을 입고 사는데 말과 행동이 비범합니다. 그런데 얼굴이 검기 때문에 흑두타(黑頭陀) 로 불립니다. 그는 앉아서 움직이지 않은지가 이제 아홉 해입니다.
「정조실록」(正祖實錄)에도 마찬가지의 내용이 보이고 있어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태조가 왕업을 일으킬 조짐이 있는 꿈을 꾸고 토굴 속에 있는 神僧(신승) 무학에게 가서 그 뜻을 풀어보게 하였다. 즉위한 뒤에 토굴이 있던 곳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석왕사(釋王寺)라 하였다.
석왕사 토굴에는 무학의 초상이 모셔져 매년 춘추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보이나 그 이후 토굴에 대해서 알려진 바 없다.
의정부 회룡사 토굴
회룡사(回龍寺)에 전하는 기문에 의하면, 무학은 정도전(鄭道傳)의 시기(猜忌)를 피하여 무학토굴에서 거처하였다고 하며, 1384년(우왕 10)부터 3년간 이성계와 함께 국가창업을 위하여 이성계는 석굴암(石窟庵)에서, 무학은 무학굴(無學窟)에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석굴암은 절에서 북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도봉산 자락에 있고, 절의 서쪽 12㎞ 정도 떨어진 곳에 천연동굴로 이루어진 무학굴이 있다.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이 절에 전하는 바 조선 태조 4년(1395)에 무학이 도봉산 동쪽 기슭에 암자를 지었는데 지금의 무학굴이며, 이 토굴 안에 부도 1기가 있었으나 수년 전에 석굴암 앞으로 옮겼다고 한다.
위의 석굴암과 무학굴은 각각 상석굴(上石窟)과 하석굴(下石窟)로 불리며, 무학과 이성계의 이야기가 얽힌 회룡사의 자취를 딴 「회룡문화제」(回龍文化祭)가 1985년부터 매년 10월 의정부시의 향토문화제로 열리고 있다.
서울 천축사 무학동
서울시와 경기도에 걸쳐 있는 도봉산의 최고봉인 만장봉 아래 남쪽 기슭에 있는 천축사(天竺寺)에는 태조 이성계가 1398년(태조 7)에 함흥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들러 기도하였다는 태조대왕헌성대(太祖大王獻誠臺, 일명 관음굴)가 있다. 이 절에 무학이 머물렀다는 기록은 없으나 그와 관계가 깊은 태조가 머물렀다는 사실로 보아 무학도 이 절에 머무르지 않았나 생각된다. 더욱이 이 절에서 서쪽으로 2㎞ 정도 떨어진 곳에 무학의 굴이 있다는 무학동이 있다. 이 무학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무학이 이성계와 더불어 천축사에 머물면서 수행했던 곳이 아닐까 한다.
철원 심원사 무학토굴
강원도 철원 보개산 심원사(深源寺)와 그 부속암자인 남암(南庵)을 중창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남암의 기슭 골짜기에 있는 토굴에서 한때 수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학이 심원사에 머물면서 풀로 옷을 삼고 나무를 먹이로 삼아 지냈다는 사실이나 토굴 터 가까이 무학의 비가 있었다는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2) 합천의 유적
무학의 고향인 합천군 대병면에 보이는 그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을 소개하고 있는 「합천댐수몰지」(陜川댐水沒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는 무학샘, 무학탄, 무학감나무, 무학바위 등이 있었는데, 이곳의 대부분 유적과 유물은 1980년대 중반 합천댐을 건설할 무렵 그와 관련된 흔적이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데, 오늘날 합천댐 가까운 악견산 기슭의 황강변 도로가에는 ‘무학왕사출생사적지’(無學王師出生史蹟址)’라는 표지석이 이 일대가 무학대사와 관련된 장소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곳과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무학대사가 세운 사찰터가 지표조사 발견되고, 또 무학대사 출생지로 추정된다며 합천군 대병면 대지리 산 2번지 일대 약 4만㎡를 ‘무학대사 유허지(遺虛址)’란 이름 아래 경상남도 기념물 제269호(2008.12.11.)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무학사(無學寺) 7층석탑
무학대사가 원나라에 유학했다 귀국하여 고향의 어머니를 찾아뵙고 난 후 악견산 기슭에 「무학사」(無學寺)란 절을 창건하였는데, 그 후 언젠가 폐사되었고 7층 석탑만 남아 있었다 하나 이 또한 현재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무학샘(無學샘, 일명 호박샘)
구리방 아래쪽 황강 가운데 호박같이 생긴 샘〔泉〕이 있는데, 이것을 ‘무학샘’이라 한다.
주위에는 강이고 옆에는 용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호박처럼 생기고 바위 속에서 샘이 솟는다고 하여 ‘호박샘’이라고도 한다. 이 샘은 무학이 어머니를 위해 숟가락으로 파서 만든 샘이라고 하는데 옛날에는 깊어서 밑바닥이 보이지 않았다고 하나 지금은 모래와 자갈로 차 있다. 더운 여름에는 호박샘의 물맞이를 하면 땀띠가 없어지고 더위를 잊는다는 약샘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고 전한다.
무학탄(잠냉이너드렁)
구리방 맞은편에 돌더미 너드렁이 있는데, 이것을 잠내이너드렁 혹은 무학탄, 황석탄이라고 한다. 홍수가 나서 물이 불어도 육안으로는 이 너드렁의 물이 보이지 않는다. 무학의 어머니가 구리방 집에서 가출한 아들 무학이 오기를 기다리며 동녘을 바라보면 뿌옇게 흐르는 대평개울의 물줄기가 아들이 오는 자취 같아 온 밤을 지새우고 아침에 보면 온다는 아들의 흔적은 없고 황토물 줄기만 남아, 기다리는 어머니 마음을 허전하게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무학이 어느 날 밤 악견산과 봉화산의 돌을 모두 작두로 썰어서 개울 바닥을 돌여울로 만들어 어머니가 자식을 기다리다가 허전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너드렁을 무학탄(無學灘) 또는 잠냉이너드렁이라 부른다.
무학감나무
무학이 어미니를 모시고 구리방에서 살 때의 일이다. 감나무 두 그루를 심으면서 무학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나무를 심어 놓고 가니, 감나무가 죽거든 제가 죽은 줄 알고, 감나무가 죽지 아니하면 제가 살아 있 는 줄로 알아주십시오.”
흔히 ‘무학나무’로 전해 내려오던 큰 감나무는 이곳에 합천댐이 건설되며 도로부지로 편입되면서 없어지고 그 인근지역인 도로가에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 그 감나무의 후손나무라고는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합천댐 아래 도로변에 무학이 심은 감나무의 후손(?) 한 그루가 있고
그 앞에 ‘무학왕사출생사적지’(無學王師出生史蹟址)’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무학바위
합천댐 둑에서 동남쪽으로 300m 지점에 자리한 큰 바위로, 바위 위쪽이 비스듬하며, 무학대사의 천서(天書) 3권이 묻혀 있다고 한다. 왼손으로 바위 위에 돌을 던져 떨어지지 않으면 아들 못 낳는 사람이 영특한 아들을 낳는다고 전해져 지나는 길손들이 올려놓은 작은 돌〔石〕들이 수두룩하다.
다. 불교사에서의 위상
17세기 말엽부터 18세기 초엽에 쓴 여러 불교의식집(佛敎儀式集)에서 무학대사는 그의 스승인 지공대사, 나옹선사와 더불어 ‘3화상(和尙)’으로 부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10년에 지어진 「제반문」(諸般文) <조사공양문조>(祖師供養文條)에는 무학과 그의 스승인 나옹을 봉양대상으로 삼았고, 1670년에 지어진 「선문조사예참문」(禪門祖師禮懺文)과 1694년에 지어진 「선문조사예참문장화」(禪門祖師禮懺文藏話)에서도 신라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조사(祖師)와 지눌(知訥)을 기록한 후 여말선초의 고승으로서 이 3화상을 들고 숭앙하였다. 그 후에 나온 여러 불교의식집에서도 봉양대상 또는 증명법사(證明法師)로 존숭되고 있는 등 무학은 그의 스승인 지공, 나옹과 함께 높은 위상을 가지며 조계종단을 이끌어 갔다.
불교에서는 고승들의 초상화는 영정(影幀), 진영(眞影) 또는 조사도(祖師圖)라고도 불리며 주요 예경대상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진영의 대상에는 한 종파의 종시조(宗始祖) 또는 국가나 사회적으로 명성을 떨친 고승, 그리고 그 밖에 사찰의 창건주(創建主)나 중창주(重創主) 그리고 각 사찰에 오랫동안 체류한 고승들도 그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무학은 한국 불교사상 마지막 왕사였으며, 지공. 나옹과 더불어 불교계의 ‘3화상’이라는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진영은 전국의 여러 사찰에 봉안되고 있다.
오늘날 무학의 진영이 봉안된 곳은 여주 신륵사(神勒寺), 남양주 불암사(佛巖寺), 순천 선암사(仙巖寺), 양산 통도사(通度寺), 양주 회암사(檜巖寺), 의정부 회룡사(回龍寺), 함양 용추사(龍湫寺), 영천 은해사(銀海寺)의 백흥암(白興庵), 서산 간월암(看月庵), 안변 석왕사(釋王寺) 그리고 서울 인왕산의 국사당(國師堂)과 국립중앙박물관 등 10여 곳에서 무학 단독 또는 ‘3화상’이 함께 봉안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무학의 선(禪)사상
가. 영아행(嬰兒行)
무학의 사상을 알아볼 수 있는 저술류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현재로서는 그가 입적한 직후 당시의 문인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그의 비문을 통해서만 그 사상의 흔적을 찾을 수 있고, 사승(師僧)인 지공대사(指孔大師)과 나옹선사(懶翁禪師)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므로 그들의 사상을 추적하여 재구성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우선 그의 회암사 비문에 실려 있는 내용을 살펴보자.
무학대사는 성질이 질박(質朴)하여 문채(文彩)나게 꾸미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하였으며, 스스로 봉양(奉養)하는 것을 박하게 하고, 남은 것은 곧 남에게 베풀어 희사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팔만 가지의 행함 중에서 젓먹이의 행이 제일이 된다”면서 모든 베품을 그〔젖먹이〕처럼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그가 사람을 접하는 데 공손하며, 남을 사랑함이 정성스러움은 지극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힘써서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대체로 그의 천성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문채 나게 꾸미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는 것은 곧 그의 생활이 소박하고 검소하였음을 의미한다. 무학대사의 이러한 생활 자세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이하는 역시 그의 비문 끝 부분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무학대사〔師〕는 道가 우뚝이 높으심이여, 보통 생각할 바가 아니다. 나옹대사〔禪覺〕의 적통이요 태조의 스승이었다. 평상시엔 아이와 같다가 구안(具眼)한 이를 만나면 화살과 칼날이 부딪치듯 버티었다. 옷 한 벌 바릿대 한 개로 겸손하고 겸손하여 스스로 낮추었으나 나라에서 존숭(尊崇)함이 상대가 없었다. 누구가 있는 듯이 삼가고, 나아가 벼슬하며 물러가기도 했는데 그 행동이 구차하지 않았다.(원문 포함 요)
무학은 평상시에는 어리아이와 같이 행동하다가도 안목을 갖춘 이를 만나면 화살과 칼날이 부딪치듯 예리함을 갖고 행동하고, 옷 한 벌 바릿대 한 개로 살아갈 만큼 겸손하여 나라에서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1762년(영조 38)에 쓰여진 「은신암사적」(隱身庵事蹟)에는 무학이 고려 말에 화를 피하여 갈대로 집을 짓고 살았다는 내용이 있으며, 「설봉산석왕사기」(雪峰山釋王寺記)에는 설봉산 토굴에서 솔을 먹으며 칡베옷을 입고 살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또한 무학이 태조의 부름을 받기 전에 고달산 초암(草庵)에서 쇠고잠방이를 입고 남새밭〔채소밭〕에서 살았다는 기록 등에서도 그의 검소한 생활을 살필 수 있다.
또한 무학은 천성이 자신을 봉양하는 데는 박하고 남은 것은 남에게 베풀었으며 사람을 공손히 대하고 나을 정성스럽게 사랑하였다고 한다. 특히 스스로 8만 가지의 행함 가운데 ‘영아행(嬰兒行)’, 즉 갓난아이의 행이 제일이라 하였다.
이 영아행이란 성행(聖行), 범행(梵行), 천행(天行), 병행(病行)과 함께 보살이 수행하는 다서 종류의 행법에 속하는 것으로서, 인(人).천(天).소승(小乘)의 지혜와 행함을 어린아이의 지혜와 행동에 비유한 것이다. 菩薩(보살)이란 깨달음을 구해서 수행하는 구도자를 가르키며,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이러한 갓난아이의 행함에 대해 무학대사가 이야기했다는 사실은 그가 왕사로 책봉되면서 오교양종(五敎兩宗)의 모든 승려와 조정대신들이 참석한 가운데 임금에게 가르침을 설하였던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백성을 보호하기를 갓난아기를 보호하는 것 같이 하라고 당부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무학은 왕이 백성을 갓난아기〔赤子〕처럼 보호하듯 정치를 베풀면 종묘사직이 편안할 것이라 하였다. 건국 혼란기에 처해 사랑과 용서로써 죄지은 자를 풀어주도록 하였다. 무학은 태조뿐만 아니라 신료들에게도 이러한 가르침을 주었다. 「태조실록」에 보면 “서전(書傳 ; 서경書經에 주해를 단 책)에도 어린이를 보호하듯 하라.”는 말을 신료들에게 인용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이는 무학이 「서전」(書傳)에도 강조되고 있는 사실을 찾아내어 불교가 억압받는 상황에서도 불교의 영아행(嬰兒行)을 강조함으로써 유불일치론(儒佛一致論)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그의 문도인 함허당(涵虛堂) 득통(得通, 1376~1433)의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과 「현정론」(顯正論)등의 저술로 체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학이 보살행 가운데 하나인 영아행(嬰兒行)을 특히 강조한 것은 지공대사의 반야사상에서 영향 받은 것이라 추정된다.
나. 臨濟禪(임제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학은 사승인 지공대사와 나옹선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특히 나옹선사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다. 따라서 무학의 선사상은 지공선(指空禪)과 임제선(臨濟禪)으로 크게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무학이 임제선풍을 견지하였다는 것은 우선 그의 행적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즉 그는 혜감국사(慧鑑國師) 만항(萬恒)의 상족제자(上足弟子)로 알려진 소지선사(所止禪師)에게 출가하였고, 용문사 법장국사(法藏國師)에게 사사받으며 「능엄경」(楞嚴經)을 보다가 득도하였다.
또한 원나라에 3년간 체류하면서 2년여 동안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서 머물렀는데, 이때 나옹선사에게 사사 받았던 사실이 그의 비문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다. 무학이 원나라 법원사(法源寺)에 있을 때도 선정(禪定)에 몰입해 있을 때도 밥 먹을 때도 잊었으며, 나옹선사가 그에게 “네가 죽었느냐?”고 물으니 그는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나옹선사가 조주(趙州)의 화두를 꺼내 그와 선문답을 한 사실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나옹선사가 하루는 무학대사와 더불어 섬돌 위에 앉았다가 묻기를, 옛날 조주(趙州)가 首座〔수행승〕와 더불어 앉아서 돌다리〔石橋〕를 보고 묻기를 “이것은 어떤 사람이 만들었느냐?”하니 수좌가 답하기를 “李膺(이응)이 만들었습니다.”하였다. 주(州)가 말하기를 “어느 곳을 향하여 먼저 손을 대었느냐?”하니 수좌가 대답이 없었다. “이제 누가 너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적당히 대답하겠느냐?”하였다. 사(師)가 곧 두 손으로 섬돌을 잡아 보이니, 옹(翁)이 문득 그치고 갔다.
나옹이 조주(趙州)의 돌다리 쌓는 화두를 꺼내 이렇게 그의 선(禪)의 경지를 가늠하였던 것이다. 조주는 80세부터 40년 동안 중국 산동성 조주성(趙州城) 동쪽에 있는 관음원(觀音院)에 머물러 있었다. 이 관음전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유명한 돌다리가 있었다. 어느 날 조주가 그의 수좌와 이 돌다리를 건너다가 화두를 던졌는데, 제자가 답을 하지 못하였다는 화두를 나옹이 무학에게 주었더니 이를 제대로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무학의 깨달음의 경지가 높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무학이 나옹으로부터 임제선풍을 사사 받았던 사실이 확인된다.
이와 같은 내용은 무학이 원나라에 체류할 때 나옹이 내린 게송(偈頌)에서도 찾아지고 있다.
① 서로 아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능히 몇 사람이 되겠느냐.
나와 나는 일가를 이루었구나.
② 도(道)가 사람에게 있으면 코끼리 상아(象牙)가 있는 것 같아서
비록 감추고자 하나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른 날 네가 어찌 남의 앞에 나서는 인물이 되지 않겠느냐.
③ 일상생활을 보니 모든 기틀이 세상과 더불어 다른 데가 있다.
선악과 성사(聖邪)를 생각지 않고 인정과 의리에 순종하지 않는다.
말을 내고 기운을 토할 때는 화살과 칼날이 서로 버티는 것같고
글귀의 뜻이 기틀에 맞음은 물이 물에 돌아가는 것 같다.
한 입으로 손〔客〕과 주인의 글귀를 머금기도 하며,
몸이 불조(佛祖)의 관문(關門)을 통과하였다.
④ 이미 주머니 속에 따로 세계가 있음을 믿어서
동쪽 서쪽에서 삼현(三玄) 쓰는 것을 일임하여 둔다.
누가 너에게 참방(參訪)한 뜻을 묻는 이가 있거든
앞문을 타도(打倒)하고 다시 말하지 말라.
위에서 인용한 자료 ①,②는 무학이 서산 영암사에 머물 때 나옹이 그에게 내린 게송이며, 자료 ③,④는 그가 1356년(공민왕 5) 고려로 귀국할 때 나옹이 손수 종이에 써서 준 게송이다. 위의 게송에서 나타난 화살과 칼날, 손과 주인, 불조(佛祖), 삼현(三玄) 등은 바로 임제선에서 자주 쓰는 화두이다.
손과 주인은 수행자가 선지식(善知識)을 참문했을 때 그들 사이에 오가는 문답 행위를 통하여 선지식의 경지나 수행자의 근기(根機)를 헤아릴 수 있게 하는, 이른바 상량법(商量法)인 사빈주(四賓主)의 하나이다. 불조(佛祖), 화살, 칼날도 임제종의 시설접화기관(施設接化機關)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삼현(三玄)은 삼요(三要), 사료간(四料揀), 사빈주(四賓主), 사갈(四喝) 등과 더불어 많이 쓰이는 화두로 임제선에서 무위진인(無位眞人)의 경지를 삼구로 상징한 것이다.
이러한 무학의 임제선 기풍은 귀국 후의 행적에도 나타나고 있다.
나옹이 신광사(神光寺)에 있으므로 무학도 또한 거기에 머물렀더니,
나옹의 대중 가운데 무학을 꺼리는 자가 있었다.
무학이 이를 알고 떠나니, 나옹이 무학에게 말하기를
“의발(衣鉢)은 말과 글귀보다 못하다.”하고
시(詩)를 지어 무학에게 주며 말하기를
“한가한 중들이 남이니 나니 마음을 일으켜서,
망령되이 옳으니 그러니 하고 말들을 하니 매우 옳지 않다.
산승이 사구(四句)의 송(頌)으로써 길이 뒷날의 의심을 끊는다.”하였다.
그 시구(詩句)에 말하기를 “옷깃을 나누매 특별히 상량(商量)할 것이 있으니
누가 속의 뜻이 다시 현묘(玄妙)함을 알리오.
너희들이 불가하다고 하더라도
내 말은 겁공(劫空)을 꿰뚫고 통하리라.
무학은 양산 원효암에서 나옹을 만난 후 신광사의 주지로 있는 나옹선사를 두 번째로 찾았는데, 나옹선사의 문도 가운데 그를 꺼려하는 자가 있자 신광사를 떠나게 된다. 그 때 나옹선사가 옷과 바릿대는 말과 글귀보다 못하며, 자신과 무학 사이를 떼어놓으려 잘잘못을 따지는 자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니 네 귀의 송(頌)으로 그러한 의심을 끊으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도 그의 임제선의 기풍이 느껴지는데 특히 나옹선사가 자초에게 발우를 전하려 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무학은 송광사에서 나옹선사로부터 발우를 전해 받았으며, 답례로 게(偈)를 지어 사승에게 예를 표하였다. 무학과 나옹선사가 송광사 16국사(國師)와 더불어 18주지(住持)로 일컬어졌으므로 송광사 주지로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참선사풍(參禪社風)인 임제선풍(臨濟禪風)을 띠고 있었다.
그러한 면모는 1376년(우왕 2) 여름 무학은 나옹선사가 주도한 회암사의 중창 낙성식에 참여한 사실로도 다시 확인된다. 역시 비문의 다음 내용을 살펴보자.
병진년〔우왕 2, 1376년〕여름에 나옹이 회암사에 옮겨가서 크게 낙성회를 개설하게 되었다. 급히 편지를 보내어 무학을 불러다가 수좌(首座)를 삼으니, 무학이 극력 사양하였다. 나옹이 말하기를 “많이 주관하는 것이 많이 사퇴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임제(臨濟)와 덕산(德山)도 수좌 소임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하고는 그로 하여금 편실(便室)에 거하게 하였다.
나옹은 회암사 중창 낙성회 때 그를 불러 수좌로 삼으려 했다. 수좌라는 것은 선방(禪房에서 참선하는 승려들을 총지도하는 승려를 말하는데, 그가 이를 사양한 것이다. 이에 나옹은 많이 주관하는 것이 떠나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라 하면서 “임제(臨濟)와 덕산(德山)도 수좌로 삼지 않고 편실(便室)에 거하게 하였다.”는 말을 들어 그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대했던 것이다.
임제(臨濟)와 덕산(德山)은 임제종을 열었던 임제의현(臨濟義玄, ? ~ 867)과 금강경 강의로 뛰어나 주금강이라 불린 덕산선감(德山宣鑑, 778~963)을 말한다. 훗날 임제와 덕산을 두고 “덕산은 방(棒)으로 인간정신을 깨우치고, 임제는 할(喝)로써 무지(無知)를 깨뜨렸다.”고 한다. 방(棒)은 직접 행동을, 할(喝)은 거부의 맹렬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임제의 방(棒)은 번개가 내리치는 듯하였고, 덕산의 할(喝) 소리는 사자의 포효 같아 상대방은 어쩔 수 없이 기(氣)가 꺾이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 무학이 임제선풍을 표방한 것은 1393년 9월에 광명사에서 나옹선사의 괘진불사(掛眞佛事)를 크게 열면서 지은 진영의 찬문(讚文)에서 살펴볼 수 있다.
지공의 일천 칼날과 평산(平山)의 할(喝)이여, 공부선(功夫選)에 뽑혀 임금 앞에서 설법했네. 최후의 신령한 빛 사리(舍利)를 남기어, 삼한(三韓) 조실(祖室)로서 천만년 전하리.
무학의 스승인 나옹이 평산처림(平山處林)의 법(法)을 계승한 것을 천명한 것과 ‘신령한 빛’이라는 단어에서 그가 임제선의 기풍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변계량은 비문 끝 부분 탑명(塔銘)에서 무학의 선풍(禪風)이 임제종풍(臨濟宗風)이었음을 다시 강조하였다.
…대사께서 평상시 거처하실 땐 어린이와 같으나 안목을 갖춘 이를 만나면 화살과 칼날이 부딪치듯 불꽃 튀기네.
이는 무학이 1395년에 회암사에서 「인천안목」(人天眼目) 등 불서류(佛書類)를 간행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이 「인천안목」은 남송(南宋)의 청안조사(靑眼祖師) 회암지소(晦庵智昭)가 중국 선문오가(禪門五家) 조사(祖師)의 유고(遺稿), 잔게(殘偈), 칭제(稱提), 수시(垂示)와 오종강요(五宗綱要)를 수록하여 그의 종풍(宗風)의 특징을 밝힌 책이며, 임제종을 그 첫머리에 두고 임제종의 모든 자료를 종연중개(宗演重開) 선화본(宣和本)에 의지하여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무학이 「인천안목」을 중간하였다는 것은 그가 오가(五家) 중 임제종풍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다. 지공선(指空禪)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무학의 선사상은 임제선풍을 계승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사승인 지공선사의 선(禪)사상에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1356년에 연도(燕都)에 도착하자마자 법원사(法源寺)에 머물고 있는 지공대사를 참례하여 인가받았으며, 한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때문에 그는 여기서 지공대사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무학은 귀국 후 나옹선사와 더불어 몇 차례 지공대사의 추모불사를 행한 바 있으며, 나옹선사와 더불어 지공대사의 유훈을 받들어 삼수양수(三山兩水)의 땅인 회암사를 흥법(興法)의 터전으로 만들었다.
무학은 조선 건국 후 왕사로 책봉되어 지공대사의 도량인 회암사에 대부분 머물면서 지공대사와 나옹선사의 탑명(塔銘)을 주청하여 회암사에 새겼고, 조파도(祖派圖)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1393년 9월에 광명사의 괘진불사(掛眞佛事)에서 지공선사를 드높이는 데 열중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무학이 임제선풍뿐만 아니라 지공대사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았음을 입증한다고 할 수 있다. 불교수행자는 그 규범이라 할 계(戒)를 소홀히 할 수 없는데, 지공대사는 이러한 계(戒)를 강조한 무생계(無生戒)를 주창하였다. 계율(戒律)은 본래 악을 깨고 선을 행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나, 지공대사의 무생계는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하여 계를 지키는 것으로 미망을 끊고 미혹을 없앤다는 철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무생계는 지공대사가 고려에서 번역한 「무생계경」(無生戒經)에 잘 나타나 있다.
지공대사가 설한 「무생계경」은 출가자나 세속인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적용되었으며, 특히 지공대사의 제자였던 나옹선사와 무학에게 전수되었을 것이다. 결국 지공선(指空禪)의 핵심은 반야사상(般若思想)이며 진공사상(眞空思想)에 있는데,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특히 최무상계(最無上戒)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나옹선사에게 무생계법이 전수되었다는 것은 나옹선사가 지공대사로부터 계율을 받았던 데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모습은 나옹선사의 게송(偈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기 전에 잘못되었고 죽은 뒤에 잘못되어
세세생생 거듭거듭 잘못되었으나
한 생각에 무생을 깨달아 내면
잘못되고 잘못됨도 원래 잘못 아니리.
위의 게송의 내용처럼 나옹선사는 무생계 내지는 무생법을 말하였고, 이러한 성향 때문에 「원융부」(圓融府)라는 僧政機構(승정기구)를 두고 현실에 깊이 참여하였던 보우(普愚)와는 달리 선사 본연의 수행에만 몰두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무학은 한때 자신이 나옹선사의 법을 이을 적자(嫡子)라면서 나옹선사의 진영(眞影)을 봉안해 놓고 지공대사의 1천 칼과 평산처림(平山處林)의 가르침에 삼한(三韓) 조실(祖室)에서 천만년을 전하겠다는 내용의 글을 지은 것을 보면, 나옹의 법(法)을 적통으로 계승한 것이 분명하다.
무학이 지공대사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은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나 무학의 가르침을 받고 계(戒)를 받아 술과 고기를 금하게 되었다는 사실 등에서도 찾아진다.
결국 무학은 임제선풍 위에 지공대사의 선(禪)사상을 수용하여 조선 초 불교계의 새로운 선풍(禪風)을 진작시켰던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