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여행 (3) 방편품 제2 (중)
법화경을 함께 배우는 ‘법화경 여행’ 제3회는 ‘<방편품> 제2’ (중)입니다. 이번에는 ‘상(본지 2월 7일자)’에 이어서 <방편품>에서 설하는 법리를 배우겠습니다.
방편(方便),
‘모두가 부처’ 깨닫게 하기 위한 자비의 결정체
■ ‘방편’이란
‘방편’이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거짓말도 하나의 방편’이라는 말이 떠올라 ‘거짓말과 똑같다’고 생각해버리지 않을까요.
불법(佛法)에서 사용하는 방편은 그러한 나쁜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방편’은 부처의 자비를 근저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 ‘방법’을 말합니다.
<방편품>에는 “나는 성불한 뒤로 여러 인연(因緣), 여러 비유를 들어 널리 가르침을 설하고 무수한 방편을 사용해 중생을 이끌고 여러 집착을 멀어지게 하였다”(법화경 107쪽, 통해) 하고 씌어 있습니다.
석존은 깨달음을 열고나서 각자의 기근에 맞춰 성불이라는 ‘목적’으로 이끄는 여러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다시 말해 법화경 이전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진실로 이끌기 위한 ‘방편’이고 ‘사람을 구제하고 싶다’는 석존의 자비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편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법화경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면 진실로 이끄는 방법으로 올바르게 살려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개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방편품>의 ‘방편’은 어떤 의미일까요.
천태대사는 ‘법화문구’에서 방편을 법용방편(法用方便), 능통방편(能通方便), 비묘방편(秘妙方便)의 세 종류로 나누고, ‘비묘방편’이야말로 <방편품>의 방편이라고 말했습니다.
‘법용방편’은 중생의 기근에 맞추어 여러 법을 설하고, 그 법의 작용으로 사람들에게 맞는 공덕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능통은 ‘능히 통한다’는 뜻이고 ‘능통방편’은 신심(信心)에 들어가는 문(門)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다시 말해 법화경 이전의 가르침은 법화경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정직사방편(正直捨方便)”(법화경 144쪽)이라고 씌어 있는 대로 법화경을 설한 뒤는 그 이전의 가르침은 버려야 할 방편이 됩니다.
법화경은 부처가 깨달은 법을 설합니다. 이것은 ‘법용방편’이나 ‘능통방편’과는 전혀 다릅니다. 중생을 부처로 이끌기 위한 방편이면서 그대로 진실이 숨겨져 있어서 ‘비묘방편’이라고 말합니다.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선생님은 “설한 말 자체는 설할 수 없는 진실과 비교하면 ‘방편’이다. 그러나 중생이 그 ‘말’로써 구제되는 것도 사실이다. 자비롭기에 부처가 수자의(隨自意)로 전 민중에게 설한 법화경의 말. 그것이 비묘방편이며, 이미 그것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부처의 지혜와 하나인 방편이다”(‘법화경 방편품·수량품 강의’)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방편품>이 밝힌 제불(諸佛)의 지혜란 ‘제법실상(諸法實相)’이며, 바꾸어 말하면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라는 진실이다. 이 진실을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비묘방편의 ‘비(秘)’이다. 또 중생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묘(妙)’이다. 이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라는 진리에 눈뜨게 하는 가르침이 ‘비묘방편’이다”(‘법화경 방편품·수량품 강의’)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방편’이라는 말은 일체중생을 부처의 경지로 이끌고 싶다는 부처의 대자비가 담긴 결정체입니다.
■ 개삼현일(開三顯一)
개삼현일은 ‘삼승(三乘)을 열어 일승(一乘)을 나타낸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승(乘)’은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이끄는 가르침을 탈것에 비유한 표현으로 부처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삼승은 법화경 이전의 제경에서 밝힌 성문과 연각, 보살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세 종류의 가르침입니다. 일승은 법화경에서 밝힌 ‘유일한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일불승’이라고도 합니다.
<방편품>에서 석존은 “여래는 다만 일불승으로,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시느니라. 다른 승(乘)이 혹은 둘 혹은 셋이 있을 수 없느니라.”(법화경 121쪽) “제불은 방편의 힘으로써, 일불승을 삼승으로 분별하여 설하시느니라”(법화경 124쪽) 하고 말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중생의 관점에서 보면 삼승이라는 별개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의 관점에서 말하면 오직 일불승이 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일불승’이란 전 인류를 부처로 만드는, 전 인류를 ‘개시오입(開示悟入)’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보급판 ‘법화경의 지혜<상>’)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성문을 위한 가르침’ ‘연각을 위한 가르침’ ‘보살을 위한 가르침’이라는 각각의 가르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되기 위한 유일한 가르침’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본래 세운 서원은 일체중생을 나와 같게 하여 다름이 없게 하고자 함이니라. 내가 예로부터 원하던 바와 같이 지금 이미 만족하니, 일체중생을 교화하여 모두 불도에 들게 하겠노라”(법화경 130쪽) 하고 “법화경을 설하므로써 ‘모두 나와 같은 부처의 경지로(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라는 옛날부터 세운 서원은 만족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석존은 “제불의 본래 서원은 내가 행한 불도를 널리 중생에게 또한 함께 얻게 하고자 함이니라”(법화경 138쪽) 하고 부처의 영원한 바람을 계승해 실천하는 보살의 길을 제자에게 외쳤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똑같이 이 길을 걷게 해주고 싶다. 불이의 길을 회득하게 해주고 싶다.’ ― 이것이 부처의 ‘본서원(本誓願)’입니다. 물론 법화경 이전의 삼승도 부처를 믿고 따라왔습니다. 그 나름대로 ‘사제의 길’을 걸어왔겠지요.
하지만 거기에는 ‘나는 나, 부처는 부처’라는 단절된 마음이 있었습니다. 스승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미망(迷妄)을 부순 것이 법화경입니다.
‘사제(師弟)의 길’에서 ‘사제불이(師弟不二)의 길’로 ― ‘개삼현일’은 이렇게 제자의 일념과 제자의 삶을 근저부터 변혁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보급판 ‘법화경의 지혜<상>’)
일체중생을 부처와 똑같은 경애로 이끌고 싶다는 부처의 바람을 자신의 서원으로 하여 행동하는 ‘사제불이’의 길이 바로 법화경의 정신입니다.
개회(開會)
모든 것을 살린다
‘개회’는 법화경 이전의 가르침을 방편으로 하여 진실한 가르침인 법화경에서 올바르게 위치를 부여하여 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디 일승인 것을 삼승으로 나누어 나타내는 것을 ‘개(開)’라고 하고 삼승을 일승으로 통일하는 것을 ‘회(會)’라고 합니다.
이 ‘개회’로 인해 진실의 일부분을 설하는 법화경 이전의 가르침도 법화경으로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성인은 “법화경의 대해에 들어가면 이전권교의 가르침도 퇴박당하는 일은 없다”(어서 377쪽, 통해)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어서 중에서 법화경 이외의 경전 등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법화경으로 올바르게 위치를 부여하여 말법의 어본불 관점에서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경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철학 등 모든 학문도 법화경을 근본으로 삼으면 자유자재로 살려갈 수 있습니다.
‘법화경의 지혜’에서
‘성불즉인간혁명’의 드라마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선생님은 “벌도, 공덕도 방편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미입회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무엇인가 괴로움이 있습니다. 괴로워하는 모습은 지옥계입니다. 그 괴로움이 계기가 되어 신앙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옥계즉불계이고, 그 괴로움은 불계에 이르기 위한 법용·능통방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냐 하면 능통방편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신심하고 나서도 괴로움은 있습니다. 앞이 막힐 때도 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부 신심을 증명하기 위한 괴로움입니다. 비묘방편입니다.
하물며 광선유포를 위한 괴로움이라면, 보살계·소구(所具)의 지옥계, 불계 소구의 지옥계입니다. 이런 존귀한 괴로움은 없습니다. 괴로움이라는 커다란 산에 도전할수록, 이겨낼수록 불계는 강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심이 강하면 마이너스는 즉 플러스이고, 벌도 즉 공덕입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체가 공덕입니다.
지금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일체가 ‘성불즉인간혁명’이라는 금세의 드라마로서 필요불가결한 한 장면, 한 장면입니다. ‘진실(불계)’을 나타내는 ‘방편(구계)’입니다. 이것이 비묘방편입니다.
보급판 ‘법화경의 지혜<상>’ <방편품>
()| 화광신문 : 20/06/12 1353호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