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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규정」 이옥봉
[ 閨情 李玉峯 ]
有約來何晩(유약래하만) 돌아온다 약속하시고 어찌 늦으신가요?
庭梅欲謝時(정매욕사시) 뜰의 매화가 시들려고 해요
忽聞枝上鵲(홀문지상작) 나뭇가지 위의 까치소리 문득 듣고
虛畵鏡中眉(허화경중미) 부질없이 거울 속에서 눈썹 그려요
〈감상〉
이 시는 안방에서 그리워하는 여인의 정을 노래한 것이다.
오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서방님께서 왜 안 오실까? 뜰의 매화가 필 때쯤 집으로 돌아오신다고 하였는데, 벌써 매화꽃이 시들려고 한다. 서방님을 기다리던 어느 날, 매화가지 위에서 문득 반가운 소식을 전해 준다는 까치 소리를 듣고는, 안 오실 줄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로 거울을 펼쳐 놓고 화장을 하고 있다(여기서 ‘허(虛)’는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어 화장을 했더니,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음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쓴 것이다).
이 시에 대해 이덕무(李德懋)는 『청장관전서』에서, “이옥봉의 「규정(閨情)」 시에는, ······하였는데, 모두 멋과 운치가 있다(玉峯詩(옥봉시) ······閨情(규정) 有約郞何晩(유약랑하만) 庭梅欲謝時(정매욕사시) 忽聞枝上鵲(홀문지상작) 虗盡鏡中眉(허진경중미) 皆有情致(개유정치)).”라 평하고 있다.
〈주석〉
〖謝〗 시들다 사, 〖虛〗 부질없다 허
각주
1 이옥봉(李玉峰, ?~?): 선조 때 옥천(沃川) 군수를 지낸 이봉(李逢)의 서녀(庶女)로 조원(趙瑗)의 소실(小室)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한 권의 시집(詩集)이 있었다고 하나, 시 32편이 수록된 『옥봉집(玉峰集)』 1권만이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부록으로 전한다.
「율」 이산해
[ 栗 李山海 ]
一腹生三子(일복생삼자) 한배에서 세 아들을 낳았는데
中男兩面平(중남량면평) 중간 아들 양쪽 얼굴이 납작하구나
不知先後落(부지선후락) 먼저 떨어졌는지 뒤에 떨어졌는지 알 수 없으니
難弟亦難兄(난제역난형) 형이네 동생이네 하기가 어렵구나
〈감상〉
이 작품은 밤을 두고 노래한 영물시(詠物詩)로, 해학적(諧謔的)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시이다.
밤 한 송이에서 세 쪽의 밤이 나왔는데, 가운데 있는 밤은 양쪽이 납작하다. 그런데 땅에 떨어진 것이 세 쪽의 밤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으니, 어느 쪽의 밤을 형이라 하고 동생이라 해야 할지 어렵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이 시에 대해, “아계 이산해가 7살 때 세 톨 밤을 시로 지었다. ······아계는 어린 시절부터 이처럼 기이한 시를 토해냈다(鵝溪李山海七歲時(아계이산해칠세시) 詠一殼三栗曰(영일각삼률왈) ······蓋自髫齕能道奇語如此(개자초흘능도기어여차)).”라 평하고 있다.
각주
1 이산해(李山海, 1539, 중종 34~1609, 광해군 1):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이색(李穡)의 7대손으로, ‘산해’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산해관(山海關)에서 그의 잉태를 꿈꾸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지함(之菡)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글씨는 6세 때부터 썼는데 장안의 명인들이 그의 글씨를 받으려고 모여들었다고 하며 명종에게 불려가 그 앞에서 글씨를 쓰기도 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친지들이 화를 입자 보령으로 이주했다. 그 뒤 이조정랑·직제학·동부승지·대사성·도승지 등을 지냈다. 1578년(선조 11) 대사간으로 서인(西人)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1588년 우의정이 되었는데, 이 무렵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했다. 일찍이 그는 남사고(南師古)와 송송정(宋松亭)에 앉아 서쪽으로 안령(鞍嶺)과 동쪽으로 낙봉(駱峯)을 가리키며 뒷날 조정에 반드시 동서의 당(黨)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전하는데 이는 그가 실제로 동서분당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1589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이해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591년 아들 경전(慶全)을 시켜 정철(鄭澈)을 탄핵하게 하여 강계로 유배시키고, 그 밖의 서인의 영수 급을 파직시키거나 귀양 보내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했다. 1592년 왜적이 침입하도록 했다는 탄핵을 받아 평해에 유배되었다가 1595년에 영돈령부사로 복직되었다. 이후 대북파의 영수로서 1599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 1601년 부원군(府院君)으로 환배(還拜)되었으며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맡았다. 문장에 능하여 선조대 문장 8대가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평해 유배시절에는 수많은 시문을 지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반타석」 이황
[ 盤陀石 李滉 ]
黃濁滔滔便隱形(황탁도도편은형) 누런 탁류 넘실댈 때는 곧 형체를 숨기더니
安流帖帖始分明(안류첩첩시분명) 고요히 흐를 때면 비로소 분명히 나타나네
可憐如許奔衝裏(가련여허분충리) 어여쁘다! 이 같은 치고받는 물결 속에서도
千古盤陀不轉傾(천고반타불전경) 천고에 반타석은 구르거나 기울지도 않았네
〈감상〉
이 시는 반타석을 두고 노래한 것으로, 반타석은 「도산기(陶山記)」에 의하면, “반타석은 탁영담 가운데 있는데, 그 모양이 편편하지는 않으나 배를 매어 두고 술잔을 돌릴 만하다. 늘 큰비를 만나 물이 불면 소용돌이와 함께 물밑으로 들어갔다가 물이 빠지고 물결이 맑아진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盤陀石在濯纓潭中(반타석재탁영담중) 其狀盤陀(기상반타) 可以繫舟傳觴(가이계주전상) 每遇潦漲(매우료창) 則與齊俱入(칙여제구입) 至水落波淸(지수락파청) 然後始呈露也(연후시정로야)).”라 기록되어 있다.
반타석은 큰비가 내려 누런 탁한 물이 흘러내리면 그 형상을 물속에 숨겼다가, 물이 빠지고 물결이 고요히 흐를 때면 다시 그 형상을 분명히 드러낸다(『맹자』에 이르기를, “有孺子歌曰(유유자가왈) 滄浪之水淸兮(창랑지수청혜) 可以濯我纓(가이탁아영) 滄浪之水濁兮(창랑지수탁혜) 可以濯我足(가이탁아족) 孔子曰(공자왈) 小子(소자) 聽之(청지) 淸斯濯纓(청사탁영) 濁斯濯足矣(탁사탁족의) 自取之也(자취지야)”라 한 것처럼, 정치가 혼탁하면 몸을 숨겼다가 맑아지면 다시 나타나는 현실에 대처하는 퇴계의 처신(處身)에 대한 문제이기도 함). 이 같은 거센 물결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반타석이 아름답다(세상이 혼탁하더라도 자신은 이처럼 흔들리지 않겠다는 퇴계 자신의 의지의 표명으로도 볼 수 있음).
〈주석〉
〖盤陀石(반타석)〗 평평하지 않은 돌덩어리. 〖滔〗 물이 넘치다 도, 〖帖帖(첩첩)〗 안온(安穩)한 모양.
〖如許(여허)〗 이와 같음.
각주
1 이황(李滉, 1501, 연산군 7~1570, 선조 3):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搜). 이황의 학문은 주자학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주자의 서간문(書簡文)을 초록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20권은 그가 평생 정력을 바쳤던 편찬물이다. 이황의 성리학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체계화한 개념을 수용하여 이를 보다 풍부히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이(理)를 보다 중시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理)를 모든 존재의 생성과 변화를 주재(主宰)하는 우주의 최종적 본원이자 본체로서 규정하고 현상세계인 기(氣)를 낳는 것은 실재로서의 이(理)라고 파악했다. 이황의 학문·사상은 이후 영남(嶺南)·근기(近畿) 지방을 중심으로 계승되어 학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 영남지방에서 형성된 학통은 유성룡(柳成龍)·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 등의 제자와 17세기의 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를 이어 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 등 한말까지 내려왔다. 근기 지방에서는 정구(鄭逑)·허목(許穆) 등을 매개로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 등 남인(南人) 실학자(實學者)에게 연결되어 이들 학문의 이론적 기초로서 기능했다. 한편 이들의 학통계승은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각 학파·당파의 정치투쟁과 궤를 같이하면서 전개되는데 이들은 남인 당색하에, 이이의 학문을 사상적 기반으로 기호지방에서 성장한 서인과 치열한 사상투쟁·정치투쟁을 벌이며 조선 후기 사상계·정치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
「춘일」 서거정
[ 春日 徐居正 ]
金入垂楊玉謝梅(금입수양옥사매) 금빛은 실버들에 들고 옥빛은 매화를 떠나는데
小池新水碧於苔(소지신수벽어태) 작은 못의 새로운 물은 이끼보다 푸르다
春愁春興誰深淺(춘수춘흥수심천) 봄 시름과 봄 흥취 어느 것이 깊고 옅은가?
燕子不來花未開(연자불래화미개) 제비가 오지 않아 꽃이 피지 않았네
〈감상〉
이 시는 봄 경치를 읊은 시로, 역대 선집(選集)에 거의 모두 선재(選載)되어 있으며 중국의 전겸익(錢謙益)이 편찬한 『열조시집(列朝詩集)』에도 수록되어 서거정의 시명(詩名)이 해외에도 떨치게 한 작품이다.
노란 버들에 금빛이 반짝이고 추운 겨울에 피었다 봄이 오자 흰 매화가 지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눈이 녹아 작은 못에 고였는데 이끼보다 푸르다. 나른하고 무료한 봄의 시름과 봄이 와서 느끼는 봄의 흥취는 어느 것이 더 깊은가? 봄이 오지 않아 꽃이 피지 않은 것이 시름이니, 머지않아 제비가 오면 꽃은 필 것이요, 그러면 시름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며, 흥이 일 것이다.
평탄한 벼슬살이를 했던 서거정(徐居正)이기에 다가오는 봄은 고울 것이요, 그러한 봄의 여유로움 또한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는 특이하게도 근체시(近體詩)에서 꺼리는 반복된 글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하나의 구(句)에서 대(對)를 이루는 구중대(句中對)를 활용하기도 하였다(금입수양(金入垂楊)과 옥사매(玉謝梅), 연자불래(燕子不來)와 화미개(花未開)).
조선 전기의 서거정·강희맹·이승소(李承召) 등의 관각문인(館閣文人)들은 화려한 수사와 세련된 감성을 위주로 시를 창작하였다. 문학에 있어 실용적(實用的)인 측면을 강조했던 이들이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인 취향을 드러내는 것은, 왕정(王政)의 분식(粉飾)과 대명(對明) 외교의 필요성으로 인해 기교적(技巧的)인 시문(詩文)의 창작이 요구되었고, 한미한 출신에서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어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사람으로서의 엘리트 의식이 귀족적인 성향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저작이 위의 시이다.
이에 대해 홍만종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사가 서거정은 대제학 자리를 오래도록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명성이 누구보다 성대했다. 그러나 평자들이 그를 중시하지 않은 것은 그의 재주가 화려하고 넉넉한 데만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徐四佳久典文衡(서사가구전문형) 聲名最盛(성명최성) 而不爲評家所重(이불위평가소중) 蓋以才止於華贍而已(개이재지어화섬이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서거정(徐居正)은 관각체(館閣體)를 풍미한 사람으로 정조(正祖)의 『홍재전서(弘齋全書)』 「일성록(日省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의 관각체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 이후 춘정(春亭) 변계량(卞季亮),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등이 역시 이 문체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근고(近古)에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 서하(西河) 이민서(李敏敍) 등이 또 그 뒤를 이어 각체가 갖추어졌다(我國館閣體(아국관각체) 肇自權陽村(조자권양촌) 而伊後如卞春亭徐四佳輩(이이후여변춘정서사가배) 亦以此雄視一世(역이차웅시일세) 近古則李月沙南壺谷李西河(근고칙이월사남호곡이서하) 又相繼踵武(우상계종무) 各體俱備(각체구비)).”
〈주석〉
〖謝〗 물러나다 사, 〖苔〗 이끼 태
각주
1 서거정(徐居正, 1420, 세종 2~1488, 성종 19):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권근(權近)의 외손자.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文風)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端宗) 폐위와 사육신(死六臣)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金時習)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문학저술을 남겨 조선시대 관각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디딤돌을 이루었다. 그의 저술서로는 객관적 비평태도와 주체적 비평안(批評眼)을 확립하여 후대의 시화(詩話)에 큰 영향을 끼친 『동인시화(東人詩話)』, 간추린 역사·제도·풍속 등을 서술한 『필원잡기(筆苑雜記)』, 설화·수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이 있으며, 관인(官人)의 부려호방(富麗豪放)한 시문이 다수 실린 『사가집(四佳集)』 등이 있다. 명나라 사신 기순(祁順)과의 시 대결에서 우수한 재능을 보였으며 그를 통한 『황화집(皇華集)』의 편찬으로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독좌」 서거정
[ 獨坐 徐居正 ]
獨坐無來客(독좌무래객) 홀로 앉아 찾아오는 손님 없이
空庭雨氣昏(공정우기혼) 빈 뜰엔 빗기만 어둑어둑
魚搖荷葉動(어요하엽동) 고기가 요동쳐 연잎이 움직이고
鵲踏樹梢翻(작답수초번) 까치가 밟아 나무 끝이 출렁댄다
琴潤絃猶響(급윤현유향) 거문고 눅었어도 줄에 아직 소리 있고
爐寒火尙存(노한화상존) 화로는 차가워도 불은 여전히 남아 있네
泥途妨出入(이도방출입) 진흙길이 출입을 방해하니
終日可關門(종일가관문) 종일 문 닫아 두자
〈감상〉
이 시는 가을에 가랑비가 내리는 어느 날 홀로 마루에 앉아서 지은 것이다.
가을날 찾아오는 손님이 없기에 혼자 마루에 앉아 있자니, 사람이 보이지 않는 텅 빈 뜰에는 어둑어둑 비가 내릴 기미다. 연못을 보니 고기가 요동을 쳤는지 연잎이 움직이고, 시선을 돌려 나무를 보니 까치가 금방 날아갔는지 나무 끝이 출렁댄다. 비가 온 탓으로 거문고 줄이 눅눅하여 소리가 날 것 같지 않은데 퉁겨 보니 아직 소리가 나고, 화로의 불을 손으로 만져 보니 식었어도 헤집어 보니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 가을비가 내려 진흙길이 되었으니(진흙길은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없게 제한하는 현실을 뜻함), 손님이 출입하기에 방해가 되어 찾아올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하루 종일 문을 닫아 두는 것도 괜찮겠다.
〈주석〉
〖搖〗 흔들다 요, 〖踏〗 밟다 답, 〖梢〗 나무 끝 초, 〖翻〗 날다 번, 〖潤〗 젖다 윤, 〖爐〗 화로 로(노),
〖尙〗 여전히 상, 〖泥〗 진흙 니(이), 〖關〗 닫다 관
각주
1 서거정(徐居正, 1420, 세종 2~1488, 성종 19):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권근의(權近) 외손자.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文風)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端宗) 폐위와 사육신(死六臣)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金時習)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문학저술을 남겨 조선시대 관각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디딤돌을 이루었다. 그의 저술서로는 객관적 비평태도와 주체적 비평안(批評眼)을 확립하여 후대의 시화(詩話)에 큰 영향을 끼친 『동인시화(東人詩話)』, 간추린 역사·제도·풍속 등을 서술한 『필원잡기(筆苑雜記)』, 설화·수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이 있으며, 관인(官人)의 부려호방(富麗豪放)한 시문이 다수 실린 『사가집(四佳集)』 등이 있다. 명나라 사신 기순(祁順)과의 시 대결에서 우수한 재능을 보였으며 그를 통한 『황화집(皇華集)』의 편찬으로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무위」 이언적
[ 無爲 李彦迪 ]
萬物變遷無定態(만물변천무정태) 만물은 변천하여 정해진 모양이 없으니
一身閑適自隨時(일신한적자수시) 이 한 몸 한적하여 스스로 때를 따르네
年來漸省經營力(년래점성경영력) 근래 점점 작위(作爲)의 힘이 줄어드니
長對靑山不賦詩(장대청산불부시) 오래 청산을 대하고도 시를 짓지 못하네
〈감상〉
이 시는 도학자(道學者) 이언적의 학자적인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시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정해진 형태가 없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니, 이 한 몸 역시 변화 속에 있는 것이므로 한적하게 지내며 때의 변천을 따르련다. 근래 들어 점점 경영하는 힘, 즉 작위(作爲)의 힘이 줄어드니(작위(作爲)는 출세나 명예를 탐하는 것, 글을 꾸미는 것 등등을 의미함), 오래 청산을 마주하고도 작위(作爲)의 힘이 줄어들어 시를 짓지 못하고 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이 시에 대해, “회재 선생의 시에 ······라고 했는데, 말의 뜻이 매우 높아 구구한 시를 짓는 사람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晦齋先生詩曰(회재선생시왈) 萬物變遷無定態(만물변천무정태) 一身閑適自隨時(일신한적자수시) 年來漸省經營力(년래점성경영력) 長對靑山不賦詩(장대청산불부시) 語意甚高(어의심고) 非區區作詩者所能及也(비구구작시자소능급야)).”라 평하고 있다.
각주
1 이언적(李彦迪, 1491, 성종 22~1553, 명종 8):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迪). 자는 부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에게 배웠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인동현감·사헌부지평·이조정랑·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했다. 1530년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몰려 향리인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시강관에 겸직 발령되고, 교리·응교 등을 거쳐, 1539년에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후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인종이 죽자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서계십조(書啓十條)」를 올렸다. 이해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과 이기(李芑)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소백주」 황진이
[ 小栢舟 黃眞伊 ]
汎彼中流小栢舟(범피중류소백주) 저 중류에 떠 있는 작은 잣나무 배
幾年閑繫碧波頭(기년한계벽파두) 몇 해나 한가로이 푸른 물가에 매었던가?
後人若問誰先渡(후인약문수선도) 뒷사람이 만약 누가 먼저 건넜냐고 묻는다면
文武兼全萬戶侯(문무겸전만호후) 문무 모두 갖춘 만호후라 하리라
〈감상〉
이 시는 비유를 통해 임에 대한 기다림과 과거에 존재했던 임에 대한 추억을 노래하고 있다.
저 중류(현실을 비유)에 떠 있는 잣나무로 만든 작은 배(시인 자신에 비유)는 몇 해나 한가롭게 타는 사람 없이 푸른 물가에 매어 있었던가(임을 만나지 못한 것이 오래됨)? 후세 사람 중에 만약에 누가 먼저 그 배를 타고 건너갔느냐고 묻는다면(내가 사랑한 임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문(文)과 무(武)를 겸비한 높은 관리였다고 대답할 것이다.
〈주석〉
〖栢舟(백주)〗 단단한 나무인 잣나무로 만든 배로, 『시경(詩經)』에 “柏舟(백주) 共姜自誓也(공강자서야) 衛世子共伯蚤死(위세자공백조사) 其妻守義(기처수의) 父母欲奪而嫁之(부모욕탈이가지) 誓而弗許(서이불허) 故作是詩以絶之(고작시시이절지)”라 하여, 후에 남편이 죽어도 시집가지 않겠다는 것에 대한 맹세로 쓰임.
〖汎〗 뜨다 범, 〖萬戶侯(만호후)〗 식읍(食邑)이 만호(萬戶)인 후로, 높은 벼슬아치.
각주
1 황진이(黃眞伊, ?~? 조선 중종대 개성의 기생): 본명은 진(眞), 기명(妓名)은 명월(明月)이다. 박연폭포·서경덕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컫는다. 재색을 겸비한 조선조 최고의 명기이다.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가곡에도 뛰어나 그 음색이 청아했으며, 당대 가야금의 묘수(妙手)라 불리는 이들까지도 그녀를 선녀(仙女)라고 칭찬했다. 황진사의 서녀(庶女)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개성의 관기(官妓)가 되었다. 15세 때 이웃의 한 서생이 황진이를 사모하다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영구(靈柩)가 황진이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말이 슬피 울며 나가지 않았다. 황진이가 속적삼으로 관을 덮어 주자 말이 움직여 나갔다. 이 일이 있은 후 기생이 되었다는 야담이 전한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 활달한 성격, 청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 이름을 날렸다.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 송공대부인(宋公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노래를 불러 모든 이의 칭송을 들었고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 성격이 활달해 남자와 같았으며, 협객의 풍을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다. 30년간 벽만 바라보고 수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정의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천금을 가지고 유혹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나, 서경덕이 처사(處士)로 학문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시험하다가 그의 높은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서경덕을 사모했다. 거문고와 술·안주를 가지고 자주 화담정사를 방문해 담론하며 스승으로 섬겼다. 종실(宗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보다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소세양(蘇世讓)이 황진이와 만나 30일을 살고 이별하는 날 황진이가 작별의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을 지어 주자 감동하여 애초의 30일만 산다는 장담을 꺾고 다시 머물렀다고 한다.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년, 자기 집에서 3년, 모두 6년을 같이 살고 헤어졌다. 풍류묵객들과 명산대첩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죽을 때 곡을 하지 말고 고악(鼓樂)으로 전송해 달라, 산에 묻지 말고 큰길에 묻어 달라, 관도 쓰지 말고 동문 밖에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게 하라는 등의 유언을 했다는 야담도 전한다. 임제가 평안도사가 되어 부임하는 도중 황진이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면서 지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