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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묘호(廟號)
정의
왕의 사후 신주를 모신 사당의 이름이자 왕의 호칭.
개설
조선시대에 재위했던 27대의 왕은 저마다 고유의 왕명을 지니고 있다. 묘호(廟號) 혹은 종호(宗號)라고 지칭되는 왕명은 엄격히 말하면 일종의 시호(諡號)이다. 묘호라는 명칭은 말 그대로 사당의 이름이다. 묘(廟) 자 앞에 시자(諡字) 한 글자를 붙인 태묘(太廟)니 중묘(中廟)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태묘·중묘는 본래 태조묘(太祖廟)·중종묘(中宗廟)라 칭해지던 것으로서, 종계(宗系)를 나타내는 조와 종을 뺀 용어이다. 그래서 태조나 중종을 묘호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당에 모신 위패에 쓰일 경우에는 ‘태조대왕신위(太祖大王神位)’니 ‘중종대왕신위(中宗大王神位)’가 된다. 이 묘호가 역사서의 본기(本紀)에서 왕명의 제일 앞에 놓이게 됨에 따라 점차 그 왕을 가리키는 칭호 곧 왕명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묘호의 시자는 시법(諡法)에 따라 결정되었다. 조 혹은 종 앞에 붙는 ‘시’는 시법의 원리에 따라 정해졌다. 따라서 묘호는 시자 한 자와 종계를 나타내는 한 자를 합성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종계를 나타내는 한 글자는 조와 종을 일컬으며, 그 앞에 붙는 한 글자가 시이다. 그리고 조와 종의 구분 기준은 가계의 계승 원리인 종법(宗法)과 예제(禮制)인 조공종덕(祖功宗德)이었다.
내용 및 특징
묘호의 연원을 살펴보면, 『사기(史記)』「은본기(殷本紀)」에서 성탕(成湯)의 적장손인 태갑(太甲)을 태종(太宗)이라 칭하였고 태무(太戊)가 은을 부흥시키니 그를 중종(中宗)이라 칭하였으며, 은도(殷道)를 재부흥시킨 무정(武丁)에 대해서는 사당을 세워 고종(高宗)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사물기원(事物紀原)』에서도 이에 대해 처음으로 종묘의 이름을 썼다고 하였다.
『예기(禮記)』를 보면 종법의 조·종의 의미가 잘 설명되어 있다. “별자(別子)는 조(祖)가 되고 별자의 후예는 종(宗)이 되며, 별자의 아들을 계승하면 소종(小宗)이 된다.”는 것이다. 천자의 적자는 천자의 위(位)를 계승하나, 그 지자(支子)들은 별자로서 분봉되어 분지(分支)된 가족의 조가 될 뿐 아니라 동시에 각 나라의 조가 되었다. 곧 태조는 처음으로 봉해진 임금이므로 시조는 태조로 불리고 그를 계승한 소(昭)·목(穆)은 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법에 따라 묘호가 결정되는 것은 제통(帝統)에 있어서이지, 제후의 왕통에서는 종호를 사용하지 못하였다.
한편 혈연관계의 친소에 근거하여 분봉되어 왕통의 계승 관계가 결정되는 것과는 달리, 공덕을 기준으로 왕호를 결정하는 예제도 중국 고대에 생겨났다. 이것이 소위 조공종덕의 원리이다. 『사물기원』을 보면, “왕이 공(功)이 있으면 조요, 덕(德)이 있으면 종이다. 유우(有虞) 때 처음으로 고양(高陽)이 조가 되고, 요(堯)가 종이 되었다.”고 하였다. 주(周)나라 이전의 조·종에 대한 후대의 주소(注疏)를 보면, “무릇 조란 창업하여 세세로 전한 데서 나온다. 종은 덕이 높아 존숭받아서 그 묘(廟)를 옮기지 않는다. ……조는 조에 공이 있고, 종은 종에 덕이 있어서 그 묘를 세세로 허물지 않는다.”라고 하여, 조공종덕의 관념이 체계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조와 종의 관념은 혈연관계를 넘어서 정치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된다. 즉 조와 종은 왕의 공과 덕을 후세인이 평가하여 묘호로 삼을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공의 비중을 높여 창업에 버금간다고 평가될 때에는 조를, 유덕자로서 국가를 수성(守成)한 공에는 종을 묘호로 삼는 제도가 생겨났던 것이다.
조·종의 묘호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한(漢)나라 때였으며, 황제의 지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후한(後漢) 때부터인 듯하다. 『후한서(後漢書)』는 상종(上宗)한 황제의 경우에 존호를 제일 앞에 써서 「현종효명제기(顯宗孝明帝紀)」·「숙종효장제기(肅宗孝章帝紀)」라 한 것이다. 이러한 본기의 기술 체제는 황제를 묘호로 부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묘호 제도와 더불어 당대(唐代)에 와서 확립되었다.
묘호는 시법에 따라 결정되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묘호는 시호의 범주에 포함된다. 시법의 연원은 중국 고대 주나라까지 소급된다. 『사기』에 기록된 시법해(諡法解)를 보면, “옛날에 큰 공이 있으면 좋은 이름을 내려 칭호를 삼았다.”고 하였다.
시호는 본래 서로 의미가 다른 시와 호의 합성어이다. 시는 행위의 자취요, 호는 공을 나타낸다. 즉 시는 생전의 행적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칭호라 할 것이다.
『오경통의(五經通義)』에서도 ‘有德則善諡 無德則惡諡’라 하고, 또 ‘善有善諡 惡有惡諡’라 하였다. 따라서 시에는 죽은 이의 생전의 행적의 선악을 살아있는 이들이 평가하여 후손들의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포폄(褒貶)의 의미가 있었다. 시를 들으면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묘호가 쓰이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시대였다. 신라의 왕명은 고유 왕호 앞에 혁거세(赫居世)·남해(南解)·유리(琉璃) 등의 이름을 붙였는데, 지증왕(智證王)이 죽은 후 신라 최초로 시호를 올렸다. 이후 법흥왕(法興王)이라든가 진흥왕(眞興王) 등 모든 왕들은 시호로서 왕칭(王稱)하였다. 그런데 신라의 왕호 가운데 유일하게 종호를 사용한 왕이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태종의 묘호 추상(追上)은 삼국 통일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흥미를 끄는 사실은 태종의 묘호 추상이 참월(僭越)한 것이라 하여 당나라의 문책을 받았다는 점이다. 태조라는 용어는 진흥왕순수비 중 마운령비(摩雲嶺碑)와 황초령비(黃草嶺碑) 그리고 김인문비(金仁問碑)에 나온다.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시호를 사용하여 시기적으로 신라보다 훨씬 앞섰다.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東明王)이 죽은 후에 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2·3대 왕은 각각 ‘호위유리명왕(號爲琉璃明王)’, ‘호위대무신왕(號爲大武神王)’이라 하였다. 이를 선호후시제(先號後諡制)에 의거해보면, 동명성왕이라 할 때의 동명성은 시요, 왕은 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무신왕은 한 광무제(光武帝)가 그 왕호를 회복해주었다고 하고, 장수왕(長壽王)에게는 위(魏) 효문제(孝文帝)가 강왕(康王)이라고 사시(賜諡)하였다. 종호를 칭한 왕은 제6대 왕인 태조대왕(太祖大王)이 유일하였다. 묘사(廟社)의 건립과 이전에 관한 기사도 간혹 보이고 있으나, 이러한 호칭들이 사당의 명칭인지 그렇지 않으면 왕명으로 동시에 쓰였는지는 불분명하다.
백제는 B.C. 18년(백제 온조왕 1)에 동명왕묘를 세웠다. 2대 왕인 다루왕(多婁王)과 그 후의 여러 왕들이 시조 동명묘를 배알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왕의 사후 호나 시를 올렸다거나 장사처에 대한 기록조차 없는 것이 신라나 고구려와 다른 점이다. 그러다가 501년 동성왕(東城王)이 죽자 드디어 시호를 올리고, 이후의 역대 왕들은 시에 왕칭을 하였다.
고려는 삼국시대의 왕칭을 계승하지 않고 종호를 사용함으로써 독자적인 예제적 국가 질서를 운영하였다. 송(宋)이나 거란과의 관계에서 동아시아 질서의 전형적인 책봉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으나, 왕건(王建)을 태조로 그를 계승하는 역대 왕들은 원(元)나라 지배 이전까지 조·종을 묘호로 사용하는 예제가 정착되어 있었다. 이는 중국 당나라 제도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원나라가 간섭하면서 묘호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충렬왕(忠烈王)부터 중국의 사시가 단행되었던 것이다. 원나라의 사시를 왕호로 삼은 것은 고려와 원이 군신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현(李齊賢)과 이색(李穡)은 종을 왕이라 고쳐서, 종호를 칭한 충렬왕 이전 왕들의 묘호를 모두 왕으로 바꾸어 기록하였다. 그 이후 정도전(鄭道傳)도 고려 역대 왕들의 종호를 모두 왕으로 바꾸었다. 이들은 고려나 조선이 중국에 대해서 제후국이라는 예제적 신분 질서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조선 건국 후 유교의 명분론에 입각하여 예치의 국가 질서를 구현하고자 한 건국 세력들은 예적(禮的) 질서관을 근본으로 묘호와 시호를 다루고자 하였다. 그것은 ‘천자사시(天子賜諡)’라는 예제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묘호의 추상은 태조의 4대조를 종묘에 모시면서 왕으로 칭하였다가 얼마 후 조로 고쳐 올린 것이 처음이었다. 4조의 비도 마찬가지로 모두 비(妃)로 제주(題主)되었다.
그런데 세종 연간에 이르러 중국의 사시를 쓸 것인가, 조선의 독자적인 사시(私諡)인 묘호를 쓸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제기되었다. 정종 사후의 묘호 논의와 『고려사(高麗史)』 개수(改修) 및 성종 연간의 『여지승람(輿地勝覽)』 편찬 과정에서 이 문제가 제기되었다. 정종의 묘호는 세종과 허조(許稠) 등의 주장에 따라 명나라에서 사시한 ‘공정(恭靖)’으로 왕칭하였다.
태종이나 세종은 사시(私諡)를 참칭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고려사』 개수 당시, 그리고 익조(翼祖)와 목조(穆祖)의 시호 논의에서도 “고려에서 참람하게 (종호를) 일컬은 것을 태종께서 싫어하여 모두 (왕칭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정왕에게 종호를 올리지 않은 이유는 태조에서 시작되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공정왕이 아닌 태종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이 왕의 훙서(薨逝)라든가 사서의 편찬 등에는 상호(上號)를 예제 원리에 맞게 적용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보다 깊이 연구하여 제도적으로 확립시킨 때는 세종대로 『시법총기(諡法總記)』 등이 이때 편찬되었다. 따라서 조선초기에 이미 경전을 통한 시법의 이해와 제정 원리, 그 의미 등 전반적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역대 왕들의 묘호는 시법에 따라 시자를 결정하였다. 성종과 중종, 인종처럼 시자를 놓고 심각하게 논란을 벌일 정도로, 대행대왕(大行大王)의 생전의 행적을 상고하여 짓는 시법의 본래 취지를 살리고자 노력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생전에 선호하던 시자를 올리기도 하였는데, 예종·명종·영조 세 왕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묘호의 결정 과정에서 왕과 신하, 정치 세력 상호 간의 견해차로 정치적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세조 이전 왕들의 묘호는 기록이 미비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별다른 쟁론 없이 상정되었다. 조선의 건국자인 초대 왕을 태조라 하고 그 첫 계승자를 태종이라 추상하는 일은 당연하였다. 그런데 제2대 왕은 태종이라 칭하지 못하고 3세기 정도 지난 숙종 때에 가서야 정종이라 추상하였다.
세종의 묘호가 결정되고 나서, 허후(許詡)와 정인지(鄭麟趾) 등이 “역대에 세종이라 일컬었던 군주는 혹은 중흥하였기 때문이거나 혹은 창업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하면서, 세종은 이와 같지 않으니 문종(文宗)이라 고칠 것을 청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의 왕 문종이 북방에서 공훈이 있었음을 들어 거절하였다. 문종은 세종의 적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하여 종을 칭하였다.
세조는 단종을 폐위시키고 즉위함으로써 종법 질서를 부정한 정치적 하자를 안고 있었다. 그렇지만 예종은 재조(再造)의 공덕을 높여 세조라 일컬을 것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중종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임금이었지만 칭종(稱宗)하였다. 칭조(稱祖) 반대자들은 세조의 경우에 중흥의 공으로 조를 칭한 것이 아니라, 아우가 형인 문종을 이었기 때문에 부자간의 계승 관계와 그 의미를 지닌 종을 칭할 수 없었다는 논리를 펼치면서 중종의 칭조를 차단하였다. 결국 중종의 칭종은 성종의 아들로서 왕위의 정통성을 계승한 종자(宗子)로서의 지위를 보다 중시한 종법의 원리에 근거하였다.
변천
임진왜란 이후 묘호 추상의 특징은 종호를 종에서 조로 고쳐 올린 사례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현상은 조·종에 대한 인식이 점차 달라져간 정치 사회적 배경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선조(宣祖)가 죽자 대신들은 칭조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여러 논의를 거쳐 재조의 공덕이 있기는 하지만 대를 이어 수성하였으며 성대한 공렬보다는 계체(繼體)를 중시하여 선종(宣宗)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조와 종의 비중을 달리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근수(尹根壽)는 “종이 조보다 폄하되거나 조가 종보다 가중되는 것이 아니다.”라 하고, 이항복(李恒福)도 이것이 자신의 주견이라고 한 사실에서, 조공과 종덕이 비중에 차등이 있는 것이 아니로되 점차 조를 종보다 선호하는 경향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선종은 1616년(광해군 8)에 이르러 선조로 묘호를 개칭하였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직후, 조정에서는 광해조 때에 올린 선조의 휘호를 깎아버리자는 의논이 있었다. 선조의 묘호 개상은 종계의 변무와 임진왜란을 극복한 중흥의 공이 그 근거였다. 그렇지만 그 배경에는 광해군과 그와 결탁한 일부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었다.
인조는 종사를 위기에서 구하고 윤기(倫紀)를 회복하여 안정시킨 공으로 칭조에 대해 쉽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는 열(烈) 혹은 헌(憲)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좌의정이경석(李景奭) 등이 인(仁) 자를 주장하여 이 시자로 결정되었다.
순조는 1857년(철종 8)에, 영조는 1889년(고종 26)에, 정조는 1899년(고종 36)에 각각 묘호를 종에서 조로 개상하였다. 묘호 개상의 이유는 순조와 영조가 재위 기간 동안 발생한 국기를 뒤흔들 만한 정치적 변란이나 서학(西學) 사건, 민란 등을 진압함으로써 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한 공을 명분으로 하였다. 조공종덕의 원리를 명목상의 기준으로 적용한 듯하나, 종보다 조를 높이는 관행과 함께 일부 정치 세력의 의도가 개재해 있었다.
1899년 12월에는 태조와 장종·정종·순조·익종 등 4대조에게 황제로서의 묘호와 칭호를 새로이 정해서 올릴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태조는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장종은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정종은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순조는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익종은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봉하였다. 이러한 추숭 사업은 고종의 전제권 강화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황제국으로의 격상에 따른 통치 체제 정비에 요구되는 일들이기도 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직후에는 진종과 헌종·철종의 추봉도 단행하여 진종을 소황제(昭皇帝), 헌종을 성황제(成皇帝), 철종을 장황제(章皇帝)로 정하였다. 이로써 황제국의 7묘제에 따른 황제로서의 묘호 추봉이 완성되어 황권의 정통성이 확립되었다.
참고문헌
신명호, 「조선시대 국왕호칭의 종류와 의미」, 『역사와 경계』 52, 2004.
임민혁, 「조선시대 종법제하의 조·종과 묘호론의」, 『동서사학』 8, 2001.
임민혁, 「묘호의 예제원리와 조선의 수용」, 『국사관논총』 104, 2004.
임민혁, 「고·순종의 호칭에 관한 이론과 왕의 정통성 -묘호·존호·시호를 중심으로-」, 『사학연구』 78, 2005.
숙위(宿衛)
정의
조선시대 왕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궁성 안팎에서 주야로 시행한 군사적 경호 활동.
개설
조선전기 숙위는 중앙군의 핵심인 오위(五衛)와 금군(禁軍)에서 담당하였으며, 숙위의 구체적인 내용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입직(入直), 행순(行巡), 계성기(啓省記) 조항 등에 규정되었다. 숙위군은 입직 후 궁궐의 동소(東所), 서소(西所), 남소(南所), 북소(北所)의 네 곳에 분산 배치되어 중소(中所)의 통솔을 받았으며 3일마다 교체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조선후기 오군영(五軍營) 체제하에서도 대체로 동일하였지만 장용영(壯勇營)의 치폐, 고종의 경복궁 이어 등에 따른 변동도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숙위는 숙(宿)과 위(衛)의 합성어로서 ‘숙’은 숙직한다는 의미이고 ‘위’는 호위한다는 의미로서 숙위의 원초적인 의미는 ‘궁궐 안팎에서 숙직하며 호위한다.’이다. 장기간 군주제가 지속된 한국과 중국에서는 왕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숙위가 고대로부터 발달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과 고려시대의 숙위를 참조하여 다양한 숙위 활동이 있었다.
군주제도의 특성상 조선시대 역시 건국 직후부터 숙위가 중요시되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왕조를 개창한 직후 반포된 문무 관제에 의하면 숙위는 중추원(中樞院)에서 담당하였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하지만 건국 직후의 혼란 상황에서 숙위는 일정한 제도 없이 변천을 계속하다가『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해 안정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숙위는 병조(兵曹)의 무비사(武備司)에서 관장하였으며, 직접적으로는 중앙군인 오위와 금군에서 담당하였다. 『경국대전』에는 숙위 근무에 관련된 입직, 근무 중 순찰과 관련된 행순, 업무보고서인 계성기 작성 등의 규정이 있는데,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입직은 장수와 군사가 궁궐에 들어가 근무를 서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숙직도 포함하였다. 입직하는 장교와 병졸은 3일 만에 교대하였는데, 오위는 각 1부(部)씩 입직하되 그 전일 저녁에 병조가 그 담당 지역과 시간을 나누어 정하고 왕의 허락을 받아 도총부(都摠府)에 공문을 보냈다. 도총부는 접수한 공문을 해당 부로 보내 입직하도록 하였다. 입직 부는 궁궐의 동소, 서소, 남소, 북소의 네 곳에 분산 배치되어 중소의 통솔을 받았다. 중소에서는 병조의 당상관 1명, 도총부의 당상관 2명이 숙직했다. 입직하는 날 제장(諸將)은 숙배하고 대궐 안에서 패를 받았다가 입직 교대 일에 패를 반납하였다. 입직 병력 중에서 위장(衛將)과 부장(部將)은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야간 시간을 배분하여 순찰한 다음 무사 여부를 왕에게 직보(直報)하였다. 이 같은 숙위 제도는 조선시대 왕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군사적 경호 활동을 대표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의 숙위는 임진왜란 이후 오군영 제도가 성립되면서 크게 변화되었다. 그 이유는 숙위가 근본적으로 군사제도와 관련되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전기의 오위 체제 및 금군 조직인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가 임진왜란 이후 오군영과 용호영으로 바뀜에 따라 숙위 역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왕의 상주 공간이 조선전기의 경복궁에서 조선후기의 동궐(東闕)로 변화하고 장용영의 설치와 폐지라는 상황 변화 역시 숙위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1802년(순조 2)의 장용영 혁파는 이후의 정치, 경제, 군사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숙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혁파 이전의 장용영이 궁궐 숙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혁파 이전의 장용영은 명정전(明政殿) 서월랑, 인정문(仁政門) 밖 월랑, 집례문(集禮門), 동룡문(銅龍門), 건양문(建陽門) 등 동궐의 주요 구역에서 숙위하고 있었다. 따라서 장용영이 혁파되자 이 구역을 다른 부대에서 대체 숙위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숙위 구도가 변동하게 되었다. 그것은 대체로 장용영 창설 이전의 3군문과 금군 중심의 궁궐 숙위 체제로 환원하는 것이었지만, 단순한 환원이 아니라 정조에 의해 강화된 궁궐 숙위를 일정 부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장용영이 담당했던 궁궐 숙위는 주로 훈련도감(訓鍊都監)과 금위영(禁衛營)이 대체하였다. 장용영에서 입직하였던 명정전 서월랑에는 훈련도감의 무예별감(武藝別監)이 계속 입직하였으며 집례문(후에는 숭지문)에는 훈련도감의 국출신이 대신 입직하였다. 동룡문과 건양문의 입직은 금위영에서 담당하였다. 인정문 밖의 월랑에는 장용영에 통합되었다가 장용영의 혁파를 계기로 분리되어 나온 호위청(扈衛廳)의 군관(軍官)이 계속 입직하였다. 이 결과 장용영 혁파 후의 동궐 숙위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御營廳)의 3군문과 함께 용호영(龍虎營), 호위청 등의 금군 및 4소, 수문장청(守門將廳), 선전관청(宣傳官廳), 내병조(內兵曹) 등의 병력에 의해 수행되었다.
동궐의 숙위 체제는 궁성외 숙위, 궁성문 수위, 궁성 내 숙위로 구성되었다. 궁성 외 숙위는 훈련도감의 남영과 광지영(廣智營) 입직군, 금위영의 서영(西營) 입직군, 어영청의 동영(東營)과 집춘영(集春營) 입직군이 담당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영조대의 3군문 궁성 외 숙위 체제로 환원된 것이었다. 궁성 외 숙위는 초경부터 5경까지 궁성 밖 전체를 대상으로 시행되는 3군문의 순라를 기본으로 3군문이 각각의 담당 구역을 특별 순라하는 별순라와 순라 활동을 감찰하는 도순(都巡)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성문 수위는 수문장과 수문병이 담당하였다. 동궐에는 9명의 수문장이 9곳의 궁성문을 수위하였다. 궁성 내 숙위는 4소, 궐내 각문, 정전 등에 입직하던 도총부 병력, 훈련도감 병력, 금위영 병력, 용호영 병력, 호위청 군관, 선전관 등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은 도총부와 내병조에 의해 감찰되었다. 결국 장용영이 혁파된 후의 순조대 동궐 숙위는 장용영 창설 이전의 3군문 중심의 궁궐 숙위 체제로 환원하는 한편 정조에 의해 강화된 궁궐 숙위를 일정 부분 반영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동궐 숙위 체제는 고종이 즉위하고 경복궁으로 옮겨가면서 또 한 번 큰 변화를 맞이했다. 경복궁의 숙위는 고종의 즉위와 함께 실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등장이라는 정치적 변수와 함께 경복궁의 지형적 특성 및 삼군부 복설 등에 의해 동궐과 다른 숙위 체제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복궁과 동궐의 숙위체제에서 동일한 부분은 무엇보다도 숙위 담당 부대가 같다는 것이었다. 즉 경복궁이나 동궐의 숙위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삼군부 병력을 비롯하여 용호영과 호위청의 병력 그리고 번상기병 등이 담당했던 것이다. 또한 숙위 체제가 궁성 외 숙위, 궁성문 수위, 궁성내 숙위 등으로 구별되어 있었던 점도 다르지 않다. 아울러 도총부의 사소에서 궁성 안을 분담하여 감독했다는 점도 동일하다.
경복궁의 궁성 외 숙위는 동궐과 마찬가지로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에서 분담하여 담당했다. 훈련도감은 건춘문(建春門)부터 영추문(迎秋門)까지 주로 남쪽 방향을 담당했다. 이를 위해 건춘문 밖에 남영을 설치하였으며, 담당구역 안에 7곳의 군포를 배치했다. 여기에 동원된 병력은 남영에 입직한 당상장관(堂上將官) 1명, 파총(把摠) 1명, 집사(執事) 1명, 군사 36명, 칠군색 40명 그리고 7곳의 군포에 입직한 28명이었다.
금위영은 건춘문부터 춘생문(春生門)까지 주로 동쪽 방향을 담당했다. 이를 위해 춘생문 밖에 동영을 설치했으며, 담당 구역 안에 7곳의 군포를 배치했다. 여기에 동원된 병력은 동영에 입직한 파총 1명, 초관(哨官) 1명, 군사 20명 그리고 7곳의 군포에 입직한 28명이었다. 어영청은 영추문부터 추성문(秋成門)까지 주로 서쪽 방향을 담당했다. 이를 위해 영추문 밖에 서영을 설치했으며, 담당 구역 안에 7곳의 군포를 설치했다. 여기에 동원된 병력은 서영에 입직한 파총 1명, 초관 1명, 군사 20명 그리고 7곳의 군포에 입직한 28명이었다. 경복궁의 궁성 외 숙위는 궁성 전체를 살펴보는 순라가 폐지되고 각각의 담당구역만 살펴보는 순작(巡綽)과 고찰을 통해 감독되었다. 이는 평탄한 경복궁의 지형적 특성이 원인이었다.
궁성문은 동궐과 마찬가지로 수문장과 수문병이 수위하였으며, 수문병은 교대로 근무하는 번상기병이었다. 다만 동궐에서는 9곳에 수문장이 배치되었지만, 경복궁에는 4곳만 배치되었다. 수문병은 대략 200명 정도의 번상기병이었다. 이외에 궁성 안의 광화문(光化門)에 60명, 건춘문에 100명, 영추문에 100명, 신무문에 30명, 춘생문에 20명, 추성문에 20명, 그리고 승화문(承華門)에 45명의 삼군문 병사들이 배치되어 외궁장과 내궁장의 파수를 분담했다. 이들은 도총부의 4소와 내병조가 감찰하였다.
외궁장 파수는 외궁장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데 비해 내궁장 파수는 일부 구역이 제외되었다. 그 이유는 근정전 앞쪽의 정전 구역을 용호영과 호위청의 병력들이 경호했기 때문이었다. 용호영의 입직군은 100명, 호위청의 입직군은 30명이었다. 이처럼 고종의 경복궁 이어 후 숙위 역시 기본 구도는 조선후기의 동궐 숙위 체제, 나아가 조선전기의 궁궐 숙위 체제와 대체로 유사하였다. 이는 왕이 어느 궁에 머물던 또는 중앙군의 제도가 어떻든 관계없이 숙위의 근본 목적이 바로 왕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군사적 경호활동이라는 면에서 동일하였기에 나타난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만기요람(萬機要覽)』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후기편』, 육군사관학교, 1997.
이근호 외, 『조선후기의 수도방위체제』, 서울학연구소, 1998.
신명호, 「조선후기 국왕 행행시 국정운영체제」, 『조선시대사학보』17, 2001.
신명호, 「순조대 장용영 혁파와 동궐 숙위체제」, 『군사』60, 2006.
신명호, 「고종의 경복궁 이어와 궁궐숙위」, 『조선시대사학보』37, 조선시대사학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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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친예(親刈)
정의
조선 후기에 국왕이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 적전(籍田)에 친림하여 보리 베는 것을 관람하던 의례.
개설
친예는 친림관예(親臨觀刈)의 줄임말로서 왕이 친림하여 곡식을 베는 것을 관람한다는 의미이다. 왕의 친예는 친경과 짝을 이루던 의례로서 친경이 파종 의례인 반면 친예는 수확 의례였다. 친예와 친경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농경의례로서 조상 숭배 정신과 권농의 기능을 같이 겸하는 통치자의 중요한 행사였다. 친예의 의식은, 행사 전에 농사를 처음 가르친 고대 신농씨(神農氏)와 후직(后稷)을 선농단(先農壇)에서 제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연원 및 변천
한국사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입춘 후 해일(亥日)에 선농(先農)에 제사하고 입하 후 해일에 중농(中農)에 제사하고 입추 후 해일에 후농(後農)에 제사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고려 시대에는 983년(성종 2)에 비로소 적전을 두고 친경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고려 시대에 국왕의 친예는 없었다.
조선 시대 들어 친경에 관한 의례가 자세히 정비되지만 친예에 관련된 의례는 정비되지 않다가 영조 대에 이르러 정비되었다. 영조는 1739년(영조 15)에 재위 중 최초로 친경 의례를 거행한 이후 총 4차례에 걸쳐 친경을 거행하였는데, 1747년(영조 23)에는 적전에서 재배한 보리를 베는 것을 왕이 직접 참관하는 행사인 ‘관예(觀刈)’ 즉 친예를 거행하였다. 이때의 친예가 『국조속오례의』에 ‘친림관예의(親臨觀刈儀)’와 ‘관예후노주의(觀刈後勞酒儀)’ 항목으로 실렸다. 이후 거의 매년 이 행사가 계속되어 고종조까지 이어졌다. 친예 의례는 명(明)나라 선종(宣宗) 때의 고사를 원용한 것으로 친경 행사를 한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국왕이 관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장종(藏種)과 헌종(獻種)으로 이어지는 친경 의식의 연속선상에서 친예 의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영조대에 왕세손으로 친경 행사에 참석하기도 하였던 정조는 친예는 거행하였으나 친경을 거행하지는 않았다. 고종조에는 친경과 친예를 한 차례 거행하였으며, 순종은 1908년(순종 2) 4월 5일에 동적전에서 친경을 거행하였다. 하지만 이 해 7월 23일에 국가사전의 대대적인 개혁으로 선농단이 사직단에 합사되고 제단과 부지가 국유로 이속되면서 선농단 제사는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선농에 제향한 후에 친경하던 의식에서 친경만 남게 되었다. 더구나 행사가 끝난 후 순종이 뽕나무, 솔나무, 전나무 등의 나무를 심고 각 대신과 황족들도 따라 심는 행사가 곁들여짐으로써 친경례는 농업과 함께 임업을 권장하는 행사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 되면서 이 같은 친경의례마저 폐지되었다.
절차 및 내용
『은대조례(銀臺條例)』에 의하면 적전(籍田)의 곡식이 익으면 예조에서는 왕에게 친예(親刈) 여부를 품지(稟旨)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는 국왕의 친예가 확정된 것이 아니라 왕의 뜻에 따라 가변적이었기 때문에 나타난 규정이었다. 친예하기로 결정하면 왕은 친예 직전에 동적전에 행차하여 선농단에서 제사를 올렸다. 이때 왕은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갖추었다.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낸 후 왕은 동적전에 마련된 관예대(觀刈臺)로 옮겨 보리 베는 것을 관람하였다. 보리는 청의(靑衣)와 청건(靑巾)을 착용한 서인(庶人) 40명이 독시관(督視官)의 감독하에 각기 기계(器械)를 잡고 동·서로 나뉘어 밭이랑으로 들어가 차례로 두 사람이 나란히 베었다. 보리를 벨 때, 독시관이 동·서에서 서로 향하여 서면 음악이 연주되고, 베기를 마치면 음악이 그쳤다. 벤 보리는 죽상(竹箱)에 담아 왕에게 올렸다. 곡식을 살펴본 임금은 죽상을 근시에게 주어 태상(太常)에서 보관하게 하였다. 이 곡식은 제사용으로 이용되었다. 왕이 곡식을 살펴보는 절차가 끝나면 보리를 벤 40명이 관예대 아래로 와서 네 번 절하였다. 왕이 술과 음식을 하사하여 참여자들의 수고를 위로하도록 명령함으로써 친예 의례는 종료되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국왕의 친예 때 백성들에게 하사한 음식이 농민들에게 퍼져 설렁탕으로 발전하였다.
참고문헌
『親耕儀軌』
『國朝續五禮儀』
『銀臺條例』
박소동, 「친경친잠의궤 해제」, 『국역친경친잠의궤』, 민족문화추진회, 1999.
김문식 외,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세자/소훈(昭訓)
정의
조선~대한제국 때 내명부(內命婦)에 소속된 종5품의 세자 후궁.
개설
조선시대에 세자의 후궁은 내명부에 속했으며 내관으로 불렸다. 또한 세자궁에 소속된 궁녀와 합쳐 여관(女官)으로 불렸다. 이는 여성으로 이루어진 세자의 후궁과 궁녀가 남성으로 이루어진 양반 관료 즉 남관(男官)에 대응하는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내명부에 소속된 세자 후궁과 궁녀는 명칭뿐만 아니라 조직에서도 양반 관료 조직에 대응하였다. 조선시대 양반 관료 조직은 크게 5~9품의 사(士)와 1~4품의 대부(大夫)로 구분하였는데, 내명부의 세자 후궁은 8~9품의 궁녀와 2~5품의 내관으로 양분되었다. 세자의 내관 즉 세자의 후궁 품계가 2~5품인 이유는 왕의 후궁 품계가 1~4품이기에 이보다 격을 낮추기 위해서였다. 사와 대부가 합쳐진 사대부는 남자 관료 즉 남관이었고, 궁녀와 내관은 그에 대응하는 여자 관료 즉 여관 또는 내관이었다.
내명부에 소속된 세자 후궁은 비록 내관 또는 여관이라고 불렸지만 실제는 세자의 첩이었다. 갑오개혁 때 내명부가 외명부와 통합되어 명부사(命婦司)로 바뀌면서 세자의 후궁 역시 명부사에 소속되었다. 대한제국 때에 명부사는 다시 내명부와 외명부로 나뉘었다가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모두 폐지되었다. 이때 세자의 후궁 제도도 사라졌다.
내용 및 특징
조선 건국을 전후한 시기에 신진 사대부 사이에서 일부일처제가 강조되면서 왕과 세자의 경우에도 정식 배우자는 1명으로 한정하고 나머지 배우자들은 후궁으로 차별하였다. 세자의 후궁 제도는 세종대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정비되었으며, 훗날 『경국대전』 「이전」 내명부의 세자궁 조항으로 법제화되었다.
조선 건국부터 세종대 이전까지는 다분히 고려시대의 관행이 유지되어 왕과 세자의 후궁 제도가 정비되지 않았다. 이처럼 후궁 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왕이 무질서하게 후궁을 뽑아 들이자 양반 관료들은 후궁 제도를 정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런 노력은 태조대부터 시작되어 태종대를 거쳐 세종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먼저 1428년(세종 10)에 왕의 후궁 제도를 정비하였고[『세종실록』 10년 3월 8일], 뒤이어 1430년(세종 12)에 이르러 당나라의 태자 내관 제도를 참조한 세자의 후궁 제도를 마련하였다[『세종실록』 12년 윤12월 16일].
『당육전(唐六典)』에 의하면 당나라의 태자 내관에는 정3품의 양제(良娣) 2명, 정4품의 양원(良媛) 6명, 정5품의 승휘(承徽) 10명, 정7품의 소훈(昭訓) 16명, 정9품의 봉의(奉儀) 24명으로 5종류가 있었다. 한나라 때의 태자 내관에는 양제와 유자(孺子) 2가지만 있었다. 남조의 송나라 때 이것이 보림(寶林)과 양제로 바뀌었다가 수나라 초기에 양제·양원·승휘·소훈·봉의 5가지의 태자 내관을 두었고, 이것이 당나라의 태자 내관으로 계승되었다.
그런데 1430년의 세자 후궁 제도에서는 정2품의 양제, 정3품의 양원, 정4품의 승휘, 정5품의 소훈으로만 규정되어[『세종실록』 12년 윤12월 16일], 당나라의 태자 내관에 비해 종류는 1가지가 준 반면 품계는 오히려 상승했다.
조선의 세자 후궁 중에서 소훈은 정5품이고 정원이 규정되지 않은 데 비해, 당나라의 경우 소훈은 정7품이고 16명이었다. 이는 조선의 소훈을 당나라의 소훈에 비해 2품 높게 정비한 것이다. 아울러 신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정원은 규정하지 않았다.
세종대에 마련된 세자 후궁 제도는 정품(正品)이 종품(從品)으로 바뀐 것을 빼고는 그대로 『경국대전』에 실림으로써 조선시대 세자 후궁 제도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변천
조선시대의 내명부는 1894년(고종 31)에 군국기무처에서 제의한 개혁안에 의해 명부사로 바뀌어 궁내부에 소속되었다[『고종실록』 31년 7월 18일]. 명부사는 기존의 내명부와 외명부가 통합된 것이다. 하지만 명부사는 대한제국 때에 다시 내명부와 외명부로 나뉘었다. 대한제국 멸망 후 일제는 대한제국의 황실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1910년(순종 3)에 이왕직 관제를 공포하였는데[『순종실록부록』 3년 12월 30일], 이왕직에는 서무계·회계계·장시계(掌侍係)·장사계(掌祀係)·장원계(掌苑係)의 5개 계가 설치되었다. 이때 내명부의 일부 궁녀만 장시계에 소속되고, 그 밖의 내명부 후궁과 외명부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당육전(唐六典)』
김선곤, 「이조초기 妃嬪考」, 『역사학보』 21, 1963.
이영숙, 「조선초기 內命婦에 대하여」, 『역사학보』 96,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