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3.11.화. 고창 두암초당.
선계(仙界)와 속계(俗界)의 경계쯤에 아슬아슬 서 있는 아름다운집
고창여행에서 아름다운 집 세채도 만나다
선암사 내원궁, 두락암 두암초당, 무장면덕림리 용오정사 홍의제
2014.3.10.월-11.화(1박2일)첫날:서울▶전북고창 선암사 도솔암
둘쩻날:두락암 두암초당▶용오정사▶무장읍성▶미당서정주 시문학관
여행 둘쨋날
2014.3.11.화요일..
전북고창 반암리 두락암 두암초당, 용오정사, 무장읍성, 미당서정주 시문학관
전날 저녁식사를 맛있게 한 황소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고
여쥔님으로부터 두암초당 가는 대충 안내를 받으면서 상세히 알아 보려면
8시 30분부터 선암사관광안내소 직원이 나오므로 이용하란다.
많이 알려진 곳이 아니어서 그 분들도 확실히 몰라 명쾌한 답을 주기 위해서
인터넷 검색 끝에 결국 찾아내어 우리에게 화면을 보여주며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분들 덕분에 곧바로 찾게 되어 여간 고맙지 않았다.
수직의 큰 바위를 지키는 작은 정자가 멀리서 보인다.
두암초당(斗巖草堂)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에 있는 일제 강점기 초당으로
아산면 반암리 영모정 뒷산에 있다. 주변에 주진천[인천강]이 흐르고 있다.
두암초당(斗巖草堂)은 호암(壺巖) 변성온(卞成溫)[1530~1614]과
인천(仁川) 변성진(卞成振)[1549~1623] 형제가 만년에 머물렀던 곳이다.
하서 김인후에게 가르침을 받고 퇴계 이황과 교류한 호암의 인품이
곡식을 되는 말[斗]이나, 저울추같이 평평하여 치우치지 않았다고 하여
‘두암’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호암 변성온과 아우 인천 변성진이 학문을 닦던 것을 기려 고을 사림들이
창건하였는데 훼손되어 5대손인 변동빈이 초당을 중건하였다. 현재 변성진의
후손인 변태섭이 관리하고 있다. 1815년 10월 영모정에 호암의 5대손
변동빈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나 오랜 세월에 유실되었다.
1954년 현 위치에 재건립하였다. 같은 시기에 영모당 재실도 건립되었다고 한다.
*고창문화대전에서 옮김
아산초등학교는 전북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1081로
도로명주소는 고창군 아산면 영모정길 45 이다.
아산초등학교 교문을 들면서 우측 급식소 뒤 산자락에
두락암과 두암초당이 자리하고 있다.
교정 오른쪽 가장자리로 줄지어 선 춤추듯한 벚꽃나무 고목을 따라가면 된다.
사진좌측 급식실(푸른 지붕)위쪽 큰 바위가 바로 두락암이다.
그 수직 바위 동굴에 지붕과 처마를 밀어 넣어 지은 정자가 두암초당이고,
바로 그 아래에 영모정이 자리한다.푸른 지붕건물은 아산초등학교 급식실이다.
두락암(斗洛巖)과 두암초당(斗巖草堂)두암초당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증 호암선생시(贈 壺巖先生詩) 퇴계 이황선생(退溪 李滉先生)
贈壺巖先生詩
重逢顔面記茫茫(다시 그대 얼굴 대하고 보니 옛날 생각이 아득하이)
屈指如今已六霜(그대와 함께 했던 날이 손가락 꼽아보니 오늘까지 여섯 날)
千里來尋珍重意(천리나 되는 그 먼길을 찾아온 그 뜻은 정말로 깊고도 깊어)一
庭相對萬叢香(집에서 서로 마주 대하니 만가지 향 다발을 묶어 놓은 듯하구려)
石磵南頭艸屋低(산골짜기 시냇물 흘러 남쪽 머리 아래 초옥은)
邇來岑寂鎖寒凄(지금부터 그 봉오리 적막하고도 쓸쓸함만 생기겠네)
館君終夜請无寐(성균관에서 그대와 밤새 잠들지 않으며 진리를 청했는데)
雷義肅肅意轉悽
(굳은 맹약은 엄숙하고 엄숙하건만 그 뜻은 처량하게만 되었구려)
河西蓬館舊同遊(하서는 성균관에서 옛날 함께 교유했던 친구)
欻去修文白玉樓(그런데 갑자기 백옥루로 가셨네)
今日逢君門下士(금일 그대 문하 변성온 선생을 보며)話君終夕涕橫流
(그대에 대한 이야기 저녁 늦게까지 하며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오)
佳山佳水日徘徊(좋은 산과 좋은 물에 하루 종일 노니니)
仁智吾猶未竭才(어짐과 지혜는 내 재능으로는 얻기 어렵네)
敢叩師門有何訣(감히 제자 되기를 청하니 무슨 말이 있어야 할까)
請將餘論賁江臺(바라노니 장차 못다한 논의는 천연대에서 마무리하세)
江臺寥闊共登臨
(천연대는 고적하고도 활달해 그대와 함께 올라가서 바라보니)
俯仰鳶魚感慨深
(위에는 소리개가 물에는 물고기가 깊은 감명 주는구려)
妙處自應從我得
(천연대가 스스로 응하니 나도 그것을 따라 얻어냄이 있어)
晦庵詩句爲君吟
(회암 시구를 그대 위하여 읊어주네)
風雪尋師十載前(눈바람 헤치고 십년 전에 찾아왔었는데)
云何一瓣嘆靡傳(어찌 화반 되어 사도를 말함이 있겠는가)
勸君莫被因循誤
(그대에게 권하노니 잘못된 사도를 쫓는 인연에 매이지 말고)
努力須撑上水船(노력하며 모름지기 물위에 떠 있는 배의 기둥 되소)
위 시는 크게 6개의 마디로 이루어졌다.
1연은 퇴계와의 만남,2연과 3연은 하서 김인후선생의 죽음을 생각하고
퇴계 나이 23세에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했던 추억을, 4연에서 6연까지는
한 사람의 스승으로서 한 사람의 제자로서 다정다감한 느낌을 나누고 있다.
퇴계는 오늘의 만남이 끝이 아님을 강조하고 마지막에는 큰 선비가 되라는
퇴계의 충고도 있고 변성온 선생은 퇴계와의 이러한 만남을 통해 학문의
뜻을 굳게 다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 다음을 검색해서 '안개시인'의 글에서 인용함
천길 벼랑아래 위태하게 걸려있는 두암초당(斗巖草堂)
고창의 인천강변에 수직으로 아찔하게 치솟은 바위 두락암.
그 수직의 바위 동굴에 지붕과 처마를 밀어 넣어 지어낸 정자 두암초당이다.
수직의 바위에 매어놓듯 한 칸짜리 방을 내고,
거기에 누마루 두 칸을 더 보태서 지은 정자이다.
서늘한 높이와 그윽한 풍류가 만나는 자리.
정자는 그 경계에서 400년 동안 한 편의 시(詩)처럼 서 있다. 보면 볼수록
현기증 나는 그 아찔한 자리에 솜씨 부려 정자를 세운 이의 담력도 담력이지만,
그 자리에서 무릎을 치고서 정자를 들인
옛사람의 눈썰미가 더 감탄스러울 따름이다.문화일보 박경일 글에서 발췌
산고수장(山高水長), 후학 김정회(後學 金正會)
변성온,변성진 형제의 학문을 예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말 서예가 해강 金圭鎭선생의 제자 김정회의 글씨(?)
두락암의 바위형상이 꼭 곡식을 재는 말(斗)처럼 생겼다 해서 斗洛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수직의 마름모꼴로 우뚝 서 있는 斗洛巖은 크기와 생김새도
예사롭지 않지만 이 암벽의 중간쯤에 허공에 매달아 지은
옛 정자인 斗巖草堂이 더욱 기이하다.
수직의 바위 움푹 파인 자리에 기둥을 세우고 처마를 들이고 기와를 올렸다.
정자의 반은 바위 안에 나머지 반은 허공에 다리를 받쳐 세워놓은 형국이다.
정자안에는 한 칸짜리 방과 방을 둘러 두 칸의 마루를 놓았다.
마치 신선이 사는 곳 같다
근차(謹次 -삼가 차운하며), 호암초당 운(壺巖艸堂 韻),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누마루에 걸린 '고산경행(高山景行)' 편액은 시경에서 따온 글로
'사람이 우러러보는 산과 사람이 걸어가는 큰길'이라는 뜻이다.
무릇 세상을 이끄는 이들이 높은 산과 큰길처럼
공명정대하게 도덕을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다.
불때는 아궁이가 누마루 밑에서 볼 수 있었다.
주변 시커먼 그을음이 이용한 흔적을 잘 말해 주듯 했다.
불을 잘 때야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안될 것 같았다.
두암초당의 주인은 조선 중기의 호암 변성온(壺巖 卞成溫, 1529~?),
인천 변성진(仁川 卞成振,1549~1623) 형제이다.
하서 김인후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퇴계 이황과 교류했던 변성온은
인품으로나 학덕으로 널리 존경받던 선비였다.
퇴계는 "1만 개의 향다발을 묶어놓은 듯하다(一庭相對萬叢香)"고 평했으며
편액(扁額)으로 내걸린 두암초당의 두암도 곡식을 재는 말(斗)과 같이
매사에 치우침이 없고 반듯했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따끈따끈한 사방 6자x6자 1평의 온돌방이다.
두암초당 마루에서 내려다 본 마을 전경이다.
바로 아래가 아산초등운동장
원운(原韻)
두락암에 초당 하나 있으니
오래된 버드나무 은밀하게 차가운 언덕을 지키네
구름 안개는 피어나 발우리를 만들고
초목을 거슬러오르니 지팡이와 오두막집에는 향기 피어나는구나
바람에 떨어진 작약을 즐기니 오히려 조상의 혼령이 남아 있고
가문 대대로 전해오는 은자는 영원한 문장가 였도다
호암 가신 백년 후 이 곳에 건물 새로 지으니
어린 손자의 세업이 창성하길 기대 하노라
오대손 변동빈- *'우보'라는 분의 해석을 인용함
포즈를 취한 필자의 모습
돌계단에서 누마루로 오를땐 높아서
오르다가 아래로 굴러 떨어지지않게 조심조심 올라야 한다.
두암초당에서 내려와
좁은 산길따라 올라 두락암 바로 뒤쪽에 이른다.
시원한 경치에 한 숨 돌리며 여기저기 풍경을 담는다.
정상은 동아줄을 잡고 올라가야 하는데 눈으로 구경만 하고 접는다.
저 멀리 선운사 도솔암이 높고 깊은 산 속에 고즈넉히 자리하고 있다.
구암리 마을회관옆 구암마을 전망대 안내판이 분명하다.
좌측 바위가 병바위다.
대취한 신선이 상을 걷어차서 술병이 거꾸로 꽂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바위이다.
희한하게도 거꾸로 처박힌 술병처럼 보였다가 어찌 보면 사람 옆얼굴을 꼭 닮았다.
병바위를 두고 반암마을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옆얼굴을 꼭 닮았다”고 한다.
구암리 마을회관 앞에 서니 영락없다.
눈썹 흰 노(老) 대통령의 옆얼굴 그대로다.
사람 얼굴 형상의 바위는 드물지 않지만, 구체적으로 ‘누구누구’의 얼굴을 닮은,
그것도 현대사의 인물과 닮은 바위는 여기 말고는 없지 싶다.
병바위 옆에는 그 술병을 올려놓았다는 소반바위가 있고,
그 뒤쪽의 아산초등학교 교정을 내려다보는 두락암이 있다.
두락(斗洛). 바위형상이 꼭 곡식을 재는 말(斗)처럼 생겼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수직의 마름모꼴로 우뚝 서 있는 두락암은 크기와 생김새도 예사롭지 않지만,
수직 암벽의 중간쯤에 허공에 매달아 지은 옛 정자가 더 기이하다.
정자가 내건 현판은 ‘두암초당’이다.
수직의 바위 허리쯤의 움푹 파인 자리에다 기둥을 놓고 처마를 들이고
기와를 올렸는데, 정자의 반은 바위 안에, 나머지 반은 허공에
다리를 받쳐 세워놓은 형국이다. 정자에는 한 칸짜리 방을 들이고
방을 둘러 두 칸의 마루를 놓았다. 누마루에 앉아서 허공에 두 발을
늘어뜨리고 있노라니 여기가 바로 신선의 자리다. 선계와 속계의 경계.
무릇 도를 닦아 신선이 되고자 한다면 딱 맞을 자리다.
‘두암초당’의 주인은 조선 중기의 변성온, 성진 형제다.
하서 김인후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퇴계와 교유했던 변성온은 인품으로나
학덕으로 보나 널리 존경받던 선비였다. 그는 배운 것을 늘 실천하려 했고,
문필을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으며 늘 백성을 앞세웠다.
이런 사람됨을 두고 퇴계는 “1만 개의 향다발을 묶어놓은 듯하다”고 평했다.
편액으로 내걸린 두암초당의 ‘두암(斗巖)’도 곡식을 재는 말(斗)과 같이
매사에 치우침이 없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누마루에 걸린 ‘고산경행(高山景行)’ 편액도 같은 의미로 읽힌다.
시경에서 따온 이 글은 ‘사람이 우러러보는 산과 사람이 걸어가는
큰길’이라는 뜻. 무릇 세상을 이끄는 이들이
높은 산과 큰길처럼 공명정대하게 도덕을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다.
*M일보 박경일 여행기에서 발췌
병바위의 전설
대취(大醉)한 신선이
상을 걷어차서 술병이 거꾸로 꽂혔다는 전설이 깃든 바위인데, 이 곳
반암마을 주민들은 '이승만 전대통령의 옆 얼굴을 꼭 닮았다'고 한다.
구암리 마을회관앞에서 바라 본 병바위
구암리 마을회관옆 구암마을 전망대 망원경이다.
전북 高敞郡 茂長面 용오정사(龍塢精舍)로 이동..
두암초당이 수직의 단애에 기대서 지은 집이라면,
무장면의 용오정사는 뒤틀리고 휘어진 것들로 오히려 힘차게 일으켜 세운 집이다.
서원과 사당을 겸한 용오정사에서 기숙사 역할을 하는 홍의재.
그 건물은 온통 둥치를 뒤튼 휘어진 나무로 기둥을 삼았습니다.
섣불리 자르지도 다듬지도 않은 구불구불한 나무들이 마치 춤을 추듯 도열해서
들보와 서까래의 무게를 묵묵히 받치는 힘찬 기둥이 됐습니다.
직선의 강박을 다 내려놓고 휘면 휜 대로, 굽으면 굽은 대로 내버려두듯이 지어낸
건물은 ‘그냥 놔 둠’으로써 파격을 이뤄낸 집입니다.
문화일보 박경일 기자여행기에서 옮김
문이 잠겨 내부 관람은 할 수 없어
직접 담은 사진들은 담밖에서 까치발로 대충 찰칵이었다.
龍塢精舍 기숙사인 홍의제
弘毅齋를 지을 때 당시 대목장이신 유익서가 구불구불
휘어져 자란 나무를 가져다가 싹둑 잘라서 그대로 기둥으로 삼고 지었다.
이런 기둥이 들보와 서까래를 지탱하고 있지만
건물은 놀랍게도 단정하고 반듯하다.
이렇게 100년이 넘는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기둥의 곡선과 힘의 중심을 다 계산에 넣고 셈을 헤아려 지은 것이겠다.
용오정사를 지은 유익서는
용호 정관원(鄭官源)과 이웃동네에서 산 인연 때문이었다.
용오 정관원은 일제 침략에 맞서 의병을 모집해 항일 투쟁에 앞서다가
고종이 승하한 뒤 마을 뒷산에 단을 세우고 통곡으로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1896년에 후학들이 德林祠 사당을 세우고 공을 기렸다
*문화닷컴 '박경일' 기자의 여행기에서 인용
용오정사의 강당인 敬義堂
경의당은 들보와 기둥에는 편액과 주련이 많다.
'不可無比所'란 글씨는 추사의 스승 翁方綱의 글씨이며 명나라 시인 육방호가 쓴
'大丈夫不可無此氣節
(대장부에게 이런 기개와 절도가 없을 수 없다'에서 따온 것이겠다.
'求壽山房'은 秋史, '金聲玉振'은 義親王 李堈의 글씨이다
무장읍성으로 이동
무장읍성
고려시대까지 일대의 영역은 무송과 장사, 이렇게 두 개의 고을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조선초에 왜구의 침입에 방비하여 새롭게 성곽을 쌓아 올리면서
무송과 장사에서 한 글자씩 따와 '무장'현이라 부르게 하고
새롭게 관아를 마련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현재 고창이 흥덕, 고창, 무장, 세 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시군 통폐합 과정에서
무장과 흥덕이 고창에 편입되면서 무장읍성 및 관아는 그 기능을 잃게 되었다.
성곽은 태종 재위 17년인 1417년에 완공이 되었다는 정확한 연혁이 전하고 있다.
당시 병마사였던 김저래가 승려와 백성들 2만여명을 동원하여 4개월의 공사끝에
완성하였다 기록되어 있다.
성의 정문은 남문ㅇ인 '진무루'이고 현재도 성곽 안에 여러개의 관아
건물이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무장읍성은 동학농민의 발상지로 잘 알려져 있다.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3대 접주 가운데 손화중의 근거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남접(동학 조직 가운데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지역의 동학도를 이르던 말)의
가장 많은 세력을 이끌었던 손화중은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정부의 중앙군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워 동학이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
정부와 화약을 이끌어 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현재는 전반적으로 무장읍성 전역이 새롭게 복구, 정비되고 있는 중이다.
남문인 진무루는 굳게 잠겨 있고 아직 복구되지 않은 성곽 틈 사이로 진입할 수 있다.
*스위트피 게시물에서 옮김
읍취루(挹翠樓)
송사지관(松沙之館) 객사는 중앙의 정당과 양편에 익현으로 구성이 된다.
중앙의 정당은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셔두고 한달에 두번 궁궐을 향해
망궐례를 올리는 곳이다. 양편에 자리한 익현은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어
왔을때 머무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송사지관(松沙之館)
무장객사 정청에 있는 송사지관 편액. '松'은 茂松에서 따온 것이며
‘沙’는 '長沙’의 ‘沙’를 딴 이름으로 무송은 현 고창의 고려 시대 지명이다.
장사는 오늘날 무장 성송 대산 공읍 상사 해리 심원 일대로,
신라 하대의 지명이라고 한다
객사 비림. 무장면에 산재해 있던 것을 옮겨 왔다.
선행비 6기, 불망비 7기, 청백비 1기, 기공비 1기, 기타비 1기가 있다
동치비
좌대에 오목오목 파인 것은
아낙네들이 접시불 켜고 치성드린 흔적이라 하고,
현감비
거북머리 비틀어 놓은 것은 백성들이 비를 세워 주면서도
미운 구석이 있어서 일부러 그랬다는 것이다.
동헌(수령의 근무지)인 취백당(翠白堂)의 아름다운 모습
무장읍성(茂長邑城)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이 성은 1991.2.21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의 남문인 진무루에서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있는데 성의 둘레는 약 1,400m, 넓이는 43,847평이다.
1915년에 발견된 '무장읍지'에 의하면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여 명을 동원,
그 해 2월부터 5월까지 만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 전한다.
흙과 돌을 섞어 축조하였다.
성내에는 객사, 동헌, 진무루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건물 주변에는 여러 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
성문 위엔 鎭茂樓라는 한자가 적혀져 있는 현판이 걸려있다.
성은 허물어져 객사와 동헌, 남문인 진무루가 전해질 뿐,
동문과 해자 사직단 등은 흔적만 남아 있다.
이 성은 원래 돌로 축적한 석성이였으나 훗날 허물어진 곳을
흙으로 보강하여 토성이 되었다고 한다.
진무루의 申叔舟詩
信宿孤城城上亭[믿고 쉬는 고성의 정자에 오르니]
西風吹入夢魂淸[서풍이 불어와 꿈과 혼이 맑아지네]
桐飄殘業吟中老[오동나무잎이 표현히 날며 남은 인생을 중 늙으니가 읊조리니]
菊彈新花分外明[국화와 새 꽃이 나누어 피면서 밖을 밝히네]
地盡海天生遠意[땅이 바다와 하늘에 다하며 원대한 뜻이 일어나고]
秋深鼓角作邊聲[가을이 깊어가고 북소리 주변에서 들린다]
欲賽高韻無佳句[높은 음률로 승부를 걸려고 하나 아름다운 시구가 생각나지 않고]
敢道爲詩記姓名[감히 길에 시를 짓기 위해서 이름만 기록하네]
宋榮來 書[송영래 씀]해석 권진순
전북 고창군 부안면 질마재로 2-8, 未堂 서정주시문학관을 찾아서
풍천장어로 알려진 인천강을 지나 미당 서정주(1915~2000)의 고향인
부안면 선운리 진마 마을에 닿는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온 서정주는
민족어 고유의 특성을 살린 뛰어난 시편들을 남겼다.
미당 시 문학관(未堂 詩 文學館 )
미당 시 문학관은 2001년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시인의 고향이자
영면지인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읍 선운리 마을에 세워진 기념관이다.
미당의 생가(生家)와 묘역이 부근에 있다.
질마재 마을에 있는 폐교된 선운초등학교 봉암 분교를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미당이 서울 중앙고보 재학시절 참가했다가 강제 퇴학당한 광주학생의거
지원 시위 사건(1929년, 1930년 2회) 기념일인 11월 3일 문을 열었다.
파이프와 지팡이, 편지, 자필 시 등 미당의 유품 50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2개 전시동, 서재 재현실, 세미나실, 다용도실, 전망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11월 <미당 문학제>를 개최하여 미당 문학상 시상식, 미당 백일장,
시 낭송제 및 각종 기념공연, 학술회의 등이 열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표적인 시, '국화옆에서', '선운사 고랑으로'을 읊으며 미당의 생애를 살펴본다
1915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출생
1936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으로 등단1941 '화사집' 발간
1948 '귀촉도'
1955 '서정주시선'
1961 '신라초'
1968 '동천'
1972 '서정주문학전집'
1975 '국화옆에서','질마재신화'
1976 '떠돌이의 시'
1982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3 '안 잊히는 일들'
1988 '자화상'
1991 '산시'
1997 '80소년 떠돌이의 시'
2000 12월24일 영면.금관문화훈장 추서
미당이 외운 세계의 산이름 목록 육필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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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 200장 분량. 총목록 1,625개,대륙별로 편집되어 있다.
'서정주 문학전집' (일지사,1972)를 출판기념회장에서
화가 천경자, 소설가 황순원과 함께.
그는 이른 봄날
선운사 동백숲에 피어난 동백꽃을 보러 선운사를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때가 일러 꽃구경은 하지 못하고 피지 않은 동백꽃을
아쉬워하며 막걸리집에서 막걸리로 마음을 달랬던 적이 있었나 보다.
그의 시 <선운사 동구>에 그 마음을 적고 있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동백호텔의 옛 이름은 동백장 여관이었다.
미당이 고향인 고창에 내려올 때마다 201호에 머물렀다.
들리는 얘기로는 그 막걸리 집 주모가 한국전쟁 때 죽었고 미당은
그 주모를 생각하며 <선운사 동구>라는 시를 지었다고도 한다.
미당은 돋움볕마을(안현마을) 산기슭에 묻혔다.
85년 동안의 인생, 그는 사람으로 태어나 시인으로 죽었다.
그리고 질마재 신화만 남았다.
선운리 마을 사람들은
마을 앞 바다에서 잡은 어패류를 지고 질마재를 넘어 장터에서 곡식과 바꿨다.
질마재란 이름도 등짐을 지고 넘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미당생가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578번지
미당은 1915년 음력 5월18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1942년 부친 서광한이
별세한 후, 친척이 거주,관리하면서 지붕을 스레트로 개조하였다.
1970년경부터 사람이 살지 않은 채 방치 되었다가
2001년 8월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미당이 아홉 살무렵 부안 줄포보통학교에 입학하려고
이사 가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다섯 살 때
내가 고독한 자의 맛에 길든 건 다섯 살 때부터다
부모가 웬일인지 나만 혼자 집에 떼놓고 온종일을 없던 날,
마루에 걸터앉아 두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가
다듬잇돌을 베고 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것은 맨 처음으로 어느 빠지기 싫은 바닷물에
나를 끄집어들이듯 이끌고 갔다.
그 바닷속에서는 안으로 안으로 안으로
초파일 연등 밤의 초록 등불 수효를 늘려 가듯 울음보를 늘여 가면서
침울해가는 내 주위와 밑바닥에서 이것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뛰어내려서 나는 사립문 밖 개울 물가에 와 섰다
아까 빠져 있던 가위눌림이 얄파라이 흑흑 소리를 내며
여뮈풀 밑 물거울에 비쳐 잔잔해지면서
거기 떠가는 얇은 솜구름이 또 정월 열나흗날 밤에
어머니가 해 입히는 중이적삼 모양으로 등짝에
가슴때기에 선선하게 닿아 오기 비롯했다
국화와 산돌 - 서정주
山에 가서 땀 흘리며 줏어온 산돌.
하이얀 순이 돋은 水晶 산돌을
菊花밭 새에 두고 길렀습니다.
어머니가 심어 피운 노란 국화꽃
그 밑에다 내 산돌도 놓아두고서
아침마다 물을 주어 길렀습니다. - 시집 ‘안 잊히는 일들’(1983)에서
생가 아래에 있는 이 초가집은 몇해전에 서울서 내려온 미당의 아우
구십이 넘으신 서정태선생이 살고 있다고 한다.
미당의 아우인 서정태 선생과 후손들은 4,052점의 유품을 기증하여
그의 시 세계를 시 문학관에 오롯이 담았다.
기다림 詩를 마지막으로 고창여행을 모두 마친다.
기다림/ 서정주
내 기다림은 끝났다.
내 기다리던 마지막 사람이
이 대추 굽이를 넘어간 뒤
인젠 내게는 기다릴 사람이 없으니.
지나간 小滿의 때와 맑은 가을날들을
내 이승의 꿈잎사귀, 보람의 열매였던
이 대추나무를
인제는 저승 쪽으로 들이밀꺼나.
내 기다림은 끝났다.
◆ 고창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사 나들목으로 나가
석교교차로에서 선운사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선운대로를 따라가다 용산교차로에서 우회전하고 곧 좌회전해서
구암교 앞에서 좌회전하면 아산초등학교다.
아산초등학교 뒤편에 두락암과 두암초당이 있다.
초등학교 급식실 뒤쪽으로 두암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용오정사는 고창 남쪽에 있다. 차량 내비게이션에 덕림리 마을회관이나
고창효자노인병원을 입력하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도솔암 내원궁 가는 길은 선운사에서 숲길을 따라 이어져 있다.
선운사에서 도솔암까지는 1시간이 채 안 걸린다.
도솔암에서 천마봉까지는 30분이면 넉넉하다.
미당문학관은 서해안고속도로→선운산 IC→서정주시문학관→선운사
고창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선운사행 버스를 타고 안현마을에서 하차
선운사에서 선운리, 안현마을로 가는 길은 7~8km 정도 되므로
시골향기 맡으며 걸어가도 된다.
삼인교차로 - 용선삼거리 - 선운리 - 안현마을로 찾아가면 된다.
사진및 편집 찬란한 빛/김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