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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와 소망
2015. 2. 8(주일낮예배) 다니엘 3:19-27
1951년에 세계 최초로 영국해협을 헤엄쳐서 왕복으로 건넌 사람은 플로랜스 채드윅이다. 33세의 나이로 영국해협을 왕복한 채드윅은 다음해인 1952년에는 미국 LA근처에 있는 카탈리나 섬에서 캘리포니아까지 35Km를 수영으로 건너는데 도전장을 던졌다. 그리고 카탈리나섬에서 출발하여 15시간을 헤엄쳤다. 15시간을 헤엄쳤다면 최소한 2끼의 식사도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먹지도 않고 수영만 한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수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생각도 하지 못한 안개가 드리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앞을 볼 수 없었던 채드윅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배위에 올랐다. 그런데 배 위에 오른 채드윅은 가슴을 치며 자신이 멈추어 선 것을 후회하였다. 왜냐하면 채드윅이 멈춘 지점은 목표에서 고작 800M 앞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가슴을 치는 채드윅에게 기자들이 와서 왜 실패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때 채드윅은 이렇게 대답한다.
추위 때문도 아니고, 피곤함 때문도 아니고, 안개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안개 때문에 목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2개월이 지난 후 채드윅은 다시 도전하였다. 그날은 물도 많이 차가웠고, 또 2개월 전보다 안개도 더 자욱하였다. 그런데 채드윅은 그 어려움을 이기고 성공을 한 것이다. 그때 기자들이 몰려와서 이번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까?하고 물었다. 기자들의 그 질문에 채드윅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번에는 제가 마음 속으로 목표지점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헤엄칠 수 있었습니다.
채드윅이 카탈리나 섬에서 캘리포니아까지 35Km의 먼 거리를 헤엄쳐 건널 수 있었던 것은 정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삶에 분명한 목표와 기대를 가지고 있는가? 전도서는 전무후무한 지혜를 가졌던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지었다. 그런데 솔로몬은 전도서 9:4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 9:4)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이 말씀을 쉽게 설명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동물의 왕이라고 하면 사자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자가 포효하면 주위에 있는 모든 동물들은 긴장하고 어깨를 움츠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자가 죽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죽은 사자는 그 어떤 위엄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죽은 사자는 살아있는 개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솔로몬의 말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런 기대와 소망이 없다면 죽은 사자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이 포효하는 사자가 아니라, 죽은 사자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 우리가 죽은 사자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열왕기상 19장을 보면 성경을 보면 로뎀나무 아래서 낙심한 엘리야의 모습을 보게 된다. 로뎀나무는 광야에서 자라는 나무이다. 뜨거운 태양아래 물은 부족하고, 또 광야의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 자란 로뎀나무는 키가 1M-3M 내외의 아주 작고 초라한 나무이다<사진 1,2,3,4>.
그런데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평가받는 엘리야가 그 작고 초라한 나무에 누워서 낙심하여 죽기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왜 엘리야가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소연 하고 있겠는가? 엘리야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갈멜산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 850명과 함께 기도대결을 펼친 것이다. 제단을 쌓고 제물을 올려 놓은 후에 기도하여 그 제단에 불이 내리면 그 신이 참 신이다는 것이었다. 먼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 850명이 기도를 하였지만, 전혀 기도에 응답이 없었지만, 엘리야가 기도할 때 제단에 불이 내려 제단의 제물을 다 태워버렸다. 그리고 난 후에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850명의 제사장을 기손시내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다 죽여버렸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을 죽인 것은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것이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 850명을 죽였을 때 당시 왕후였던 이세벨이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공적으로 선언을 한 것이다. 그때 엘리야는 이세벨이 자신을 죽일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낙심한 것이 아니었다. 엘리야가 낙심한 것은 자신이 꿈꾸던 세상이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것으로 낙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엘리야가 낙심하여 불평과 원망이 가득한 삶이된 것이 처음부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꿈과 기대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갈멜산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담대하게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증명하기 위하여 무릎 사이에 고개를 넣고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런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 보였고, 또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 850명을 처형하므로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세상이만들어 졌을 것이다고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 할 때 그 이세벨을 향하여 저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들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이러한 실패의 경험이 엘리야를 낙심한 사람으로, 아니 죽은 사자와 같은 무용지물의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소망과 기대를 잃어버린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저는 93년에 결혼하여 대연동에 1천만원짜리 전셋집에서 살았다. 그때 제가 받은 사례가 30만원이었다. 제가 87년도에 모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는데, 그때 교회에서 받은 사례가 30만원이었다. 그런데 7년이 지나 결혼을 했는데, 사례가 여전히 30만원이었다는 것이다. 그 30만원으로 생활을 하니 쌀독에 쌀이 떨어질 때가 있었다. 그때 유명한 사건이 많이 있다. 당시 수산대학을 다니면서 교회에서 생활하는 청년과 자취하는 청년들이 집에 와서 밥을 달라고 밥상을 두드리는데, 하필 그때 집에 쌀이 떨어진 것이다. 집에는 한 톨의 쌀이 없어 난감해 어찌할 바를 몰라할 때 한 청년이 쌀을 한가마 가지고 온 것이다. 고향에 갔는데, 엄마가 전도사님께 쌀 가져다 드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정말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가 당시에 많이 있었다. 그때 제가 아내에게 한 말이 조금만 기다려라 오빠가 강도사가 되면 잘 해 줄께! 였다.
그리고 강도사가 되었다. 강도사가 되니 사례가 120-130만원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아이를 3명이나 낳은 것이다. 그러니 주남이, 주혜 유치원비 내고, 주현이 우유값 내면 생활비는 여전히 빠듯하였다. 그때 제가 아내에게 한 말이 목사가 되면 좀 나아질 테니 한번만 더 참고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목사가 되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커서 이제는 학원비를 비롯하여 아이들 밑에 들어가는 돈이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때 서울에 사는 큰처제가 우리집 통장에 잔고가 하나도 없는 것을 알고 통장에 돈 100만원도 없이 불안해서 어떻게 사노? 하면서 핀잔을 줬던 기억이 있다. 부목사 시절에 우리는 빚없이 사는 것으로 감사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저는 아내에게 담임목사가 되면 괜찮을 것이다고 한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제가 담임목사가 되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제가 부자로 보이는가? 저는 전도사시절에 비교하여 볼 때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삶의 형편은 전도사 때나 지금이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변화되지 않는 자신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실망하고 이제 기대와 소망을 가지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삶에 변화가 없어도 우리는 기대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죽은 사자가 아니라, 초라하더라도 살아있는 개의 모습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기대와 소망의 삶을 살 수 있는가? 이제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두라평지에 금신상을 만들고 낙성식을 할 때 있었던 한 사건이다.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등 모든 관료들이 다 그 신상 앞에 설 때 악기소리가 나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관료들이 다 그 앞에서 절을 하는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절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갈대아 사람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고자질을 하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앞에 잡혀 오게 되었다. 왕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 자는 뜨거운 풀무불에 타서 죽어야 하는데, 지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러한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때 느부갓네살은 긍휼을 베풀어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사랑하여서 다시 악기 소리가 날 때 금신상 앞에 절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런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의 배려는 거절하였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 건져내실 것이다고 담대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리아니하실지라도 왕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느부갓네살 왕은 분노하여 이들을 결박하고 풀무불을 7배나 더하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또 느부갓네살은 군대 용사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풀무불에 던지라고 명령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 느부갓네살이 이들을 결박하고, 또 풀무불을 7배나 더하여 용사들에게 던지라고 명령하는 것은 혹시 이들이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분노한 왕은 내가 반드시 너희를 죽이리라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느부갓네살의 의지 앞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어떤 기도를 하였겠는가?
하나님 풀무불에 들어가면 끝장입니다. 풀무불에 들어가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보여주옵소서
아마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 기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풀무불은 7배나 더 뜨거워졌고, 또 이들은 결박되어서 용사들에게 붙들려서 풀무불 중앙에 떨어져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뜨거운 풀무불 가운데 떨어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이제 더 이상 기대와 소망은 다 사라진 것이 아닌가? 청소년사역자로 잘 알려져 있는 산울청소년교회 강은도목사님은 교회 다니는 아이들의 특징을 한가지 말하였다. 교회 다니는 아이들은 놀려고 하니 찜찜함이 있다. 친구들이 노는 것처럼 그렇게 놀면 하나님이 벌을 할 것같고, 또 그렇게 살면 안될것 같은 막연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공부를 하려고 하면 죽을 것만 같은 것이다. 그래서 교회다니는 아이들의 특징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어정쩡한 신앙과 어정쩡한 삶을 사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특징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모두가 절망이다고 하는 그 순간에 어쩡쩡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낙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더 하나님을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다니엘과 함께 환관장 앞에 서서 10일 동안 채식을 하겠다고 말할 때 가졌던 그 신앙, 두라평지에 거대한 신상 앞에 모두가 절할 때 똑바로 서서 절을 하지 않을 때 가졌던 그 신앙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하는 그 순간에 역사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도 이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본문을 보면 느부갓네살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불가운데 던진 후 그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3명의 청년을 던졌는데, 그 불안에는 4명의 사람이 보이는 것이다.
(단 3: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지금 이 구절은 우리에게 2가지의 의문을 주고 있다. 먼저 한가지는 3명의 친구는 모두 결박된 상태로 풀무불에 던져졌는데, 느부갓네살 왕이 볼 때 결박되지 아니한 4명의 사람이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3명의 사람을 던졌는데 풀무불 속에는 4명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상황인가? 분노한 느부갓네살왕은 뜨거운 풀무불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고통하며 죽는 것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세히 보는데,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결박이 풀려서 자유하는 청년들의 모습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 3명이 아니라, 4명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왕이 이들에게 풀무불에서 나오라 할 때 이들은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고, 왕 앞에 서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이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우리는 기대와 소망을 상황과 형편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상황과 형편이 변하지 않으니 점점 기대와 소망을 포기하는 무의미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뜨거운 풀무불 가운데 있어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결코 기대와 소망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예수님을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다 도망을 가 버렸고, 지금 예수님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비방과 조롱을 하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은 어떤 기대와 소망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아무런 기대와 소망을 가질 수 없었던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 아들이 죽었을 때 하나님은 이제 그 아들을 다시 살리시고, 부활의 첫열매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예수님은 연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을 능력의 하나님이 살려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함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 능력으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능력으로 연약한 우리를 살리시고, 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므로 기대와 소망의 삶으로 나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연약할수록 더욱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참된 기대와 소망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