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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예배할 때. . .
요한복음 4장 23-34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배 = 핫 스팟
스마트 폰에는 ‘핫 스팟’이라는 기능이 있습니다.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기지국에서 쏴주는 전파에 접속을 해야 하는데, 접속이 안 될 때, 그 접속을 가능하게 하는 중간 기지국역할을 하도록 핸드폰의 전파를 중계하는 무선 랜 기지국 기능을 하는 것이죠.
조금 더 쉽게 설명을 하면 좋을 텐데, 제 지식이 그렇게 밖에 되지 않습니다.
경험으로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이런 것이죠. 해외에 나갈 때면 저는 핸드폰에 데이터 로밍을 해 가지고 나 갑니다. 그래서 인터넷이 안 되는 곳에 가면 제가 ‘핫스팟’을 켜 줍니다. 그러면 아내는 빠르게 카톡도 보고 필요한 정보들을 습득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을 말씀을 시작하면서 우리의 예배가 삶에서 ‘핫스팟’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 핫 스팟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이죠. 그런데 우리의 힘이 고갈되고 힘들 때, 핫 스팟이 필요합니다.
핫 스팟은 두 가지 중요한 역할 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내 데이터가 바닥나거나 연결할 수 없을 때 핫스팟에 접속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주변에 접속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핫 스팟 기능으로 연결해 주는 것이죠.
‘예배’는 우리가 사는 삶에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도록 연결하는 기지국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하고 세속적입니까? 그런데 예배 가운데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배 안에서 ‘신령과 진정’이라는 전파가 나오고, 그 전파를 받으면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영적으로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들에게서 죽어 있던 영적 기
능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영’과 ‘진리’가 함께 나오고 있죠. 메시지
성경에 보면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예배여야 한다.”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진정한 영성이 발휘되는 것은 ‘진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일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연결되는 순간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비진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진리가 드러나면 죄를 넘어뜨리고 악한 권세들을 깨뜨릴 수 있는 권세가 생깁니다.
그러니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크리스천들에게 얼마나 중요할까요?
빛과소금교회에서는 예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예배를 준비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배를 강조하다 보니, 종종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만 드리면 뭐해?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아야지! 예배만 하고 다른 것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그런데 이런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분명하다면, 예배자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착가하기 때문이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마음대로 하십시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어떤 행동도 잘못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십시오! 그리고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의 삶은 절대로 진리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배시간이 아닌 때에도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과의 접속으로 인해‘충만한 진리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모이는 예배시간은 얼마나 충만한 시간이 될까요?
또한 그 충만함으로 인해 예배시간에 ‘full’ 충전된 우리들이 흩어지면, 우리가 서있는 모든자리에 ‘핫 스팟’이 켜지는 순간이 아닐까요?
예배는 우리의 삶이 가장 생생하게 영이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순간이요 장소입니다.
그러니 이 예배의 순간이 얼마나 떨리는 순간이겠습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배의 감격’이라는 것은 이러한 떨림이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요?
요즘도 저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할 때 아직도 떨리세요?"
저와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 물어보십시오. 제가 얼마나 떨며 예배를 준비하는지 말입니다. 몇 주 전 원고를 마무리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중에 다시 원고를 보고, 토요일에 다시수정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주일 새벽에도 수정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려고 나를 열어놓기 때문이지요.
적어도 저는 예배를 인도하기 몇 시간 전부터 말씀을 가지고 고민하고 씨름하며 준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하는 일은 예배를 돕는 일입니다. 사실 예배의 주인공은 여러분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여러분이 영적인 하나님께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오페라든 가장 비싼 자리가 어디입니까?
지휘자와 연기자, 연주자의 표정이 보이는 곳, 그들의 숨소리와 땀, 침이 튀는 곳에 있는 자리가 아닙니까? 왜냐하면, 그만큼 치열하고, 준비된 모습의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는 자리가 다 똑같지 않습니다.
치열한 예배자의 준비를 여러분이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다시" 할 수 없습니다. 재방송이 없습니다.
예배는 매 주일 생방송으로 진행됩니다. 그 순간이 가장 귀하고, 치열한 순간입니다. 그런 예배를 여러분이 조금이라고 생각한다면 예배의 시간과 자리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저는 목회자들에게 세미나를 인도하면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당신들 목회의 승부를 예배에 거십시오. 예배시간에 감격을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가 오늘 여기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예배자들이 각자의 섬김의 자리로 흩어질 때, 여기저기서 켜지는 핫 스팟으로 인해 이 세상이 영과 진리로 충만해 지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까요?”
예배할 때는 언제일까요?
오늘 본문 2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 말씀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에게는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소중한 예배시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께서는 ‘지금’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미국 베들레헴 침례교회 담임목사이자 유명한 작가이기도 한 존파이퍼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우주에는 두 가지 위대한 열정이 있다. 영광을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열정과 만족케 되려는 인간의 열정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는 상충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예배를 통해서 동시적으로 만족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때, 내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열정과 인간의 열정이 만나 만족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예배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트 설교원 자료 중에서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 중요한 사실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부끄러운 저의 경험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벌써 10년은 지난 일인 듯합니다. 제가 한참 예배에 관련된 세미나나 포럼에 강사로 불려 다녔던 때입니다.
생각나는 찬양이 있습니다.
지난해 11월에 한국 선교사 지도자 포럼이라는 대회가 있었습니다. 폐회 설교를 맡아용인에 있는 한 수양관에 가게 되었습니다.
상당한 규모의 중요한 집회라는 기사를 접하고 갔지만, 너무나 썰렁하게 남아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중요한 순서들이 끝나고 마지막 폐회예배만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멀리? 이 사람들 때문에?”설교를 시작하기 전, 상당한 경력을 가진 피아니스트 김애자 선교사님의 연주가 있었습니다. 정말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그분을 바라보며 “프로답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계속해서 제 마음에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나는 설교를 누구 때문에 하는가?”
연주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 많은 청중보다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 그 연주를 듣는가가 아닐까요? 옛날 궁정에서, 청와대에서 연주하는 사람들이 신경 쓰는 것이 사람의 숫자일까요?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런 생각을 주시더군요.
“여기에 내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제일 소중한 사람들이다!”거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신분을 모르지만, 갑자기 그분들이 가장 소중한 사람들로 변했고, 하나님 앞에서 설교한다는 떨림에 성실하게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는 생각, “나는 목사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우리를 실패자로 만들고, 예배에 성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눈에 보이는규모와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이죠.
다음은 페이스북에 댓글로 남긴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프로로 살게 해주셔^^ 개척 초기에 아내와 어린 아들 두 녀석과 함께 예배드리던 시절. 아들이 화장실에 가자며 엄마를 조를 때, 엄마는 두 아들을 다 데리고 나갑니다. 그때 홀로 단 위에 남겨진 나. 우두커니 그들이 오기만 기다립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내 설교가 끊여지지 않고 들어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좋겠다는 것을. 더도말고 덜도 말고 한 사람만 있어주면 좋겠다는 것을. 한 해를 시작하면서 예배를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의 핵심인 예배의 정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자들이” 오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지 못한다면,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지금 이 자리’가 예배자리가 됩니다.
그런데 영과 진리가 아닌, 우리의 조건이 예배를 좌우하면 지금 예배를 드리지 못할 많은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때로, 우리의 예배를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찬양 인도자, 설교자, 기도자, 찬양대가 맘에안 들어 예배를 방해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이‘영과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솟아나는 생각들과 우리 취향의 ‘호 불호’에 의해 좌우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배는 우리의 감정이나 선택에 의해 좌우 될 수 없는 ‘더 중요한 그 무엇’입니다.
김정주가 쓴 [안녕, 기독교]라는 책에 보면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저자가 군산에서 사역할 때, 꼭 가보고 싶었던 맛 집이 있었답니다.
전국의 5대 짬뽕으로 불리는 곳 중에 하나인 ‘복성루’라는 음식점인데, 늘 그 음식점을 지나갈 때면 여리고성처럼 사람들이 줄을 서서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늘 궁금했지만 가보지 못하던 그 집을 교회를 사임 하던 때, 함께 봉사하던 교사들과 함께 가게 되었답니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푸짐한 그릇에 짬뽕이 담겨서 나오는데 비주얼이 장난이 아니었다. 겸허한 마음으로 천천히 국물을 떠서 코로 냄새를 흠향하고 입으로 투척했다. 암스트롱이 달을 처음 밟았을 때의 그‘위대한 한 걸음’처럼, 내 혀는 우주적인 짬뽕에 착륙해 ‘위대한 한 걸음’을 맛보았다. 끝내주는 맛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함께 왔던 선생님들 중에 대부분이 그 음식점이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옆에 있으니까, 언제든지 올 수 있으니까, 그렇게 힘들게 서서 기다리면서 먹여야 싶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주변에 유명한 것들에 오히려 무감각한 것들이 많은 듯합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한강 유람선 타보지 않고, 63빌딩에 가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우리가 수 없이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렇게 많은 교회 활동을 하면서도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거나 감격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들도 그런 것은 아닐까요?
언제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으니까. . .
지금 이 예배시간이 아니어도 언제든지 은혜를 받을 수 있으니까. . .
언제든지 시간만 내면 혼자서도 기도할 수 있으니까. . .
‘지금’이 꼭 아니어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때’를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경험하는 것처럼, ‘초신자’들이 우리들보다 예배시간에 더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지금 그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요?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시간은 우리의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귀한 시간인데 말입니다.
우리가 그 소중함을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지난 해 논산훈련소에서 세례 받을 장병들에게 설교한 내용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군 생활을 시작하고 막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자대로 배치 받을 많은 젊은이들이 지금 이시간을 참 힘들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간이 이들의 인생에 피해갈 수 없는 때라면, 가잔 소중한 시간으로 지나야하지 않을까요?
어느 날 훈련소에 위문차 공연을 왔던 어떤 교회 청년부의 이야기입니다.
여자청년들이 나와서 노래를 하고 워십 댄스를 할 때는 눈이 초롱초롱 하던 병사들이 설교시간에 다 눈을 감습니다. 그런데 간증 순서까지 있으면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그 때 병사들의 눈을 뜨게 만든 하나의 간증이 있었습니다.
뇌성마비를 심하게 앓고 있는 한 남자청년이 군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소리 내기도 힘들어서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목소리로 말이죠.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처럼 군대에 가고 싶은 데 갈 수가 없어요. 제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에 와 있는 여러분들이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들인 줄 아세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지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가장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들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니, 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지만 모두가 주님의 은혜와 기적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가난한 심령’으로 간절하게 예수님을 찾는 사람에 게 만나주셨고 역사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혈루병 앓는 여인이 예수님을 만졌을 때입니다. 마가복음 5장 24절부터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죠.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예수님을 부딪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3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옷자락에 손을 대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셨습니다.
그녀의 절박함이 ‘이 때’ 예수님을 간절히 붙잡게 한 것이죠. 육신의 손이 아니라, 그녀의 영이 예수님과 교통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요?
마가복음 5장 34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오늘 우리들이 예배드리는 ‘이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때가 ‘지금 이 순간’ 이라면. . .‘이 때’는 늘 우리들 앞에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 때’가 늘 ‘이 때’라면 우리들에게 주어진 모든 날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삶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매일 예배를 드린다는 것, 매일 규칙적인 무엇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참 많이 ‘규칙적인 습관’을 만들기 위해 결심들을 해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운동’하기로 결심합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죠.
또한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눈을 맞추고 대화의 시간을 갖기로, 정기적으로 가정 예배를 드리기로, 혹은 정기적으로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기로. . .하지만 이런 것들을 지키는 것이 무척 힘들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키기 힘든 것들을 지키는 것이 결국, 나의 건강, 나의 가족, 나의 영성,나의 삶을 지켜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고 지키면, 그 지키는 것이 나를 지켜줍니다.
‘이 때’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우리가 참 많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시간이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절대적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에서 밀렸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나침과 시계’의 비유 같은 것입니다.
시계는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라면, 나침반은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우선순위를 정해주는 것입니다. 좋은 예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바로, 하나님의 나침반을 받고, 우리의 시계를 풀어 맡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나침반과 시계"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등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상을 향해 가는 길에는 나무가 빽빽하게 차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중간마다 나침반을 바라보며 방향을 확인합니다. 아들이 보기에 그 시간이 아까워 아버지를 재촉합니다. "아버지 빨리 가지 않으면 날이 밝기전에 정상에 오르지 못해요!"
산 깊이 들어갈수록 나무 때문에 방향은 보이지 않았고, 불안한 상황에서 더 이상 아들은 재촉할 수 없었습니다. 늦은 것 같았지만, 결국 나침반을 보며 부자는 정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정상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나침반을 주며 말합니다. "얘야! 시간보다 중요한 건 방향이야, 방향을 잘못 잡으면 산속에서 헤매다 죽을 수도 있어."이제 아들이 아버지에게 시계를 풀어주며 말합니다. "아버지 제가 스스로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시계를 보관해 주세요."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빨리 가는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가는 사람을 원하시기때문입니다.
[원칙 중심의 리더십]에서 스티븐 커비가 한 말이죠.
“원칙을 세우는 것을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원칙이 나를 지켜 줄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령과 진정이 중요하니 그 동안 예배를 위해 우리들이 정해 놓았던 규칙들이 무가치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규칙은 ‘온전한 사랑의 한결같은 헌신’이 수반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율법이나 규칙들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끊임없는 율법의 보완과 체계’가 신령과 진정의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예배의 정신을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의 [안식]이라는 책에 아주 중요한 글이 나옵니다.
“부단한 금욕생활도 안식일의 정신을 심하게 꺾을 수 있지만, 경거망동은 안식일의 정신을 아예 말살하고 만다.
창으로 보석을 세공할 수 없고, 보습으로 뇌를 수술할 수 없다. 안식일은 기분 전환이나 쓸데없는 짓, 불꽃놀이나 재주넘기를 하는 날이 아니다. 안식일은 갈가리 찢어진 살을 수선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하는 날이다.
존엄성을 상실한 노동은 불행의 원인이고, 정신이 없는 휴식은 타락의 원천이다. 실로, 금지 조항들이 있었기에 안식일의 위엄은 천박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놀라운 사실 하나는, 매일 매일 우리가 지켜나가려고 하는 것들이 쉽지 않지만, 가끔 하는 것보다는 매일 하면 할수록 더욱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아주 좋은 예가 될 듯합니다.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릴 때, 한 번 탄력을 받으면 기름을 많이 소비하지 않고도 앞으로 잘 나갑니다. 소위 말하는 연비가 좋아지는 것이죠.
브레이크를 밟을수록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성이 깨어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이 깨어 있다면, 예배하는 삶이 우리에게서 규칙적으로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 날까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이 보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죠.
아마도 그런 경험들이 있을 겁니다.
차를 바꿀 때가 되면 어떤 차를 사야할지 고민에 들어갑니다. 그러고 어떤 차를 살지 마음에 결심을 하고 나면 참으로 신기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길을 지날 때마다 여기저기서 ‘그 차’가 눈에 보인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그 차가 많아졌을 리는 없는데, 그 차가 눈에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종종 사용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간다!”‘때’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들어가는 자,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삶은 필연적으로 ‘감사’와 연관 되어 있습니다.
시편 100편 4절의 말씀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서면 ‘감사’가 생각납니다. 일단 감사를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로 인한 찬송이 시작되는 순간 깊은 교제로 들어가는 것이죠.
시편 기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궁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가만히 묵상해 보세요. 저에게는 ‘누림’이라는 단어가 생각납니다. 하나님과 함께 궁정에 거하는 순간은 우리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 아닐까요?
다윗은 시편 103편 2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혜를 잊지 말지어다
다윗은 그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은, 그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방법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이클이 만들어 집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임재 앞에 섭니다. → 하나님 앞에 서니 감사할 것이 참 많습니다. → 감사하니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찬송하며 궁정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제가 있습니다. → 이 놀라운 영적 경험
을 잊지 않기 위해 다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감사’가 생각나는 순간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서 가장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는 계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찬양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한 해를 시작하면서 힘들지만 우리들이 규칙적으로 할 수 있는 예배는 무엇인지 생각하고 결단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우리가 예배자로 살아가면서 이것만은 원칙으로 삼고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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