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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을 빼앗기지 마라
빌립보서 1:1~11 I.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려는가?
아동부 교역자가 주일 예배시간에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설교를 했습니다.
아이들 에게 물었습니다. “부자는 이 땅에서 부요롭게 잘 살다가 지옥에 갔고 나사로는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여러분 부자처럼 살기를 원해요 나사로처럼 살기를 원해요?” 물었더니 한 아이가 대답을 했습니다. “이 땅에서 부자로 살다가 죽어서는 천국에서 하나님하고 살래요.” 얄미운 대답이기는 하지만 정답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지옥처럼 살다가 죽어서나 가는게 천당인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천국 같은 세상에서 천국처럼 살다가 영원 한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위해서 글을 쓰고 가르치던 언론인겸 정치인 미국의 맥스 러너(Max Lerner)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가지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리면서 산다. 마음대로 생각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산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잘 먹고 잘산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불행하게 그리고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아간다”고 말했습니다. 마냥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야 할 여러분의 그 기쁨을 빼앗아가는 원흉이 있다면 그게 무엇입 니까? 세상의 모든 언론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역사상 가장 불행한 시대라고 선전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또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어제보다 오늘이, 과거보다 오늘이 더 기쁘고 행복한가? 그게 아니라면 오늘 나의 기쁨을 앗아간 원흉이 무엇인가? 빌립보서 강해 설교를 시작하고 네 번에 걸쳐서 설교 했습니다. 설교한 1:1~11은 인사 혹은 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빌 1:12~18 말씀은 본론의 시작 “기쁨”을 주제로 빌립보서 첫 어젠다는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가?”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무엇이든 성도는 기쁨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 환경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기쁨을 빼앗기지 마라”입니다. II. 내가 당하는 위기 – 큰 길이 되다.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에게서 기쁨을 빼앗고자 마귀가 던진 첫 번째 올가미는 환경이었습 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바울은 “나의 당한 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삶이 힘들어지고 내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갑자기 내게 밀어닥친 힘든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한 어떤 그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나의 당한 일”이란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감옥에 투옥된 상황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몸이라도 자유스러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전도자 바울이 아니더라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길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억울한 위기 상황 속에서 제일 먼저 터져나오는 건 불평, 원망이지요. 선한 일을 하다가 오해받고 모함을 당하고 손가락질을 당했다면 견디기가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하나님 뜻을 따라 내 생애를 던진 나를 5년 동안이나 감옥에 가두어 놓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 그만두자, 안 하면 될 것 아니야? 전도도 뭐고 깨끗이 포기하자! 이게 어려운 환경,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우리의 태도 아니었 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언제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취했던 우리의 자세에 아니었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을 통하여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형제들아” 너희들이 제대로 알기를 원한다. 사도 바울은 내가 어떤 위기 속에 있느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교회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할 터인데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도리어” 반전의 단어입니다. 역전의 단어 아닙니까? 악이 도리어 선이 되었습니다. 불리한 상황이 유익한 상황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위기가 기회가 되었습니다. 꽉꽉 막힌 커다란 태산이 복음전파에 큰 길이 되었습니다. 칠흑 같이 어두운 절망적인 상황이 찬란한 희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도리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 “진전”이란 말도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건설 현장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저기 산 위에, 저 멋진 산 밑에 멋진 빌딩을 지어야 되겠는데 거기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거예요. 공사가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그리 가는 길을 닦는 것 이게 “진전”입니다. 당시엔 전쟁용어, 군사용어로 쓰여지던 단어입니다. 본진이 진격해 들어가야 되겠는데 이게 탱크가 들어가고 본진이 들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공병대가 길을 닦고 다리를 건설합니다. 이것이 “진전”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 전세계에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했어요. 그런데 길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의 감옥에 갇힌 이 억울한 상황이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큰 길을 닦는 역사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진전”이라는 단어입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내가 감옥에 갇힌 것이 길 닦는 공병대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감옥이 나의 비전을 꺾지 못한다. 풍랑이 나의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세상에 그 어떤 환경도 우리의 기쁨을 빼앗지 못한다. 고난은 도리어 성도가 가는 길을 닦는 도로공사가 될 뿐이다. 지금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처하여 있다 할지라도 이해가 안되고 용납이 안 되시겠지만 여러분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여러분들이 나아가는 여러분에게 주신 것 그 꿈과 비전과 소원이 이루어지는 큰 길이 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에 위기가 오면 내 인생에 역전의 기회가 왔다. 그렇게 믿으라는 겁니 다. 내가 당한 일이 내 비전 달려가는 길에 도로공사를 하는구나. 그렇게 해석하라는 겁니다. 지금 사도 바울의 몸은 가둘 수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을 가둘 수는 없었습 니다. 요셉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거룩한 꿈을 형들은 찢으려했습니다. 땅 속에 묻으려했습니 다. 미디안 장사꾼에게 팔아버리려고 했습니다. 세상은 그를 감옥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꿈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찢을 수도 없고 묻을 수도 없는 겁니다. 여러분의 그 거룩한 꿈을 누구에게 팔 수도 없고 감옥에 가둘 수도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큰 길을 만드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16세기 영국 교회가 복음주의 전도자들을 몹시 박해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때 존 번연(John Bunyan)은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12년간 감옥생활을 합니다. 여기 감옥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리고 읽혀진 책 “천로역정”이라는 대작이 나오게 됩니다. 신구약 66권에 수많은 말씀이 나오고 얼마나 많은 사건이 기록되어져 있습니까? 누군가 나에게 “목사님 신구약 기록된 말씀 사건 가운데 목사님을 바꾼, 목사님 인생 여정에 가장 큰 힘이 되었던, 인생철학이 되고 목회철학이 된 사건이나 내용이 있다면 그게 무엇입 니까?” 묻는다면 한 두 가지 사건이 지나가겠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만 말하시오 라고 누군가 내게 말한다면, 모세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가데스에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낸 사건입 니다. 10명의 정탐꾼. 가나안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우리는 올라갈 수 없다. 올라가더라도 이길 수 없다. 그들은 거인이고 그들 눈에 우리는 메뚜기와 같았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살길이 없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곳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히 아름다운 땅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 땅은 우리의 땅이 되고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그들을 도울자가 없더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올라가자. 10정탐꾼은 북쪽을 보고 12명 정탐꾼은 남쪽을 본 게 아닙니다. 10정탐꾼은 어제를 보고 갈렙과 여호수아는 오늘을 본게 아닙니다. 10정탐꾼은 위를 보고 2명은 아래를 본 게 아닙 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상황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보는 눈이 달라요. 해석이 달라요. 입이 달라요. 가는 길이 달라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면, 저건 내 밥이다. 위기는 기회다. 내가 당한 일은 큰길 만드는 멋진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사건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제 설교를 오랫동안 들었지만 모르긴 하지만 가장 많이 들은 설교가 있다고 한다면 본문과 상관없이 이 사건입니다. 이게 내 믿음의 은사를 주었고, 이게 내 인생의 기회를 주었고, 내가 아무리 큰 위기를 만나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었던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 되었던 것 아니겠습니 까? III. 황실 시위대에 복음이 전해지다. 빌립보서 1:12절과 13절을 잘 살펴보십시오. 12절에서 지금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 있습니 다. 그런데 13절에 자신은 지금 감옥 안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분명히 몸은 감옥 안에 있는데 그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여 지금 여러분의 환경이 감옥에 갇혀있는 것처럼 절망적입니까? 꼼짝 달싹 할 수도 없이 묶여 있습니까? 숨쉬기도 힘든 상황입니까? 그러나 믿으십시오. 그리고 외치십시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위기 안에 산다고 말하지 마세요.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나는 세상 거인 앞에 메뚜기가 되었다고 넋두리하지 마세요. 이건 우리의 밥이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면,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느냐?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로마 교회 건설의 다리 공사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막막하기만 세계 선교의 길이 어떻 게 닦여졌습니까? 복음전파의 진전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13절입니다.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모든 시위대 안에 복음의 역사가 나타났다” 이 말의 배경과 뜻은 그렇게 쉬운 말이 아닙니 다. 여러분이 빌립보서를 읽다가 “모든 시위대 안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 말이 저절로 이해 되어지면 여러분 여기 앉아있으면 안 됩니다. 자리에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장로 회신학대학교 신대원 입학원서를 사셔야 돼요. 쉬운 해석이 아닙니다. 제가 조금만 설명을 드릴게요. “시위대 안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이 문장은 간단해요. 그러나 그 내용은 어마 무시한 사건을 말하는 겁니다.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기적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시위대란 궁중 황제와 함께 살며 황제를 지키는 친위대를 말합니다. 대통령 곁에 있는 경호실과 비서실을 다 합쳐도 비교가 안 되는 겁니다. 황제 유고시 시위대장은 계엄사령관이 됩니다. 계엄사령관은 시위대원 중에서 새 황제를 선임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우선 로마 군대 군인이 된다는 것 특별히 장교가 된다는 것 그 당시 출세 중에서도 최고의 출세입니다. 성공의 지름길입니다. 그런데 로마 군인이 되는 길은 다양한 길이 있습니다. 문제는 시위대는 아무나 될 수가 없습니다. 혈통이 좋아야 합니다. 가문이 좋아야 합니다. 건강해야 합니다. 최고의 학력을 가져야 합니다. 경력이 좋아야 합니다. 반동이 그 가문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어느 것 하나 흠이 있어서 갈 수 없는 게 시위대입니다. 그 중에서 도 가장 중요한 게 종교적인 자격입니다. 황제숭배 사상에 철저히 서 있어야 됩니다. 그들의 철학과 신앙과 영성은 황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어야 되는 겁니다. 전 세계는 로마로, 로마를 통해서 세계 시민이 구원을 받는 다는 로마의 자긍심을 지켜야 됩니다. 황궁에 사는 자기 자신들은 지금 신전에 살고 있는 신적인 존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위대가 지나가면 황제가 지나가는 것처럼 모든 시민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이들 가운 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생긴 겁니다. 황제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세주다. 이걸 믿는 사람들이 점점점점 생겼났다는 것입니 다. 시위대가 지켜야 할 VIP 죄수가 한 사람 들어오면 한 팀이 4명씩 구성되어 있습니다. 6시간 씩 4교대로 지킵니다. 한 사람 황실 감옥에 갇힌 죄수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하루에 16명이 교대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것도 가능한 한 밀착보호를 합니다. 조금이라도 옮기면 4명과 함께 죄수가 매여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는 “매임”이라고 했지만 에베소서 6:20에서는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시위대의 팔과 사도 바울의 팔이 함께 묶여 있었다는 겁니다. 이 16명도 뇌물이나 설득이 있으면 안되겠기에 수시로 교대로 되어집니다. 16명 10번만 바뀌면 160명입니다. 시위대는 만명 내외가 되는 군대였습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사도 바울 곁에서 하루 동안 지내는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이 생겨납니 다.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 곁에 가서 밥 한그릇만 먹으면, 대화만 몇 번 하면 바이러스가 감염될 수 있잖아요. 바이러스보다 더 강력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도 바울의 복음전도였다 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전도자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가만히 있는데 황실 시위대가 하루에 16명씩 계속해서 바뀌어지면서 찾아오는 겁니다. 하루 종일 복음을 전했던 것이지요.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의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세계 선교의 길을 닦는 기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복음의 진전이라는 단어로 시위대 안에 볶음이 전해졌다는 말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 후반절에 보면 바울은 자신의 감옥에 갇힌 사건을 통해서 황제 시위대에 복음이 전해 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투옥되고 재판을 받는 사건을 통해서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라고 기록합니다. 그 밖의 모든 사람,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의 사람이 누구일까요? 이름을 밝히기 어려웠던 로마 황실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 당시 편지에 쓸 수 없는 기타 등등의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베스도 총독 아그립바 대왕 로마 황궁으로 끌려다니며 재판을 받습니다. 재판을 받는데 내가 얼마나 억울한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소명을 하기보다 복음을 전합니다. 그랬더니 총독이 “바울아 네가 공부를 많이 하더니 미쳤구나”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재판을 보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황실 가족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로마가 기독교 를 공인하고, 로마에 기독교가 국교가 되어지는, 전 세계에 복음이 전해지는 길이 되었으니, 이 엄청난 큰 길을 닦는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더냐? 그 얘기입니다. 기타 등등 그 외에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고 말합니다. 사람 여러분! 여러분의 어떤 상황이 여러분의 기쁨, 행복을 앗아갑니까? 지금 여러분이 “당한 일”은 무엇입니까? 질병이 여러분의 기쁨을 빼앗아갑니까? 사업의 실패가 여러분의 행복을 앗아 갔습니까? 여러분의 손발을 묶고 있는 어떤 사건이 있습니까? 아니면, 문자 그대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고 있습니까? 울화통이 터져 죽을 지경입니까? 오늘의 그 형편이 내일로 달려가는 공병대가 길닦는 역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꼼짝달싹 할 수 없는데 여러분을 돕는 시위대가 물밀듯이 밀려오는 역사가 되시길 바랍니다. 한 번도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기적 같은 기타 등등 은혜의 진보가 이 시간 있으시길 바랍니 다. 지금 방영되고 있는 주말연속극 “현재는 아름다워”하는 연속극이 있습니다. 저도 가끔 보는데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극히 정상적이라서 그냥 재미로 볼만해요. 그 연속극에 보면 주인공 이름이 현재에요. 그 애인 이름이 미래에요. 그래서 현재와 미래가 연애를 하는데 결혼의 위기에 부딪힙니다. 그리고 결혼을 아마 꼭 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현재와 미래가 결혼해서 애기 낳고 잘 살 거에요.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현재가 어떤 위기라고 할지라도 미래를 만나서 키스를 하고 결혼하 게 되고 애기 낳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현재가 미래를 만나야 합니다. 이게 오늘 본문에 사건입니다. IV. 기회는 위기의 탈을 쓰고 온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또 다른 삶의 환경이 나옵니다. 바로 인간관계 즉 사람 관계입니다. 한 집에 살다보면 사람에게 실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신뢰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사람 관계는 가까울수록 서로 예의를 지키고 조심스럽게 대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결혼 예식은 거창하게 준비를 하는데 결혼 생활은 전혀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기를 맞는 겁니다. 사람 관계는 보석처럼 소중한 것이기에 소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이루어진 사랑, 완성된 인간관계는 없습니다. 매일 농사를 짓는 것처럼 한송이 소중 한 꽃을 가꾸는 것처럼 햇빛과 물을 주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옆자리 남편, 아내 힐끗 쳐다보며 “이 인간아 물주라고 하잖아! 이 인간의 햇빛 좀 비추라고 그러잖아. 아니야 너 보고하는 소리야!” 네가 물주라고! 네가 햇빛이 되라고! 그 얘기입니다. 소중했던 인간관계가 뒤틀려 질때마다 스트레스가 되고 각종 질병이 찾아옵니다. 특별히 인간관계 갈등으로 일어나는 질병이 간질환, 위장 질환입니다.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원흉이 인간관계라는 겁니다. 가정 안에서, 교회 안에서, 직장에서 친구관계에서.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면 잘못된 인간관계와 인간관계를 잘 못하는 유형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상대를 이용하는 걸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친 집착을 깊은 애정이라 고 말합니다. 상대를 조종하고 통제하는 걸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핸드폰 뒤지고 메모지 뒤적거리고, 선의의 거짓말 한번 넘어가 주지 못하고 머리카락만한 일을 모두 콩알 세듯 따지면서 자신은 섬세한 사랑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 병적인 사랑이다. 그렇게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물론 상대방에게 불신을 준 사람도 잘못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내가 위기를 만났을 때에 감사하게도 내 빈 자리, 내 약점을 채워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런 일로 너를 사랑하노라고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내 빈자 리 내 약점 채워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이런 사람들을 “이들”이라고 설명합니다. 14절에서 이들은 바울이 투옥되자 바울이 하던 일을 “겁 없이 담대히 감당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을 사랑해서 힘든 줄도 모르고 무서운 줄도 모르고 심지어 죽을 줄도 모르고 겁 없이 담대하게 행했다. 그래서 “이들”을 설명했다는 틀림없이 이들 이들 이들입니다. 반면, 내가 어려울 때에, 내가 지쳐 쓰러져 있을 때에, 내가 옥에 갇힐 때에 그 틈을 타 나를 짓밟고 내 것을 빼앗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의 것을 빼앗아 자기에게 주었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팝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17절 “그들”이라고 바울이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옛날 번역에는 “저들”이라고 표현하고 있 습니다. 동역자가 돌변해서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설명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같으면 아마 모르긴 하지만 오늘 본문을 그 인간들이 누구인지, 그 인간들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 얘기를 기록하는데 다 할애해 버렸을 것 같아요. 그러나 “그들” 이란 단어 하나로 끝내버립니다. 무슨 얘기일까요? 그들을 설명을 가치조차 없다는 겁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내 머리에도 기억조차 하지 않는다. 기록조차 남길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로 끝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이르러 결론을 내립니다. 예수님이 괜찮다면 이 모든 상황으로 길이 닦여지고 기회가 만들어진다면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It’s OK with Jesus Christ! 예수님이 괜찮다면 나도 괜찮다.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내가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릴 때 태클거는 놈들, 풀숲에서 똥 누는데 주저 앉히는 놈들, 내가 엎어져 있는데 꼭지 차는 놈들... 참 용서하기 힘든 놈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 까? 내가 그들 때문에 기쁨을 빼앗기고 불행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갚아야 한다면 하나님이 갚으실 것입니다. 내가 한 일은 잊어버리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나는 예수님만 자랑하면 되는 겁니다. 괜찮아! It’s OK with Jesus Christ!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 살면서 내가 어떤 일을 당하고, 누구를 만나 어떤 상황에 던져져도 내가 예수안에 있다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그는 반드시 새로운 기회가 될 것입니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시각이 있어야 됩니다. 믿음의 시각입니다. 신문의 시각 말고 내 감정이 시각 말고 내 기분이 주인이 되는 그런 속물 말고 믿음의 관점이 내게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인생의 기회는 위기라는 탈을 쓰고 나타납니다. 축복은 위기라는 보자기에 쌓여서 오는 겁니다. 그걸 보는 눈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세찬 바람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맞바람이 불어야 힘찬 비상이 가능한 겁니다. 비상 상황은 당신이 비상의 기회가 되는 것입 니다. 죽은 통나무는 물결에 둥실둥실 떠내려 가지만 살아있는 피래미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죽어 있으면 성경적인 시각이 죽어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식어져 있으면 세상 물결 속에 둥실둥실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당신의 믿음이 살아있으면 물결을 거슬러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자동차 레이싱에서 직진 코스에서 역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역전은 언제옵니까? 위기의 코너링에서 역전은 가능합니다. 잘못 돌면 차가 뒤집어집니다. 이때가 오히려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전세계 도처에서 경제 위기 상황이 발발하고 있습니다. 부의 순위가 바뀌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회를 만드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당한 일이 크면 클수록 믿음의 눈을 크게 뜨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큰 길을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기쁨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기뻐하 고 또 기뻐하며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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