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서한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
니다.” (요한 17,23)
상해에서, 1849년 5월 12일
그리스도 안에 지극히 공경하고 경애하올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님께
귀양살이 하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신부님께 서한을 올립니다. 아직도 우리의 서원과 희망이 이루어
지지 않고 있습니다. 언제나 언짢은 소식만 전해드리게 되니 저로서도 서글프고 이 소식을 들으시는
신부님의 마음도 틀림없이 무거우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찾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비록
우리의 계획이 성공하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우리는 모든 것이 실패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우리
는 죽어 없어질 것들이나 우리 자신을 위해 열망하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 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우리의 도움이 아쉽지 않은 분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이고 우리의 구세주이며,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우리도 겸손하
게 크나큰 고난을 참아 받은 다음에야 열매를 맺도록 미리 정해두셨습니다.
우리의 기대가 이루어지기를 참고 견디는 것은 잠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탄원하는 우리
의 항구심도 아직 짧습니다. 얼마나 많은 성인들이 단 한 사람의 죄인의 회개나 어떤 특별한 은총을
얻기 위하여 10년, 20년, 30년, 40년 또는 더 오랜 세월 동안, 열렬한 기도와 크나큰 희생과, 힘들고 지
루한 극기와 보속을 하느님께 바치셨습니까? 참으로 이러한 모범을 묵상하는 때에 저는 어떤 정신으
로 고무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저는 천상의 도움을 애원하는 데는 너무나 소홀하였고, 인간적인 희망에 너무 의존하였으며,
또한 무수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제가 우리에게 오는 하느님의 자비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듯합니다.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 저의 주님이시여, 만일 제가 당신 분노의 원인이라면 저를 바다 속 깊이 던져
주시고, 당신 종들의 참상을 불쌍히 여기소서. 본시 저는 아무것도 아니고, 치욕을 당하며 사람들에게
밝히는 것 외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당신의 작품입니다. 저는 당신 안에서라야 겨우 당신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체하는 것뿐이랍니다. 오로지 저에 대한 당신의 지극히 거룩하신 뜻이 제 안에서 저
를 통하여 저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방금 우리는 두 번째로 해로 원정을 시도하였습니다. 지난 1년 내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허송세월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재작년에 우리가 파선했던 고군산도에 저의 이종사촌 형이 거룻배를 가지고 와
서 여름 내내 우리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라 피에르 함장이 조선 정부에 편지를 썼을 때 그 해안에 반
드시 다른 함선들이 그곳에 올 것이라고 거듭거듭 확고하게 다짐하였습니다. 그 소문을 전해들은 우
리 신부님들과 신자들은 우리를 마중하기 위하여 사소한 것까지 챙겨 빈틈없이 대비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끔찍한 위험과 곤경을 겪었겠습니까?
만일 우리 편에서 좀 더 주의를 기울이고 좀 더 현명하였더라면 틀림없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미리 대
책을 강구할 수 있었고 또 강구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라 피에르 함장이 그렇게 편지를 쓴 것
을 알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즉 우리 신부님들이 그런 정보에 따라서 그 기회에 우리를 입국시킬
만반의 준비를 할 것이라는 것을 상당히 쉽게 예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배를 여기 상해로 인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리 서로 연락이 닿지 못
했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습니다. 여하튼 하느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
소서.
금년에는 양편에서 미리 약속하고, 우리 마카오의 선박 한 척을 타고 백령도로 향하였습니다. 이곳은
우리의 친애하는 자랑스러운 전우였고, 지금은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충실한 천상 수호자가
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되었던 곳입니다.
계절이 꽤 나쁜 때였으므로 위험과 노고가 없을 수 없습니다. 사슬이 끊어지고, 닻은 잃어버렸으며,
선장은 함선 전체를 파선 당하게 할까봐 조바심을 냈습니다. 무진장 애를 쓴 끝에 우릭 그토록 찾고
바라던 포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발짝도 상륙하지 못하고 곧 후퇴하여 나와야 했을 때 우리
마음은 얼마나 비통했겠습니까!
우리의 선장은 어떤 영국인이 작성한 해도를 따라서 항해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해도에 그려진 섬을
찾기는 하였으나, 그 해도가 정확하지 못하여 잘못 그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앞에 처음으로 나타
난 섬들 중의 하나는 그 해도에 보면 ‘교도(Kiaotao)'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섬으로 내려
가서 그곳 주민들에게 그 섬의 이름과 위치를 물어보았는데 (이름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
었습니다. 이 섬이 정말 다른 섬인지 또는 섬 주민들이 우리를 빨리 따돌리려고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곳만이 아니라 그 해도에 백령도라고 적혀 있는 다른 섬에 가보아도 중국 배건 조선 배건
아무 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 안드레아 신부의 보고에 의하면 이 섬에는 많은 산동 어부들이 떼
를 지어 모이므로 그곳에 가면 어김없이 큰 선단을 만나게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입니다.
하여간 이제 우리는 극도의 궁지에 빠졌습니다. 전혀 알 수 없는 생소한 곳이요, 지극히 위험한 곳이
었습니다. 닻을 내릴 수도 없고 안내자를 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어떤 조선 사람이라도 외국인에게 심
부름을 하기 위하여 접촉하는 것이 엄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장은 라 피에르 함장이 당했
던 것과 같은 운명을 당할까봐 시시각각으로 조바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무 대책도 없었습니다. 인간의 도움은 더 이상 전혀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성녀께 구원을 청했습니다. 우리 모
두를 온전히 하느님의 자애로우신 섭리에 맡길 따름이었습니다. 경황없이 허둥대는 동안에 어느덧
함선은 이 불길한 지역에서 멀리 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상해에서의 귀양살이로 되돌아와 있습니다. 아마 우리를 영접하러 오던 저 가련한 신
자들이 포졸들의 손에 붙잡혔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우리 포교지 전체가 또다시 박해자들의 참혹한
광란으로 마구 난폭하게 짓찢겨졌는지도 모릅니다.
또 한 가지 심히 우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프랑스 함선이 또다시 나타났기 때문에 조선 정부에서 신
자들이 크게 격분하여 분풀이를 할는지도 모릅니다. 이때까지는 프랑스인들에 대한 공포 때문에 감
히 신자들에게 분노를 터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많은 말로 단단히 약속을 하고서도 지난
2년 동안 아무 군함도 조선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늦어지는 것에 대해 프랑스 정부 측에서는
아무런 해명도 없었습니다. 또 이렇게 오랜 시일이 경과하여도 파선한 군함들의 잔해들이 물속에서
썩도록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조선 정부는 아마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저 프랑스 놈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괜히 힘이 센 체하고 우쭐대더니 실제는 약속도 못 지키는 자들이다. 입으로만 큰 소리 치지만 실제
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다시는 안 올 것이다. 장차 우리에게 아무 것도 못할 것이다. 자, 때는 왔다.
천주학쟁이들을 깡그리 박멸하자. 다시는 움트지 못하도록 씨를 말리자. 프랑스 군함을 우리나라에
끌어들인 것이 바로 그자들이다. 우리 가운데서 저들을 치워버려도 우리는 프랑스로부터 아무런 보
복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판단할 것입니다.
전형적인 그리스도 국가인 프랑스는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이미 시작한 좋은 일을 계속하기 바
랍니다. 만일 우리에게 최후의 파멸이 닥쳐온다면 확실히 프랑스 정부의 의도에 반대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프랑스 정부가 그 원인이 된 것입니다.
저희의 모든 희망이신 자비하신 주님, 저희에게 재난을 물리쳐 주시고, 영광스러운 프랑스 공화국에
서 치욕을 물리쳐 주소서.
금년에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다시 한 번 육로로 다른 길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며칠 후 페레올
주교님께서 지시하신대로 요동으로 떠나겠고, 다가오는 겨울에는 변문으로 가겠습니다. 제가 거룩한
순명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하였더라면 저는 벌써 우리 포교지인 조선에 들어가 있거나 그렇지 아
니하면 순교하여 저 세상에서 우리 신부들 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
고, 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저의 장상이 명하시는 것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만 붓을 놓으면서 다음 번 서한은 조선에 들어간 후에야 신부님께 올리기로 다시 한번 약속합다.
고마우신 신부님을 통하여 모든 신부님들에게 특히 우리 지도자이신 바랑(Baran) 신부님께 우리의 머
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늑방 안의 심장으로부터의 순명과 인사의 문안을 드립니다.
이 자리에서 마레스카(Maresca) 주교님과 예수회 회원 신부님들의 지극히 자상한 보살핌에 대하여 우
리 신부님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회 회원 신부님들께서는 제가 아주 오랫동안 체류하면서 융숭
한 대접을 받아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저 혼자서는 그분들에게 합당한 인사를 드리기에 부족합니다.
경애하올 우리 신부님들께서 저의 가난함을 대신하여 사례하여 주십시오.
사백주일(부활 제2주일 4월 15일)에 지극히 공경하올 마레스카 주교님으로부터 저는 사제 서품을 받
았습니다. 제가 그토록 고귀한 품위에 언제나 합당한 자로 처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의 미천함과
연약함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크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너그러우신 하느님의 자비로 그 짐은 아주 감미롭고 고무적인 것인 만큼 지극히 무능
하고 가난한 제가 날마다 지극히 존엄하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미사성제를 드리고 온 세상의 이루
다 평가할 수 없는 값진 대가를 날마다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권능을 수여받았음은 큰 위로입니다.
이제 저에게 주어진 본분은 하느님 앞에서 모든 신부님들과 저의 동료들을 더 자주 더 열렬히 기억하
는 것입니다. 신부님들과 저와 우리 불쌍한 포교지를 위하여 같은 일을 하고 계시고 또 하실 것이라
고 믿습니다.
공경하올 스승님께, 그리스도의 가장 미천한 종이며 신부님의 부당한 아들이고 쓸모없는 조선인 탁
덕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