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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곽 답사 기행
1. 서울성곽
서울 성곽은 과거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을 둘러쌓고 있는 도성이다. 오랜 역사성과 함께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둘레는 약18.6km, 면적은 59만6812㎡이다.
서울 성곽은 1396년(태조5)부터 축성을 시작했다.
성벽은 백악(白岳▲342)·낙산(駱山▲125)·남산(南山▲262)·인왕산(仁王山▲338)의 능선을 잇고 있으며, 길이는 영조척(營造尺)으로 5만9500자이며 이 길이를 천자문(千字文)의 97자(字) 구획으로 나누고 매자구간(每字區間) 600자로 하여 백악의 동쪽으로부터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막음은 백악 서쪽의 조자(弔字) 구역으로 끝났다.
이때 쌓은 성벽은 석성(높이 15자) 1만9200자, 평지의 토성 4만30자이며, 수구(水口)에는 홍예(雲梯)를 쌓고 좌우에는 석성을 축조했다. 1396년 정월부터 팔도 각지에서 모인 12만 명으로 성곽 축조 공사를 시작했다.
성에는 四大門(동대문―興仁之門, 서대문―敦義門, 남대문―崇禮門, 북대문―肅竫門)과 四小門(동소문―惠化門, 서소문―昭義門, 남소문―光熙門, 북소문-彰義門)8개의 문을 냈다. 이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소실되어 그 터만 남았고, 흥인지문(동대문)만은 옹성으로 쌓았고, 숙청문(숙정문)은 암문(暗門)으로 하여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남대문은 1396년, 동대문 옹성은 1399년 완성되었다. 서울성곽은 오랫동안 밖으로는 외적의 공격을 막고 안으로는 왕권의 위엄과 권위를 보여줌으로서 나라의 안정을 꾀하는 역할을 하였다.
2. 서울과 성곽의 시초
조선 태조는 1394년 무학대사와 함께 직접 현장을 시찰한 다음 지금 서울지역으로 천도하도록 결정했다. 정도전을 한양에 파견하여 도시건설 전체를 맡겼고 정도전은 건중화와 협력하여 종묘, 사직, 궁궐, 시장 등에 대한 도시 계획을 세웠으며 1395년 9월 신도읍 공사를 완료하였다.
이후 바로 도성 축조를 위한 임시기구인 도성 축도도감을 설치하여 도성 축조 기본계획을 세우도록하고 성터 측정을 명령하여 실행하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돌이 많은 산등성이는 석성으로, 흙이 많은 평지는 토성으로 하여 쌓았으나 토성은 비에 약하여 훼손되어 지속적인 정비를 계속하다가, 세종대왕 때 도성 수축도감을 설치하여 전국에서 32만명에 이르는 군인들을 징발하여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아 성곽을 튼튼히 하는 공사를 진행하였다.
성곽은 천재지변이나 임진왜란 같은 전쟁을 거치면서 무너져왔으며 개축되기를 반복하다가 숙종30년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3군영을 동원하여 6년간 개축공사를 하였다.
영·정조 이후에도 개축은 지속되었으며 19세기 말 일본의 침략으로 성곽은 크게 훼손되었다. 또한 전차를 놓으면서,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6.25이후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보존보다는 훼손의 정도가 심해졌다.
3. 성벽의 축조기법
1) 태조때의 성벽
자연석을 거칠게 가공하여 아래쪽은 넓은 돌을 놓고 위쪽으로 갈수록 작은 돌로 쌓았으며 위로 갈수록 조금씩 들여쌓는 방법을 썼으며, 현재 남산지역 일부에서 볼 수 있다.
2) 세종때의 성벽
석재가공을 하여 아래쪽은 장방형으로 된 돌을 쌓았고, 사이 사이에 잔돌을 섞어 위로 갈수로 안쪽으로 들여쌓는 공법을 썼으며, 돌의 모양에 따라 깍아서 틈을 없애는 그렝이 기법이 일부 사용되었다.
3) 숙종때의 성벽
한변이 45센티미터 정도로 정방형에 가깝게 규격화하여 쌓았으며, 일부에서는“ㄱ”, “ㄴ” 자모양으로 가공하여 석재간 마찰을 늘려 성벽을 튼튼히 하기 위해 다듬어서 사용한 곳도 있다. 이 때는 거의 수직에 가깝게 쌓았다.
4. 성곽의 구조물
1) 4대문과 4소문
동서남북 4방위마다 각1개의 대문을 건설하고 그사이 통행의 편리를 위하여 4개의 소문을 설치하였다.
이4대문에는 유교에서 말하는 사람이 지켜야할 5가지 덕목인 5상(仁義禮智信)에서 글자를 한자씩 가져와 각문에 붙였다. 동쪽을 뜻하는 仁은 興仁之門에, 서쪽을 뜻하는 義는 敦義門에, 남쪽을 뜻하는 禮는 崇禮門에, 북쪽을 뜻하는 智는 肅竫門에 빠졌고 탕춘대성의 弘智門에 붙였으며 信은 普信閣에 붙어있음을 볼 수 있다.
四小門은 북동쪽의 惠化門 동소문, 북서쪽의 彰義門 북소문, 남동쪽의 光熙門 남소문, 남서쪽의 昭義門 서소문이 있다.
2) 협축성과 편축성
협축성은 주로 평지에서 성곽 양쪽을 석축이나 흙으로 쌓은 것으로 중국의 만리장성이 대표적이고, 편축성은 산지가 많은 지역에서 한쪽만 석축을 쌓고 그 뒷면을 잡석이나 흙으로 채워 보강한 것으로 그 대표적이 서울성곽이다.
3)체성과 여장
체성은 성의 몸에 해당되는 부분이며 여장은 공격용 창이다.
체성은 겉으로 드러난 성벽과 그 뒷면에 채워진 돌이나 흙도 포함된다. 겉으로 드러난 벽의 석재를 면석이라하고, 면석을 받치고 있는 아래의 석재를 “기단석”이라한다. 면석 뒤 보이지 않는 곳에는 가공하지 않은 잡석으로 쌓아올리는데 이를 “뒤채움석‘이라 한다.
여장은 체성위로 올려진 낮은 담장을 말하며 성밖의 상황을 살피고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여장에는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3개의 구멍를 설치하는데 양쪽 2개는 원총안으로 구멍을 수평으로 하여 멀리 있는 적을 공격하기 좋게 하였으며, 가운데 구멍은 근총안으로 구멍을 아래쪽으로 향하게 하여 가까이 있는 적을 공격하기 좋게 하였다.
4) 곡성과 치성
성곾의 일부를 바깥으로 둥그렇게 돌출시켜 쌓은 성을 말하며, 관측소나 포대를 설치하기 위한 시설로 방어상 중요한 지점에 설치하였다. 서울성곽은 백악산과 인왕산 2곳에 설치하였으나 인왕산에 설치된 곡성은 군사시설로 인하여 들어가 보기가 곤란하다.
5) 암문과 수문
암문은 대문과 소문사이에 성곽이 굽어진 바로 뒤에 설치하여 평소에는 잘 막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는 비밀문으로 사용하였다. 전쟁이나 비상시 밖으로 통하는 비상구의 역할을 하였다. 서울 성곽은 개축을 하면서 8개의 암문을 설치하여 일반인의 통행을 위한 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 서울특별시는 서울을 둘러쌓고 있는 서울 성곽 복원과 함께 서울 성곽길을 조성하고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는 서울의 개발에 따른 훼손으로 사대문 안 전체를 등재하기는 곤란하다고 판단해 역사 도시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서울 성곽 등 조선시대 도성과 도성 방어 유적을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추진 대상으로 선정하여 추진하였다.
서울 성곽이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대상으로 선정된 이유는 서울 성곽이 세계에서 최장기간 도성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보존 상태도 비교적 좋았기 때문이다.
서울 성곽 답사 구간 간략도
(그림의 구간대로 하지 않고 우리 사정대로 답사하였음)
■ 1코스 북악산(백악산)코스 : 숙정문 ~ 창의문 (2012.8.1일)
서울시청 - 삼청공원 - 숙정문 - 곡장 - 청운대 - 1·21사태 소나무 - 백악마루 - 백악산 정상 - 창의문
1코스는 서울시청 지하철 3출구에서 만나서 광화문을 지나 북촌 한옥마을 옆을 지나 산림이 우거진 삼청공원으로 들어섰다. 기온이 32도 이상 되는 날이라 그런지 말바위에도 바람이 한 점 없는 찝통 더위가 아침부터 지속되었다. 이 구간은 계속하여 오르막 계단으로 형성되었으며, 초소 근무하는 병사 외는 거의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으나 창의문에서 출발하여 반대로 오는 사람을 몇 명 정도 만날 수 있었다.
이 길은 성곽 안과 박으로 통하는 나무계단이 있으며 여기에 서울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조망대가 설치되어 많은 사람이 조망할 수 있게 되어있다.
성곽 안쪽으로 걸으면서 성북동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나무계단을 통하여 밖으로 나오면 삼청각까지 길이 이어진다. 이 구역은 군부대가 밀집한 통제구간으로 패찰을 달고 걸어야 한다. 패찰을 받기 위해서 숙정문 탐방안내소에 들어가서 신분 확인을 하고 패찰을 달고 걸어가면서 성 바깥쪽을 보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는 성곽과 나무들을 볼 수 있었으며 오늘 따라 더욱 한적함을 느끼게 한다.
말바위 쉼터에서 300m쯤 가다 보면 숙정문이 보인다. 사대문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1396년(태조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숙정문은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 했었다. 이후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숙정문위에 올라 주위를 보고 나서 길을 따라 곡장으로 향하였다. 소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따라 지나 한참 걸어 곡장으로 들어가 서울 뒤쪽을 조명하였으며, 여기서는 백악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과 높게 쌓아올린 성곽의 바깥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곡장이란 적을 살피고 성벽을 오르는 것을 좀 더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과거 평탄한 지형에는 치성을, 산세가 험한 곳에는 곡장을 설치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시설인 만큼 지리적으로 입지가 아주 좋아 주변 전망을 관람하기에는 종은 위치인 것 같다.
등산로는 곡장에서 내려서면 평탄한 길이 나오며 이후 암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다가 다시 성 안으로 들어오도록 되어 있었다.
한참을 올라가다 1.21사태 당시 적군과 교전이 버러진 장소로서 총탄이 박힌 흔적이 있는 소나무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인 1.21사태 소나무다. 여기에서 잠시 사진을 찍고 계속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 백악산 정상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도 병사가 주위를 살피고 있었으며 바위에 올라가서 기념사진을 찍고 창의문을 향하여 내리막 길을 따라 내려왔다. 경사가 급한 내리막이며 돌고래 쉼터를 지나 조금 더 내려와서 창의문 탐방안내소에 도착하여 패찰을 반납하고 밖으로 나서면 창의문이 한눈에 들어온다. 창의문에 올라가서 내부를 보고 다시 내려와서 빈 의자에 앉아 막걸리 한잔으로 갈증을 풀었다.
창의문은 북문 또는 자하문으로도 불린다. 1396년(태조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의 하나로 창건돼 창의문이란 문명(門名)을 얻었다. 북한 ·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하여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1)에 다시 열어놓았다고 한다. 1623년 인조반정 때는 능양군을 비롯한 의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문루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40년(영조16)에 다시 세우고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1958년 크게 보수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서울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오늘 산행은 급한 오르막 구간에다 또한 날씨가 너무 더워 짧게 하여 여기 창의문에서 하산하였다.
여기서 걸어서 경복궁역 근처까지 가서 칼국수로 점심을 먹고 귀가하였으며 다음은 오늘 전철을 탄 곳에서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곳 주변에서 가 볼만한 곳으로는 간송 미술관과 수연산방이 있으나 다음기회에 보기로 하였다. 간송 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미술관으로 국보 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이 소장된 곳이다.
수연산방은 상허 이태준이 살던 집으로 현재는 전통찻집으로 운영 중이라고 한다.
■ 2코스 인왕산코스 : 창의문 ~ 독립문 (2012.8.8일)
경복궁역 - 창의문 - 윤동주 시인의 언덕 - 인왕산 정상 - 선바위 - 국사당 -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 독립문
2코스는 인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끼고 있는 코스인데 오늘도 날이 너무 더워 많이 걷지 못하고 독립문까지 걷기로 하였다. 창의문에서 시작하는 이번 코스는 창의문을 둘러본 후 도로로 내려와 길 건너 바로 오른쪽 언덕으로 올라가서 시인의 언덕에 이른다.
시인의 언덕을 오르는 계단은 초입부터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 ‘서시’ 등의 작품들로 윤동주 시인이 인왕산 자락에 살던 시기 구상된 시로 이루어 졌다.
시인의 언덕은 이런 윤동주 시인을 기리기 위한 길로 시인의 언덕 공원에서는 ‘서시’의 시비도 있다. 공원을 좀 지나 좀 더 등산로를 걷다 보면 도로 건너편에 바로 인왕산 등산로 입구 팻말이 보인다.
인왕산 등산로는 가파른 계단길로 성벽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성벽 안으로 들어오게 돼 있다. 인왕산 등산로에서는 청와대, 창경궁, 한강, 서울명소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인왕산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새로 단장한 성곽 안쪽을 따라 급 비탈길을 한참 내려와 쪽문 계단으로 설치된 문을 나와서 길이 흔적을 따라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선바위를 볼 수 있다. 선바위는 스님을 닮은 바위로 조선 태조가 성을 쌓을 때 문신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이 바위를 성 안으로 할 것인지 성 밖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 대립을 보였다고 하며, 태조는 결국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정하도록 하여 성 밖으로 밀려났다는 일화가 있다.
선바위와 주변 괴암괴석을 보고 내려오면 국사당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은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일본이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 남산 팔각정 오른쪽에는 그때의 국사당 터 표지석으로 설치하여 남아 있다.
서대문역을 건너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관람하였다. 이곳은 1908년 경성감옥으로 문을 열었고 유관순 열사, 만해 한용운, 도산 안창호, 백범 기구 등 애국지사가 투옥됐던 곳으로 지금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바뀌었다. 이곳을 세 번째 왔지만 올 때마다 일제의 잔혹한 강정기 시대를 간접 경험하는 것 같았고 애국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내가 맡은 사소한 것부터 실천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것을 늘 느끼게 하는 곳이다.
독립문은 1896년 독립협회가 한국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청(淸)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모금 운동을 해 세웠으며 지금은 공원으로 잘 조성되어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오늘도 날이 더워 짧은 산행을 여기서 마치고 독립문 근처 냉면집에 가서 냉면을 먹고 귀가하였다. 다음3 코스는 이곳에서 시작하기로 하였다.
■ 3코스 남산코스 : 독립문 ~ 장충체육관 (2012.8.18일)
독립문 - 권율장군 집터 - 달구샤 - 홍난파 가옥 터 - 경교장 - 경찰박물관 - 경희궁 - 서울 역사 박물관 - 정동교회 - 배제학당 - 숭례문 - 백범 광장 - 안중근 의사 기념관 - 남산 봉수대· 팔각정· 남산타워 - 해오름 극장- 장충체육관
3코스는 독립문역에서 만나 지난번에 내려온 성곽 안으로 가기 위하여 인왕사와 국사당을 지나 성곽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으로 된 쪽문을 목표로 하여 갔으나 원래 길이 없는 곳이라 찾지 못하고 다시 내려와서 시도하여 세 번이나 오르락 내리락하여 결국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성곽 박 길을 따라 계속 내려와 아래쪽에 있는 입구를 통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곽 안쪽 길은 잘 정비되어 시민들이 산책하기에 좋은 등산로로 되어 있었다.
예전에 조그만 슈퍼가 있던 자리에 다시 새 건물로 슈퍼가 생겼으며 바로 여기서 나가 권율 장군 집터와 최초의 통신사가 있었던 건물(딜구샤)을 보고 다시 성곽 안으로 들어가서 계속하여 내려와 시내에 접근하였다. 강북 삼성병원에 도착하여 김구 선생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경교장을 볼 수 있었다. 병원입구 현관으로 쓰이는 건물이 김구 선생의 자취를 간직한 경교장이다. 경교장은 김구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인 1949년 6월까지 집무실 겸 사저로 사용되던 곳이다. 경교장에 도착하여 내부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이틀 뒤 8월 20일 개관이라 내부는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경찰박물관에 잠시 들러 전시된 경찰장비를 보고 나와 경희궁을 둘러보고 경회궁 오른쪽 끝부분에 있는 고목나무에서 사진 한 장 찍고 휴식을 취한 다음 인근에 있는 서울 역사박물관에 들어가 전시된 작품을 보는 시간을 가졌다.
길을 건너 정동길 4거리에서 정동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정동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 건축물로, 1895년 9월에 착공해 1897년 10월 무렵에 준공된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축물이다.
배재학당 터를 지나 길을 따라 숭례문 쪽으로 향하였다. 이곳 주변에는 옛 러시아 공사관과 이화여고가 있다.
옛 러시아공사관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1896년 2월 1일 세자(뒤의 순종)와 함께 옮겨가 이듬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피신했던 곳이다. 또한 아관파천 중에 친일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 내각이 조직되는 등 역사적으로 의의가 큰 건물이다. 현재는 탑의 일부만 남아 있다.
이화여고는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설립된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며 1886년 5월 31일 개교했다. 이후 1887년 10월 22일 고종 황제가 이화학당이란 교명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화여고에는 독립투사인 유관순 동문을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해 1974년에 건립된 유관순기념관이 있다. 유관순은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해 1918년 고등과에 진학했다. 1919년 3·1운동을 하다 헌병에게 잡혀가 졸업은 하지 못했다.
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고가도로가 나오는데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 횡단보도를 건너서 다시 올라가면 중앙일보사 건물을 볼 수 있고, 이 중앙일보사 건물을 지나 대한상공회의소 쪽으로는 복원된 성곽 일부를 볼 수 있었고 이길을 따라 내려와 재건 중인 숭례문까지 오게 되었다.
숭례문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을 둘러쌓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남쪽에 있다고 하여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숭례문은 서울성곽 건설이 한창이던 1396년에 시작하여 1398년에 완공되었으며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국가차원의 의장행렬이 통과하던 성문으로 4대문과 4소문중에서 가장 웅장한 규모의 크기이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 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해 짠 구조가 기둥 위뿐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崇禮라는 이름은 禮를 떠받든다. 는 뜻으로 유교의 5상인 仁義禮智信의 禮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유교적 가치관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崇禮門 맞은편에 있는 관악산의 모습이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아 화기가 강하다고 하여 그 화기를 억누르기 위해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달아 맞불로 도성을 보호하려 했다고 한다. 또한 광화문의 헤치도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도시에 가뭄이 들었을 때는 양기가 너무 강하다고 하여 승례문을 닫고 북쪽의 음기가 잘 들어 오도륵 숙정문을 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날이 흐려 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남대문 시장에 들어가 해장국으로 점심을 먹고 숭례문 공사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남산으로 향하였다. 오후 산행은 우산을 접었다 폈다를 계속하였으며 오늘은 긴 산행으로 장충체육관까지 가기로 하였다.
성곽은 남산쪽으로 이어지는데 SK빌딩을 따라 성곽의 일부가 복원되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여기서 계속하여 오르면 가파른 계단을 만나는데 이것이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나왔던 일명 ‘삼순이 계단’이다. 이 계단을 따라 남산공원에 다다른다. 계단을 오르자 백범광장이 있고 오른쪽에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다. 또한 이곳은 일제 강정기에는 조선의 얼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세웠던 조선신궁의 터였으며, 부근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전진기지로 쓰이던 왜성대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남산부근에는 과거 일본인이 많이 거주했었다. 이러한 것으로 인하여 민족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백범 김구 선생 광장과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광장에는 國家安危 勞心焦思(국가와 안위를 걱정하고 애를 태운다)가 세겨진 비석을 볼 수 있고, 비석 오른쪽 아래에는 수장인도 함께 음각되어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거사하고 1910년 2월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사형당하였으며 이곳에 설치된 안중근 의사 기념관 전시관 내부에는 그의 일생일대를 일목요연하게 저시하였으며, 실외에는 각종 비석이 설치되어 독립운동의 산실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몇 년전에 하열빈역에 가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거사한 장소도 봤으며, 뤼순 감옥에 가서 감옥 전체와 안중근이 생활하던 독방도 보고 왔는데 여기 남산에 와서 기념관을 보니 그때의 생생한 모습이 다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남산 길을 따라 오르면 작은 바위봉이 나오는데 이곳이 잠두봉 포토아일랜드다. 이곳에서는 도성안 경복궁은 물론 인왕산에서부터 낙산까지 잘 보이며 아름다운 서울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벼슬이 있는 양반은 출퇴근이 좋은 궁궐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생활하였는데 이곳이 경복궁과 창덕궁을 잇는 북촌마을이며, 반면에 벼슬하지 못한 양반들은 이곳 남산에 자리를 잡고 생활하였다. 경치가 좋고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이곳 남산에서 궁궐을 마주보게 하고 집을 지어 벼슬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다스리고자 했다고 한다. 벼슬하지 못한 선비들이 남산에서 나막신을 딸깍거리며 신고 돌아다닌다고하여 벼슬하지 못한 이들을 딸깍발이 또는 “남산골 샌님”이라고 하였다.
남산을 오르는 계단은 봉수대까지 이어진다. 봉수대는 횃불이나 연기를 이용하여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로 신호를 보내던 제도로 통신시설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시대에 국경지대의 비상사태를 왕궁이 있는 서울까지 알려주던 통신수단이다.
조선시대의 봉수로는 제1봉수대가 함경도, 제2봉수대가 경상도, 제3봉수대가 평안도 강계, 제4봉수대가 평안도 의주, 제5봉수대가 전라도에 설치되어 운영하였으며 적들의 접근정도에 따라 봉수를 피워 다음 봉수로 전달되는 과정을 반복하여 보통12시간 이내에 서울에 도착하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봉은 횃불, 수는 연기를 뜻하며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신호를 전달하였다. 이제도는 삼국시대에 생겨나 조선시대에 보완 정비되어 사용되었다.
선조시대에는 봉수제도 대신 사람이 말을 타고 달리거나 직접 달려 문서를 전달하는 파발제를 시행하였으며 19세기말 전화 등의 통신시설이 들어오면서부터 폐지되었다.
봉수대를 구경하자마자 팔각정과 타워가 있는 남산정상에 도착하였다.
특히 N서울타워는 서울의 랜드마크로 서울 관광의 필수 코스이기도 하다. 팔각정 자리에는 원래 “國祀當”이 있던 자리이다. 국사당은 태조가 조선을 세우고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종묘, 사직, 궁궐을 짓고 남산(목멱산)을 목멱대왕으로 봉작하여 수호신으로 모시어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었다.
일제는 우리민족의 정기를 차단하고자 국사당을 지금의 인왕산 부근으로 옮겼으며 국사당의 가운데 “사”인 제사“祀”를 스승“師”로 바꾸어 “무학대사”만을 위한 사당으로 전략시켰다. 지금은 팔각정에 “국사당터”라는 표지석만 남아있다. 지난번 2코스 탐방 시 국사당을 거쳐 왔으며 인왕산 모퉁이에 자리도 협소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실제 가서 보면 마당이 전혀 없는 길가에 초라한 모습으로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산에는 조선신궁터가 있는데 조선신궁터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서울 예장동 일대에 진을 치고 주둔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이곳을 왜성대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조선침략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후세에 정한론(조선침략론)의 선구자로 여겨졌으며 19세기 후반에 침략한 일본인들은 그를 본받아 남산일대에 진을 치고“왜성대공원”을 조성하고 벚꽃600여 그루를 심었으며, “남산대신사”라는 신궁을 세워 일본의 시조신인 “아머테라스스 오미카미”를 모셨다. 이처럼 일본은 신민정책의 일환으로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이르는 크기로 남산 높은 곳에 “조선신궁”을 조성하고 일본신을 모셔 한양 어디서나 볼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통하여 조선의 수도 한복판에 일본의 시조신을 모셔 침략의 본색을 드러냈으며 1905년 을사 늑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 스스로 조선신궁은 스스로 불태워 없에 버렸다.
남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서도 서울 성곽을 따라 내려 올 수 있다. 군데군데 끊기기는 했지만 성곽을 보며 과거 역사의 숨결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서울 성곽은 태조, 세종, 숙종 때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성곽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남측 순환로와 이어진다. 이 길은 순환버스들이 다니는 길로 한적하다.
오늘은 성곽을 따라 걷지 않고 남산 순환로를 따라 내려 왔다. 도로를 따라 계속 내려오다가 조망대에 이르러 휴식을 취하고 막걸리 한잔씩 하였다. 다시 걸어 내려와 남산 아래쪽 도로를 만나는데 여기서 조금가면 해오름 극장 앞이다. 극장에서 맞은편에 있는 한국 자유총연맹자유센터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 끝부분에 오솔길이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서울 성곽을 볼 수 있고 정비된 탐방로를 걸어 올라가면 팔각정을 볼 수 있다, 팔각정에서 옆길을 따라가면 성벽 옆으로 난 성곽길을 걸을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은 코스를 바꿔서 한국 자유총연맹자유센터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해오름 극장에서 도로를 따라 내려가 동대앞 수표교로 향하였다.
남산 성곽길을 걷다 보면 성곽에 씌어 있는 한자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성곽을 축조할 당시 감독관이나 석공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성곽을 따라 내려오면 서울 신라호텔 정문을 지나 장충단 공원을 지나게 된다.
장충단은 1985년 일제의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전국에서 시작된 항일의병단 활동으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고종황제가 장충단과 장충단비를 세우면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장충단비만 남아 있다.
유관순 열사 기념탑에서 사진을 찍고 내려와 동국대학교 입구아래에 있는 수표교까지 왔다. 이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에 서 있던 다리인데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수표교는 원래 하천의 수심을 재는 역할을 하던 다리였다. 수표교에서 사진을 찍고 오늘 일정 5시간 20분을 마무리하고 동국대앞 지하철을 이용하여 귀가하였다.
다음은 여기서 시작하지 않고 서울 시청에서 만나 말바위에서 계속 내려와 이곳 장충체육관 까지 겉기로 하였으며 서울 성곽 탐방을 마치고자 한다.
주변의 명소로는 이번에는 가보지 못하였으나 와룡사와 남산골 한옥마을이 있다.
와룡묘는 제갈공명을 모시는 사당으로 와룡은 제갈공명의 호이다.
■ 4코스 낙산코스 : 말바위 ~ 장충체육관 (2012.9.2일)
서울시청 - 공원 - 발바위 - 와룡공원 - 혜화문 - 낙산공원 - 최순우고택 - 이화장 - 동대문 - 동대문 역사공원 - 광희문 - 장충체육관
오늘은 마지막 4구간하는 날인데 장충체육관에서 시작하면 언덕이 계속 이어지므로 노선을 바꿔서 반대코스로 말바위에서 시작하여 장충체육관까지 내려가면서 구경하기로 하였다. 9시 30분 시청역 5번 출구에서 만나서 걸어서 말바위 까지 가기로 하였으나 일행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5번 출구에서 마을버스로 이동하여 삼청공원 입구 금융 감독원 인가? 하는곳에서 하차하였다.
삼청공원을 지나 말바위까지 땀을 흡뻑 흘리고 올라갔으며 잠시 휴식을 하고 전망대에서 서울 성북동쪽을 조망하고 밖으로 난 산책길을 따라 하산하면서 와룡공원에 도착하였다. 아침이라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운동을 하고 있었으며 우리는 공원 한적한 곳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 시간을 가졌다.
1,2,3구간때와는 달리 오늘은 기온이 약간 낮아져 그런대로 산행하기에 좋은날이었다.
여기서 성곽 안쪽 산책로를 따라 이동하여 시내에 접근하여 최순우 고택을 돌아보았다. 다시 올라와서 경신고등학교를 지나 서울 4소문중의 하나인 혜화문을 보고 시내로 내려와 도로를 통과하여 다시 성이 시작되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잘 정비된 성곽 밖 등산로를 따라 계속하여 걸어갔으며, 이곳에서 시작하여 낙산공원을 거쳐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길은 아주 훌륭한 성곽길이다. 이 길은 성곽길 복원이 잘 돼 있기 때문에 걷기에 편하고, 길가에 있는 정자에 앉아 낮잠을 자거나 사색을 즐기기에도 좋다. 이 길을 따라 계속 가다 보면 낙산공원으로 이어진다.
낙산공원에는 전시실 및 관리실, 매점, 비우당(庇雨堂), 정자, 각종 체육시설, 이벤트광장 등의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었으며, 또 공원 녹지화를 위해 소나무를 포함해 총 40종, 8만9670그루의 나무가 심어져 있다고 한다.
낙산공원 안쪽 등산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오른쪽 마을로 들어가 이화장을 보려고 요리조리 꼬불꼬불 언덕길을 따라 내려가니 이화장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사진을 찍고 등산로로 가지 않고 안쪽 도심길을 따라 동대문에 도착하였다. 동대문은 흥인지문이라고 하며 서울 4대 문 중 하나로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라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했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해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다. 원래 흥인지문 좌우로 높은 성벽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동대문근처 식당에 들어가 식사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청계천을 향하여 걷기를 계속하였다.
청계천은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구와 중구의 경계를 흐르는 하천으로 길이는 10.84km다.
북악산·인왕산·남산 등으로 둘러싸인 서울 분지의 모든 물이 여기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빠진다. 본래의 명칭은 ‘개천(開川)’이었다고 한다.
조선의 한양 천도 당시 청계천은 자연하천 그대로여서 홍수가 나면 민가가 침수되는 물난리를 일으켰고, 평시에는 오수가 괴어 매우 불결한 하천이엇다고 한다. 태종이 개거공사(開渠工事)를 벌여 처음으로 치수사업을 시작했으며, 영조 때에는 준설·양안석축·유로변경 등 본격적인 개천사업을 시행했다. 이 공사로 내의 흐름이 비로소 직선화 되었다.
순조·고종 때에도 준설공사는 계속되었는데 이 개천에 놓인 다리는 수표교·오간수교·광교·영미교·관수교 등 모두 24개가 있었다. 국권 피탈 후 일제강점기 초에는 근대적 도시계획의 성격을 띤 대대적인 준설공사가 이루어졌다.
오간수문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오간수교가 자리 잡고 있다. 오간수문은 1907년 일제에 의해 허물어졌다가 오간수교로 다시 만들어졌다 사라졌다. 지금의 오간수교는 2003년 청계천 복원사업을 하며 복원된 다리로 알고 있다.
2003년 7월부터 시작된 서울시의 청계천 복원사업 구간은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서 성동구 신답철교로 구간으로 5.8km에 이른다.
2005년 10월 1일 2년여의 공사를 마치고 청계천 위에 놓인 총 22개의 다리를 중심으로 정조반차도를 비롯한 역사적 자료를 복원한 도심 속 하천으로 개통했다.
계속하여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은 동대문 운동장을 철거하면서 만들어졌다. 철거 도중 이간수문 등 다양한 유적과 유물이 발견돼 ‘동대문 역사문화공간’으로 조성되었다.
공원 내에는 동대문운동장 기념관, 동대문 역사관, 디자인 갤러리 등이 운영되고 있다. 공원에서는 공원 조성 시 발굴된 잃어버렸던 성곽들을 볼 수 있다. 또 옛 건물 기둥 터, 기와 등도 볼 수 있어 역사를 몸소 느낄 수 있다. 성곽을 따라 가다보면 ‘치’ ‘치성’이라는 방어시설도 볼 수 있고, 이간수문도 볼 수 있다. 이간수문은 남산 방면에서 내려온 물들을 내보내는 수문이다.
이곳을 지나 시내를 통하여 광희문으로 향하였다.
광희문은 조선시대 서울의 사소문(四小門) 중 하나로 동남쪽에 있었던 문이다. 광명(光明)의 문이라는 뜻에서 광희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태조 5년(1396) 8월부터 9월까지 행한 2차 도성 수축 공사 때 다른 문들과 함께 누각을 올려 완성했다. 이 문 옆에 하수구인 수문(水門)이 있어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렸다. 또 성 내에서 발생한 시체는 서소문과 이 문으로만 나갈 수 있어 시구문(屍口門)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광희문은 지금의 자리에서 15m 정도 옆 도로 위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문루가 망가졌다가 1975년 문을 남쪽으로 옮겨 문루와 함께 복원했다.
광희문을 지나서 요리조리 성곽을 따라 민가 중앙으로 난 길을 따라 고급주택 단지를 지나서 장충체육관을 향하여 걸어갔다. 이곳은 민가가 많아 성곽이 많이 끊긴 구간으로 찾아가기가 곤란하며 몇 번을 왔지만 그때 그때마다 길이 날설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어느새 낮은 언덕에 도달하고 보니 반대쪽 도로건너편에 장충체육관이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곳은 지금 복원중 공사가 한창이다. 체육관 옆을 따라서 남산공원내로 진입하여 동국대학교 우측도로로 동국대학교 안에 들어왔다. 잠시 캠퍼스 구경을 하고 하산하여 충무로역까지 와서 전철을 타고 귀가하였다 이로서 4구간으로 나누어 걸은 서울 성곽길 걷기를 마무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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