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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씨의 근원
1. 성씨(姓氏)의 유래
우리나라 성(姓)은 중국의 한자문화가 유입한 뒤인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산, 강 등을 성으로 삼았다.
*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강(姜)씨라고,
*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姬)씨로,
*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으므로 성을 요(姚)씨 로한 것은 이것을 실증 한다
1) 삼 국 시 대
고구려 - 우리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 인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賜姓)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 있는 인명의 기록을 보면,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 때에 장수왕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 하였으며,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
백 제 - 우리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이 기록 되어 있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신 라 - 박(朴), 석(昔), 김(金)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북제서"에는 진흥왕(540~576)을 금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라는 성을 사용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7세기 이전 건립된 신라 진흥왕의 네곳의 순수비, 신라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신라 진평왕 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볼때 인명에 성을 사용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우리 선조는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예를 들어 추정해보면 고구려는 장수왕 시대(413~490)부터, 백제는 근초고왕 시대(346~375)부터, 신라는 진흥왕 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삼국 시대의 성은 - 고구려: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 백 제: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국 등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 신 라: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 많았다.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않았다.
2) 고 려 시 대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 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문종9년(1055)에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않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법령으로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민중이 성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3) 조선시대, 현대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아졌다. 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보면
*1486년(성종)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영조(21대)에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
*1908년(고종)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숫자가 많은 것은 고문헌 에 있는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으로 되어 있으나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최근의 조사인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개의 성씨로 보고 되었다. 그러나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라며 1939년에 시행한 창씨개명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이름을 다시 찾을 때 까지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 큰 수난기였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2000년 인구 주택 총 조사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귀화인을 뺀 한국인의 성은 모두 286개, 본관(本貫)은 4,179개인 것으로 나타났다.
2. 本의 起源 (본의 기원)
본은 본관(本貫),본향(本鄕),관적(貫籍),선향(先鄕) 등으로도 부르며 시조의 출생지나 정착지 등으로 본을 삼았다.
그러나 시조의 발상지가 아니더라도 봉군(封君)이나 사관(賜貫)에 의해 본관을 정하기도 했으며, 후손 가운데 어느한 파가 다른 지방에 나뉘어 거주하면서 오래 살게 되면 그 자손들이 독립하여 그 지방을 본관으로 삼은 예도 많았다. 이를 분관(分貫) 또는 분적(分籍)이라 한다.
분관의 대표적이 예로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은 본래 전라도 곡성 출신이었으나 태조로부터 평산을 본관으로 하사받아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되었던 일을 들 수 있다. 성은 같은 조상을 가
진 혈통임을 나타내는 이름으로써 다른 혈통의 씨족들과 구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성은 같으나 시조가 다른 경우가 많아 씨족의 완전한 구별이 어려웠으므로 성 앞에 본관을 붙여 다른 혈통과 구별하고 있다.
오히려 성이 생기기 전부터 본관이라 할 수 있는 부족 이름을 사용하여 같은 씨족임을 나타냈었다.
이러한 출신지가 성과 결합하여 동족을 다른 종족과 구별하는 표시로서 오늘날과 같은 본관으로 굳어지게 된 것은 대체로 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본관이 곧 신분의 표시였으므로 사족들 사이서만 본관이 일컬어졌지만 후대에 내려오면서 성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일반 서민들까지도 본관을 표시하게 되었다. 원래 같은 성씨라 할지라도 여러 친족 공동체가 있었고 이들은 각기 동성의 중앙 귀족과 유대를 맺고 있었는데 신라 말기 골품 제도가 무너지면서 그런 유대 관계가 끊어짐에 따라 지방의 친족 공동체들이 각기 분립하여 직계 선조를 시조로 내세워 본관을 달리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경주 김씨나 경주 박씨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주 김씨는 羅州(나주)김씨, 義城(의성) 김씨,彦陽(언양) 김씨,三陟(삼척) 김씨, 江陵(강릉) 김씨, 蔚山(울산) 김씨,光山(광산) 김씨, 安東(안동) 김씨 등으로 갈라졌다.
경주 박씨는 密陽(밀양) 박씨,高靈(고령) 박씨,咸陽(함양),죽산(竹山),상산(商山),전주(全州),순천(順天),월성(月城) 박씨 등으로 본관이 나누어졌다.
한편 모든 사 본관과 성과의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관계가 있다.
1) 同祖 同本 同姓(동조 동본 동성)
같은 시조에 같은 본, 같은 성을 사용하는 경우로 이것이 가장 전형적인 형태이다.
2) 同祖 同本 異姓(동조 동본 이성)
같은 시조에 같은 본이나 성을 하사받거나 그 밖의 이유로 성이 달라진 경우이다. 가락국의 수로왕 후손으로 김해의 본을 쓰면서 김해 김씨와 김해허씨(金海許氏) 등으로 갈려 사용하는 경우다.
3) 同祖異本同姓(동조 이본 동성)
같은 시조의 후손이면서 본을 다르게 쓰고 있지만 성은 같은 경우다. 파평 윤씨의 시조 신달(莘達)의 후손이면서 남원(南原),함안(咸安),덕산(德山),신령(新寧) 등으로 각각 다른 본을 사용하고 있으나 성은 같은 윤씨를 사용한다.
또 신라 알지왕의 후손으로 강릉, 광 등 본은 달라도 성은 같은 김씨를 사용한다.
4) 同祖異本異姓(동조 이본 이성)
원래 동족이지만 성과 본관을 다르게 쓰고 있는 경우이다. 김해김씨와 양천허씨, 인천이씨와 문화유씨, 연안(延安)차씨 등이 그 예이다.
5) 異祖同本同姓(이조 동본 동성)
시조가 다르면서 본과 성이 같은 경우다. 수로왕계의 김해김씨와 일본계로 임진왜란 때 귀화한 김충선계 김해김씨가 그러하며, 남양홍씨(南陽洪氏)에는 시조가 다르다 하여 당홍(唐洪)
이라 부르는 남양홍씨와 토홍(土洪)이라 부르는 남양홍씨가 있다.
6) 異祖同本異姓(이조 동본 이성)
시조가 각각 다르므로 성과 다르지만 시조의 발상지가 같아서 본이 서로 같은 경우이다. 경주 이씨와 경주손씨(孫氏), 경주이씨와 청주한씨 등의 경우가 그러하다.
7)異祖異本同姓(이조 이본 동성)
시조가 다르므로 본과 다르나 성이 같은 경우다. 파평윤씨와 해평윤씨(海平尹氏),안동장씨와 덕수장씨, 광주이씨(光州李氏)와 연안이씨 등이 그러하다. 이족이라면 성과 본관을 다르게 쓰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한 지방에 여러 성씨가 연고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신분과 계급에 따라 거주지가 제한되었으며 양민은 주(州),부(府),군(郡),현(縣)에서 살았으나 천민들은 향(鄕),부곡(部曲),소(所),처(處),역(驛),섬(島)등에 살았으므로 신분을 표시하는데 그들의 거주지를 사용하였다.
천민의 직업은 대대로 세습되었으며 한 지역에 집단을 이뤄 살았으므로 그 거주지는 그들의 혈연적 집단의 신분을 표시하는 본관의 구실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성은 같아도 본관이 다르면 이족이요, 반드시 성과 본관이 같아야만 동족이 된다고 할 수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원칙론일 뿐 예외가 많아 상당히 복잡하다.
씨족의 연원이 같으면서도 성과 본관이 다른 성씨가 많은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이족이면서도 성과 본관이 같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3. 尹氏 유래
윤(尹)씨의 유래
윤씨(尹氏)라는 성(姓)을 말함 때는 우리나라의 10대성 가운데 8위에 해당하는 대성(大姓)으로써 고려(高麗)시대와 이조(李朝)시대에 있어서 크게 번영하여 나라와 민족(民族)에게 크게 공헌한 바 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를 빼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모든 윤씨(尹氏)가 탄생한 시초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문헌에서도 대체적으로 나타나 있으나 그 설명은 일치하지 아니하다.
윤성(尹姓)의 근원 측 윤(尹)자를 사람이 성씨로 사용된 기록이 처음에 등장한 것은 고대중국(古代中國)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시되고 있는데 고문헌(古文獻)중의 하나이 제왕세기(帝王世紀)라는 사서(史書)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중국 상고시대(中國上古時代)의 삼황(三皇)중의 하나인 황제의 아들인 소호김천씨(小昊金天氏)가 자기의 두 번째 부인이 낳은 반(般)을 봉(封)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윤성(尹姓)중의 윤(尹)자를 따서 성(姓)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윤성(尹姓)이 탄생한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說)에 따르면 고대중국(古代中國)에서 재상(宰相)이라는 뜻을 가진 경윤(卿尹)중에서 윤(尹)자를 따서 이를 성씨로 사용 하므로써 윤성(尹姓)이 창시되었다고 전해진다.
또 은(殷)나라의 탕왕(湯王)때에 윤계(尹階)라는 사람이 있었고 주(周)나라 선왕(宣王)의 신하
(臣下)인 윤길보(尹吉甫)라는 현신(賢臣)이 있었는데 현신 윤길보의 유적(遺蹟)이 채읍(采邑)땅에 남아 있다고 전하며 만성통보(萬姓統譜)라는 문헌에 따르면 요(堯)임금의 후손들은 범씨(范氏), 윤씨(尹氏), 당씨(唐氏), 위씨(韋氏)로서 5성(五姓)으로 분파되어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김영천백연기(金榮川百鍊記)에 따르면 이윤(伊尹)의 후손들이 이씨(伊氏), 윤씨(尹氏), 신씨(莘氏), 형씨(衡氏)로서 4성(四姓)으로 분파(分派)되어 내려왔는데 이 가운데 윤씨(尹氏)성을 지닌 자손(子孫)들만이 가장 뚜렷하고 분명하다고 되어 있다.
그 밖에도 맹자(孟子)나 사기(史記)에는 윤사(尹士), 윤탁(尹鐸), 윤번(尹藩), 그리고 춘추(春秋)의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제자백가(諸子百家)들 중에는 윤문(尹文)과 윤희(尹喜)라는 인물(人物)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학자(學者)로서 주로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이어 받았거나 이에 영향을 주었던 인물들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는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에 나오는 현동(玄同)이라는 구절과 문숙공(文肅公)의 자(字)가 동현(同玄)이고 호는 묵제(黙齊)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노자(老子)의 철학(哲學)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듯 시전(詩傳)이나 맹자(孟子)를 지닌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윤(尹)자를 사람이 성(姓)으로 사용한 역사적인 연원은 중국(中國)에서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비록 윤성(尹姓)의 근원뿐만 아니라 원래 어느 성씨(姓氏)를 막론하고 그 시초적인 그원 고서(古書)와 전설 등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 통례이며 이것을 고고학적인 차원이나 고증으로 입증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에서 윤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파평윤씨의 시조이신 태사공(太師公 : 諱=신달)께서 단기 3226년 음력 8월 15일(서기 893년 : 신라 진성여왕 7년 癸丑)에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눌노리에 있는 파평산 기슭의 연못의 옥함(玉函)에서 탄강(誕降)하신 후부터 유래(由來)한다고 전해지며 태사공(太師公)께서 탄강하시기 전에도 윤씨(尹氏)성을 지니자가 몇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나 고려사(高麗史)를 비롯한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들은 그 수가 불과 몇 사람 뿐으로서 모두 그 당대에 소멸된 것이며 그 후손들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윤성(尹姓)에 관하여 각종 문헌을 살펴보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는 182본이라고 되어 있으며 파평윤씨 대종보와 다른 문헌에는 149본으로 파평윤씨 사전에는 현존하는 숫자로서 25본을 기록하고 있으며 최근의 자료인 만성족보 및 한국인의 성보에는 현재 10본으로 등재되어있다. 그러나 그보다 뒤인 서기 1985년 11월 1일 현재로 경제기획원의 사상 처음으로 본관별, 성씨별로 조사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44본으로 나타나 있다.
윤씨는 옛 문헌상에 149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현재는 48개의 본관이 있으며 이중 11개의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의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으나 해평, 무송, 칠원, 해남, 평산을 제외한 모든 본관은 파평 윤씨에서 분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남원윤씨, 신영윤씨, 야성윤씨, 함안윤씨, 덕산윤씨 등은 파평으로 다시 합본이 되었다고 한다.
★1). 파평윤씨(坡平尹氏) 유래
파평윤씨의 시조 윤신달(尹莘達)은 태조 왕건을 도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개국공신으로서 태자를 교육시키는 태사삼중대광에 봉해졌다. 그의 5세손인 윤관(尹瓘,
1040~1111) 장군은 고려 문종때에 문과에 급제하고 1107년(고려 예종3년)에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한뒤 여진정벌에 나서 적 5천명을 죽이고 130명을 생포하는 등 북진정책을 완수한공으로 영평(파평)백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하였다.
파평윤씨의 시조 태사공 윤신달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경기도 파평(파주)에 있는 파평산 기슭에 용연(龍淵)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어느 날 이 용연에 난데없이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리면서 천둥과 벼락이 쳤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린지 사흘째 되는날, 윤온이라는 할머니가 연못 한 가운데 금으로 만든 궤짝이 떠 있는 것을 보고 금궤를 건져서 열어보니 한아이가 찬란한 금빛 광체 속에 누워있었다. 금궤 속에서 나온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으며, 또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윤온 할머니는 이 아이를 거두어서 길렀으며 할머니의 성을 따서 윤씨가 되었다.
잉어에 대한 전설은 윤신달의 5대손인 윤관의 일대기에도 또 나온다.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전쟁 중에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을 때 잉어떼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이번에는 장군의 뒤를 쫓던 적군이 뒤 쫓아와 강가에 이르자 윤관 장군에게 다리를 만들어 주었던 잉어 떼는 어느 틈에 흩어져 버리고 없어졌다.
그래서 파평윤씨는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묘는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산37번지에 있다.
파평은 경기도 파주군에 위치한 파평면의 옛 지명이다. 파주는 본래 고구려 장수왕 때 파주사현이었는데 1398년 조선 태조때 서원군과 파평현을 병합하여 원평군이라 하였고, 1461년 파주목으로 승격, 1895년 군이 되었다
분파
- 함안백파 - 신령공파 - 소정공파 -소부공파 -봉록군파
- 남원백파 - 대언공파 - 원평군파 - 판서공파 -태위공파
- 덕산군파 - 양주파 - 소도공파 - 야성군파
- 문정공파 - 전의공파 - 판도공파 (제학공파, 부윤공파, 정정공파)
시조 태사공 윤신달(尹辛達)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시조(始祖) 윤신달(尹辛達)은 신라(新羅)의 천년사직(千年社稷)이 기울고 후삼국(後三國)의 격동기에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창업에 공훈을 세운 명신(名臣)이다.「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용연보감(龍淵寶鑑) 」 등의 문헌에 의하면 시조 신달은 경기도 파주 파평산(坡平山) 기슭에 있는〈용연지(龍淵池)〉라고 못 가운데 있던 옥함(玉函)속에서 출생했다고 하며, 그가 옥함(玉函)에서 나올 때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고 발(足)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바닥에는 윤(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姓)을 윤(尹)으로 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특히 시조 신달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현신(賢臣)으로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기까지 항상 곁에서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충간(忠諫)했으며,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벽상삼한익찬 2등공신(璧上三韓翊贊二等功臣)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관작을 받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파평(坡平)으로 삼아 명문세도(名門勢道)의 가문으로 기틀을 다져왔다.
그 후 신달의 현손(玄孫) 관(瓘)이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종(宣宗) 때 합문지후(閤門祗候)와 좌사낭중(左司郎中)을 지내고, 1107년(예종 2) 여진정벌(女眞征伐)에 원수(元帥)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전, 함주(咸州)와 영주(英州)등 9지구에 성(城)을 쌓아 참범하는 여진을 평정(平定)하고 개선했으며, 뒤에 벼슬이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이르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승례(承禮)의 아들 번(璠) 세조(世祖)의 국구(國舅)가 되어 대사헌(大司憲)․우참찬(右參贊) 등을 거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번(璠)의 아들 삼형제(三兄第)중 맏아들 사분(士昐)이 우의정(右議政)을 지내고 영동령부사(領敦寧府事)에, 둘째 아들 사균(士昀 )은 예조 판서(禮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영평군에. 셋째 사흔(士昕)을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우의정(右議政)에 오름으로써 형제 정승(政丞)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사분(士昐)과 사흔(士昕)의 두 집안에서 같은 시기에 왕비(王妃)가 배출되니, 왕실을 배경으로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으로 갈라져 정치적(政治的) 대결을 벌이게 되는 불운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승순(承順)의 아들 곤(坤)은 정종조(定宗朝)의 동지총제(同知摠制)로서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으며 1408년(태종 8) 사은사(謝恩使)로 명(明) 나라에 다녀온 후 세종(世宗) 때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삼산(三山)의 아들 호(壕 : 곤의 손자)는 성종비(成宗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아버지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진 뒤 영돈령부사(寧敦寧府事)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한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 杖)을 하사(下賜)받았다.
성종(成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던 필상(弼商)은 세조(世祖) 때의 총신(寵臣)으로 도승지(都承旨)를 지낼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우참찬(右參贊)에 특진(特進)되고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 되었으며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다. 이어 좌의정(左議政)으로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를 겸하여 건주위(建州衛) 토벌에 공을 세워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앞서 성종조(成宗朝)에 연산군(燕山君)의 생모 윤씨(尹氏)으 폐위를 막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사약(賜藥)을 받았다.
필상(弼商) 증손(曾孫) 현(鉉)은 1537녀(중종 3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종중실록(中宗實錄)」편찬에 참여한 뒤 호조 판서(戶曹判書)․돈령부사(敦寧府事)에 이르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난「국간집(菊磵集)」을 저술했다.
목사(牧使) 은(垠)의 아들로 세종(世宗) 때 좌찬성(左贊成)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사로(師路)는 정현옹주(貞顯翁主)와 결혼하여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졌으며 세조(世祖)때 좌익공익(左翼功臣)에 책록 되었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택(澤)의 아들 헌주(憲注)는 숙종(肅宗) 때 문과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한 후, 호조 판서(戶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지내고 기로소(妓老所)에 들어간 강(絳)과 그의 다섯 아들 지미(趾美)․지선(趾善)․지완(趾完)․지경(趾慶)․지인(趾仁) 형제가 크게 현달(賢達 )하여 명성을 날렸으며, 그 중에서 현종(顯宗) 때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병․이․공조 판서(兵․吏․工曹判書) 등을 지내고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지선(趾善)과 숙종(肅宗)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내고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진 비경(飛卿)과 그의 손자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른 봉구(鳳九)는 학행(學行) 뛰어난〈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사람으로 추앙받았고, 봉오(鳳五)는 영조(英祖) 때 대사헌(大司憲)과 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이른 봉조와 함꼐 명성을 떨쳤다.
당대의 덕망 높은 학자였던 심형(心衡)은 비경(飛卿)의 증손으로 영조(英祖) 때 부제학(副提學)․예조 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속종(肅宗) 때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난 증(拯)은 수차에 걸쳐 대사헌(大司憲)과 이조 판서(吏曹判書)․우의정(右議政) 등에 임명되었으나 불취(不就)하고, 당시 격렬한 사색당쟁(四色黨爭)에 깊숙이 가담하여 소론(少論)의 영수(領袖)로서 송시열(宋時烈) 중심의 노론(老論)에 대항하며 이산(尼山)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인종(仁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고 위사일등공신(衛社一等功臣)에 오른 인경(仁鏡)과 영조(英祖) 때 대사간(大司諫).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이른 동도(東度)가 뛰어났으며, 학자(學者)로 명망(名望) 높은 정(鼎)과 경남(景男). 낙(洛)등은 학문으로 가통(家統)을 이었다.
한말에 와서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이름난 준희(俊熙)와 창석(昌錫)․기섭(기燮)․해(海)․애경(愛卿)․석구(錫求)․현진(顯振) 등이 구국(救國)의 신념(信念)으로 항일 투쟁에 앞장섰으며,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소속으로 일본군(日本軍)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 등을 폭사(暴死)시킨 의사(義士) 봉길(奉吉)은 학문(學問)고 충절의 전통 가문인 파평윤씨의 전통을 이었다.
★2).남원윤씨(南原尹氏) 유래
시조 윤위(尹威, 시호는 문헌)는 윤신달의 8세손이며, 윤관 장군의 증손자이다. 윤위는 1176년(고려 명종 6년)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박사를 거쳐 기거랑, 이부랑중, 예빈소경 등을 지내고 1200년(고려 신종 3년) 국자사업으로 호남에 갔을 때 남원에서 복기남이 반란을 일으키자 혼자서 적을 토평하여 평정 시켰다. 그 공으로 남원백에 봉해지고 남원을 식읍으로 하사 하자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윤씨에서 분관하여 남원으로 하였으나 파평윤씨로 다시 합본 하였다고 한다.
- 윤위의 묘소는 전남 구례군 산동면 이평리 문덕산에 있으며 음력 3월 15일에 향사 한다.
★3.)함안윤씨(咸安尹氏) 유래
시조 윤돈(尹敦)은 남원 윤씨의 시조인 윤위의 손자이다. 윤돈은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전의정랑을 거쳐 이부시랑에 올랐다. 이 때 함안에서 반왕의 난이 일어나자 왕이 원수 겸 자사에 봉하고 난을 평정토록 명하자 병사들을 이끌고 평정하여 그 공으로 수문전 태학사, 판밀직 문하시중에 특진되고 함안백에 봉해졌으며 함안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
윤돈에게 아들 4형제가 있었는데 첫째 아들 윤희보(주부공)은 본관을 함안으로 하였고, 나머지 3형제는 남원윤씨를 이었다. 그러나 후에 파평 윤씨로 합본하였다고 한다
.
4)해남윤씨(海南尹氏) 유래
시조 윤존부(尹存富)는 고려중엽 때 사람이나 그 후 7세손 까지는 출생지와 거주지 등이 분명하지 않다. 중시조인 8세손 윤광전이 고려 공민왕 때 사온직장으로 탐진(강진) 지내다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아들 단봉(丹鳳)·단학(丹鶴) 형제를 데리고 해남(海南)으로 은둔(隱遁)하여 이 곳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한 8세손 영동정공부군(令同正公府君)광전(光琠)을 이후에 후손들이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본관을 해남(海南)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 윤광전의 묘소는 전남 강진군 도암면 계라리 한천동에 있으며 음력 9월 9일에 향사한다.
5).해평윤씨(海平尹氏) 유래
시조 윤군정(君正)은 고려 고종, 원종 때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좌복야, 공부판사(工部判事)를 지냈다. 그의 손자 윤석이 고려 충숙왕 때 충근절의 동덕찬화 보정공신, 벽상삼중대광, 도첨의사, 우의정, 판전리사사로 해평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해평을 본관으로 하였다
6).무송윤씨(茂松尹氏) 유래
무송 윤씨는 원래 소호씨이다. 상고시대에 소호 금천씨 차비의 아들 반이 궁정이 되었는데 왕이 옹주의 윤성에 봉해서 윤씨로 하였다고 한다. 오계시대에 후손인 윤경이 병란을 피하여 무송(전북 고창)에 정착하여 살면서 본관을 무송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후의 기록은 알 수가 없다.
시조 윤비는 고려 예종 때 보승랑장으로 무장현 호장을 지냈다.
- 윤비의 묘소는 전북 고창군 대산면에 있다.
7).칠원윤씨(漆原尹氏) 유래
시조 윤시영(尹始榮)은 신라 무열왕 때 태자태사로서 고명원로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아들 윤황 이후의 기록은 없어서 알 수가 없고, 고려시대에 칠원백, 호장을 지낸 윤거부를 1세 조상, 중시조로 하고 있다. 그의 17세손인 윤길보(시호는 충의)가 구성군에 봉해지고 후손들이 칠원군에 살면서 본관을 칠원으로 하였다.
- 묘소는 경남 함안군 칠서면에 있다.
8).양주윤씨(楊州尹氏) 유래
시조는 고려에서 도첨의 정승을 역임한 윤숭(尹 崇)이다 .아들 윤덕방은 양주에서 대대로 살아온 선비로 고려 시대에 판전의사를 지냈다. 그래서 후손들이 양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9).영천윤씨(永川尹氏) 유래
시조 윤절생(尹切生)은 고려시대에 호장을 지냈다. 그의 4세손 윤승관이 정당문학을 지내고 고울(영천)백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본관을 영천으로 하였다.
영천윤씨의 인물로는 태종 때 군수 윤순(淳), 성종 때의 이조참의 윤긍(兢), 선조 때 중추부참지사 윤빙(聘) 등이 있다
10).예천윤씨(醴泉尹氏) 유래
시조 윤충(尹忠)은 고려시대에 추밀부사를 지내고 예빈시 소윤에 추증되었다. 그의 후손들이 예천에 대대로 살아오면서 본관을 예천으로 하였다.
증손 윤상(祥)은 태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성, 예문관제학, 성균관박사를 지냈으며, 성리학과 역학에 밝아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11).해주윤씨(海州尹氏) 유래
시조 윤중부(重富)는 조선 세종 때 중추부지사를 지냈으며, 아들 윤희평(熙平)은 연산군 때 무과에 급제, 공조판서와 중추부지사를 지냈다. 서흥 윤씨(瑞興)라고도 했었다.
4. 윤씨의본관
성씨(姓氏). 본관은 문헌에 149본이 전하지만, 파평(坡平) ․해평(海平) ․남원(南原) ․칠원(漆原) ․무송(茂松) ․함안(咸安) ․해남(海南) ․해주(海州) ․예천(醴泉) ․야성(野城) ․기계(杞溪) ․양주(楊州) ․현풍(玄風) ․죽산(竹山) ․고창(高敞) ․평산(平山) ․영천(永川) ․여주(驪州) ․신녕(新寧) ․덕산(德山) 등 48 이 본이 현존한다.
그러나 해평․무송․칠원․해남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은 모두가 파평윤씨에서 분적 되었다고 하며, 그 중 남원윤씨 ․함안윤씨 ․야성윤씨 ․신녕. 덕산윤씨 등은 파평윤씨로 환보(還譜)하였다고 한다.
윤씨는 파평윤씨의 분적종을 포함한 파평계가 전체 윤씨 인구 중에서 가장 많고, 해남. 칠언 해평윤씨가 다음을 차지한다. (27P 참조)
윤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632명에 상신 18명, 문형(文衡:大提學) 6명, 왕비 5명, 부마 7명, 봉군 7명을 배출하였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 9만 143가구, 51만 6985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8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83만 4081명, 전국 인구 구성비 2.1 %로 274성 중 역시 제8위였다.
2000년11월1일 인구 주택 총 조사에 의하면 인구가 948,600명 2.1% 286개 10대 성중 8위이다
1)【파평윤씨】 시조는 고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신달(莘達)이며, 현손 관(瓘)은 고려 중엽의 문무를 겸비한 명장으로 파평윤씨의 중시조이다.
아들 5형제를 두었으며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로 분파되었다.
파평윤씨 가운데서 주로 판도공파(版圖公派:承禮)와 소정공과(昭靖公派:坤)에서 대대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이 두 파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파평윤씨의 약 80 %를 차지한다.
판도공파는 승례(承禮)의 아들 대에서 다시 제학공파(提學公派:珪) ․부윤공과(府尹公派:普老) ․정정공파(貞靖公派: )로 갈라지며, 그 중 정정공파가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집안이다.
윤번(璠)은 세조의 국구로서 그의 맏아들 사분(士昐)은 우의정, 둘째 사균(士昀)은 예조판서, 셋째 사흔(士昕)이 우의정이 되어 형제간에 정승을 지냈다.
그러나 뒤에 사분과 사흔 두 집안에서 같은 시기에 각각 왕비가 나와, 왕실을 배경으로 대윤과 소윤으로 갈라져 일가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사분의 증손 임(任)은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이며, 장경왕후는 여필(汝弼)의 딸로서 세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었다.
장경왕후의 뒤를 이어 사흔의 증손인 지임(之任)의 딸이 제2계비로 책봉되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되었다. 문정왕후가 아들 경원대군(慶源大君:明宗)을 낳은 뒤로 장경왕후의 오빠 임을 중심으로 한 일파, 즉 대윤과 문정왕후의 동생 원형(元衡)을 중심으로 한 소윤이 정치적 암투를 벌였다.
소정공파는 승례의 형 승순(承順)의 아들 곤(坤)의 후손이다. 곤은 정종 때 제2차 왕자의 난에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공신에 책록, 이조판서를 지냈다. 손자 호(濠)는 성종의 국구로서 딸이 성종비 정현왕후(貞顯王后)가 되면서 돈령부영사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필상(弼商)의 증손 현(鉉)은 명종 때 호조판서를 지내고, 선조 때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돈령부영사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이 밖에 사로(師路)는 세종의 딸 정현옹주(貞顯翁主)와 결혼하여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지고, 세조 즉위년 좌익공신에 책록되고 좌찬성 ․중추부영사에 이르렀다. 이조판서 강(絳)과 다섯 아들 지미(趾美) ․지선(趾善) ․지완(趾完) ․지경(趾慶) ․지인(趾仁) 등이 뛰어났으며, 특히 지선 ․지완의 형제 정승이 유명하다. 지선은 현종 때 병조 ․이조 ․공조판서를 거쳐, 숙종 때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지완은 어영대장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오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한편 숙종 때 호조참판을 지낸 비경(飛卿)의 손자 봉구(鳳九) ․봉오(鳳五) ․봉조(鳳朝), 그리고 증손 심형(心衡) 등이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이다. 봉구는 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숙종 때 집의(執義) ․찬선(贊善) 등을 지내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봉오는 영조 때 대사헌 ․우참찬 등을 지냈으며, 봉조는 암행어사 ․대사간 등을 지내고, 영조 때 부제학이 되고 대제학에 이르렀다. 또 심형은 영조 때 부제학 ․예조참판등을 역임하였다.
노성윤씨(魯城尹氏)란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세거한 파평윤씨 소정공파에서 분파된 장령공(培)돈(暾)의 후손을(시조21세손) 가리키며, 충남에서는 학자 집안으로 알려졌다. 돈은 선조 때 대사헌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그의 다섯 손자 가운데 특히 황(煌)은 아우 전(烇 )과함께 학자로 유명하다. 황의 여덟 아들 중 순거(舜擧) ․문거(文擧) ․선거(宣擧) 세 아들이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문거는 효종 때 동래부사를 지내고 경학(經學) ․성리학 ․서예에 뛰어났고, 선거는 거유로서 숙종 때 예송(禮訟)을 둘러싼 대립에서 중립을 지켰다.
그의 아들 증(拯)은 숙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
았으며, 왕과 한번의 배면(拜面)도 없이 상신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증은 서인이 노 ․소론으로 분당하자 송시열의 노론에 대항하여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아들 행교(行敎)도 대사헌이 되었다.
이 밖에도 정승급 인물로는 인경(仁鏡) ․동도(東度) 등이 있다. 인경은 각조의 판서를 거쳐 인종 때 좌의정 ․영의정이 되고, 명종이 즉위하자 위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동도는 영조 때 대사간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학자로는 정(鼎) ․경남(景男) ․낙(洛) 등이 유명하다. 근세인물로는 1932년 상하이에서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등을 폭사시킨 의사 윤봉길(尹奉吉)이 있다.
집성촌 :전남함평군 해보면 상곡리. 대동면 상옥리. 엄다면 엄다리 무안군 해제면 양간리 나주시 남평면 남석리 충남 연기군 서면 봉암리, 경북 예천군 유천면 화지동, 용궁면 대은 리. 선산군 고아면 황산동 , 달성군 옥포면 신당동등
2)【남원윤씨】시조 신달(태사공)의 8세손 위(시호:문헌)는 1176년(명종6) 문과에 급제 국자박사를 거쳐 기거랑, 이부랑중, 예빈소경 등을 지내고 1200년(신종3) 국자사업으로 안염사가 되어 호남에 갔을 때에 남원에서 복기남이 반난을 일으켜 수쉬가 제압치 못하고 안염사에게 고하니 그가 단기로 입부 적도를 회유하여 해산시키고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전추기에 특승되고 남원백에 봉해졌으며 남원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으므로 그의 직계들이 남원에 세거하면서 파평윤씨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남원으로 하였다. 위의 묘소는 구례 문덕산하 초량방에 있고, 음3월15일에 향사한다. 방산서원 광주 서강사에 제향한다.
시조 윤위(尹威, 시호는 문헌)는 윤신달의 8세손이며, 윤관 장군의 증손자이다. 윤위는 1176년(고려 명종 6년)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박사를 거쳐 기거랑, 이부랑중, 예빈소경 등을 지내고 1200년(고려 신종 3년) 국자사업으로 호남에 갔을 때 남원에서 복기남이 반란을 일으키자 혼자서 적을 토평하여 평정 시켰다. 그 공으로 남원백에 봉해지고 남원을 식읍으로 하사 하자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 윤씨에서 분관하여 남원으로 하였으나 파평 윤씨로 다시 합본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백운거사로 필명이 높았던 이규보가 쓴 [국자사업윤공애사]에 의하면, 윤위는 문하시중 윤관(尹瓘)의 후손으로 덕과 인품과 문장을 갖추었으며, 술을 몇말씩 먹는 호주가인데도 허튼 소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경 유수로 있다가 죽었는데 남원 사람들이 그의 공을 생각하여 장례비를 모아 남원 땅에 묻히게 하여 후손들이 남원에 살면서 시적(始籍)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맥으로는, 아성의 전란에 순절한 극민(克敏 : 시조 위의 아들)과
문하시중에 올라 함안백에 봉해진 돈(敦)의 부자가 유명했으며, 시조의 현손으로 평리를 지낸
수균(守均)의 아들 황(璜)은 고려말에 전서를 지냈으나 조선 개국에 두문 불사하여 충절을 지켰다.
2000년 통게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원윤씨(南原尹氏)는 남한에 총 10,117가구,
32,7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성촌 : 충남 부여군 옥산면 봉산리 전남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
충남 천안군 동면 화계리 전남 화순군 능주면 천덕리
전북 순창군 유등면 외이리 전남 구례군 산동면 이평리
전북 남원군 덕과면 용산리 전남 해남군 황산면 부곡리
. 전북 남원군 주생면 일원. 전남 영암군 삼호면 난전리
3)【함안윤씨 】
시조 윤돈(尹敦)은 남원윤씨(南原尹氏)의 시조 윤위(尹威)의 손자이다.
윤돈은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 이부시랑(吏部侍郞)이 되었으며 때마침 함안에 반란이 일어나자 그가 원수(元帥) 겸 자사(刺使)가 되어 이를 평정했다.
그 공으로 함안을 식읍으로 하사 받고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래서 그의 큰아들 희보가 함안에 살면서 그곳에 관적 하였다.
함안윤씨(咸安尹氏)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6명, 공신 1명, 장신(將臣) 4명을 배출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윤기견(尹起畎 )과 윤각(尹慤)을 들 수 있다.
윤기견은 1439년(세종 21) 친시문과에 급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으로 <세종실록(世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고,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지냈으며, 죽은 뒤 그의 딸이 숙의(淑儀)가 되어 연산군을 낳아 연산군 때 함안부원군(咸安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그의 아들 윤구(尹遘)도 병조참판을 지냈다.
윤말손(尹末孫)은 세조 때 북병사(北兵使)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 등에 오르고 함안군(咸安君)에 봉해졌다.
윤천뢰(尹天賚)는 부윤 진경(進卿)의 아들로 인조 때 무과에 급제, 현종 때 함경남․북도의 병마절도사, 충청도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도총관․어영대장 등을 지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대흥산성(大興山城)을 증축했으며, 다시 도정(都正)이 되어 강화도 돈대(墩臺)의 공사를 총감독했다.
그의 아들 윤취상(尹就商)은 숙종 때 총융사(摠戎使)․어영대장(御營大將)․훈련대장(訓練大將)․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윤의(尹顗 )는 선조 때 문과에 급제, 필선(弼善)을 거쳐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반계(盤溪) 윤원(尹愿)은 숙종 때 민비의 폐비론이 대두되자 수백 명의 유생을 인솔, 대궐 앞에서 이의 부당함을 상소했다.
심적당(心適堂) 윤욱(尹頊)은 광해군 때 진사로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자 이이첨(李爾瞻)을 비방하고 호남으로 남하하여 보성의 실치(失峙)에 정착했다.
충민공(忠愍公) 윤각(尹慤)은 숙종 때 무과에 급제, 초계군수(草溪郡守)․전주영장(全州營將) 등을 거쳐 전라도 수군절도사에 승진되고, 해적의 발호가 심하자 금위중군(禁衛中軍)이 되어 방어에 공을 세웠다.
그 후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청(淸)나라 사신과 함께 백두산의 경계를 사정하고, 백두산 남쪽의 지형을 그려 바쳤다.
경종 즉위년에 병조참판에 전임되고, 삼도 수군통제사를 거쳐 총융사(摠戎使)가 되었으나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유배되었다가 영조 때 신원 되었다.
그의 손자 윤태연(尹泰淵)도 영조 때 총융사 ․어영대장 등을 지냈다.
집성촌 : 광주시 남구 노대동, 행암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