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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의 진실 - 제1부
1. 아버님의 이북 노정
4) UN이 참전한 6·25 전쟁-하나님의 재림주 구출섭리
① 한국전쟁 발발과 흥남수용소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은 1950년 6월 25일 미명이었다. 아버님과 감방에서 함께 지낸 김인호 씨에 의하면, 수용소에서는 한국전쟁은 수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해졌다.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하여 미 제국주의자의 지시를 받은 남의 병사들이 38도선 전역에 걸쳐 대대적 무력 침략을 해왔다. 우리의 용맹한 병사들은 즉각 반격에 나와 용감하게 적을 퇴출시키고 있다. 동지들은 어떠한 사태가 일어나도 동요하지 말고 맡겨진 책임을 완수하도록.”
수용소에서는 인민군의 승리를 알리기 위하여 매일 요란스러웠다. 저녁의 ‘독보회’에서 읽는 노동신문은 북한 승리의 기사를 크게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수인들에게 오는 식료의 배급은 점점 형편없는 것이 되었다. 면회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미숫가루도 손에 들어오지 않게 되어 거의 모든 수인은 빈사상태가 되어 사망자는 이전보다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유엔군은 북한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였다. 흥남비료공장에 대한 폭격은 1950년 8월 1일이었다. B-29 폭격기 50대가 흥남 공업지대를 맹렬히 폭격하였다. 폭탄은 합계 1,500발, 총 중량은 750톤 이상이 되었다. 비료공장에는 철근 콘크리트 방공호가 있었지만, 거기는 일반인이 먼저 들어갔기 때문에 수인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것으로 생사가 갈렸다. 그렇다 해도 일반인이 들어간 방공호에서의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거기에 들어가지 못한 수인들의 사망자는 적었다. 박정화 총반장에 의하면, 일반인이 2,700명, 수인이 270명 사망하였다고 한다.
폭격을 받은 8월 1일 수인들의 얼굴은 죽은 사람 같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박 총반장에 의하면, 아버님만은 태연하게 폭격 같은 것은 없었던 듯한 태도였다고 한다. 아버님은 미리 이와 같은 사태가 올 것과 또 자기를 중심한 직경 12미터 안은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알고 친한 사람들을 자기 가까이에 있도록 전하고 있었다. 폭격 때 아버님은 혼자서 명상하고 있었다.
② 흥남수용소로부터의 해방
국군은 1950년 10월 1일 삼팔선을 돌파하여 북상했다. 10월 10일 국군은 흥남으로부터 남쪽에 위치한 원산을 점령하였다. 공산당은 유엔군이 북상하고 있는 것을 알고 많은 한국인 포로를 살육하기 시작했다. 연발총으로 소사(掃射)하고 수류탄을 폭발시키고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이는 등 잔인무도한 학살이었다.
흥남은 함흥으로부터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흥남수용소에서는 10월 12일 형기 7년 이상의 수인 약 70인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산에 끌려가서 학살되었다. 아버님의 형기는 5년(1948년 9월 9일에 3년 4개월로 감형)이었다. 아버님을 포함한 수인들이 학살될 예정일의 전날 미국공군의 B-29 폭격기는 흥남비료공장과 그 부근에 맹렬한 폭격을 가하였다. 10월 14일의 일이었다.
아버님은 이날 출감하셨다. 이 10월 14일을 교회에서는 ‘이북출감일’로서 매년 기념하고 있다. 자신이 흥남수용소에서 해방된 날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잊을 수 없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버님은 후에 ‘오! 인천’이란 한국전쟁을 테마로 한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것도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을 교육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사실을 바르게 전하는 일과 맥아더 원수와 유엔군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함이었다.
③ 흥남수용소 생활에 관한 아버님의 소회
아버님은 죽음과 이웃한 환경 가운데 2년 5개월간 흥남수용소에서 생활하였다. 가장 엄한 환경 가운데서 생활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가깝게 체험한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기간에 관한 아버님의 말씀을 단편적이지만, 몇 개 소개하겠다.
“옥중 생활은 나에게 슬픔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그 이상 없는 최고의 도장이었습니다.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원수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사형수와 코를 맞댈 수 있으며 숨을 함께 쉴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도장이었습니다.”
“2년 8개월의 수용소 생활에서 나는 공산체제의 사악함을 뼈골에 사무치도록 체험했습니다. 나는 눈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최악의 비인간성을 목격했습니다. 이대로 공산주의가 방치된다면 전 세계는 그들의 손에 의하여 파멸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나는 공산 이데올로기와 투쟁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 몸을 바쳐왔습니다. 불은 불로서 제어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다른 별개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만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생사를 결정하는 싸움의 방법은 이념의 싸움인 것입니다. 이 전쟁은 군사력만 가지고 싸우는 전쟁이 아닙니다. (중략) 그리고 나는 공산주의의 사악함의 핵심은 하나님의 실존을 부정하는 데 있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인간의 영원한 생명을 부정하는 데 있는 것임을 발견하였습니다.”
“공산당원들은 전부가 새빨간 거짓말쟁이들입니다. 내가 형무소에 있을 때 그곳 소장이란 사람이 매일같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재소자들에게 매일 소고기와 신선한 쌀을 몇 그램씩 주셔서 이렇게 좋은 식사를 하기 때문에 몸이 튼튼해지고 공장에서 일을 잘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중략) 공산당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거짓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중상모략은 보통입니다.”
“내가 입을 열면 영계가 동원되어 전도해 주는 것입니다. 선생의 수인번호는 596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꿈에 나타나서 “몇 호실의 596번, 이러이러한 분이 있는데 당신이 받은 미숫가루를 조금도 손대지 않고 가져가서 그분에게 드리시오.”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1년에 2회 사과 한 개를 배급해 주는데, 그것을 받으면 보통 사람들은 받자마자 한입, 두입 씹어 먹어서 1분도 안 걸리게 다 먹어 치웁니다. 그러나 나는 ‘이 색은 얼마나 예쁠까? 이 색을 맛보자! 그다음에는 맛을 맛보자.’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먹는다는 생각이 나오지 않습니다. 먹을 때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사과를 먹을 때에 나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먹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먹었습니다.”
“내가 감옥을 떠날 때 부모가 자기로부터 떠날 때보다도 더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그들에게 남겨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활동하여 왔습니다.”
마지막의 말씀을 좀 더 알기 쉽게 표현해보자. 그 수인이 부모와 이별할 때보다도 아버님과 이별할 때에 더 안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심정적 관계(인연)를 맺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아버님은 수용소 생활을 해 오셨다는 의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부모 중의 부모, 즉 참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다른 죄수들을 자기 자식 같이 사랑했다는 말이다.
실제로 흥남수용소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어떤 수인 문정빈(文正彬)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가 함흥에 있었지만, 아버님과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하고 집을 나와서 아버님을 따라갔다. 아버님이 평양에서 피란할 때도 김원필 씨는 평양에 모친이 있었지만, 모친과 집을 버리고 아버님과 함께 행동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의 끈보다도 더 깊은 관계를 아버님은 김씨와의 사이에서 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아버님은 옥세현 씨가 정성을 다해 자기 머리카락으로 짜서 만든 버선을 신고 미숫가루를 가지고 사랑하는 식구들이 있는 평양으로 향하였다.
④ 흥남에서 식구들이 있는 평양으로
1945년 10월 14일은 김일성(당시 만 33세)이 처음으로 평양에서 공적으로 민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아버님이 흥남수용소로부터 해방된 것은 바로 5년 후인 1950년 10월 14일이다. 아버님은 이때 만 30세, 수용소를 떠나 식구들이 있는 평양으로 향하였다.
10월 13일 모택동은 북한에 군사 원조를 공여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이러한 때 아버님은 흥남 출발 10일 후인 10월 24일 평양에 도착하셨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10월 25일에 중국 인민지원병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김일성은 10월 12일(16일이란 설도 있음)에 고급승용차로 평양을 비밀리에 탈출하였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30일에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시청 광장에서 열린 평양시민환영대회에 참석하였다.
⑤ 아버님, 성가 2장 ‘성려의 새 노래’ 가사를 지으심
아버님은 흥남노무자수용소에서 예수님의 공생애에 해당하는 2년 8개월간 사탄과의 싸움에 승리하시고 예수님이 잃어버린 12사도에 해당하는 12인 이상을 전도하심으로써 예수님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우시고 해방되셨다.
아버님은 자신의 옥중 생활 동안에 하나님이 겪으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사랑의 염려와 노고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미래 섭리에 대한 뜻을 생각하시면서 성가 2장 ‘성려(聖慮)의 새 노래’ 가사를 지으셨다. 작사의 시기는 평양에 도착하신 10월 24일 직후일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님이 흥남수용소에서 나올 때 지참한 물건 가운데 미숫가루가 있었다. 평양으로 오는 10일간 배고픔을 참고 미숫가루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이 기간에 산에 가도 농가의 사람들은 모두 피란하고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것은 썩고 얼어붙은 감자뿐이었다고 김원필 씨는 말하였다. 아버님은 썩은 감자에 손을 댄 정도였고, 공복 상태에서 평양에 도착하였다.
평양에 도착해서 3일 정도 되었을 때, 아버님은 제자 2~3명을 모으고 미숫가루에 물을 타서 수용소에서 만든 젓가락으로 반죽하여 떡을 만들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수용소에서 아버님이 하신 일을 거기서 설명했다. 수용소에서 가지고 온 미숫가루를 아버님 자신이 그때까지 먹지 않은 것은 자기가 현재 줄 수 있는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을 식구들에게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에게 있어 여기 있는 수명의 식구는 전 인류를 대표해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아버님 말씀에 ‘주는 데 굶주린 사람이 되자.’는 말씀이 있다. 아버님은 어떤 때라도 최고의 것을 항상 주려고 하신다. 그것도 자기가 갖고 남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자기를 희생하면서 주려고 하신 것이다.
서울에서의 학창 시절에 자기가 금식해서 돈을 만들어 학우를 위하여 그 돈을 빌려준 것과 같은 것이다. 아버님은 하나님의 사랑, 즉 참사랑을 실천하셨다. 참사랑에 관하여 아버님은 되풀이 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참사랑이란 어떠한 사랑일까요? 참사랑의 본질은 받으려고 하는 사랑이 아니고 사람을 위하여 전체를 위하여 먼저 주는, 위하여 살려고 하는 사랑입니다. 주고도 주었다고 하는 것조차 기억하지 않고 계속하여 주는 사랑입니다. 기뻐서 주는 사랑입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안고서 젖을 먹이는 기쁨과 사랑의 심정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기쁨을 느끼는 것과 같은 희생적 사랑입니다.”
아버님은 평양에 도착하여 40일간(10월 24일~12월 4일) 평양에 머물렀다. 제자들에게 흥남수용소에서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아버님은 부모 형제가 있는 정주(定州)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자기 가족 이상 제자들과 만나는 것을 우선하였다. 제자들을 다 찾은 후에 고향을 찾아간다는 것이 하나님을 따라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다 찾았을 때는 고향에 갈 수 없는 정세가 되어 있었다.
⑥ 평양 체류 40일간
중공군이 참전함에 따라 유엔군은 평양에서 후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란하기 시작하였다. 아버님은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곧 남쪽으로 피란하시지 않았다. 80세가 넘은 노파에게 무사히 귀환했다는 말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3일 맥아더 원수는 유엔군에 평양을 포기하고 삼팔선까지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 날 평양 방위선의 중앙부인 성천(成川)이 중공군에 탈취되어 이 돌파구로부터 대군이 밀려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시민은 아침 일찍부터 피란을 시작하였다. 다음 날 12월 4일에 유엔군은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이때 평양의 대동강에 걸려있던 철교가 유엔군의 폭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피란민들은 다리를 정상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파괴된 철골을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12월 4일 저녁부터 5일 낮까지 대동강을 건넌 피란민 수는 5만 명이 넘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의 후퇴에 따라 많은 북한 주민이 남하하기 시작하여 피란민의 대열은 남쪽으로 가는 도로를 메웠다. 피란민들은 추위와 질병과 배고픔과 싸우며 북한을 탈출하였다.
김원필 씨가 찾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을 때 그 노파는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상태였다. 김씨는 노파에게 아버님이 무사히 수용소로부터 나왔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 일을 아버님에게 전하니까 비로소 아버님은 “그러면 이제 피란 가자.”라고 말했다.
아버님은 왜 그 노인을 만날 때까지 피란할 수 없었는가. 그 노인은 아버님이 평양에 와서 전도할 때 교회에 와서 언제나 아버님 옆에 앉아 아버님의 옷을 만지고 싶어 했다. 그러한 노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공로를 쌓은 사람을 무시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참소 받는다고 말씀을 하신다. 아버님은 하늘과 땅 앞에 그리고 그들의 조상과 후손으로부터도 동정 받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일 때문에 아버님 일행의 피란은 늦어졌다. 이때는 일각(一刻)을 다툴 때였다. 그것은 아버님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으로 곧 평양을 탈출하는가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아버님은 김원필 씨에게 박정화 씨(흥남수용소에서 총반장을 했던 제자)를 데려오라고 하셨다. 김씨가 박씨의 집을 찾아가니까 그만 혼자 남아있었다. 그것은 박씨가 발 골절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가족은 피란 가는 데 그가 큰 짐이 되기 때문에 자전거와 개를 남겨두고 먼저 가버리고 없었다.
그런 가운데 김씨가 찾아갔기 때문에 박씨의 기쁨은 한층 더 컸다. 박씨는 자기를 버리고 먼저 아버님도 피란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리어카에 그와 자전거를 싣고 아버님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 후 다시 아버님 일행은 박씨가 있던 집에 돌아왔다. 그 집은 높은 데 있었고, 평양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이때 유엔군은 후퇴하면서 포탄을 폭발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소리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박씨에 의하면, 동쪽 하늘이 밝기 시작할 때 아버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고 한다.
“내가 평양에 온 것은 평양을 제2의 예루살렘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평양의 (기독교) 성도들이 나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장차 평양은 공산군의 소굴이 된다.”
이 말은 2000년 전에 예수가 불신하는 사람들에게 말한 다음 성구와 흡사하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 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태복음 23장 37~38절)
청년인 건장한 사람에게도 피란길은 극히 어려운 것인데, 아버님은 발이 골절된 박씨를 데리고 김씨와 세 사람이서 평양으로부터 부산을 목표로 떠났다. 주요 도로는 군인들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란민은 포장되어 있지 않은 논길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자전거에 탄 박씨가 핸들을 잡고 방향 조종을 했다. 그의 오른발은 페달에 닿지만, 깁스를 한 왼발은 페달에 닿지 않았다. 아버님이 그 자전거를 뒤로부터 밀었다. 김씨는 짐을 지고 그 뒤를 따랐다.
12월 4일 저녁 피란민 가운데서 늦게 대동강을 작은 배를 타고 건너 평양을 탈출하였다. 고난을 상징하는 것 같은 눈이 내리는 추운 날의 출발이었다. 이때 아버님의 결의는 흥남수용소에 들어갈 때 ‘제일 어려운 일을 내가 책임진다.’와 똑같이 ‘피란민 가운데서 제일 고생한다.’였다.
세 사람의 복장은 이러하였다. 아버님은 박씨의 낙타 오버를 한복 바지저고리 위에 입고, 머리에는 머플러로 둘둘 감았다. 김원필 씨는 박씨의 개털로 된 오버, 박씨는 스프링코트를 입었다.
피란할 때 아버님을 모시고 흥남수용소로부터 따라왔던 문정빈(文正彬) 씨는 길이 엇갈려서 함께 남하할 수가 없게 되었다. 흥남수용소로부터 신고 온 옥세현 씨의 머리카락으로 짠 버선을 가져오지 못하고 피란길에 나선 것은 그때의 혼란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옥씨는 후에 다시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서 버선을 짰다. 아버님이 너무나도 그 버선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⑦ 아버님, 성가 3장 ‘영광의 은사’ 가사를 지으심
아버님은 10월 24일에 평양에 도착하여 김원필 씨에게 평양에 있던 제자 등을 찾아보게 하시고 40일을 체류하시게 됐다. 10월 25일에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가하게 되고 맥아더 원수는 12월 3일에 유엔군에게 평양을 포기 하고 삼팔선까지 후퇴할 것을 명하였다.
아버님은 하나님으로부터 평양을 떠나 자유 대한민국에 가서 북한에서의 승리 터 위에 새로운 섭리를 출발하는 영광의 은사를 받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성가 3장이 된 ‘영광의 은사’의 가사를 지으셨다. 작사 날짜는 1950년 12월 초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양에서 만나야 할 노파를 만나시고 12월 4일 저녁에 작은 배로 대동강을 건너 평양을 탈출해 남하의 길에 오르셨다.
⑧ 평양으로부터 피란민으로서 남하
이남으로 가는 피란민은 점점 수가 많아져서 파도와 같이 밀려왔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쪽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한번 잃어버리면 찾아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어떤 때에 김원필 씨는 아버님을 놓쳐버린 일이 있었다. 그때 운 좋게 재회할 수가 있었다.
많은 피란민 속에는 북한의 스파이가 피란민을 가장하여 민중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정보를 흘리는 일도 있었다. 이런 스파이가 있었기 때문에 유엔군은 피란민을 향해서 기총소사(機銃掃射)를 하는 일도 있었다. 피란민 가운데 어떤 어머니가 유엔군의 총을 맞아서 등에 업혀있던 아이가 울부짖는 모습을 아버님 일행은 목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장을 보고 박씨는 생지옥을 떠올렸다.
출발해서 1주일쯤 지나서 고갯길을 올라가게 되었다. 오르막길을 만나면 큰 짐을 짊어진 사람은 그 고개를 넘어가기가 지극히 어렵게 된다. 더욱이나 박씨와 같이 발을 다친 거구의 몸을 자전거에 싣고 언덕길을 올라가는 것은 대단히 힘들었다. 몇 번 시도해도 그 언덕길을 넘어갈 수가 없었다. 중공군이 노도와 같이 뒤로부터 따라오고 있었다. 이때 박씨는 아버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간청하였다.
“선생님, 이대로 가면 저 때문에 두 분도 다 죽습니다. 저를 여기 놓아두고 먼저 가 주십시오.”
이때 아버님은 어떻게 답하였을까! 여기서 아버님은 박씨에게 성을 내고 야단을 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으로 인연을 맺은 우리는 죽어도 같이 죽는 것이고 살아도 같이 사는 것이다. 이런 약속을 한 우리가 아닌가.”
박씨는 이 말을 듣고 감격하였다. 아버님은 자기 등에 박씨를 업고 한숨에 그 고개를 넘어갔다. 김씨는 그 뒤를 따라 자전거를 밀고 통과하였다. ‘세 사람이 하나가 되면 하늘이 지켜준다.’라고 하는 아버님의 말씀을 믿고 박씨도 아버님을 따라갔다.
잔디밭이 아름답게 깔려있는 곳에 도착하였을 때 일행은 잠시 쉬게 되었다. 이때 아버님은 “사냥을 하자.”고 말씀하셨다. 총으로 꿩을 잡는 사냥을 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세 사람은 식사를 얻어먹을 수 있을까 없을까도 알 수 없는 피란민이다. 사냥이라고 해도 잡는 것은 자기 내복 속에 살고 있는 이였다. 1개월 가까이 같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이가 무지하게 많은 내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리씩 잡으면 다 잡을 수 있는 수도 아니었다. 근처에 있는 소나무 가지를 꺾어서 내복에서 이를 쓸어내렸다. 이가 제일 많이 있는 것은 젊은 김씨의 내복이었다.
⑨ 용매도(龍媒島)에서 생긴 일과 삼팔선에서의 기도
그 후 아버님 일행은 육지로부터 수km 앞에 있는 용매도(황해남도 남해안의 해주만 입구에 위치)로 향하였다. 2010년 11월 23일 북한에 의한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난 섬으로부터 용매도는 서쪽으로 19km 떨어진 곳에 있다.
그 용매도로부터 인천으로 가는 배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곳에는 아버님과 아는 사람이 어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일행은 용매도로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다.
밤중 썰물 때를 기다려 아버님은 바지를 위쪽까지 말아 올리고 무릎 밑까지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곳을 자기만큼 체중이 있고, 깁스를 한 박씨를 업고서 새까만 밤에 바닷길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발밑은 보이지 않는다. 맨 발로 걷기 때문에 조개껍질이나 작은 돌에 발바닥을 찔린다. 가는 도중에 박씨를 내려놓고 쉴 수도 넘어질 수도 없다. 얇은 얼음판 길을 걷는 것과 같은 위험한 노정이었다. 이때 김원필 씨는 짐과 자전거를 끌고 뒤를 따랐다.
여기서 가장 괴로울 때 아버님은 마음속으로 “인류 구원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이 이상 곤란한 일이 찾아와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이와 같은 길이 일생 계속되어도 간다. 그런 각오를 하나님 앞에 맹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라고 생각하면서 결의를 새롭게 굳혔다.
사고 없이 무사히 해뜨기 전에 목적지인 용매도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아는 사람은 벌써 피란했는지 있지 않았다.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탔지만, 배 안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어 결국은 군인과 경찰 관계자 이외의 일반인은 모두 배에서 내려야 했다. 다시 목숨을 걸고 온 길을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때의 부담과 절망감은 두 사람(김씨와 박씨)에게는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배로 남쪽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없어지고, 추위와 굶주림 가운데 다시 지금 온 길을 되돌아간다는 것은 벌써 인간 힘의 한계를 넘어간 것이었다.
이때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후의 일이었다. 아버님이 흥남수용소로부터 무사히 해방된 기념일(10월 14일)에 김씨가 용매도를 왕복했을 때 이야기를 교회 식구들 앞에서 간증하였다.
“아버님은 어떻게 그와 같은 어려운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지금도 믿을 수가 없다.”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아버님은 짤막하게 이렇게 말씀했다.
“이 한 사람(발이 다친 박정화 씨)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가지 못하면 천주복귀(天宙復歸)의 뜻은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님은 이렇게 말씀을 이어갔다.
“이 한 사람을 천주 대신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천주적인 힘이 나에게 보태졌던 것이다.”
천주(天宙)의 천(天)은 영계(천상)를 의미하고, 주(宙)는 지상계를 의미한다. 새로운 개념의 용어이다. 김씨는 이때 처음으로 등에 업은 박씨에 대하여 아버님은 천주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님은 용매도로부터 다시 돌아올 때, 박씨와 김씨가 너무나 마음이 서운해서 쳐져있는 것을 알고 “오늘 우리를 접대하여 줄 귀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두 사람은 실망 가운데 그 말에 격려를 받고 어려운 바닷길을 힘내어 걸어서 전날 밤에 용매도로 출발했던 바닷가로 다시 돌아왔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해가 지고 한층 더 추워져 있었다. 그때 아버님은 북한 인민군의 패잔병이나 스파이로 오인 받고 향토 자경단원들로부터 매를 맞았다. 대한민국의 군인은 머리가 긴데 반하여 북한 인민군은 머리를 짧게 깎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님의 머리는 아직 짧았다.
김씨와 박씨는 아버님이 목사이고, 북한에서 수감되어 있었을 때에 머리를 깎였다는 것을 설명하였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이 아버님의 짐 속을 뒤져 조사하니 성경책이 나왔다. 그래도 그들은 믿지 않고 목사를 가장한 스파이라고 결정 내렸다. 박씨가 참지 못하여 자경단원에게 반격을 하려 하니까 아버님이 박씨를 말리면서 못하게 하였다.
이때 자경단원은 아버님에게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서 3장 16절의 성구를 말해보라고 하였다.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성구이다. 아버님이 그 성구를 유창하게 대답하니까 그때서야 오해가 풀렸다.
그 후의 일이다. 아버님 일행은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젊은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그 마을 교회의 집사로 성가대를 지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귀한 사람이 오니까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계시를 받고 있었다.
그 계시의 말씀에 따라서 그 부부는 결혼할 때에 맞춰놓은 새 이부자리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잠자리도 방 가운데 가장 따뜻한 방을 제공하였다. 아버님이 “우리를 대접해 줄 사람을 만난다.”고 말씀한 대로 일이 실현된 것이다.
김씨는 후에 이 일로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버님이 매 맞는 고통(시련)을 받은 대가로 따뜻한 이불과 방,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다.
김씨는 당시를 돌이켜 볼 때 자기 자신의 일 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아버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을 후회하고 자기들의 부족함으로 인해 아버님이 고통당하시게 된 것에 대하여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게 되었다.
아버님 일행은 그 후 삼팔선까지 남하했다. 이때, 아버님은 두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삼팔선을 건너면서 ‘남북을 내 손으로 통일하겠습니다.’라고 맹세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의 기도를 하셨다. 아버님은 생애 동안 이 기도를 잊은 일이 없었다.
아버님이 남북통일을 보는 관점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다.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는 민주주의 세계와 공산주의 세계로 갈라진 것의 축소판이고, 한반도의 통일은 민주주의 세계와 공산주의 세계의 통일에 직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한반도의 남북통일 없이는 하나님을 중심한 세계의 평화와 통일도 없다고 본다. 아버님은 하나님을 중심한 새로운 진리를 바탕으로 한 절대적 가치관에 의해서만 남북통일과 양대 세계의 통일은 온다고 말씀하셨다.
⑩ 서울에서 부산을 향하여
서울에 아버님 일행이 도착한 것은 1950년 12월 27일이었다. 서울은 아버님이 학창 시절을 지내신 곳이고, 일본 유학 후 처자와 함께 생활한 제2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북한으로 갔기 때문에 처자와 이별한지 4년 반이 지나 있었다.
그런데 이때 아버님이 처자를 만나기 위하여 찾았다는 이야기나 증언은 없다. 아버님의 지금까지 행동 방식을 보면 만나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정확히 말하면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제강점기에 경기도경찰부에서 함께 고문을 받았던 곽노필(郭魯弼) 씨의 집을 찾았지만, 그는 집에 있지 않았다. 남쪽으로 피란했기 때문이다. 아버님 일행은 옛날에 하숙했던 이기봉(李寄鳳) 씨 집을 찾아가 그 곳에서 숙박하였다.
서울에서 체재 중에 병역조사를 받게 되었다. 여기서도 아버님은 머리가 짧기 때문에 군대의 도망병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다. 많은 사람이 피난하여 있을 때였으므로 스파이인지 군인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북한의 스파이를 군대에 넣으면 그야말로 큰일 난다. 그런 상황 하에서 그해 마지막 날 아버님과 김씨는 서울의 창덕궁 앞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검사에서 두 사람이 같이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군의 징집이 면제되는 병종(丙種) 판정 증명서를 받게 된 것이다.
후에 1955년 7월 4일 아버님은 서울에서 사건이 생겨서 체포되는 일이 있었다. 체포된 이유의 하나가 ‘병역법 위반’ 혐의였다. 나중에 군의 징집이 면제된 이때의 사실이 판명된다.
아버님 일행이 서울에 도착하였을 때 식료품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먹을 것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서울 사람들은 거의가 피란을 떠나가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노인뿐이었다. 김원필 씨는 어딘가의 집에 가면 무언가 먹을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집에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모두 못을 박아 놓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집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먹을 것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김씨는 어떤 집의 담을 넘어서 안에 들어갔다. 열심히 찾아보았다. 속에 있는 방에 들어가니까 직전까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불이 깔린 채로 있었다. 김씨는 서랍 등 모든 것을 열어보면서 먹을 것을 찾았다.
그러면서 이불 밑에 작은 주머니 같은 것이 있는 것을 찾았다. 그것을 열어보니까 그 안에 쌀이 들어 있었다. 김씨는 기뻐하면서 그 쌀을 가지고 와서 밥을 지었다. 이렇게 하여 세 사람은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 아버님은 김씨에게 그 쌀을 어디서 입수하였는지 물었다. 김씨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아버님은 이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중에 이 쌀의 3배 이상을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김씨에 의하면, 보통 사람 같으면 이와 같은 전시에 있으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배고픈 대로 먹어치운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님은 앞의 말을 김씨에게 하고도 식사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김씨는 아버님이 말한 “3배 이상을 갚아야 한다.”는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을 듣고서야 비로소 아버님은 밥에 손을 댔다.
김씨의 이러한 증언을 듣고 생각나는 것이 있다. 아버님이 고향 정주에서 생활하고 있던 어린 시절의 일이다. 어머니가 아들인 아버님에게 참외를 주신 일이 있다. 이때 모자간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다.
“이 참외는 어디서 온 겁니까?”
“어디서라니? 형이 사온거야.”
“어느 밭에서 사왔습니까? 살 때는 누가 따 주었습니까? 할머니요? 할아버지요? 그렇지 않으면 아저씨요?”
아버님에게 있어서는 한 개의 참외라도 어떤 과정에서 손에 들어왔는지가 대단히 신경 쓰였다. 훔친 것을 판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굶어 죽게 되면 죽어도 좋다. 그러나 정체를 모를 물건을 먹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아버님의 신념이었다. “목이 말라도 훔친 샘물은 마시지 않는다.”란 말을 생각게 하는 이야기다. 그때로부터 약 2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버님은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쌀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가에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많은 사람은 쌀의 출처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이러한 경우에는 보기가 무섭게 밥을 먹는다. 어떻게 쌀을 구했는가를 물어본다고 하더라도 “3배 이상으로 갚아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피란민 가운데 몇 사람이나 있을 것인가! 그것도 김씨가 “예”라고 할 때까지 밥에 숟가락을 대는 일도 하지 않은 것이다.
이때의 아버님 일행이 어떠한 상황에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기로 한다. 1951년 1월 초 중공군의 ‘정월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랜돌프 AP 기자가 서울 남쪽으로부터 당시 피란민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몇 천, 몇 만의 불쌍한 군중이 중공군의 침공으로부터 도망가서 살고자 하는 일념으로 200마일 남쪽 부산까지 터벅터벅 걸어간다. 이 난민의 흐름은 큰 바다의 파도와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밖에 나가보면 수십만의 난민이 걸어가고 있다. 하루 종일 끊임없이 쉼 없이 걸어간다. 우리가 침대에 들어갈 때도 그들은 걸어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편안한 잠자리에 들어가 있을 때도 그들은 터벅터벅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위에 하늘의 운명은 더욱 가혹하다. 유엔군의 방위선이 붕괴되어 난민이 피란하기 시작한 지역은 맹한파가 찾아와서 3일 전부터 눈이 내리고 있다. 피란민이 입고 있는 솜옷은 흠뻑 젖어버렸다. 어제부터 추위가 더욱 심해져서 그들이 입고 있는 단벌옷은 꽁꽁 얼어붙어있다.”
랜돌프 기자는 한 노파가 105밀리 구경 포탄에 맞아 발을 절단하는 상황, 길바닥에서 출산하여 태어난 아기를 곧바로 도랑 속에 던져버려도 옆에 있는 가족들이 말리려고도 하지 않는 일 등을 포함하여 부산으로 향하는 난민의 모습을 보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골절상을 입은 박씨는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박씨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경주(경상북도)에 머물게 되어 아버님과 김원필 씨 두 사람이 경주로부터 부산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