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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
날씨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할만큼 좋았다. 호수도 좋고 주변 정자도 좋고 폭포도 좋고, 그럼에도 가장 좋았던 것은 주변에 어우러진 나무들이었다. 꽃이 잔뜩 핀 벚꽃도 개나리도 좋았지만, 사철 푸르기만 한 거같은 소나무도 봄이어서 더 초록 왕성한 모습이 감지되었다. 최고의 저수지에 국민나무 소나무의 아름답고도 기세등등한 모습이 어울려서 그대로 농업국가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듯하다.
방문일 : 2021.4.7.
위치 : 충북 제천시 모산동 241번지
1. 구경하기
신라 진흥황 때 우륵이 처음 쌓고 700년 뒤에 박의림이 다시 쌓았다는 의림지, 저수지의 실용적 기능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여러 정자 등이 포진한 유서깊은 경승지로 많은 시인묵객이 작품을 남겼다. 도담삼봉을 그린 이방운의 그림이 특히 유명한데 당시 의림지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저수지 제방 축조시에는 반드시 나무를 심는다. 나무는 뿌리가 얽혀 제방을 튼튼하게 해주고, 토양의 유실을 막아 홍수에서 지켜준다. 이방운의 <의림지>에도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나무는 실용적인 기능 외에도 그늘을 제공해주며 정자와 호수와 함께 어울려 풍광을 아름답게 하는 데도 커다란 기여를 한다. 나무는 버릴 게 없다 . 죽어서도 향기를 뿜는 나무는 살아서는 더 진한 향기를 뿜는다.
의림지의 높이 뻗은 소나무는 저수지의 수호신이자, 풍광의 수호신이다. 의림지는 소나무로 하여 품격을 높이면서 한국인의 마음에 젖어들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소나무는 저수지 옆에서 확실한 수분을 공급받고, 햇빛을 제대로 받는다. 사람은 그늘과 위로를 소나무에게서 받는다. 삼자의 아름다운 공생이다.
저수지 가운데 순주섬이 보인다.
* 알면서 보기
의림지는 김제 벽골제(碧骨堤), 밀양 수산제(守山堤)와 함께 함께 현재까지 남아 있는 3대 국내 최고(最古) 수리(水利)시설로 충청북도 기념물 제11호이다. 벽골제, 수산제 등은 형태만 남았지만, 의림지는 지금도 농업용수로 활용되어, 청전동 일대의 농경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한다.
의림지는 저수지임에도 풍광이 아름다워 2006년에 국가 명승 20호로 지정되었다.
제천 의림지와 제림 (堤川 義林池와 堤林)
(Uirimji Reservoir and Jerim Woods, Jecheon)
충북 제천시 모산동 241번지 외
의림지 건설 시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신라 진흥왕 때 우륵이 처음 방죽을 쌓았으며, 그로부터 700여 년 뒤인 고려시대에 고을현감 박의림(朴義林)이 다시 견고하게 쌓은 것이라고 하는 설이 많이 알려져 있다.
문헌에 기록된 바로는 세종 때 충청도관찰사였던 정인지(鄭麟趾)가 수축하고 다시 1457년(세조 3) 체찰사가 된 정인지가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의 단종복위운동에 대비하여 군사를 모으면서 호서·영남·관동지방의 병사 1,500명을 동원해서 크게 보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최근에는 1910, 1948년에 보수공사를 했으며, 1970년에 보조 저수지로 상류 쪽 1.2km 지점에 제2의림지를 축조했다. 1972년의 대홍수로 무너진 의림지 둑을 1973년에 복구하여 지금에 이른다. 1992년 현재 의림지의 규모는 저수지 둘레 약 1.8km, 만수면적 15만 1,470㎡, 저수량 661만 1,891㎥, 수심 8~13m, 몽리면적 약 2.87㎢이다.
(몽리 면적[蒙利面積] 논밭 따위가 저수지, 보, 양수장과 같은 관개 시설에 의하여 물을 받게 되는 면적.)
충청도지방에 대한 별칭인 ‘호서(湖西)’라는 말이 바로 이 저수지의 서쪽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의림지는 유서깊은 경승지로도 이름이 있으며, 많은 시인묵객들이 작품을 남겼다. 조선 후기 산수화가 이방운의 서화첩 《사군강산참선수석(四郡江山參僊水石)》에 의림지의 아름다운 모습이 잘 담겨 있다.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은 것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제방에 많은 나무가 있어서 “제천 의림지와 제림 (堤川 義林池와 堤林)”이란 이름으로 명승에 등재되었다.
의림지 제방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는 군락을 이루어 보기도 좋고, 제방의 기능을 보완하는 실용적인 기능도 한다. 수령 200~500년으로 추정되는 180여 그루의 소나무는 번호가 매겨져 특별 관리된다.
의림지 제방과 호안 주변에는 진섭헌(振屧軒), 임소정(臨沼亭), 호월정(湖月亭), 청폭정(廳瀑亭), 우륵대(于勒臺) 등 많은 정자와 누대가 있었다. 지금은 1807년(순조 7)에 세워진 영호정(映湖亭)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鏡湖樓)가 남아있다. 의림지를 에둘러 약 2km의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다. 산책로를 따라가면 이 정자들을 만난다.
경호루 뒤에 있는 용추폭포는 2020년 저수지에서 계곡으로 연결되는 배수로를 정비해 30m 높이로 만든 인공 폭포다. 폭포 위의 유리 바닥으로 내려다 보이는 절벽은 오금이 저리게 한다. 급전직하로 떨어지는 폭포, 우렁찬 물소리 폭탄을 밟는 느낌이다. 눈으로 보는 폭포가 몸으로 체감된다.
예로부터 서식해온 빙어가 특산물로 유명하다. 2011년부터 14년까지는 빙어 축제도 열렸으나, 온난화로 동절기 얼음의 안전문제가 발생해 축제는 사라졌다.
의림지 복판에는 순주섬이 있다.
제천시 캐릭터들
용추폭포 전망대
*용추폭포 유리전망대. 2020년에 건설되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폭포
경호루
저수지에 웬 폭포? 그것도 스카이 무빙워크까지. 아슬아슬한 발 아래로 폭포가 소리치며 떨어진다. 떨어지는 것이 폭포인지, 난지 헷갈려서 더 겁나는 유리 아래 폭포.
저수지로만도 감사한데, 물의 홍수 폭포까지 절경과 함께, 감상으로만도 만족하지 못하게, 체험까지 하라고 한다. 오감 관광이다. 관광 호사의 끝이다.
용추폭포를 멀리서 바라봤다.
조선의 소나무, 기개 있고 아름다운 노송과 청송이 고루 모여 물가에 사열을 하고 있다. 소나무를 제대로 감상한다. 화가들이 가장 그리기 어렵다는 나무가 소나무다. 그만큼 나무가 전형화된 모습으로 자라지 않는다는 거다. 어떤 게 전형적인 모습인지 수렴해내기 어려운데, 사실 소나무들은 모두 제가 표준이라고 말한다. 모두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실 표준이 없다는 거, 누굴 표준으로 삼지 말고 누구나 제대로 대우해달라는 요구를 소나무가 생긴 형태로 이미 말하고 있는 거 같다.
어떤 소나무든 국민 소나무, 국민 소나무의 다양하면서 기개있는 모습을 실컷 본다. 누구나의 개성으로 만가지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우아하고 당찬 모습으로 민주적 의사를 표현하는 한국인을 닮은 거 같기도 하다.
영호루
우륵정
3. 구경 후
1) 우륵 이야기
의림지 동쪽에는 우륵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최근에 건립한 것이다. 그 앞에 널찍한 제비바위는 연자암, 연암, 용바위 또는 우륵대라고도 불린다. 이 바위에서 우륵이 가야금을 타며 제자들과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뒤편에는 우륵샘이라 불리는 약수가 있다. 약수 전설까지 더하면 우륵 전승이 한층 더 온전해진다.
우륵은 6세기 가야국 사람인데, 가실왕의 명으로 가야금 악곡 12곡을 지었다. 나중 가야국이 어려워지자 551년 신라에 투항하였다. 진흥왕이 받아들여 국원(國原 : 지금의 충주)에 편히 거처하게 하고 552년에 대내마 법지(法知)·계고(階古)와 대사 만덕(萬德)을 보내 전수하게 했다고 한다. 충주 탄금대(彈琴臺)는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청금리 등 근처 여러 마을의 지명에 가야금이 들어가 있다. 아직도 여러 지역에서 다양하게 우륵을 기념한다. 고령에서는 대가야읍에 우륵박물관을, 충주에서는 남한강에 우륵대교를 지었다. 아파트에 우륵이 붙은 이름은 전국에 산재한다.
우륵은 제천과도 인연을 맺고 있다. 신라 진흥왕 때 우륵이 용두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을 막아 둑을 만든 것이 의림지의 시초라고 한다. 저수지를 만든 것은 그의 전공인 음악과는 관련이 없다. 혹시 신라 망명 이후 공적인 활동은 충주에서, 사적인 활동은 의림지에서 하지 않았을까.
이곳 제천에서 자연인으로 살고자 했다면, 농사 관련 애로 사항은 남 일이 아닐 수 있다. 만년에 편하게 살면서 민중 속에서 음악을 즐기고자 했다면, 무관한 것 같은 이 두 가지 사항은 유관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음악은 많은 사람을 위로해준다. 굶는 사람은 몸을 먼저 위로하고 다음에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 순서이다. 저수지는 몸의 생계 대책, 음악은 마음의 생계 대책이다.
신라가 우륵을 받아들인 것은 김유신 일가를 받아들인 것과 같은 배경이다. 고대에서 중세로 비약하는 신라는 많은 인력을 흡수하여 국가의 역량을 높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국력이 커지고 국토를 넓히자 문화수준을 높여 나라를 빛내야 하는 과제가 또한 긴요해졌다. 6세기 중엽에 진흥왕이 가야의 우륵을 맞아들여 그렇게 하는 데 큰 진전을 이룩했다.” (한국문학통사 1권)
우륵이 가야 시절 가실왕의 요구로 만든 12곡이 고대의 음악이라면, 우륵의 제자 세 사람이 진흥왕의 요구대로 새로 개편하여 만든 5곡은 중세의 음악이다. 우륵은 “세 사람의 처사를 불만스럽게 여기다가, 연주를 들어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감탄하기를 ‘즐거우면서도 난잡하지 않고 애조를 띠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바르다 이를 것이다’고 했다 한다. 그것이 중세 예악의 이상적인 경지이다.”(통사 1권)
가야는 고대에 머문 국가고, 신라는 중세로 진입한 국가이다. 시대의 비전을 만들어내는 국가의 혜안이 그를 받아들여 충주로 안착시켰지만, 우륵 자신은 자연인으로서는 가야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신라는 가야를 멸망시키는 국가가 아니던가.
또한 자신이 지은 12곡에 대한 애착이 있는 우륵은 이것을 개조하려는 신라에 서운함을 느꼈을 법하다. 제자들은 12곡이 “이 곡들은 번잡하고 음란하여 우아하고 바르지 못하다.”고 비난하기까지 하며, 5곡으로 개조하였다. 12곡이 중세 국가 신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서운한 우륵도 정작 개조한 5곡을 듣고는 찬탄을 마다하지 않았다. 시대 변화와 이에 맞는 새로운 음악의 의의를 인정한 것이다.
우륵은 고대와 중세의 중간자, 가야와 신라의 중간자다. 이성은 중세를 긍정하지만 마음이 향하는 곳은 고대의 가야다. 그러나 몸이 신라로 왔으니 가야로 돌아갈 수 없다. 신라에서 부정한 12곡은 대부분 가야국 군현의 이름에서 따온, 지방 음악이다. 12곡에서 5곡으로 가야를 부정해야 살아갈 수 있게 된 우륵, 가야가 그리워도 버리고 온 땅, 몰락한 땅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몸은 갈 수 없어도 마음은 갈 수 있다. 가야와 같이 고향으로 느껴질 만한 곳은 공적인 영역이 아닌 다른 곳이어야 한다.
충주는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557년에 국원소경을 설치한 전략적 요충지대이다. 일찍부터 충주 중원지역은 한반도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인식이 있었다. 신라는 귀족과 백성을 이 지역으로 옮겨 지방문화의 중심지로 활용하고자 했다. 충주가 갖는 이런 정치적 의미는 우륵에게 편안한 공간이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
고향 가야와 흡사하게 편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려면 충주보다 더 한적한 곳이어야 했으나 국왕이 정해준 거처 충주에서 아주 멀리 갈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적절한 곳이 제천 아니었을까. 설화 속에서의 그는 만년을 제천에서 보내고자 하고, 제비바위에서 가야금을 타면서 살아갔다. 그 음악은 가야 12곡이나 지방민요 아니었을까도 추측해본다.
(우륵이 지은 12곡명은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보기(寶伎)」·「달기(達己)」·「사물(思勿)」·「물혜(勿慧)」·「하기물(下奇物)」·「사자기(獅子伎)」·「거열(居烈)」·「사팔혜(沙八兮)」·「이사(爾赦)」·「상기물(上奇物)」이다. 이 중에서 「보기」·「사자기」·「이사」를 제외한 나머지 9곡은 당시의 군현명과 같다.)
우륵 덕분에 신라는 중세 궁중악을 정립하고 국가의 문화적 수준을 높였다. “고대 선진국 가야의 역량을 받아들여 ㆍㆍㆍ 신라는 중세문화를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우륵은 신라가 요구한 음악적 역량을 다 바쳐서 은혜에 보답했다.
그러나 자연인 우륵은 허전하여 마음의 고향을 찾게 된다. 이런 마음을 담은 것이 우륵 설화가 아닌가 한다. 의림지 주변 우륵의 자취는 모두 설화에만 나타난 것이다. 의림지 우륵 축조설도 기록으로 확실히 증명되지 않는다. 물론 제비바위, 샘물 등등의 우륵 이야기도 모두 설화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문헌 기록에 나타난 것만 찾고, 입의 기록(구비, 口碑)은 허술하게 여긴다. 삼국유사도 당시 설화의 기록이 많다. 구술 전승과 문자 전승의 경계는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문헌설화도 대부분 당시 민간에 떠돌던 설화를 한문으로 기록한 것이다. 구술 전승과 문자 전승의 경계가 때로는 무의미하다. 오히려 문자 기록보다 입의 기록, 구술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문자 기록만 중시하면 문헌 고증주의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 우륵정의 건립은 그런 점에서 환영할 만하다.
언중이 진실이라 믿는 것, 혹은 언중의 구비 속에서만 살아있는 것이 문자로 고착된 것보다 더 깊은 진실일 수 있다. 우륵 설화는 우륵이라는 인물의 더 진실된 면모를 담은 이야기일 수 있다. 우륵의 진실이거나, 언중이 믿고 싶은 삶의 진실이다. 인근 단양의 도담삼봉에 얽힌 삼봉 정도전의 이야기는 대부분 설화일 뿐이다. 그러나 기록이 없다고 설화를 믿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설화적 진실, 민중적 진실이 문자적 진실보다 더 삶의 진실에 가까울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륵은 기록이 절대적으로 빈약한 시대의 인물이 아니던가. 우리에게는 우리의 삶을 고양시킬, 그 진실이 더 소중하다.
2) 제천 사람들의 의림지
의림지를 와서 보고 몇 번이나 놀란다.
① 고대 수리시설이 아직도 현재형이라는 거 ② 역사적 수리시설이 아름다운 풍광마저 간직했다는 거 ③ 규모가 엄청 크다는 거, 의림지와 규모가 비슷한 제2의림지, 비룡담을 또 만들었다는 거. ④ 거기다 우륵 설화, 인물전설이 전한다는 거, 의림지도 교과서에서나 봤던 것을 봐서 신기하기 그지없는데, 우륵이라는 전설적 인물에 관한 인물전설이 전한다는 것이 모두 놀랍다.
이런 놀라운 경승이자 유적을 잘 가꾸어 나가면서 생활속에서 누리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대한민국의 발전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어디서나 누구나 그 자리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살면서 노력하는 것의 총체가 나라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거다.
<참고문헌>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1권
김학범, 우리 명승기행, 김영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음백과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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