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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개혁군주 正祖(22대,1776~1800)의 최측근인 丁若鏞(1762~1836)에게 유배형이 내려진다. 18년의 유배생활 속에서도 개혁의 꿈을 멈추지 않은 丁若鏞, 그 터전은 茶山草堂이었다. 經世遺表, 牧民心書, 欽欽新書 등 5백여권의 저서를 집필하며 조선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한 그 곳, 茶山草堂으로 역사저널 그날이 떠난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오늘은 전라남도 강진에서 인사드립니다. 200여년전 丁若鏞이 개혁의 큰 그림을 그렸던 茶山草堂 앞에서 저희가 자리를 마련해 봤는데요. 여기 와 보니까 어때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저 대학생 때 여기 한번 와보고 오늘 처음 와 보는데 대학생 때 그 모습, 저는 많이 변했는데요. 여기는 그대로군요. ~아아~ 옛날이여~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저는 저런 대학생들을 데리고 매년 답사를 옵니다. 여기 참 다산 선생한테는 죄송하지만 이 유배지가 지금은 굉장히 경치가 좋은 곳이예요.
원동연/영화제작자: 저는 사극을 찍다 보니까 이런 곳을 많이 헌팅을 다니는데 아까 저기서 바다가 보이는 것을 보니까 너무나 아름답던데 우리 헌팅팀은 한번도 여길 찾아온 적이 없어요. 제가 가서 혼내줄려고 하고 있어요. 너무 좋아요.
최태성: 그런데 여기 있는 곳곳이 다 정약용 선생의 흔적이 묻어있는 것이예요. 우리 바로 앞에 있는 이 바위를 보세요. 이게 다산 정약용 선생의 다산초당의 4가지 경치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예요. 이게 이름이 뭐냐하면 다조라는 거예요. 그런데 왜 다졸까요?
원동연: 다 좋았으니까
최태성: 다 좋았어요, 이게 뭐냐면 차를 끓이는 부엌(茶竈-찻 일을 하는 부엌이나 작업대). 우리 지금 여기 차 있잖아요? 그런 의미가 있는 그런 것입니다.
원동연: 이런 풍광에서 여기서 차를 마신다면 신선도 부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최원정: 그랬을까요?
김문식/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다산 선생이 18년 유배생활을 하는데요. 후반부 10년을 여기서 생활을 해요. 그러면서 여기서 제자도 양성하고 저술작업도 하고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다산학이라고 하는 그 산실이 바로 茶山草堂이예요.
임윤선/변호사: 옛날에 고시생들이 와서 공부하기에 딱 좋아요. 그랬을 것 같애요. 집중이 잘 되었겠네요. (역시 고시생다운 고시생에게 안성맞춤 茶山草堂).
이익주: 호가 茶山이잖아요? 이 草堂이 있는 만덕산이 옛날부터 차로 유명합니다. 차 밭, 그래서 차茶 자를 써서 다산, 이것이 호가 된 거죠.
최원정: 정약용 선생은 다양한 분야에 많은 활동을 하셨던 분이잖아요. 많은 이미지가 있는데 저희가 그 중 대표적인 이미지를 화면으로 준비해 봤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정약용의 모습은? 과연 어떤가요? 다들 첫번째 얼굴에, 두번째는 암행어사 같은 느낌이고요.
원동연: 첫번째는 조선명탐정! 김영민씨가 역할을 담당했죠.
최태성: 두번째 사진은 학자 이미지, 실학자! 세번째는 잘 생겼다. 누구예요?
임윤선: 정해인!
원동연: 제가 제일 관심있게 보는데요. 정해인은 알고봤더니 정약용의 직계 6대손 이라고 해서 제가 여기 온 게 아마 정해인씨랑 영화를 찍게 될 운명이 아닐까---
최태성: 정약용의 얼굴은 정말 다양합니다. 정말 천의 얼굴인데 그 중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빼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정조의 남자라는 것입니다. 정약용의 집안이 너무 좋아요. 일단 8대가 계속 문과에 급제했고요. 홍문관 관리를 지낸 옥당가문 출신이고요. 그리고 정약용 자체가 너무 똑똑해,
이력서
이름: 정약용 호: 다산(茶山)
생몰년도: 1762년~1836년
급제: 진사시 합격(22세)
경력: 경기 암행어사(33세) 곡산부사(36세)
네살 때 천자문을 다 떼었고요. 7살 때 직접 시를 지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최원정: 유전자도 남달랐고 떡잎부터 다른 분들과 남달랐던 것 같애요. 그 재능을 살려서 정조와함께 큰 일을 해내지 않습니까?
최태성: 유명한 거, 정약용하면 딱 떠오르는 것, 큰 성?
임윤선/원동연: 수원화성!
김문식: 성설이라는 것에서 화성을 어떻게 쌓을지 기본적인 방략을 8가지 조목으로 제시를 해요(城說 1792년-정약용이 쓴 화성건설방법에 대한 기본지침서). 이걸 보신 정조가 수정을 해서 성화주략이란 걸 만듭니다. 그 다음에 정조의 문집에도 들어가요.
임윤선: 잠깐만요! 쓴 사람이 누구라고요, 처음에?
김문식: 그러니까 초안을 잡은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죠.
임윤선: 그런데 정조가 본인 이름으로 바꾸었다고요?
김문식: 수정해서 완성한 것은 정조, 이렇게 된 거죠.
임윤선: 정말 수정한 건 맞아요? 이거 이번에 잘못하면은요, 200여년만에 표절시비로 정조가 청문회감이예요.
김문식: 제가 여기 오기 전에 대조를 해봤어요. 대조를 해보니까 좀더 좋은 문장으로 만들고 간략하게 만든건 정조가 하셨어요.
이익주: 임 변호사님이 아주 큰 일을 하나 놓쳤어요. (일동 웃음). 처음에 화성을 지을 때 예상되는 공사기간이 10년 이었어요. 이 10년의 예상기간을 가지고 시작을 했는데 실제로 공사를 해보니까 2년 9개월만에 화성을 완공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래서 4만냥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절감하는데 성공하죠.
최원정: 비결이 뭘까요, 공기단축, 비용절감?
원동연: 제가 그래도 사극영화를 계속 만든 사람인데 화성을 계속 봤습니다. 거중기 때문입니다.
최태성: 어마 어마한 성역을 하는데 있어서 거중기 몇대 썼을까요?
원동연: 100대는 써야죠. 정조는 그 정도 스케일은 있죠.
쵀태성: 딱 한대 밖에 안 썼어요. 달랑 1대!
김문식: 거중기를 도입해서 공사비를 4만냥을 줄였다 이건 팩트입니다. 그대로 기록에 나옵니다. 거중기가 1대만 제작됐다는 것도 팩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복원해 논 거중기 보면 그렇게 크진 않죠.
최태성: 그러니까요.
김문식: 그래서 여러가지 주장이 있는데 (거중기 용도를 둘러싼 가설), 첫번째는 실험용으로 하나를 만들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최근에 새로운 학설이 나왔는데 이것이 성을 쌓을때 돌을 올리는게 아니라 채석장에서 돌을 캐어가지고 수레에 실을 때 사용한 거중기다. 왜냐하면 바퀴가 없거든요.
이익주: 거중기를 사용한 것도 물론 도움이 됐겠지만 사실은 좀 더 결정적인 비결은 공기를 단축하고 비용을 절약한 비결이 있습니다.
최윤정: 그 비결은?
이익주: 그게 뭐냐하면 임금을 지급하는데 성을 쌓고 옮기고 한 양에 비례해서 임금을 지급하는 방식이죠. 임금지급방법을 도입한 거죠.
임윤선: 지금으로 치면 성과급제이지요?
이익주: 네
임윤선: 기술자로도 뛰어난데 이럴 땐 또 뛰어난 행정가네요.
최원정: 그러니까요. 이게 동기부여가 중요한 거잖아요.
김문식: 화성성역의궤가 있는데요. 거기에 보면 참여한 노동자 하루의 명단이 다 나와요. 그 사람 밑에 며칠 반까지 근무한게 다 나와요. 하루의 반까지도 계산을 해 놨어요. 그게 임금을 계산해 주기 위한 기록이죠.
최원정: 이렇게 정조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가고 있던 정약용에게 위기가닥칩니다.
-천주교 박해사건에 휘말린 정약용, 집안 여러 사람이 나라에서 금지한 천주교를 믿다 발각됐기때문입니다. 형제들과 나란히 국문장에선 정약용, 끝까지 천주교 신자임을 부정했지만 18년 유배생활을 막을 순 없었다.
최원정: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닌가요?
김문식: 정조가 갑자기 돌아가면서 노론쪽에서 정약용 등 남인에 대한 본격적인 정치적 공격이 시작이 된 거예요. 그런데 남인을 공격하기 좋은 게 바로 천주교입니다. (남인의 약점=천주교). 집안 사람이 줄줄이 엮어져 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노론이 정국을 뒤집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남인계 세력이 밀려나가는 처지에서 박해를 받는 거죠.
최원정: 그러면 이제 천주교는 사실상 빌미인 명목상 이유일 뿐이고 실제 이유는 정치박해잖아요?
이익주: 아주 안타깝게도 이런 일이 있습니다. 정조가 사직하고 있는 정약용에게 어떤 글을 보냅니다. 내가 이달 그믐쯤 너를 불러드리겠다. 그게 정조 돌아가시기 며칠전이예요. 마지막 날 하루 전에 정조가 돌아가세요.
최태성: 그건 드라마예요, 드라마.
이익주: 정조가 이제 불러드릴려고 하는데 건강이 악화되면서 못불러들이고 정약용이 끝내 돌아오지 못합니다.
원동연: 그러니까 항상 드라마나 영화 만드는 사람한테 너무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만든다고 하는데 지금 보시면 알겠지만 현실이 드라마틱해요.
이익주: 맞아요. 정조가 돌아가시면서 정약용만이 아니죠. 박지원, 김홍도 이런 정조가 키웠던 수많은 인재들이 전부 버림을 받고 그러니까 정조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조선으로서는 정말 대단한 기회를 놓치게 된 거지요. 조선의 운명입니다.
원동연: 안타깝네요.
최원정: 그리고 정약용은 18년 동안 이곳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이곳 강진에 와서 처음 머물렀던 곳이 바로 사의제(四宜齊) 라는 곳이예요. 저희가 녹화전에 미리 다녀 왔습니다.
-강진 유배길에 오른 정약용, 말탄 의금부 관리 뒤를 포승줄에 묶여서 두명 군인이 호송-음력 1801년 11월 9일 서울출발-11월 23일 강진도착
-유배초기, 정약용의 흔적을 찾아나선, 이익주, 최태성, 임윤선, 웬 초가? 사의제-강진에 유배온 정약용이 처음 머물던 주막집.
이익주: 정약용이 강진에 왔는데 어디로 갈지 정해지지가 않았어요.
최태성: 원래 정해져 있지 않은 건가요?
이익주: 강진으로만 보내고 그 다음에는 이쪽 강진에 군수나 지방수령이 결정해 줘야되는데 서로안받을려고 해요.
최태성: 그렇죠, 죄인이니까.
이익주: 그런데 주모가 그 처지를 불쌍하게 여겨서 여기와 계세요 그래가지고 주막집에 자리를 잡은 거죠.
최태성: 정말 정약용 선생의 엄청난 저술은 어떻게 보면 주모 덕분이네요.
이익주: 그게 아니었으면 목민심서나 명저를 못볼뻔 했어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않은 정약용). 여기 四宜齊, 네가지 마땅함이라는 뜻이예요. 어떤 삶을 살아야 되나 (유배지에서도 삶의 방향을 고민한 정약용). 이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애요. 그 답이 네가지를 해야한다. 그래서 맨 처음이 뭐냐 하면, 사의담(思宜澹)-생각은 담백하게, 모의장(貌宜莊)-용모는 엄숙하게, 세번째는 언의인(言宜訒)-말은 적게,
최태성: 그 訒(인)자가 말 더듬을 인자예요. 그러니까 말을 더듬는 것처럼 말을 많이 안하는 거죠
이익주: 신중하게 말을 하고, 네번째는 동의중(動宜重)-움직임은 신중하게,
최태성: 참, 정약용 선생님은 혼자 있는데 아무도 보지는 않지만 혼자 나름대로의 수양을 쌓는 것을 택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러요.
임윤선: 저는 말을 줄이겠습니다. 저에게 자꾸 말 시키지 마세요.
최태성: 갔다왔는데 너무 열악한 환경이어서 지금 정비는 잘 되었지만 그때 당시를 떠올리면 저 같으면 그냥 무너졌을 것 같애요.
임윤선: 주막집의 골방이니까 왁자지껄 할꺼고 어이! 서울에서 온 나으리 한잔 드시오! 하고 그러면 그런 사람들 속에서,
최태성: 강진에서 가까운 곳에 해남이 있어요. 해남에 외가가 있어요. 해남 윤씨가 있는데 그러면 도움을 주어야 하는 상황이거든요. 그런데 외면합니다. 그렇게 가까운 외가도 외면하는 상황이니 외지에 있는 사람들은 오죽이나 했겠어요?
최원정: 그런데 우리가 소위 역사 다루면서 유배 떠난 분들 이야기를 참 많이 했는데, 정약용 선생은 18년이나 계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김문식: 정약용을 유배해제를 시켜서 복권시킬 수 있는 세력이 없어진 거지요. 유배 왔을 때 현지 수령이 있을 것 아녜요. 판단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곧 돌아가서 조정에 가서 높은 벼슬로 갈 사람이냐 그렇지 않으면 별볼일 없이 그냥 끝나는 사람이냐 판단을 하는데 그게 유배지 생활의 결정적 영향을 미치죠. 홍문관 교리를 했던 김진형이란 사람이 철종 초년에 바른 소리를 하다가 함경도로 유배를 갔어요. 그런데 이분은 복귀할 가능성이 많다고 본거 같애요. 그래서 수령들이 현지에서 극진하게 대접을 하고 그 사람이 음주가무를 즐길 수 있게 해주고 그 다음에 인근에 명산인 칠보산 유람도 하게하고 스무살도 안된 기생과 동침도 하게하고 그러니까 수령이 오히려 접대를 하는 이런 케이스도 있어요.
원동연: 저는 유배를 자청해서 가겠습니다.
임윤선: 이쯤 되면 유배 아닌 유람인데요. 그래서 이분 김진형씨는 돌아오셨나요?
김문식: 돌아오죠. 두달만에 유배해제 되어 돌아옵니다.
임윤선: 수령이 머리가 좋네요.
최태성: 다 그런건 아니고요. 정약용처럼 복귀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은 얘기가 달라지는 거예요. 당시 대전별감이었던 안조한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추자도로 유배를 갔어요. 안조한은 복귀할 가망성이 전혀 없는 거예요. 그 마을에 유배를 가면 담당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보수주인 이라고 하는데 딱 첫눈에 그릇을 내던지면서 역정을 내는 거예요. 대전별감출신인데 이 사람이 너무 불쌍해 가지고 처음부터 처마 밑에서 당분간 자요. 일년 내내 옷달랑 한벌 갖고 정말 아무 것도 없이 추운 겨울을 보낸 그런 경우도 있어요. 이건 정말 유배 중에 감옥살이도 너무 심한 감옥살이에요.
이익주: 유배 중에 생활비는 자기가 대야 되거든요.
최원정: 유배당한 사람이, 자비예요?
이익주: 유배 중 생활비도 벌어야 되거든요. 실제로 동냥까지 한 사례가 있어요. 거기서 먹고 살 길이 없어서 구걸을 해먹은 사례도 있습니다. (원동연씨에게) 유배가시겠습니까?
원동연: 아니, 안갑니다. 아니 유배생활 하는 것 자체가 고통인데 진짜 돈있고 빽있고 다시 정권에 복귀하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차별을 받는다는 게 이게 도대체 같은 유배인지, 또 하나 아까 보수주인이라고 하셨는데 보수주인은 누구예요?
이익주: 유배형을 받은 죄인이 왔을 때 그 사람의 숙식을 책임져 주는 사람을 지정 해줍니다. 이 사람을 보수주인이라고 해요. (보수주인-유배지에서 숙식을 해결할 거처를 제공하고 죄인을 감시하는 직무를 맡은 자). 그런데 유배를 가는 것 자체가 굉장히 살기 어려운 척박한 곳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지역 사는 사람들의 삶이 평균적으로 다 열악한데 그런 생활 속에서 군식구가 하나 느는 거에요.
원동연: 다들 싫어하겠네요.
이익주: 그렇죠. 그러니까 그릇을 던지면서 왜 나냐구 하는 거예요.
김문식: 하필이면 그때 강진현감이 노론계 인물인 이안묵 이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서로 정치적으로 상극이다 보니까 좋게 대우를 해줄 수 없는 여건이 됐던 거죠. 그리고 다산 스스로 기록에 보면 유배 이듬해 즉 1802년에 강진현감의 무고로 인해 본인이 굉장히 고초를 겪었다 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임윤선: 그러면 사의제 주막집 주모가 정약용의 보수주인인 셈이지요?
김문식: 그렇죠.
임윤선: 그러면 생활비는 아까 자비부담 원칙이라면 주모한테 숙식비는 제공한 거예요?
김문식: 아무도 안받아 주는거예요. 외가에서도 안받아주었어요. 그러니까 보다 못한 주막집 노파가 문을 열어준 거지요. 그런데 이 노파가 글을 몰라요. 이제 보니까 술값을 외상을 많이 주는데 계산이 잘 안되니까 받아야 될 돈을 잘못받고 하는 걸 본 거죠. 다산 선생이 계산하는 법을 가르쳐 줘요. 글자를 모르니까 기호로 표시를 해가지고 일종의 기초적인 장부정리법을 해주는 거죠. 본인이 시범을 보여주고 그렇게 해서 요즘으로 치면 재정기부라 할까요. 그렇게 해서 밥값을 하는거지요.
임윤선: 이걸 보니까 아까 생각나는 사례가 얼마전에 돌아가신 프랑스의 최고령자, 잔 루이스 칼망(1875~1997) 이라는 할머니가 계신데요. 이분이 110 몇살에 돌아가셨는데 엄청난 거부였어요. 왜냐하면 이분이 손녀일 때 그 동네에 고흐가 살았는데 고흐가 돈이 없어서 식료품을 살 때마다 자기 그림을 한 점씩 주고 받아간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봤더니 집에 고흐 그림이 넘쳐났어요. 그 그림을 팔았더니 프랑스에서 어마어마한 거부가 되었어요. 이 정약용 다산 선생님이 그냥 재능기부가 아니라 글을 써주었다면은 이 주막집이 진짜 강진 땅 아주 다 샀을텐데---
이익주: 그런데 사람은 이런 어려운 속에서 진가가 드러난다고 하잖아요. 정말로 정약용이 여기 와가지고 그때 나이가 마흔살 이거든요. 그리고 유배는 종신형에요 그러니까 마흔에 내 인생은 끝났구나 이런 절망의 상황이었는데 여기에서 정말 심기일전 하는 겁니다. 절망에 좌절하지 않고 내가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벼슬을 하느라고 제대로 공부를 지금까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자기에게 더 많이 생긴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인거예요. 그리고는 이제야말로 공부할 시간을 얻었다. (위기를 기회로!). 이제 학문에 정진을 하는데 사실은 이것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정약용이 탄생하게 된 거예요.
최태성: 그 극한 상황에서 이제야 공부할 때가 되었죠.
최원정: 그리고 또 여기서 다도문화를 정립한 초의선사도 정약용의 제자라면서요?
김문식: 제자라고 학계에서 얘기를 하고 있어요. 강진에서 유배생활 하는 동안에 이제 다산의 제자그룹을 세그룹으로 나누어 볼 수 있어요. 첫번째는 읍내에 있을 때 거기에서 만들어진 읍성제자들로 관아에 출입하는 아전들의 자제들이 많이 있었어요. 두번째가 헤장선사 초의선사 등 스님들이 오고요. 마지막으로 다산초당에 와서 해남 윤씨 중심의 양반제자들이 오고요. 또 이쪽으로 다산의 두 자식, 그러니까 정학연, 정학유 두 아들이 수시로 와서 여기서 공부를 하거든요. 아들 두 사람을 제자로 넣어서 세 그룹으로 나눠져서 이걸 합쳐서 다산 학당이라고 지금 부르고 있습니다. (다산학당-읍성제자, 승려제자, 양반제자).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다는 거죠.
원동연: 그때 조선은 신분제 사회이잖아요. 과거도 보지않은 사람들이 뭐하러 공부를 하는지 이해가 안되거든요.
임윤선: 공부안하세요, 고시 안볼거면?
원동연: 고시안보면, 전 공부 안합니다. 목적 없는 공부는 안합니다.
이익주: 다산은 이 상황에서 뭐 과거를 위해 공부하라 이것보다는 한 마디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요.
원동연: 저는 뭐가 됩니까?
이익주: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게 잘 살려고 하는 게 아니냐. 이런 것에만 뜻을 두고 편안하게 지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죽어서도 시체가 식기도 전에 사람들이 다 이름을 잊어버린다. 이게 금수와 다를게 뭐냐? 그래서 금수를 면하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
김문식: 다산의 제자 중에 황상이란 분이 많이 알려져 있죠. 황상이란 분이 저걸 실제로 실천을 해요. 평생을 스승의 가르침대로 살죠.
최원정: 그렇게 다양한 제자들과 함께 방대한 저술활동을 펼쳤던 곳이 바로 이곳 다산초당인 거잖아요.
김문식: 다산초당이 교실에 해당되고요. 그리고 앉은 저쪽편 동편에 있는 집이 동암인데요. 저기가 다산선생이 거처하던 집입니다. 그리고 저 건물 안에는 천여권의 책이 있다고 기록이 남아있어요. 그 다음에 우리 바로 앞에 보이는 집, 서암인데 여기가 제자들 숙소에요. 기숙사라고 볼 수 있죠.
임윤선: 그런데 다산초당이면 초가집 아니예요? 그런데 왜 기와집이예요?
이익주: 그렇죠. 이름과 맞지않는데 다행히 초의선사가 그린 그림이 있어요. 이렇게 다산초당도 라는 그림이 있어서 세월이 흐르면서 이것이 폐가가 돼죠. 여기 8년 동안 머물다가 올라가니까 폐가된 걸 1958년에 복원을 하면서 초가를 기와집으로 복원을 한 겁니다.
임윤선: 아쉽네요.
최원정: 얼핏보기에도 아기자기해 보이잖아요. 우리가 구석구석 미리 다녀왔습니다.
-일행,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목, 뿌리의 길, 길이 가파르죠. 마을과 떨어진 길, 초당은 산 중턱에 있고, 자, 초당에 도착을 했습니다. 여기가 다산초당입니다. 초당이면 초가집인데 이것을 복원을 하면서 기와집으로 바꾸었어요. 초가로 하면 계속 갈아야 되니까 이건 다산와당이네요. 그리고 이쪽으로 가면 다산 4경 중 한곳, 丁石바위가 있죠. 丁石이라고 두 글자로 새겨놨어요. 정석이 무슨 뜻이예요? 저 정석 싫어했어요. 丁자는 정할 정자, 이건 정약용 할 때 丁자예요. 고무래 정자죠. 다산 선생님 집안의 고무래 丁자, 丁石은 다산 정약용의 바위다.
실제로 땅이 폐허가 됐다가 여기 다산초당을 찾는데 바위에 새겨진 이 丁石이 중요한 표지가 됐죠. 다산4경-丁石바위, 약천(藥水), 다조, 석가산. 지금 여기 연꽃이 있는 연못이 석가산 이라는 곳입니다. 석가모니의 사리가 모셔져 있나요? 석가모니산이라고 읽을 수도 있으나 돌로 만든 假山, 가짜로 임시로 만든산 石假山, 바다가에서 돌을 주워와 가지고 석탑을 쌓은 것입니다.
일행, 이 길이 다산 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차가 많고 다산을 지나가게 되고 동백꽃길도 굉장히 멋있는 길이예요. 바다가 보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강진만 바다 풍경, 저기가 강진만입니다. 천일각은 나중에 세운 건물이긴 한데 이 자리가 중요한 곳입니다. 지금은 논밭이 많아졌는데 실제론 이 앞까지 바다물이 들어 왔어요. 흑산도에 형님, 정약전이 계십니다. 천일각에서 형님을 그리워했습니다. 형제가 같이 유배를 왔다가 나주에서 갈라져요. 갈라져서 그리고 나서는 평생 못보지요. 흑산도에서 1816년에 돌아가시는데 그때까지 보지를 못합니다.
최원정: 다산 초당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구석구석 다니는 재미가 많은데, 여러분, 보시면서 내가 여기의 일부를 집으로 가지고 가고 싶다. 그러면 어디가 가장 탐나세요?
임윤선: 문화재 보호법 위반 아닌가요?
최원정: 만약에~~, 어떤 곳이 가장 탐 나시는지?
최태성: 전 이 다조가 제일 탐나요. 이거 가지고 가고 싶어요.
원동연: 저는 이 돌보다도 아까 丁石이라고 써있었죠. 돌이요. 정약용이 직접 쓴 글씨라는데 기교가 없고 필체에 힘이 있는 게 회사에 걸어 놓으면 뭔가 좀 기운이 돌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이익주: 저는 다산초당의 현판 글씨가 추사체로 보이는데요. 아마 가장 값나가는 물건이 아닌가 싶네요.
최원정: 가져 가시는게 아니니까
김문식: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이 집안 가꾸기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어요. 다산 선생님도 젊은시절 서울에 살 때에 집이 그렇게 넓은 집을 못구했어요. 마당이 넓지 않으니까 반을 짤라서 대나무로 난간을 치고 그 안에다 화분을 가지고 화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여기에 매화 치자 동백 이런 철철히 나는 꽃이 피는 화초들을 길렀습니다. 그 다음에 국화를 좋아해서 수십종의 국화를 길렀어요.
원동연: 어쨌던 수원축성을 진두지휘한 사람이 정약용인데 그런 정약용의 재능과 능력을 집안 가꾸기와 정원 꾸미기와 난 가꾸기에 썼다는 게 국가적으로는 얼마나 안타까운일예요.
최태성: 그런데 정약용 선생님이 성격 자체가 큰일에도 있지만 작은 일에도 매사 꼼꼼하신 분이예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아까 황상 말씀하셨잖아요. 황상이 스승께 질문합니다. 선생님, 숨어사는 선비의 거처는 어떠해야 합니까? 물어보는 거예요. 그러면, 대충 답이 나오지 않겠어요? 어떻게 대답하셨겠어요?
임윤선: 검소해야 하느니라
최태성: 그런데 정약용 선생은 아주 꼼꼼해요. 일단, 위치, 위치선정이 중요하다. 앞에는 시내가 흘러야 되고 뒤에는 적당한 산이 있어야 된다. 그리고 밖에서 여기를 볼 때는 잘 보이지 않아야 되고 그리고 방향은 남향이어야 된다. 여기서 그치는게 아니예요. 내부 인테리어까지 아주 꼼꼼하게 제시를 해요. 정약용이 <제 황상 유인첩>에 남긴 숨어사는 선비가 사는 주거의 이상적인 조건입니다. 순창의 설화지로 벽지를 발라 꾸미고 문설주 뒤에는 가로로 길게 그린 담묵 산수화를 붙인다. 문 옆에는 마른 나무와 대나무와 바위를 그리거나 혹은 짧은 시를 써놓는다. 방 안에는 서가 두 틀을 놓고 1,300~1,400 권의 책을 꽂아둔다. 읽는 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질 만큼 명료한 인테리어 강의, 제 집에도 모시고 싶네요.
최원정: 돈 있어도 못모십니다.
원동연: 아까 답사하면서 교수님께로부터 들은 얘기가 정약용이 직접 텃밭을 계단식으로 밭을 일궈서 미나리를 재배해서 용돈을 벌었다는게 현실적으로 훨씬 더 와닿는데요.
최태성: 제 황상 유인첩에 보면 사람은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지 삶에 대한 플랜까지 꼼꼼하게 적어놓으셨어요. 이건 기본이 농사입니다. 집 앞에는 수백 이랑의 일년 농사를 딱 지어서 생계를 일단 해결하고, 집 뒤쪽에는 처마 밭 특용작물 키워서 먹은 다음에, 남는 건 팔고, 심지어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쳐서 의복까지 해결하는, 완벽하게 의식주를 해결하는 플랜까지 세웠습니다.
김문식: 누에를 쳐야 비단 옷을 입죠.
원동연: 집을 지으면서 생계까지도 다 염두에 두고 하였다는 거 아녜요.
임윤선: 18년간 자급자족 하시려면 그 정도는 하셔야죠.
최원정: 양반이잖아요. 옛날에 양반은 삼시세끼 굶어도 이를 쑤신다는데 그만큼 체면이 중요한데-----,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고,
원동연: 정약용은 사대부이면서도 그런 권위와 체면을 버리고 굉장히 생활력도 강하고 의식도 깨어있고 완전히 사기 캐릭터 아닙니까
김문식: 그래서인지 둘째 아들인 정학용은 農家月令歌를 지은 것으로 전해져요. 農家月令歌는 일년 열두달 농가에서 뭘해야 되는지를 노래로 만든 것이거든요. 농업에 꿈과 관심을 가지게 한 거지요 (農家月令歌-1년 동안 농가의 행사와 세시풍속은 물론 그 당시 미덕의 세목들을 엿볼 수 있는 가사문학).
최원정: 이곳에서 많은 책을 쓰셨다고 우리가 아까 얘기했는데 그냥 많이가 아니라 한 500여권이 넘는 거죠? 600권에 가까운?
최태성: 교수님께 죄송한 말이지만 저는 책을 지금까지 한 17~18권 정도 썼거든요. 그런데 한권을 쓸 때마다 제 몸이 다 빠져나가는 거 같애요. 너무 힘들어요. 저는 그래서 이 5백권을 어떻게,
원동연: 17권이 빠져 나간 체격이 이래요?
최원정: 옛날엔 체격이 굉장했겠네요.
임윤선: 옛날에는 먹으로 갈아서 글씨를 썼는데, 500~600권이라고 하면은 사실은 20년 동안 집필하셨다. 한달에 한권씩 쓰셨다는 얘기 거든요. 이것은 사실 불가능해요. 솔직히 믿기가 힘들어요.
김문식: 5백권이라는게---무슨 말이냐 하면, 이걸 5백권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이건 책이예요. 다산 선생의 필사본을 보면 3권을 한책으로 (3권=한책), 그러니까 500권이라고 하면 약 180책이 넘는 거지요 (500권=약180책).
이익주: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자기 전공분야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쓰는 것은 혹시 가능할지 몰라요. 그런데 정약용의 이 책은 한가지 분야에 국한 되지 않고 정치 경제 지리 문학 철학 의학 자연과학 이런 굉장히 많은 분야에 걸쳐서 이 많은 책이 저술되었다는 거예요.
원동연: 아무리 정약용이 뛰어났다고 해도 그 양이 5백권에 달한다는 건 저는 솔직히 믿을 수가 없거든요. 왜냐하면 그냥 쓰는 것만도 한 수백년이 걸릴 것 같은데, 이게 좀 이상해요. 좀 수상해요.
최태성(연기): 비록 죄인이지만 그런건 속이지 않소 혹시 과골삼천이란 말 들어보셨소?
임윤선: 과-골-삼-천? 처음 들어봤소!
원동연: 과부삼촌?
최태성: 생각하는 게 왜 그 따위요? 踻骨三穿이란 바로 이 복사뼈가 세 번 구멍이 낫다 그 말이오 (踻骨三穿-복사뼈에 세 번 구멍이 나다).
임윤선: 왜 세번 구멍이 났나요?
김문식: 그러니까 이렇게 앉아서 글을 쓰다보면 복사뼈가 달른 거잖아요. 그 정도로 세번이나 구멍이 났다는 거죠.
최원정: 고시공부를 한 임윤선 변호사는 어디까지 가보셨어요?
임윤선: 저는 복사뼈가 멀쩡해요 엉치뼈도 멀쩡하고,
이익주: 한국의 남성들은 마흔살이 넘으면 지금도 노안이 와요. 그러니까 분명히 그때 노안이 오고 중풍기운도 있었다고해요. 중풍에 노안에 정말 공부하기 힘든 여러가지 조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각고의 노력을 한 거죠.
최원정: 학문에 대한 열정만으로 되는게 아니잖아요? 뭔가 비밀이 있을 것 같은데, 사료를 통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사암선생연보에 실린 기록입니다. 제자 중에 경제과 사서를 찾아보는 사람이 여러 명, 불러주는 것을 빠르게 받아쓰는 사람이 서너 명, 항상 번갈아가며 원고를 정서하는 사람이 서너 명, 옆에서 도와 먹줄 친 종이에 잘못 불러준 것을 고치고 종이를 눌러 책을 장정하는 사람이 서너 명이었다. 책 한권이 완성되기 까지 철저한 분업시스템, 이쯤 되면 다산초당이 아니라 다산출판사 아닙니까?
최원정: 비밀은 혼자 제작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했다.
임윤선: 생각해 보세요. 역대 전세계의 성인들은 책을 직접 쓴 사람이 없어요. 공자님 직접 쓰셨나요? 제자들이 썼죠. 예수님 직접 쓰셨나요? 제자들이 썼죠. 부처님 직접 쓰셨나요? 제자들이 썼죠. 그러면 다산도 제자들이 쓸 수 있죠.
원동연: 맞습니다. 저도 감독시키잖아요.
임윤선: 그렇죠.
최태성: 제자들이 얼마나 힘들었겠냐구요
임윤선: 기쁨이죠.
최태성: 고시 패스 한 사람들이 말들을 이렇게 해요?
이익주: 우린 조교안시켜요!(웃음)
최원정: 시킬 조교가 없어요.
최태성: 아니 그런데 이 작업으로 책 한 권이 완성되기까지 다섯번 정도 반복을 합니다. 그러면 밑에 있는 제자는 죽어요. 이게 얼마나 힘든데---
원동연: 전 다산 제자 안할래요.
최원정: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작들이 나온게 아닙니까?
최태성: 그렇습니다. 이건 사실 상식적인 부분인데 정약용의 대표적인 책을 1표2서라고 하잖아요? (임윤선에게 향하여) 돌발질문
임윤선: 목민심서 하나,
최태성: 1표는 經世遺表, 2서는 牧民心書, 欽欽新書, 그러니까 經世遺表 같은 것은 뭐냐 하면 중앙관리들이 실천해야 할 큰 개혁안 밑그림을 말하는 거구요. (經世遺表-행정기구의 개편 등 조선제도의 개혁원리를 제시한 책). 그리고 2서 중에 牧民心書는 지방관리들이 해야 될 일들 (牧民心書-수령이 지켜야 할 임무를 정리한 지방행정 지침서), 그리고 欽欽新書라는 것은, (欽欽新書-한국법제사상 최초의 율학 연구서), 어떤 법의 적용 이런 것들에 관해서 기록한 책입니다, 흠흠신서 같은 경우는 임 변호사님이 읽으셨어야 될 그런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임윤선: 아마 읽어본 것 같기도 하고~
이익주: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책이 경제유표예요. 정약용이 경제유표 맨 앞에 지금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경세유포<서문>-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 그래 가지고 시급하게 개혁할 내용들을 여기에 담아 놓는데 정말 국가의 모든 개혁안이 다 담겨요.
김문식: 그 중에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는게 考績制度를 굉장히 꼼꼼하게 검토하는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건데 평가항목이 아홉개 강령이 있어요. 굉장히 엄격한 考課시스템을 만들어야 돼요.
이익주: 엄격할 뿐 아니라 상대평가입니다. 이걸 상1: 중8: 하1, 이렇게 해놓고 더 무서운게 있어요. 하위 5%는 무조건 면직, 이런 시스템을 해야만 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세도정치를 배웠지요 이 때가 그 때예요. 세도정치기에 지방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막을 수 있다고 본 거죠. 그래서 이런 말을 해요. 다른 벼슬은 구해도 좋지만 수령, 목민의 벼슬만큼은 절대로 구해서는 안된다. (牧民心書-다른 벼슬은 구해도 좋으나 목민의 벼슬을 구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뇌물을 주고 사서는 안된다는 얘기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요. 오직 수령은 만백성을 主宰하니, 백성들을 직접 만나잖아요. 수령(임금의 대리인)이 왕을 대신해서 만백성을 主宰한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지방관이 잘 해야 된다.
김문식: 조선시대에 목민서가 많이 남아있어요. 그런데 정약용이 만든 목민심서가 가장 체계적이고 방대한 내용을 가진 목민서 라는 거죠.
임윤선: 오죽 꼼꼼이 쓰셨을까요
이익주: 게다가 정말 자기의 그 경험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아주 꼼꼼해요. 심지어는 이런 내용까지 있습니다. 부임하는 첫날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
최태성: 역시 꼼꼼 정약용,
이익주: 어리석은 자는, 배우지 못하고 무식해서, 지방관으로 처음 부임할 때 산뜻한 옷,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갓을 쓰고 좋은 안장에 날랜 말을 타고 부임한다.
임윤선: 지금으로 하면 부임할 때 외제차를 타고간다 이거잖아요.
이익주: 도열한 아전들은 그걸 본 순간 아 이거로구나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구나 화려한 옷차림을 딱 보는 순간 알만하다.
-추리박스-조선 선비차림의 한 남자가 쟁반에 뭔가를 들고 등장,
최원정: 정약용의 제자이신가요?
최태성: 부임 첫째날은 저런 옷을 입으라는 얘기죠. 그럼 부임 열흘째 되는날은, 날짜별로, 열흘째 지침이 있습니다. 열흘째 부임해서 해야될 것이 있어요. 자, 술병-회초리-인장-두루마리-동전 중에서 골라 보시죠.
최원정: 아니 지금 골르라는 거예요? 돌잡이 하라는 거예요?
원동연: 전 술병을 잡았습니다.
최태성: 왜 술병을 잡았는지 설명을 하세요.
원둥연: 수령이 아전들과 술을 마시면서 분위기 파악을 위해서, 우리 영화 찍을 때 회식하는 것처럼, 그걸 수령이 해야지 누가 합니까?
최원정: 그거 좋네요, 저도 여기 한표.
최태성: 긴장과 이완, 열흘짼 이완!
임윤선: 열흘째는 저는 인장, 왜냐, 당시에는 목민관들의 눈을 속이고 밑에서 공문서들을 많이 위조했을 것 같애요. 그렇게 나오니까 항상 나의 도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늘 살펴보고 밑에서 위조 변조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원동연: 말 안들으면 채찍으로!
임윤선: 그건 오일째에요,
최태성: 정답을 알려 드릴게요. 정답은 의외인데, 정답은 이 두루마리예요. 마을지도입니다. 사또가 부임한 마을의 지도, 열흘째 되면 노회한 아전을 불러가지고 화공을 불러서 마을의 지도를 그리도록 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걸 관아의 벽에 걸어놓도록 하라. 왜 일까요?
최원정: 요즘엔 내비게이션이 있지만 갓 부임한 사또는 길을 모를 것 아네요?
원동연: 내가 어느 정도 규모 고을에 있는지 자기가 관활하는 지역을 그림으로 아는 것 너무나 당연한 거지요.
이익주: 중요한 것은 저 집입니다. 집을 정확하게 표시하게 하는 거예요. 어떤 마을은 인구가 많잖아요. 그런데는 조밀하게, 여기는 인구가 이만큼 된다 이렇게 표시를 해주고 산간지역에 잘 파악이 안되는 집도 다 찾아내 가지고 지도에 표시를 해라. 또 한가지 기와집은 꼭 기와집으로 표시를 해라. 잘 사는 집이죠.
김문식: 그런데 이걸 왜 하냐하면 3년에 한번씩 호적조사를 해요. 뭐냐하면 어느 집에 몇 사람이 사느냐 왜냐하면 사람일인당 세금이 매겨지거든요. 이때 농간이 작용을 하는거죠. 상대적으로 우리 식구수를 줄이면 세금이 줄어들잖아요. 그걸 담당하는게 아전이니까 아전에게 뇌물을 줘서 빼기도 하고 또 아예 아전이 뇌물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그런 중간농간을 없애기 위해서 정확한 지도를 가지겠다는 거예요.
최원정: 개혁안들이 들으면 들을수록 정말 구체적이예요. 손바닥 안에다 나라와 백성들의 사정을 다 꿰뚫고 있는 것처럼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목민심서에 실린 詩 <哀絶陽> 입니다.
갈밭 마을 젊은 아낙 길게 우는 소리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출정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 있다 해도
사내가 제양물 잘랐단 소리들어 본 적 없네.
입에 담기도 힘든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대체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최원정: 그러니까 이게 詩라고 그러셨잖아요? 그냥 詩인 거죠. 이게 실제 상황은 아닌 거죠?
최태성: 아니예요. 이게 사실이예요. 이게 1803년이죠. 강진 四宜齊에 머물면서 실제 있었던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태어난지 사흘밖에 안된 아이를 軍籍에 올리고 軍布를 내야 되거든요. 태어나서 사흘밖에 안된 아이인데 게다가 마을 책임자 이장이 왔다갔다 하면서 이거 안내면 소 끌고가고 너무 힘들어 가지고 그 애비가 남자임을 부정하는 거에요 (아기 몫의 軍布 대신 소를 뺏기고 성기를 잘라낸 아버지). 남자가 되는 순간 착취를 당하니까 자신의 성기를 잘라내는 그걸 가지고 가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했지만 결국은 면박 당하는 너무나 안타까운 장면인데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예요. 이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예요. 絶陽은 남자의 陽을 자른다는 거거든요. (絶陽-양근을 자른다). 너무나 가슴 아픈 詩입니다.
임윤선: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와서 사람들의 밑바닥 인생을 보지 않았으면 이런 詩를 남겼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원동연: 다산의 개혁서들은 어떻게 보면 비전과 희망을 담는 것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강력한 현실비판에 대한 서적들인 것 같애요.
임윤선: 심화적이예요.
이익주: 牧民心書 라고 하면 목민관, 지방수령의 청렴함을 강조하는 책이라고 많이 알고 있는데 청렴함보다 더 절실한 무엇이 있었던 거죠. 그 당시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지방관들의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안되었죠.
최원정: 茶山 선생께서 이곳 茶山草堂에 오셔서 많은 일을 한 걸로 오늘 확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나긴 18년의 유배생활도 끝이 보이는 거죠.
최태성: 네, 1818년 유배에서 풀려나시고 고향으로 돌아가시는데, 고향이 혹시 어딘지 아세요?
임윤선: 네, 아까 미사리 잠깐 말씀하셨는데, 두물머리 근처 아녜요?
최태성: 맞아요, 이제 남양주로 돌아가십니다.
이익주: 여기서 한가지 다산의 인생에는 재미있는게 있어요. 18이라고 하는 숫자인데요. 여기서 18년 동안 유배생활 하셨잖아요. 남양주로 올라가서 거기서 18년을 살다가 돌아갔어요. 그런데 또 한가지 처음 관직에 올라서 꼭 18년만에 유배가 됩니다.
최원정: 제자수도 18명이었다고 들었는데,
김문식: 18명이었어요. 18년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500권 이상의 저서를 만들었는데 이걸 한번 펼쳐보고 싶지 않았겠어요. 그러니까 다시 관직으로 돌아갈 날을 생각했지만 고향에 돌아와서도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익주: 세도정치라는 암흑기에 정말 다산 같은 촛불 하나가 있었거든요. 이 촛불을 조선은 쓰지를 못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저는 모든 역사의 어려운 시기에는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세도정치에는 다산 같은 해법이 있었던 거지요. 자, 이걸 쓰지 못한 불운, 이것이 그 뒤에 망국으로까지 이어지는 첫걸음이 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김문식: 다산 선생이 돌아가시고 99년 될 때 1935년이 되면 다산이 재평가 받기 시작해요. 이때 조선학운동이라는, 일제시대 때 우리 것을 제대로 연구를 해서 세계적인 것으로 확대시키라는 기치를 내걸고 본격적인 한국학 연구가 시작이 되는데 그게 바로 시작이 다산이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있는 이곳이 다산학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다산학은, 사실은 근대에 들어와서 한국학의 시작이거든요. 강진과 다산과 한국학이 가지는 어떤 연결고리랄까 그런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정약용의 숨결이 살아있는 茶山草堂에서 오늘 특별한 시간을 마련했고요. 그리고 역사저널 그날이 다음 시간부터는 근대사 이야기로 새단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아쉽게도 끝 인사를 드려야 할 분들이 있는데, 원동연 대표님, 임윤선 변호사님,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큰 별샘 최태성님, 세분 덕분에 정말 행복했습니다.
원동연: 저는 사실은 방송이 처음이었는데 겁없이 방송일을 하게 되었는데 되게 잘 하더라고요. 농담이구요. 제가 열편의 영화를 만드는 동안 저의 아버지가 한편도 제 영화의 시사회장에 안오셨거든요. 그런데 이 역사저널 그날만큼은 저의 아버지가 매주 나한테 어떻게 봤다 재밋게 봤다 라고 저의 아버지와 저의 관계를 굉장히 결속력있게 해준 프로그램이어서 개인적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역사저널 그날 시즌이 오랫동안 계속 가기를 바랍니다. 감사했습니다.
최태성: 역사저널 그날을 4년간 했어요. 오래 됐더라구요. 앞으로도 계속 응원할 거구요. 어설픈 연기지만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임윤선: 저는 항상 현실을 다루는 사람이잖아요. 현실만 다루는 사람인데 역사저널 그날 덕분에 그래도 조선시대를 함께 여행했습니다. 정말 즐겁게 여행했구요. 부족한 모습 지켜봐 주신 시청자 여러분께 감사하고요. 다른 멤버와 함께 찾아올 역사저널 그날을 계속 더 사랑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최원정: 세분께서 정말 역사저널 그날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요. 자, 역사저절 그날 시즌2 여기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7화, “다산 정약용”에서 정리).
① 茶山 丁若鏞은 18년간을 관직에 있었고 1801년(40세)에 유배를 갔다가 1818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남양주로 돌아갑니다. 거기서 18년을 더 삽니다. 다산 선생 사후 99년 될 때 1935년(일제강점기)부터 다산이 재평가 받기 시작한다. 일제시대 때 우리 것을 연구 해서 세계적인 것으로 확대시키라는 기치를 내걸고 한국학 연구가 본격적인 시작이 되는데 그게 바로 다산이다. 정약용의 經世遺表 서문에 지금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만다. 정약용의 1표2서에 국가의 모든 개혁안이 다 담겨있었다. 수원화성 축성은 丁若鏞이 초안을 잡고 正祖가 수정해서 10년 예상 공사기간을 깨고 거중기를 사용하여 2년 9개월만에 완공하는데 성공했고 공사비도 4만냥이나 절감하는데 성공했다..
② 다산은 집안 사람들이 천주교에 연루되어 1801년 마흔에 유배를 간다. 그러나 정조가 너를 언제 다시 불러들이겠다고 했는데 그게 마지막날 하루 전에 정조가 죽습니다. 정말로, 유능한 정약용이 나라를 위해 쓰임 받지를 못합니다. 정약용뿐만 아니라 박지원, 김홍도 등 정조가 키웠던 수많은 인재들이 정조의 죽음과 함께 전부 버림을 받는데 조선으로서는 정말 비극적인 운명이다.
③ 유배는 종신형이다 유배지에서 생활비는 자비부담, 강진에서 18년간 백성들의 밑바닥 생활을 체험했고 눈으로 봤다. 경세유표에 나오는 詩 哀絶陽은 사실이다. 정약용은 이런 절망상황에서, 좌절하지 않고 심기일전, 내가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벼슬을 하느라고 제대로 공부를 못했다. 유배생활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고 학문에 정진, 유명한 정약용이 탄생하게 된다. 중풍에 노안에 공부하기 힘든 여러가지 조건에도 정약용은 정말 각고의 노력을 다 하였다.
④ 다산은 세도정치 시대에 관직에 있었고 18년 유배생활과 세도정치라는 조선의 암흑기에 정말 하나의 촛불이었다. 조선은 이 촛불을 쓰지를 못했다. 역사의 어려운 시기에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이 동시에 존재했다. 이걸 쓰지 못한 조선의 불운, 이것이 그 뒤에 망국으로 이어지는 첫걸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