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다닐 때 충장로 1가와 금남로 사이 골목길에 “베토벤음악감상실”이라는 곳이 있어서 몇 차례 가본 적이 있다. 어두컴컴한 홀 안에는 의자가 줄 지어 놓여 있고 사람들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약간 숙이거나 옆으로 기울인 채 자못 진지한 모습으로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도 뒷자리에 폼을 잡고 앉아서 집중해서 들어보려 했으나 도무지 집중되지 않고 음악이 귓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처럼 따분하고 재미없는 클래식 음악을 저 사람들이 고상한 척 하느라고 괜히 저렇게 폼 잡고 앉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는데, 이따금 교무실에 미제 아저씨가 007가방에 외국 문물을 가득 담아 들고 팔러 왔다. 빙 둘러 서서 온갖 신기한 선진 문물을 구경하는 선생님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는 물 건너 온 그 물건들 중에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은색 일제 소니 워크맨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얄팍한 헤드셋으로 들어본 음악은 난생 처음 경험하는 황홀한 소리의 세계였다. 마치 북극광 오로라가 내 왼쪽 귀와 오른쪽 귀 사이를 빠르게 오가다가 정수리 위로 휘감아 돌아 올라가는 듯한 소리였다.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테레오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걸 통해서 당시 유행하던 온갖 팝송과 포크송, 샹송, 칸초네, 컨트리 음악, 재즈, 폴모리아 악단의 경음악 연주 등을 들었다. 이후 미국에서 유학 생활 하는 동안에는 자동차를 운전하여 가족 여행을 출발하면서 카오디오 세트에 카세트테이프를 밀어 넣고 버튼을 눌러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이 흘러나오는 순간은 설렘 그 자체였다. 미국에서 살면 팝송이 듣기 싫어지고, 한국 가요가 절절하게 와닿게 된다. 신기하게도 한국으로 돌아오면 다시 팝 음악이 매력을 되찾는다.
이후 50대 중반쯤에 카오디오 FM의 클래식 채널을 통해서 우연히 듣게 된 교향곡이나 협주곡 등이 가슴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통해서나 카오디오를 통해서 클래식을 음악을 듣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부아뜨 블루투스 스피커를 구입하여 집에서 열심히 듣게 되었다. 단지 듣고 흘려보내는 것이 어쩐지 허전하여, 들은 음악에 관해 기록하기 시작했다. 100매짜리 공책을 마련해서 내가 들은 클래식 음악에 대한 정보(작곡가, 곡명, 곡 번호, 빠르기, 음계 구분)와 나의 간단한 소감을 적고, 그 옆에 나의 감동 정도에 따라서 나름대로 별점을 다섯 개에서 두 개까지 매겼다. 그런 식으로 200쪽짜리 공책을 가득 채웠다. 날마다 밤낮 없이 들었다. 이어서 또 한 권의 공책도 거의 다 채워갈 무렵 열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하지만 고조되었던 열기가 조금 가라앉았을 뿐, 지금도 여전히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다. 음악 감상에 대한 나의 지론은 음향 장비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듣는 나의 귀와 느끼는 나의 가슴을 연마하자는 것이다. 전문적으로 음악 감상을 하는 어떤 이들은 고가의 음향 장비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수 천만 원짜리 스피커와 음향 시스템을 설치하는 사람들도 있고, 진공관 앰프와 진공관 스피커의 음만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장비와 같은 외적인 요소에 너무 집착하면 듣는 사람의 내적인 감각과 감정에 소홀해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음향 장비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이유가 그런 호사를 누릴 대담성이 나에게 부족하거나 혹은 나 자신이 스스로 그런 건 사치라고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지금 나는 백여만 원짜리 라부와뜨 스피커와 카오디오, 스마트폰과 이어폰 정도의 누추한 장비로도 만족한다.
그렇다고 요즘 내가 클래식 음악만 듣는 건 아니다. 나는 국민학교 다닐 때 이미자와 남진의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며 자랐다. 이후 중고등학교 때는 배호나 나훈아 노래가 나의 정서 속에 스며들었으며, 대학 시절에는 송창식을, 대학 졸업하고는 조용필을 듣고 부르며 지냈다. 지금은 현인의 노래나, 그보다 더 과거로 역주행해서 1953년에 발표된 「봄날은 간다」나 심지어 1928년에 발표된 「황성옛터」 등도 즐겨 듣고 따라 부르기도 한다. 나의 아내는 그런 나에 대해 점점 ‘영감탱이’가 되어간다고 놀린다. 어떻든 나는 극히 일부 스타일의 가요나 음악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종류의 음악이나 유행가를 즐겨 듣는다. 음악에 관한 한 나는 잡식성이다.
2주 전에 5년 동안 사용한 스마트폰이 고장 나서 새로 샀는데, 집에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와 연결을 시도해 보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며칠간 서너 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를 거듭하면서 스트레스가 점점 가중되어 갔다. 예전 같았으면 나 자신의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당장에 스피커를 부둥켜안고 금호전자상가로 달려갔을 텐데, 나이 때문에 기운이 딸려서인지 좀 느긋해진 탓에, 며칠을 더 이리저리 궁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오늘 아침 우연히 어떤 영감이 작동하여 다시 시도했는데, 빙고! 마침내 연결에 성공했다. 그동안 뭔가 답답하게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게 순식간에 사라지고 뛸 듯이 기뻤다. 행복이나 기쁨은 순간적으로 깡충 뛰는 건가 보다.
첫댓글 다양한 음악들을 즐길 수 있는 포용성에 부럽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베토벤 안가본 사람 찾기가 ㅎ 쉽겠어요. 와우! 스테레오를 처음 접하신 순간의 느낌 서술이 감각적이시네요.^^
베토벤의 테이블과 의자가 투박한데다 맨 꼭대기에 있어서 갈 때마다 백설공주와 난장이집에 나오는 '난장이집'에 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ㅎ (정감있었다는 의미입니다 ^^)
몇주전 단체로 베토벤음악감상실에 갔었는데..
확실히 호미 님과 시대를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처음 제목만 보고 전혀 다른 쪽으로 생각했습니다 ㅎㅎ 기회가 되면 클래식 음악에 관한 다양한 정보도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