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박씨족회서(羅州朴氏族會序)>는 나주박씨 13세(世) 서포공(西浦公: 휘 東善, 1562~1640)께서 안동부사로 부임한 이듬해 을묘년(광해 7년: 1615년) 2월 13일 안동부 관아에서 열렸던 나주박씨 족회 상황을 당시 나주박씨 외예(外裔)로 모임에 참석했던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 1566~1629)이 간략히 기록한 글이다. 당시 모임에는 70여 명이 참석했는데 안동부 관아가 좁아서 바깥에 차일(遮日)을 쳐서 참석자들을 수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글에는 참석자들이 좌정(坐定)하는 순서를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不問官爵之有無。不論毛髮之黔素。惟以族秩爲序。>
(불문관작지유무 불론모발지검소 유이족질위서)
그 내용은 <벼슬이 있는지 없는지 묻지 않고, 모발이 검은지 흰지도 논하지 않고 오로지 족질(族秩)로써 차례를 삼았다>는 것이다. 즉 벼슬이나 나이는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족질(族秩)'을 기준으로 차례를 정했다는 것인데, 여기서 족질(族秩)은 무슨 의미일까?
'족(族)'은 물론 한 할아버지 자손이라는 뜻의 종족(宗族: 겨레붙이)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질(秩)'은 어떤 뜻일까? 일반적으로 '秩'은 차례ㆍ순서ㆍ등위ㆍ위계(位階)ㆍ질서(秩序)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족질(族秩)은 곧 '겨레붙이의 차례/위계'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즉 항렬(行列)을 의미한다.
항렬은 친족집단 내에서 계보상의 종적(縱的)ㆍ횡적(橫的) 세대관계(世代關係)를 나타내는 장치이며 친족집단의 질서와 통합을 위한 수단이다. 일반적으로, 각 세대마다 일정한 순서에 따라서 이름 글자 가운데 한 글자(또는 편방偏旁)를 공통으로 사용함으로써 상호간의 세대관계를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항렬 개념의 밑바닥에는 기본적으로 숭조(崇祖) 사상이 깔려 있다. 항렬이 높다는 것은 곧 세대가 높다는 것을 의미하고, 세대가 높다는 것은 곧 공통 선조와의 거리가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선조의 입장에서 보면 항렬은 선조 자신과의 거리(촌수)를 나타내는 부호(符號)이다. 세대간의 거리(촌수)는 곧 유전적 혈통(血統)의 원근(遠近)을 표시한다. 그리하여 항렬은 바로 친족집단 내부의 질서(秩序)가 되는 것이다.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이 있다. 전통적으로 이는 오륜(五倫)의 하나로 흔히 연장자와 연소자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장유유서에 나오는 '장유(長幼)'의 개념은 그 배경 집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일상 생활에서 장유는 나이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예컨대, 군대에서는 장유를 계급의 높고 낮음으로 판단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종족(宗族)(겨례붙이)의 모임에서는 장유의 개념을 항렬(行列)의 높고 낮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나주박씨족회서>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족(宗族) 내부의 항렬 우선 주의는 일반사회의 연령 우선 관습과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는 것 같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바로 연령은 높지만 항렬은 낮은 사람과 (반대로) 연령은 낮으나 항렬이 높은 사람과의 관계이다. 이런 경우에 서로간의 호칭과 대우 어법(語法)을 어떻게 정해야 할 지를 두고 이런저런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