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02-18 주일설교
장래희망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4:12~17
“할머니, 할머니는 장래희망이 뭐야?” 손녀의 질문에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할머니는 그런 거 없어.” 여러분 할머니는 왜 장래희망이 없을까요? 살 날이 얼마 없어서가 아닙니다. 어른이 장래희망을 버리는 이유는 희망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나이에도 미래에 관한 희망과 계획이 있습니다. 저는 계획대로 잘 되어서 지금도 장래희망을 품고 있을까요?
살다 보면 누구나 소원대로 되지 않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인생의 한 부분입니다. 또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지 않을까요?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이런 복잡한 질문에 대해 하나님이 본문을 통해 답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여러분은 하나님의 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나서 사역을 시작하려고 할 때 한 가지 소식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었던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것입니다. 헤롯 왕이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것을 책망하자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고 가두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물러가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인생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주십니다.
1. 하나님의 교체 타이밍은 틀림이 없다.
요즘 축구선수 불화설 때문에 SNS가 좀 시끄럽죠. 그 문제에 대한 저의 의견을 국민일보에 실었는데 보고 참고하세요.
https://www.themiss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71222
축구에서 선수를 투입하고 교체하는 것은 감독이 판단합니다. 초반에 강한 공격수를 넣을지 초반에 방어에 주력하다가 후반에 적극적으로 공격할지 결정해서 선수를 투입하는 것은 모두 감독의 선택입니다.
모든 선수는 전후반 90분을 뛰며 세 골을 넣고 싶겠지만 감독이 정해준 시간 동안 열심히 뛰고 감독이 나오라면 즉시 나와야 합니다. 성도도 하나님의 교체 타이밍에 따라 인생 계획을 실행하면 됩니다. 축구 감독의 판단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지만 우리 하나님의 전략과 교체 타이밍은 틀림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이 헤롯에게 잡힌 것은 하나님의 교체 타이밍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은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후에 나사렛을 떠나 가버움에 가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천국 복음을 외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등장할 시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은 왜 요한 을 구출하지 않았을까요? 왜 부도덕한 헤롯을 물리쳐주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사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요한과 같이 잡혀가는 것도 아니었고 헤롯을 물리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세우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고 3년 후에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다면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감독이신 하나님께서 대기하라고 하면 대기하고 뛰라고 하면 열심히 뛰면 됩니다. 여러분을 아직 벤치에 앉혀 놓은 것은 쓸모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감독은 선수마다 적절할 때 사용할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벤치 선수는 신발 벗고 쉬면 안 됩니다. 감독이 부르면 즉시 투입되도록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축구는 격렬한 운동이기에 준비 없이 들어가면 다치기 일쑤입니다.
하나님의 선수도 언제라도 출전하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요셉도, 모세도, 다윗도 준비되었을 때 쓰셨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타이밍에 쓸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쫓겨가는 것이 성공하는 것이다.
예수님 두 번이나 피신하셨습니다. 우선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신 것은 헤롯의 폭정을 피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치적으로 싸우려고 오셨다면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사명이 아닙니다. 또 요한과 함께 잡혀가서 죽는 것도 예수님의 사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국 잡혀가서 빌라도에게 재판받아 죽었지만, 그 당시는 헤롯에게 잡힐 때가 아니므로 안전한 곳으로 피하셔야 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피하신 것은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기 때문입니다(눅 4:29-31).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신성 모독한다고 여겨서 벼랑에서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려고 오신 분이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성경에 예언된 대로 나무에 달려 죽으셔야 했습니다. 벼랑에 떨어져 죽으면 무가치한 죽음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버나움으로 피신하셨습니다.
헤롯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피신하고, 고향 사람들에게 살해되지 않으려고 가버나움으로 피신한 것이 인간적으로는 비참하게 보입니다. 보통 사람도 이렇게 쫓겨 다니면 신세를 타령할 법한데 메시아께서 그런 일을 당하시다니요? 그런데 마태는 이것이 메시아 예언의 성취라고 증언합니다(14절).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이 한 번 더 증명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큰 뜻을 세우고 승승장구하는 것만 주님의 인도하심은 아닙니다. 우리도 창피 이유로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거나 사업이 망해서 쫓겨갈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왜 그런 일을 당해야만 하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쫓겨간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주님이 왜 그런 곳으로 보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원래 교회를 세우고 열심히 목회하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아서 건축한 예배당을 다른 목사님에게 넘겨드리고 물러났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공부해서 신학박사가 되었습니다. 박사가 된 후에는 전공을 살려서 설교학 교수가 되고 싶었으나 주님은 성 혁명 세력과 싸우는 자리에 저를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남들이 나서지 않는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이 일은 한 지역교회만 섬기는 일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섬기는 일이고 대한민국과 한국교회의 거룩성을 지키는 일입니다.
제가 이 일을 하면서 인간적으로도 유익이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만나기 어려운 많은 사람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요즘 제가 만나는 친구 가운데 박사, 교수, 의사, 변호사 등이 즐비합니다. 장관도 만나고 유명한 국회의원도 만나고 얼마 전에는 대통령식에도 들어가서 시민사회수석도 만났습니다. 지역교회 목회만 했더라면 이런 인맥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이 네게 띠 띄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21:18) 그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주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의 소원을 들어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바로 여러분이 성공하는 길입니다. 주님의 짐을 여러분 등에 지고 가면 주님께도 영광이 되지만 여러분에게도 영광이 됩니다. 그러므로 무슨 이유로 지금 여기에 있고, 이런 사람을 만나며, 어쩌다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는가 생각하지 말고, 이것이 내가 원했던 장소, 원했던 일인가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맡겨 주신 일을 감사하며 성실하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의 뜻도 이루어지고 여러분의 인생도 멋지고 성공한 인생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쫓겨가더라도 주님의 계획을 이룬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시골 가버나움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가신 것은 좌천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마태는 이것이 바로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전도를 시작하심으로 저 변방 갈릴리에 생명의 빛이 비쳤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열두 제자의 직업은 어부, 세리, 학자, 열심당원 등 다양한데 율법학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등의 수제자는 모두 어부 출신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남보다 가난하거나 약하더라도 실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을 사랑해서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이 여러분을 강하게 만들어 귀하게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부 출신이 예수님 수제자가 되었듯이 여러분도 예수님께 귀하게 쓰이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가지고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학식과 지위가 높은 부자들만 데려다 제자로 삼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전도할 때 일부러 가난한 사람만 전도할 필요도 없지만 가난한 사람이라고 무시하고 피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여러분이 만날 수 있는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복음의 핵심은 단순하다.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단순한 두 마디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첫째는 회개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가까이에 온 천국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봉석 목사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렇게 해서는 전도가 안 된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에게 묻고 싶어요. “그러면 뭐라고 하면 전도가 되는데요? 예수님은 뭐라고 전도하셨는데요?”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하신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불신 지옥”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 그것이 바로 “예수 천당”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불신 지옥’이라는 말을 싫어하고 전도 효과가 없다고요? 옛날 사람들은 불신 지옥이라는 말을 좋아했을까요? 그런 소리는 옛날 사람들도 싫어했습니다. 죄인들은 원래 복음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전도는 원래 사람들에게 미련한 것입니다(고전 1:21).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문구가 현대인들에게 거부감을 준다는데 여러분에게 좀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믿습니까? 분명히 믿습니까?
이 세상에는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믿지 않을 사람은 어떤 친절한 말, 좋은 말을 해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 사람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만 전해도 믿습니다.
옛날 남대문 시장에 갔더니 장사꾼이 옷을 쌓아놓고 이렇게 외칩니다. 여기 아주머니들 빨리 옷을 만져 보라고. 댁에 남편들 메리야스 쪼가리 입혀서 직장에 보내어 놓고 왜 이 옷을 안 만져 보는 거냐고. 이유를 못 대면 볼기짝 맞을 생각 하라고. 이렇게 무례하게 명령하듯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듣고도 여자들이 옷을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 아내도 거기서 내가 입을 니트 옷을 사 주어서 잘 입었습니다. 옷이 맘에 들면 장사꾼의 말이 무례한지 그런 것 신경 안 씁니다.
이 말은 우리가 전도할 때 무례하게 좋다는 말이 아니라 복음에 물타기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복음 대신에 교양을 전해서는 영혼은 살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불신 지옥”이라는 말을 싫어한다면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요? 세례요한도 회개하라고 외쳤고 예수님도 회개하라고 외쳤고 베드로도 회개하라고 외쳤고 바울도 전 세계에 다니며 회개하라고 전했는데 우리가 회개하라는 말을 안 하고 뭐라고 말할까요?
의사는 환자에게 병을 정확히 고지(告知)할 의무가 있습니다. 심지어 현대의학으로는 치료가 안 되니 삶을 정리하라는 말도 전할 의무도 의사에게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는 복음에 물 타지 말고 사실대로 전해야 합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너는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불신 지옥”이라는 말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이 하셨듯이 회개하고 천국을 받아들이라고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원색적 복음을 전해서 영혼을 살리는 것, 그것을 여러분의 장래희망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https://youtu.be/zbO1BG6shMI
PL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