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나에게 당나귀 귀가 생긴다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노인경 그림책 / 문학동네 / 2022)
2022년 7월 6일 이 명 진
흔히 아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가 있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 소문을 낼까 이발사를 죽인다. 소문을 내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풀려난 이발사는 말을 하지 못해 병이 난다. 결국 대나무밭에 가서 크게 소리치고 온 후로 병은 나았지만 대나무밭에 바람이 불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다.
대개 신체에 생기는 비밀 이야기는 비밀을 숨기는 방법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삼는다. 데이비드 스몰의 《머리에 뿔이 났어요》나 데이빗 새논의 《줄무늬가 생겼어요》 같은 그림책처럼 말이다. 하지만 노인경 작가는 숨기거나 활용하는 다양한 방법들 대신 당나귀 귀를 갖게 된 임금님의 죽음에 초점을 맞춘다. 이건 생각 못했지 하며.
임금님이 되면 머지않아 죽는 나라가 있다. 왜 죽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줄지어선 묘비들이 쓸쓸해 보인다. 그럼에도 자신은 다를거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죽더라도 왕이 한번 되어보려는 사람들로 줄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444번째(하필 4가 3개나?)로 왕이 된 사람의 기쁨도 잠시, 이튿날 아침 귀가 당나귀처럼 커졌다. 당혹감에 커다란 왕관을 만들어 감추어보지만 왕관의 무게 때문에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444대 왕은 이전 왕들의 일기를 읽으며 다른 왕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당나귀 귀가 되었고 커다란 왕관 때문에 힘들었음을 알게 된다.
이전 왕들이 죽은 이유는 다양하다. 왕관이 너무 커 고꾸라져 죽고, 왕관의 무게 때문에 허리가 휘어 죽고, 왕관이 떨어져 새끼발가락 뼈가 부러져 죽고, 당나귀 귀가 부끄러워 수치심에 죽고, 당나귀 귀만 생각하다 슬픔에 빠져 죽고, 당나귀 귀가 된 원인을 찾지 못해 기가 막혀 죽고, 당나귀 귀 때문에 속을 끓이다 화병으로 죽고, 자신의 모습을 보자마자 심장마비로 죽었다. 모든 죽음의 원인은 당나귀 귀였다. 내 당나귀 귀를 보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왜 당나귀 귀가 되었을까? 이러다 당나귀가 되는 건 아닐까? 나는 어찌해야 하나? 많은 고민을 한 444대 왕은 왕관을 벗고 당당히 당나귀 귀를 드러낸다.
‘에잇, 이깟 귀가 뭐라고.’
임금님 귀를 본 대신들과 왕은 한바탕 웃는다. ㅋㅋ 같이 웃고 마음이 가벼워져 아픈 곳도 없어졌다. 백성들의 말도 잘 들린다. 귀가 커진 건 백성들의 고충이나 바람에 귀 기울이고 좋은 정책을 펼쳐 나가라고. 그래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좋은 왕이 되라고. 그것이 정말 왕의 길이라고 알려준다. 443명의 희생을 치르고서야 그 이유를 깨닫게 된 왕이 나왔으니 너무 많은 댓가를 치른 셈이다.
‘귀가 커진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군.’
당나귀 귀를 가진 왕 덕분에 태평성대를 이룬 모습을 팝업으로 표현했다. 함께 손잡고 동등하고 편안하게 웃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행복해진다. 앞모습 뿐 아니라 뒷모습까지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으니 꼭 다시 한번 보자.
왕이라는 지위는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을 부리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다보니 쓴 소리보단 달콤한 소리만 귀 기울이고, 독단이나 독선에 빠지기 쉽다. 그런 왕이 민심을 모른 척 하지 않고 커다란 당나귀 귀로 사소한 이야기까지 귀 기울여주고 해결까지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왕관의 무게는 비밀의 무게다. 비밀은 숨기면 숨겨지는 것일까? 내가 짊어지고 있는 비밀을 속 시원히 터놓을 수 있을까? 비밀을 터놓았을 때 다른 사람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 나에게 갑자기 일어난 안 좋은 일도 좋게 생각하게 되는 날이 올까?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행동할지는 내가 결정한다. 비밀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서 오는 병들도 모두 나의 선택으로 인한 내 책임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는 〈바캉스 프로젝트〉라는 한국 그림책 작가들의 프로젝트 그룹에서 2020년 발간한 그림책을 문학동네에서 올해 재발간한 그림책이다. 이수지, 강혜숙, 노인경, 서현, 소윤경, 신동준, 정진호, 조은영, 한성민, 이명애, 오정택 등 11명의 작가가 모여 기존 그림책 출판시장에서 다루기 힘든 다양한 주제나 새로운 표현을 담은 독립출판물을 선보이는 프로젝트로 2019년부터 옛이야기를 모티브로 하는 전래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올해 4권이라도 구매한 나를 칭찬한다. ㅋ
이 그림책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단순화되고 판화로 찍은 듯 반복된 그림과 흰색, 갈색, 검정 같은 기본 색을 사용하여 우리를 편안하게 만든다. 내가 한, 또는 했던 선택들이 모두 옳았다는 건 아니지만 늘 반성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놓치지 않으며 잘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