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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 / 레 13:1-8, 고전 10:31-11:1
지난 주 우리는 원공예 집사님을 하나님의 품으로 보냈다. 원집사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설날을 지내고 나서 별세하셨다. 유족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빈다. 이때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초상집에 갔다가 애기 난 집에 가면 부정탄다는 것이다. 그러자 한편에서는 그것은 미신이라고 했다. 어느 것이 맞을까? 초상집에 갔다가 애기 난 집에 가면 부정탄다는 말은 우리나라 고유로 내려오던 하나의 생활습관이다. 그런데 이것이 미신일까? 전염병을 앓다가 죽은 사람은 대개 임종시 병원균이 밖으로 발산된다. 옛날에 폐결핵 환자가 죽으면 숯불을 피워 놓고 방문을 열지 않으려 했다. 무서운 병으로 장질부사(장티푸스)가 있다. 요즘은 장티푸스 같은 병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옛날에는 마을 전체가 죽어가는 병이었다. 이것을 열병 또는 염병이라고 했다. 홍역에도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아무튼 어떤 경우가 생길지 모르니까 초상난 집에 애를 낳을 집, 애를 낳은 집 식구들은 가지 말아야 한다. 되도록 서로 접하지 않는게 좋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제사지내야 하기 때문에 초상집에 갈 수 없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이 미신으로 변했을까? 기독교가 이 땅에 전파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습을 지켜보던 선교사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양에서는 병원 영안실에 냉동시켜 초상치루고, 어린애는 산부인과에서 낳아 소독시킨다. 하지만 우리는 어린애를 거의 집에서 낳았고, 요즘에야 병원에서 낳아도 3일만에 퇴원해서 집으로 온다. 그리고 초상도 대개 집에서 치렀다. 어린애가 병원에서 집으로 오지만 아직 면역기능이 약하기에 엄마 젖을 3주는 먹어야 면역기능이 생긴다. 이때까지는 초상집과 애기 난 집을 들락거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런 풍습을 모르던 선교사가 미신이라고 치부했다. 그러나 이것은 미신이 아니고 과학이다.
이제 입춘도 지나고 봄기운이 서서히 밀려오고 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고난의 길은 잊어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에만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믈질만능의 풍조 속에서 사는 기독교인들이 거기에 물들어 좋은 것을, 많이 갖는 것을 최고의 축복이라고 여기는 오염된 가치관을 갖고 산다는 것이다. 때로는 기독교의 본질조차 이런 오염된 가치관에 물들어서 과연 바른 기독교란 무엇인가, 바른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바른 모습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때에 우리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듣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씀의 의미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적인 기준을 새롭게 하는 것이고, 바른 기독교인의 삶의 기준을 새롭게 하는 것이며, 지표를 제시해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에 고린도에 들려서 여러 가지 어려운 시련 가운데서도 고린도교회를 개척했다. 이 고린도란 도시는 지형적으로는 두 항구를 연결하는 도시이며, 외형적으로는 대단히 아름다운 도시요, 교통과 산업이 발달했고, 정치의 중심지요 고대 헬라문화가 꽃피었던 도시이다. 이 당시 고린도의 인구는 60만명인데 그중 20만이 자유인이고, 40만은 세계 각지에서 끌려온 노예들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상업이 발달하고 교통의 중심지이고 문화와 생활수준이 높은 도시였던 반면, 도덕적 윤리적으로는 매우 타락한 도시였다고 교회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도시는 방탕의 도시, 우상의 도시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여기에 상징적으로 세워진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러 왔다. 그리고 거기에는 1천여명의 여승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타락의 상징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들처럼 되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의 무서운 욕이었다고 한다.
이런 도시에서 1년반 동안 머무르면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전도해서 교회를 세웠다. 그런데 이 교회와 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1장 - 당파문제, 5장 - 불륜문제, 6장 - 소송사건, 7장 - 혼인문제, 독신 과부의 재혼문제, 8장 - 우상의 제물, 11장 - 부인의 수건 문제, 성찬에 관한 문제, 12장 - 성령의 은사문제, 15장 -부활문제, 16장 - 헌금문제, 아볼로에 관한 문제 등. 이런 상황에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거기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은 ‘나를 본받는데 있다’고 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가진 모든 문제들도 ‘나를 본받으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통해서 문제 해결과 해방의 기준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빌 4: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이 말씀은 바울이 생활한 기준, 그것을 따라 삶을 살아주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바울이 살아온 사람의 기준인 유대인의 기준을 본받으라는 말도 아니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로마인의 기준을 본받으라는 말도 아니다.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 희랍인의 기준을 본받으라는 말도 아니다. 오로지 온 생을 통해서 죽으나 사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겠다고 하고, 기독교의본질을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다메섹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전 생을 바쳐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려고 했던 바로 그 삶의 기준을 본받으라고 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삼으신 그 기준을 따라 살려고 노력했다. 때문에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삶의 중심이 그리스도가 되어 있다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닮아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토마스 아 캠피스란 중세의 사제요 수도사는 1427년 경에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성서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힌 책이다. 이 책의 맨처음 부분에 이렇게 서문을 쓰고 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따르는 자는 삶의 밝은 빛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어둠에 행하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교훈의 말씀에 의해서 진정으로 완악하고 어두워진 마음으로부터 깨우침을 받고 자유롭게 된다면 우리는 그의 교훈과 그가 사시던 방법으로 살도록 권고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1406년 7월에 자신의 신앙생활의 세가지 규범을 다음과 같이 정하고 그렇게 살기로 선언했다. 그것은 1) 겸손하게 사는 것, 2) 순수하고 정결하게 사는 것, 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는 형제단을 조직해서 함께 살며 순결하게 살고,나누면서 살며, 검소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물질이 표준이요, 자기 자신이 삶의 기준이 되어있음을 느끼게 된다.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책을 쓴 사람은 오늘의 세대를 기준도 권위도 방향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그래도 현대인들이 방향상실의 병에서 치유를 받으려면, 자기가 받은 상처를 남을 치유하는데 쓸 때 치유받을 수 있다고 말한바 있다.
지난 두 해전 LA사건이 있었을 때 웨버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1950년 대의 흑인폭동은 하나의 인종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단순한 문제엿다. 그러나 이번 폭동은 단순한 인종문제가 아니다. 50-70년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이 자아가 없어지고, 기준이 없어지고,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어진 삶의 태도라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미국이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는 강대한 나라인지 모르지만, 자기를 상실하고, 자기 삶의 기준이 없어지고, 자기 삶의 방향과 긍지를 잃어버린 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치유하기 가장 어려운 병 중의 하나이다. 오늘 자본주의 영향을 받고 사는 성도들의 삶의 표준이 물질이요 돈이요 자기자신이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을 갖기 위해서 경쟁하고, 가장 많은 돈을 갖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남이야 어찌되든 내가 좋으면 그만이란 기준 속에서 살고 있다. 겸손, 순결, 순종이라는 말은 수도원의 고전으로만 남아있을 뿐, 교회도 가장 많은 수를, 가장 많은 재정을 좋은 교회의 표준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서의 기준은 교회는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아 사느냐 하는것이지 물질의 양이 표준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인간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며, 자기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반영에 있었음울 말할 수 있다. 예수를 본받아 산다는 것은 순종하면서 산다는 뜻이다. 이 순종이란 말은 가까이 듣는다는 의미이고, 이는 응답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따라 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통해서 이 역사 속에 성취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곧 책임있는 응답이 중요하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나를 본받으라는 내용이 무엇인지 몇가지만 살펴보겠다.
첫째, 가난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난하게 사는 것과 부유하게 사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을 경험하는 우리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가진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욕심이 가장 커다란 문제이다. 중남미 니카라구아의 소모사 정권, 1년에 800만불 횡령, 지진이 나서 각국으로부터 들어온 원조물을 다 팔아 개인적으로 착복, 여인들이 하루 일하면 2불을 주는데 이는 부자들의 한끼 식사비, 산디니스타는 무기 구입하여 27명의 젊은이들과 게릴라전을 시작, 결국 민족을 되찾았다. 한 사람은 치부하기 위하여 나라를 팔고 미국의 군벌들과 손 잡았지만, 한 사람은 스스로 가난하게 되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민족과 역사를 되찾았다. 부유한 사람은 어려울 때 비행기를 타고 도망가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민족을 지키고 역사를 지킨다.
둘째,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는 것은 남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쿠바에서 있었던 일이다. 쿠바의 본토인 추장이 사형장에 섰을 때 스페인 신부가 다가와서 ‘지금이라도 당신이 회개하면 세례를 받을 수 있고, 세례를 받으면 천국에 갈 수가 있습니다. 세례를 받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때 인디언 추장이 하는 말 ‘천국에 가면 그곳에 스페인 사람들과 함께 사느냐?’ 신부 ‘천국에는 스페인 사람이나 인디언이나 다 함께 산다.’ 인디언 추장의 말 ‘그런 천국엔 가지 않겠다.’ 그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와서 본토인들의 생명을 죽였고, 땅을 빼앗았고, 복지를 파괴시켰는데, 그러한 그들이 예수를 말하고 천국을 말할 때에 그들이 말하는 천국엔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그들이 말하는 천국엔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예수를 본받는다는 말은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의 아픔과 그들의 어려움과 기쁨을 같이 나눌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이 독일에 퀘이커 교도들을 보냈다. 그들은 전후에 모든 것이 초토가 된 독일의 아픔을 나누며 일했다. 그때 이들이 와서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독일 사람들이 표현한 말이 있다. ‘이들은 도대채 누구며 무엇을 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인가? 그들은 예배당도 짓지 않고, 회심자도 구하지 않으며, 자기 표현도 하지 않으며, 조직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우리의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주고, 병든 자들을 간호해 주며, 소망 없는 자를 격려해 주고, 불구가 된 사람들을 훈련시켜서 그들 스스로가 정직하게 일용할 양식을 얻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은 대체 누구일까?’
행 11:26절에 보면, 안디옥 지방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향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인 자신이 붙인 이름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사는 모습을 보고 붙인 이름이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닮아 사는 사람들이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닮아 살게 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남의 복지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남들에게 그리스도를 닮아 사는 본을 보인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남을 위한 사람드리요, 남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요, 남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성취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루터는 ‘각자가 타인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될 때에만 내 안에 있는 바리새인이 먼저 기도로써 억압될 수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웨버 박사는 유니온 신학교 교수라는 명예로운 직업을 버리고 할렘 빈민가의 도시교회 목회자로 개척을 했다. 그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다 헐고 낡은 집을 사서 교인들이 수리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싼 값에 임대해 주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 교회는 40년 전 처음 시작했을 때와 같이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고 입주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지 않는다. 아무 조건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가난하고 우범화되어 가는 지역을 예루살렘으로 만들고 시온으로 만들자는 것일 뿐이다. 1910년대에 살던 우리 민족의 일은 민족을 찾고 나라를 찾는 일이었지만, 1945년 이후 희년이 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민족을 통일하는 일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야겠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감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저 사람은 진짜 그리스도인이다, 예수쟁이다라는 소리는 들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5-07)